23.12.05 07:08최종 업데이트 23.12.05 07: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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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용진 제주전통음식보전연구원장 제주 전통음식 연구가인 양용진은 슬로푸드 국제본부에서 사라져가는 세계 전통음식을 기록하는 ‘맛의 방주’ 프로그램에 제주의 전통음식인 골감주와 강술을 등재했고, 올해는 수애(제주도식 순대) 둠비(두부) 오합주 오메기술을 등재 신청해놓고 있다. ⓒ 황의봉

 
'맛집을 찾아서'. 제주 여행의 목적을 묻는 설문에 맛집이나 멋진 카페를 찾아가기 위해서라는 응답이 가장 높게 나왔다는 기사를 보고 놀란 적이 있다. 제주의 아름다운 자연경관보다는 먹을거리에 더욱 관심이 있다는 여행자들의 취향은 이제 대세가 된 것일까. 섬 구석구석까지 하루가 다르게 식당과 카페가 들어서고, 맛집과 먹을거리 정보가 넘쳐나는 게 최근 제주의 분위기다.

제주 전통음식 연구가 양용진은 이런 세태에 할 말이 많은 사람이다. 제주의 먹을거리를 찾아서 와주는 것은 고마운 일이지만, 제주의 음식문화를 이해하고 제주다운 맛을 체험하는 여행자가 드물기 때문이다. 대를 이어 제주 전통음식을 연구, 보급하고 각종 교육과 강연을 통해 제주의 가치를 역설하는 그를 만났다.


양용진은 제주향토음식보전연구원의 원장이자 얼마 전까지는 김지순요리제과직업전문학원의 원장이었다(37년간 운영해 온 학원은 작년에 접었다). 또 국제 슬로푸드 한국협회 제주지부장이고, 향토음식점 '낭푼밥상'의 오너 셰프로 직접 요리를 하고 있다. 그러나 이런 직함보다는 TV 출연이나 각종 요리 강좌를 통해 많이 알려진 유명인이기도 하다.

이탈리아서 받은 충격... "왜 우리 것을 대단하게 생각하지 못했을까"
 

제주의 전통 잔치음식 혼례식에서 신랑을 에스코트 하는 집안 어르신인 중방(혹은 대방)을 대접하기 위해 신부 측에서 차린 밥상. ⓒ 양용진

 
양용진 원장과 제주 전통음식 이야기를 시작하려면 그의 어머니인 김지순 명인으로부터 시작해야 할 듯하다.

"어머니가 2010년 제주특별자치도에서 지정한 '제주 향토음식 명인 1호'가 되셨는데, 2호 명인이 나오기까지 10년이 걸렸습니다. 그만큼 이 분야에 정통한 분이 드물었기 때문이죠. 1936년생인 어머니 세대에 제주도에서 서울의 대학에 유학한 여학생이 2명이었는데, 그중 한 명이었다고 하더군요. 수도여사대 가정과를 졸업하고 1970년부터 제주산업정보대, 지금의 제주국제대에 요리 담당 교수로 출강하셨고, 그때부터 제주 음식문화에 관해 연구를 하셨다고 합니다. 1985년부터는 요리학원도 여셨고요. 전국적으로도 무척 일찍 요리학원을 시작하신 겁니다.

제주도는 육지와 달리 규방문화라는 게 없었기 때문에 전통음식에 대한 기록이 없어요. 그래서 어머니께서 당시 70∼80세 넘은 어르신을 찾아다니며 구전해 오던 옛 전통음식을 기록하고 재현하는 작업을 꾸준히 해오신 거죠. 그 공로를 인정받아 향토음식 명인 1호가 된 것입니다.

저는 1990년대 중반부터 어머니를 도와 전통음식을 함께 기록하기 시작했고요. 처음 전통음식을 찾아다닐 때 만났던 어르신들의 연세를 고려하면 현재 기준으로는 100년 전의 제주도 음식을 조사하고 기록을 남기기 시작한 것이지요. 그런데 100년 전의 음식들은 그 이전 수백 년 동안 이어져 온 음식들에서 큰 변화가 없었기 때문에 제주도의 전통음식을 고스란히 찾아볼 수 있었던 겁니다."

 

요리 방송 프로그램 진행 제주 전통음식을 소개하는 방송 프로그램에 자주 출연해온 양 원장은 2018년 3월부터 2년여간 JIBS 제주방송 ‘양용진의 로컬푸드’를 진행하며 제주산 식재료를 이용한 요리를 선보였다. ⓒ 양용진

 
김지순 명인과 아들 양용진의 제주 전통음식 되살려내기 노력은 2011년 첫 결실을 맺는다. 350여 가지의 전통음식을 재현해 보여주는 도록을 펴낸 것이다. 비매품 한정판으로 나온 이 도록은 제주도청 홈페이지에서 pdf 파일로 볼 수 있다.

양용진 원장이 처음부터 제주의 향토음식에 매달린 것은 아니었다. 그림을 그리고 싶었고, 한편으론 연극 배우를 하고 싶어 연극영화과 시험도 봤다. 그러나 뜻대로 되지 않아 대학은 건축과를 다녔고, 졸업 후에는 공연기획 일을 하게 됐다. 그가 제주 전통음식의 길로 들어선 것은 짧은 이탈리아 연수를 통해 얻은 깨달음에서 비롯됐다.

"30살 무렵에 어머니 일을 도와드리기 시작했는데, 처음엔 제과제빵학원을 했습니다. 제가 서울에서 다른 일을 하면서도 요리학원과 제과제빵학원에 다니면서 공부를 했거든요. 그때만 해도 제주도 향토음식이라는 게 굉장히 투박해 거기서 어떤 문화적 가치를 찾아내기가 힘들지 않나 하는 생각이 강했어요. 경제적 가치 위주로만 생각을 했던 것이지요.

그런데 2000년에 천주교 복지재단에서 이탈리아 음식문화를 배우고 싶어 하는 사람들을 뽑아 현지에 연수를 보내준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교황청이 초청하고 지원도 해주는 프로그램이었어요. 서양의 향토음식이 이탈리아에서 비롯됐다고 하니까 한번 가보자 해서 곧바로 지원했지요. 한 달 동안 로마에 체류하면서 피자 파스타 리소토 3개월 과정을 압축해서 집중적으로 배웠습니다. 이때 주말이나 쉬는 시간을 이용해서 이탈리아 음식문화를 접해볼 수 있었는데, 토속적인 음식들이 정말 많더군요. 기교를 부리는 것도 아니고 좋은 식재료를 가지고 그냥 자연스럽게 만들더라고요.

이탈리아 요리사들과 이야기를 해보니까 자부심이 대단한 겁니다. 그곳 시골 음식들은 제주도 음식보다 더 투박한 것들도 많은데, 거기서 나름의 가치를 찾아내는 걸 보면서 대단하다는 생각과 함께, 이 정도를 가지고 세계적인 음식문화라고 한다면 제주도 음식도 가능하지 않겠나, 하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또 그 무렵 이탈리아에서 슬로 푸드 운동이 벌어지는 것도 봤고요.

그래서 이탈리아에서 귀국하자마자 어머니에게 사설 연구소라도 만들어서 제주 음식을 체계적으로 정리하고 여기서 가치를 찾아내자고 말씀드려 제주 향토음식보전연구원을 만들게 된 것입니다. 요즘 말로 그때 대오각성을 한 셈입니다. 나는 왜 우리 것을 대단하게 생각하지 못했을까, 하는 자각이 생긴 겁니다. 어머니가 해오신 작업을 어떤 식으로 이어받을 것인가 고민을 하던 차에 이탈리아에서 길을 찾게 된 것이지요."
 

유배객도 똑같이... 음식 앞에서 평등했던 제주 인심
 

넷플릭스 '국물의 나라' 촬영 요리 다큐멘터리에 출연해 제주의 국물음식은 돼지 육수를 이용한다는 점을 보여주며 몸국, 고사리 육개장, 접짝뼈국 등을 소개했다. ⓒ 양용진

 
이제부터 본격적으로 제주 향토음식 이야기를 들어볼 차례다. 양용진 원장은 제주의 향토음식에는 제주인들의 공동체문화가 짙게 배어 있다는 점을 누누이 강조한다. 그리고 그 생생한 사례로 잔치음식 문화를 들고 있다.

"전통적으로 제주에서 잔치를 할 때는 우선 돼지를 잡는 데서부터 시작했어요. 제주도에선 마을마다 자연스럽게 추대된, 경험 많고 솜씨 좋은 어른이 잔치를 총괄하는데, 도감이라고 합니다. 이 도감이 돼지를 잡고, 삶고, 나누어주는 일까지 모두 담당합니다.

도감이 돼지고기를 나눠줄 때는 누구에게나 똑같이 '궤기 반'을 주게 됩니다. 즉 돼지고기 수육을 아주 얄팍하고 넓적하게 썰어서 고기 석 점, 메밀가루와 선지를 버무려 속을 채운 제주식 순대인 수애 한 점, 제주 재래종 좀콩으로 만든 마른 두부인 둠비 한 점이 담긴 1인분의 음식이 바로 궤기 반입니다.

아기들이나 할머니 할아버지, 심지어는 그날 잔치에 오지 못한 사람에게도 누구 적시(혹은 직시, 제주방언으로 누구의 몫이라는 의미), 하면서 포장을 해서 똑같이 나눠주는 겁니다. 행사를 위해 준비한 귀한 음식일수록 소외되는 사람이 있으면 안 된다는 게 제주 사람들의 음식에 대한 철학이자 제주 음식문화의 상징입니다.

조선시대에 유배 온 양반들을 제주 목사가 먹여 살린 게 아닙니다. 마을 사람들이 먹여 살려야 했어요. 유배객들과도 똑같이 음식을 나눠 먹었던 것이지요. 음식 앞에서는 누구나 평등하다는 그런 공동체 의식을 저는 대단하다고 봤어요. 그래서 저는 이 잔치문화를 국제적으로도 자랑스럽게 생각할 필요가 있다고 봐서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에 등재하고 싶은 욕심이 있어요. 현재 유네스코에 등재된 음식문화가 20가지가 좀 안 되는데, 이 가운데 16가지가 공동체 음식입니다. 우리나라 김치가 아닌 김장이 등재된 것도 공동체 음식문화이기 때문이지요. 제가 보기에 제주도의 잔치음식 문화는 공동체 음식의 끝판왕이라고 생각합니다."

 

낭푼밥상 제주도 공동체문화를 잘 보여주는 낭푼밥상은 한 가운데에 밥을 가득 담은 낭푼 그릇을 놓고 식구 수대로 국과 수저를 놓는다. 밥은 주로 잡곡으로 지었고, 푸른 잎 채소와 발효음식으로 차려진 건강밥상이다. ⓒ 양용진

 
양용진 원장은 제주의 공동체문화를 잘 보여주는 또 하나의 사례로 낭푼밥상을 든다. 규모가 큰 마을잔치와는 달리 한 가정의 상차림인 낭푼밥상을 통해 제주 사람들의 이웃에 대한 배려의 정신과 함께 일상적인 식생활의 단면을 엿볼 수 있기도 하다.

"잔치음식처럼 낭푼밥상도 제주의 공동체문화를 잘 보여줍니다. 제주에선 평소에 밥상을 차릴 때 밥상 한가운데에 밥을 가득 담은 낭푼 그릇을 놓고 식구 수대로 국과 수저만 가져다 놓으면 한 끼 식사가 차려집니다. 한 그릇에 담은 밥을 같이 퍼먹으니 목숨을 함께 부지해 나간다는 짙은 유대감이 형성되는 밥상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손님이 와도 국 한 사발에 수저 한 벌 가져다 놓고 권했고요. 척박한 환경이 주는 곤궁함 속에서 귀한 음식일수록 평등하게 나누어야 한다는 생활철학이 생겨난 것이지요.

이 낭푼밥상엔 쌀이 귀하다 보니 보리나 다양한 잡곡으로 밥을 지었고, 톳이나 모자반 같은 해초를 섞은 밥도 올라왔어요. 또 쑥이나 냉이 무 혹은 감자나 고구마를 섞기도 했지요. 그리고 반드시 국을 곁들여 거친 잡곡밥이 수월하게 넘어가도록 배려했는데, 특히 다른 지방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생선을 이용한 맑은국이 많았습니다. 고등어나 각재기(전갱이) 갈치로 끓인 국이 그런 예인데, 갯바위나 근해에서 낚은 생선이 낭푼밥상에 오르기까지 반나절도 걸리지 않았기 때문에 신선도가 뛰어나 가능했던 것입니다.

또 낭푼밥상에는 사시사철 푸른잎채소가 반드시 등장합니다. 어느 집이건 우영팟(작은 텃밭)을 일궈 자기 식구들이 먹을 만큼의 채소를 직접 재배한 것이죠. 겨울에도 영하로 떨어지지 않는 기후 덕이었습니다. 영양학적으로 볼 때 낭푼밥상은 음식의 가짓수가 많지 않지만, 잡곡과 채식의 비중이 높았어요. 그리고 동물성 음식의 비율은 20%를 넘지 않으면서 어패류가 많았고, 된장 김치 젓갈 등 발효음식이 많았기 때문에 건강밥상 장수밥상이 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낭푼밥상은 한편으로는 양용진 원장이 직접 운영하는 식당의 상호이기도 하다. 그가 높이 평가하는 제주의 공동체문화와 배려의 정신이 담긴 전통적인 낭푼밥상을 재현해 현대인들에게 체험해 볼 수 있게 하자는 취지에서 식당을 열었다. 제주 사람 혹은 외지인들은 식당 낭푼밥상에 대해 어떤 반응을 보였을까.

"어머니가 찾아내고 기록한 제주 전통음식을 좀 정리해서 실제로 사람들에게 선보일 공간이 필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제주 향토음식을 표방한 식당들은 많지만 진짜 전통 제주 음식을 맛볼 수 있는 식당은 한 군데도 없었거든요. 애월읍 유수암리에서 시작했는데 옛날 토종 식재료를 구하는 것부터가 힘들었습니다. 소량으로나 나오지 일반적으로 유통되는 게 아니어서 가격이 비싸질 수밖에 없었어요.

그래서 전통음식을 싸게 팔 수가 없으니 아예 고급화해보자, 해서 서양의 파인 다이닝(fine dining, 고급식당) 개념을 도입했습니다. 코스요리를 개발해 음식을 하나하나 설명해 주는 식으로 시작했는데, 외식업체들 쪽에서는 굉장히 좋게 봐주셨어요. 반면 제주 토박이들은 거부감을 갖더라고요. 어릴 때 집에서 쉽게 해 먹던 음식인데 가격도 비싸고 너무 고급스럽게 나오니까 말이죠.

저희는 외국인 관광객이나 식도락을 즐기러 온 외지인을 타깃으로 삼았는데, 반응은 뜨거웠습니다. 음식에 대해 일일이 설명해 드리니까 진짜 대접받은 느낌이었다고 하고, 옛날 생각이 난다는 분도 계셨고요. 지금까지 알고 있던 한식과 제주의 전통음식이 왜 이리 다르냐는 질문도 많았습니다. 고춧가루도 거의 안 들어가고 양념도 단순하고 식재료 자체가 매우 달랐으니까요. 외국인 셰프들도 많이 다녀갔고 제주 식재료에 대한 국제 교류도 많이 했지요.

그런데 김영란법이 발효되면서 타격을 받았습니다. 가격이 세다 보니 아무래도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결국 3년 만에 접고는 신제주로 옮겨 저렴한 식당으로 다시 시작하게 됐지요. 낭푼밥상 시즌2라 해서 제주의 전통음식 중 잔치음식을 테마로 잡았어요. 이곳으로 옮겨서는 괜찮아지는 듯했는데, 한 6개월 후쯤에 코로나19 팬데믹이 덮치면서 힘든 시기를 보내야 했습니다. 요즘은 작년까지 운영해 온 요리학원과 제과제빵학원을 접고 그 자리로 낭푼밥상을 이전하기 위해 공사 중입니다."


제주의 '진짜' 향토음식들
 

제주 향토음식 명인 1호인 어머니와 함께 김지순 명인은 1970년 경부터, 제주에서 구전돼온 전통음식을 찾아내 기록하고 재현하는 작업을 해왔다. 양 원장은 2011년 김지순 명인과 함께 350여 종의 제주 전통음식을 집대성한 도록을 펴냈다. ⓒ 양용진


양용진 원장이 오너 셰프를 맡은 낭푼밥상은 2021년 3월 영국에 본부를 둔 '더 월드 베스트50 레스토랑'이라는 단체가 음식평론가 요리사 기자들에 의뢰해 선정한 아시아 전통음식점 77곳에 이름을 올리기도 했다. 한국에서는 서울의 식당 3곳과 제주 낭푼밥상 등 4곳만이 뽑혔으니 국제적으로도 인정을 받고 있다고 하겠다.

양 원장의 이야기를 듣다 보니 제주의 음식을 두고도 향토음식이니 전통음식이니 혹은 로컬 푸드니 해서 다양한 명칭이 있는 듯하다. 어떤 차이가 있을까?

"향토음식 혹은 토속음식이라고 하면 전통적으로 그 지역에서 먹어왔던 음식들을 말했는데, 요즘은 향토성을 가진 그 지역의 음식이라는 의미로 좀 바뀌었어요. 예를 들면 갈치조림이나 고등어조림이 대표적인 제주의 향토음식처럼 돼 있지만 실제로는 과거 제주도에서 그렇게 고춧가루를 많이 사용해서 만든 생선조림을 먹어본 적은 없어요. 반면에 전통음식은 말 그대로 예전에 먹던 방식으로 만든 음식을 말하고요. 로컬 푸드는 그 지역의 식재료를 이용한 모든 음식을 말합니다. 돈가스는 제주도 돼지로 만든 로컬 푸드이지만 향토음식이라고 하지는 않죠.

저는 세 가지 음식을 다 추구합니다. 문화의 가치는 다양성에 있으니까요. 그러려면 여러 가지가 공존해야 한다는 것이고, 음식도 시대에 맞게 변화가 일어날 수밖에 없다는 생각입니다. 옛날 것만 고집할 수는 없는 것이죠. 또 외국의 음식문화도 받아들이고 있는 상황인데 '전통'이나 '향토'만 부르짖을 수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다만 중요한 건, 전통음식의 바탕 위에서 개발된 향토음식이 나와야 뿌리가 있는 음식이고 문화가 될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원형 그대로의 옛 음식 보존작업을 하는 한편으로 시대에 맞게 변화하는 과정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양 원장에 따르면 제주도의 향토음식 개념이 바뀌었을 뿐 아니라, 진짜 향토요리를 맛볼 수 있는 식당도 거의 없다는 것이다. 그런데도 요즘 향토음식을 표방한 식당들이 많이 눈에 띄는 건 어떻게 된 일일까?

"1970년대 초반에 서남해안 지역에 극심한 가뭄이 몇 년간 지속되었어요. 그때 신안에서부터 진도 완도 고흥 녹동 등에 사시던 분들이 고향을 떠나 대거 제주로 왔습니다. 그 수가 2∼3년 사이에 2만 명 정도나 됐는데 대부분 젊은 사람들이었습니다.

이 사람들이 제주도에서 정착해 살면서 본격적으로 상업활동을 한 시기가 1970년대 후반에서 80년대입니다. 제주도의 관광산업이 활성화하기 시작한 게 80년대 초반으로, 그때부터 제주 음식의 수요가 생기기 시작한 것이죠. 관광음식점이 필요하게 된 겁니다. 이때 제주도 토박이들은 집에서 해 먹던 투박한 음식을 가지고 장사를 하지 않았어요. 그러니까 호남인들이 제주도 식재료에 전라도 양념으로 만들어 팔았던 음식이 지금의 제주 향토음식이 돼버린 거죠.

전라도 서남해안 지역의 양념들은 굉장히 자극적인 것이 많아요. 마늘 고춧가루 다대기 같은 걸 많이 쓰는데, 지금 제주도 향토음식점에 가보면 양념 많이 쓰는 것을 볼 수 있어요. 저는 이런 현상을 탓할 수는 없다고 봅니다. 그분들이 장사하면서 나름대로 최선을 다해서 관광객을 끌어들였으니까요. 실제로 제주 서문시장이나 동문시장 상인의 한 70%가 호남분들입니다."

 

감저범벅 제주는 전세계에서 가장 다양하게 메밀음식을 만들어 먹는 지역이다. 사진은 메밀음식 가운데 하나인 범벅을 재현한 것으로, 고구마(감저)를 넣어 만든 감저범벅이다. ⓒ 양용진

 
그렇다면 제주의 오리지널 음식은 어떤 것이었을까. 제주의 기후나 토양 등 환경이 요리 재료나 음식문화에도 커다란 영향을 끼치지 않았을까. 양 원장의 설명을 들어봤다.

"당연히 자연환경으로부터 받은 영향이 지대합니다. 대표적인 게 배추입니다. 제주도 배추는 물이 많아서 김치 담그면 빨리 물러져 맛이 없다고 하거든요. 이게 사실은 제주도 토질이 화산회토여서 물이 고이지 않고 다 빠져버리지요. 그러니까 채소가 스스로 살아남기 위해 물을 많이 머금게 되는 겁니다. 무는 원래 수분이 많아야 상품이기 때문에 전국에서 가장 알아주고, 대부분의 채소도 수분 함량이 높아 품질이 좋은 거죠.

제주 사람들은 물 많은 배추를 나름의 비법으로 김치를 담가 먹었습니다. 바닷물에서 3∼5일 정도 절이는 겁니다. 그러면 많던 수분이 빠져나가 양념을 하면 아삭아삭해져 오래 두고 먹을 수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알려진 표준방식으로 소금 쳐서 반나절 만에 절여 김치를 담그면 당연히 빨리 물러질 수밖에 없어요. 제주 식재료에 맞는 제주만의 조리법이 있는데 이걸 무시해버리면 식재료 자체가 안 좋은 것처럼 보인다는 겁니다.

제주는 해양성 기후이다 보니 쑥이라든가 산나물이 육지에 비해 떫은맛이 훨씬 덜합니다. 쑥은 데치기만 해도 바로 쓸 수 있고 심지어는 생으로도 먹을 수 있을 정도입니다. 더덕도 그렇고요. 약간 떫은맛이 나는 채소도 제주도에선 그 정도가 확 줄어듭니다. 바다에서 나는 먹을거리도 풍부합니다.

바닷가 갯바위들은 다공질의 현무암이어서 거품이 많고 클릭이 많아 표면적이 굉장히 넓다는 특징이 있습니다. 표면적이 넓다 보니 거기에 기생하는 플랑크톤 같은 기초 바다 식물들이 많이 붙어 있고, 그걸 먹이로 삼는 보말이라든가 조개류들이 많습니다. 게 종류도 매우 다양하고요."

 

제주 전통음식 재현 2018년 제주시에서 개최한 제주 음식박람회에서 제주의 전통음식을 옛 방식 그대로 재현해 전시했다. ⓒ 양용진

 
제주는 고려시대 100여 년에 걸쳐 원나라 즉, 몽골인의 지배를 받아야 했다. 현재까지 이어지는 제주의 전통음식에도 그 영향이나 잔재가 남아 있지 않을까 싶다.

"고소리술이 탐라총관부 시절에 제주로 들어왔다고 하고요. 메밀도 그때 들어왔다고 하니까 지금 메밀을 활용한 음식도 대부분 몽골의 영향을 받았다고 할 수 있겠네요. 메밀은 밭에 그냥 뿌려놓으면 잘 자랍니다. 바람이 많은 지역에서는 키가 큰 곡물은 재배하기 쉽지 않은데 메밀은 다 자라봐야 40∼50㎝밖에 안 되거든요. 90여 일이 지나면 쉽게 수확할 수 있기도 하고요. 제주도 사람에겐 메밀이 굉장히 고마운 곡물이죠.

전 세계에서 메밀로 만든 음식 종류가 가장 많은 곳이 바로 제주입니다. 강원도에 메밀 음식을 파는 곳이 많지만, 메뉴가 4∼5가지 이상을 넘어가지 못합니다. 제주도에선 혼례나 장례 등 대소사에 돼지를 잡으면 몸국이나 육개장 접짝뼈국 등을 끓이는데, 이런 탕국에는 반드시 메밀가루를 풀어 넣습니다. 느끼한 맛도 잡고 고깃국물을 진하게 우려낸 듯한 식감을 느끼게 해서 많은 사람이 나눠 먹을 수 있도록 지혜를 발휘한 것이지요. 메밀을 이용해 만든 떡 종류만 해도 빙떡을 비롯해 벙개떡 방울떡 고리동반 물떡 등 매우 많습니다. 말고기를 먹게 된 풍습도 사실은 몽골의 영향이라고 할 수 있지요."


돼지고기, 존다니 무침, 고사리
 

제주 향토음식 해설 2023년 제주 향토음식 품평회에서 양용진 원장이 제주의 출산관련 전통음식을 해설하고 있다. ⓒ 양용진

 
제주의 전통음식에 대한 애정 때문일까. 양용진 원장은 물어보기만 하면 답변이 막힘없이 술술 나온다. 단순한 음식 설명을 넘어 역사적 배경과 곁들여 흥미롭게 이야기를 풀어나간다. 이번에는 호남지역에서 제사나 잔치에 빠지지 않는다는 홍어에 해당하는 제주 음식에 관해 물었다.

"돼지고기는 무조건 들어가야 하고요. 세계적으로 맛있다고 하는 돼지고기가 스페인의 이베리코잖아요. 이 이베리코와 제주도 흑돼지가 자라는 환경이 똑같습니다. 이베리코를 방목한다고 하는데 제주도에서도 원래 돼지를 방목했거든요. 한 해에 2∼3개월 풀어놓고 길렀어요. 현재 제주도에서 소비되는 돼지고기의 25% 정도가 흑돼지이고, 나머지가 일반 돼지입니다. 이 흑돼지는 제주도 난지축산연구소에서 만든 난축맛돈을 비롯해 외래종 돼지에다가 제주 재래종 흑돼지의 유전자를 교합해 새로 만든 품종들이지요. 옛 토종 흑돼지의 맛을 조금이라도 복원하기 위해 만들어낸 것입니다.

존다니 무침이라는 것도 빠지지 않습니다. 제주도 근해에서 잡히던 작은 상어인 두툽상어로 만들었는데, 이게 요즘 잘 안 잡혀서 오징어나 한치로 대체해서 만듭니다. 홍어처럼 암모니아 향이 올라오는 무침 요리입니다. 그다음에 당면잡채가 일제강점기부터 일반화됐습니다. 당면의 원료가 고구마 전분인데, 일본 강점기에 고구마 전분 공장의 70%가 제주도에 있었어요. 당면순대도 가장 먼저 자리 잡은 곳이 제주도입니다. 제주 서문시장에서 90년 전부터 당면순대를 만들었고 지금도 70년 역사의 당면순대 집이 있어요. 앞에서 '궤기 반'이나 몸국도 빠지지 않는 것이죠.

고사리도 빼놓을 수 없습니다. 특히 한라산 먹고사리가 맛이 좋기로 유명하지요. 고사리는 음지식물인데 곶자왈이 습하고 수분이 많은 지역이다 보니 먹고사리가 자라기 좋습니다. 고사리는 수분이 많을수록 수관이 넓어지고 두꺼워지거든요. 그런데도 억세지 않고 부드러우니까 제주 고사리를 알아주는 겁니다. 그런데 너무 부드럽다 보니 나물로 만들기가 힘들어요. 육지 고사리는 나물로 볶으면 약간 질근질근 씹히지만, 제주 고사리는 씹히지 않고 그냥 물러져 버립니다. 그래서 삶아서 말려놓고 놔뒀다가 많이 안 불리고 바로 조리해서 먹었습니다. 요즘엔 삶은 생고사리를 냉장고에 보관했다가 조리하기도 합니다."


제주도를 찾는 여행자들이 대부분 이른바 맛집에 대해 큰 관심이 있는 것 같다. 전통음식 전문가로서 이런 현상을 어떻게 보고 있는지 궁금하다.

"맛집을 찾아다니는 분들이 기대치가 너무 높고 또 유행에 굉장히 민감한 것 같습니다. 제주도에서도 요즘 베이글 등을 파는 베이커리 카페가 난리더라고요. 제주와 상관없는 음식에 열광하는 것은 군중심리라고 할 수 있어요. 자기가 먹고 싶은 게 아니고 남들 다 먹으니까 나도 먹어봐야지 하는 것이거든요. 제주의 음식 맛을 접하고 싶으면 유명하다는 곳만 찾아다닐 게 아니라 현지인들한테 물어보라고 조언하고 싶습니다. 현지인 중에도 나이가 조금 있는 분들에게 물어보면 진짜 현지 맛집을 찾을 수 있을 겁니다."

제주 개발, 이제 그만했으면 좋겠다
 

요리강좌 진행 양용진 원장은 제주 전통음식이나 제주산 식재료를 활용하는 요리강좌를 진행하고 있다. 사진은 2023년 5월 외식업 종사자들을 위한 ‘마스터 쉐프 클래스’ 요리강좌. ⓒ 양용진



제주도는 요즘 환경훼손에 대한 우려의 목소리가 갈수록 커지고 있다. 먹을거리를 다루는 사람으로서 개발과 환경보존, 핵 오염수 방류와 같은 이슈를 어떻게 보고 있을까.

"저는 개발 불가론자는 아니지만 이제 그만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제2공항은 정말 반대합니다. 공항 건설은 개발 면적이 넓을 수밖에 없고 소음과 진동도 굉장히 심합니다. 그리고 공항 예정지인 제주도 동쪽 지역은 땅 밑에 동굴들이 많이 있는데, 공항을 만들게 되면 다 묻혀버리고 말 겁니다. 이런 것이 어떻게 보면 제주도만의 경쟁력이라고도 할 수 있는 것인데 말이죠.

핵 오염수 방류에 대해서는 이렇게 말하고 싶습니다. 화장실에서 밥을 먹어도 건강에 이상은 없을 겁니다. 그런데 누가 화장실에서 밥 먹습니까? 안 먹잖아요. 찜찜하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오염수가 안전하다고 우겨도 어쨌든 핵을 거쳐서 나온 것이지 않습니까. 찜찜한데 그걸 어떡할 겁니까. 바다에서 나오는 식재료 가지고 찜찜한 상태에서 음식을 만들어서 먹으라면 안 되잖아요.

지금 난개발 난개발하는데 처음 개발할 때 무슨 영향이 있을 거라고 했나요. 쌓이고 쌓이니까 이렇게 온 지구 생태계가 엉망이 되고 있지 않습니까. 환경에 나쁜 영향을 주면 안 된다고 하면서 환경영향평가라는 걸 하지만 지금 다 영향을 받고 있잖아요. 저는 이런 문제의식이 있어서 환경에 관심 많은 분들이 개발에 우려하는 공동성명을 내게 되면 기꺼이 함께 참여하고 있습니다. 제주의 기존 자원들을 보존하면서 지속가능한 경쟁력을 유지하는 게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보고 있습니다."


제주 전통음식을 연구하고 보급하는 외길을 걸어온 양용진 원장의 다음 행보는 어디로 향할까. 12월 초부터 제주시 노형동에서 낭푼밥상 시즌3을 시작하고, 제주향토음식보전연구원을 비영리 사단법인으로 만들 예정인 그는 나아가 제주향토음식박물관 건립을 꿈꾸고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제주 전통음식을 널리 알려 세계적인 자랑거리로 만들겠다는 각오를 다지고 있다.
 
"믿기 어렵겠지만 제주도가 세계적인 관광지라고 하지만 특급호텔에 제주 전통음식을 취급하는 곳이 없는 실정입니다. 그래서 내년부터 제주 전통음식 강의를 개설하려고 한라대학과 논의 중입니다. 지금 제주도에서 향토음식을 가르쳐주는 학과가 없거든요.

제주도는 사실 가진 게 너무 많은데, 우리가 그걸 잘 몰라요. 당장 돈 되는 것에만 매달리는 것 같아요. 제주도의 잔치문화를 외국인들한테 얘기해주면 다들 놀랍니다. 누구나 차별 없이 음식을 나눠 먹는 문화가 세계적으로도 드물다는 겁니다. 제가 외부에 강의를 많이 다니는 이유도 이런 제주도 특유의 문화와 가치를 전파해서, 나중에 유네스코 문화유산으로 등재되기를 기대하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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