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12.07 11:41최종 업데이트 23.12.07 13: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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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 성남시 분당구 판교로 넥슨코리아 본사. 2019.1.3 ⓒ 연합뉴스


피로하다. '넥슨 집게손 논란'을 보는 내 심정이다. 믿는 것만 믿고, 보고 싶은 것만 보는 이들을 설득할 여력도, 필요도 없다.

그러나 나 개인의 피로감만 언급하고 넘어가기에는, 실체적인 위협이 있다. 디시인사이드 등 온라인 커뮤니티에는 넥슨 본사 앞에서 열린 여성단체의 집회 참가자들에게 칼부림하겠다고 위협하는 게시글이 올라왔다.


논란이 된 넥슨 메이플스토리의 엔젤릭버스터 리마스터 애니메이션 홍보영상의 '집게손'을 만든 것으로 잘못 알려진 여성 창작자 A씨의 신상은 온라인에 무단 유출됐다. 일부 커뮤니티 유저들은 해당 영상을 제작한 넥슨의 협력업체 '스튜디오 뿌리'의 사무실을 찾아가 문을 두드리고 직원들의 얼굴을 찍어 올렸다. 사과를 종용하는 원청업체 넥슨에 이어 일부 유저들로부터 실체적인 위협을 거듭 느낀 스튜디오 뿌리는 대표 명의의 사과문을 재차 올리고 A씨가 퇴사를 결정했음을 알렸다 (그러나 이후 뿌리는 경향신문과의 인터뷰에서 해당 직원을 보호하기 위해 입장문을 냈으며, A씨는 퇴사하지 않았다고 밝혔다.)

그래서 또 쓴다. '집게손'에 대해서.

영상 검수한 남성 애니메이터 "페미니즘이 뭔지도 모르는 제가"

게임업계 전반에 암약하는 페미니스트가 비밀 결사의 상징처럼 곳곳에 심어놓는다는 표식으로서의 '집게손'에 대해서는, 얼마나 허무맹랑한 일인지 여러 기사와 칼럼이 이미 공박했기에 재론할 가치를 느끼지 못한다. 경향신문은 4일 논란에 휩싸인 애니메이션이 에미상을 수상한 유명 남성 애니메이터, 김상진 감독이 만들고 검수했다고 보도했다. 김 감독은 인터뷰에서 이같이 말했다. "페미니즘이 뭔지도 모르는 제가… (후략)"

문제는 사태의 가해자인 넥슨에 덧입혀진 피해자 서사다. 넥슨을 두고 '젠더 갈등'에 새우 등 터진, 혹은 '집게손'을 위시한 혐오 표현의 희생양으로 그리는 언론과 일각의 의견이 있다. 그러나 넥슨이 2016년 'GIRLS Do Not Need A PRINCE'(여자에게 왕자는 필요하지 않다)가 쓰인 '메갈리아' 후원 티셔츠를 입었다는 이유로 게임 <클로저스>의 김자연 성우를 교체한 일은 지금껏 이어진 게임 업계 여성 창작자에 관한 마녀사냥의 시초다. 이후 남초 커뮤니티들에서 SNS 등에서의 '페미' 이력을 문제 삼아 여성 창작자에 대한 공격을 감행하고, 게임사가 이에 동조해 해당 스태프를 퇴출시키는 일은 게임업계의 고질병이 됐다.

복수의 언론에 따르면 이번 사태에서 넥슨은 제작사인 뿌리 측에 사실관계를 확인하는 대신 사과문을 올릴 것부터 종용했다. 이어 넥슨은 지난달 26일 유튜브 방송을 통해 "맹목적으로 타인을 혐오하는 데 부끄러움을 느끼지 못하고, 몰래 드러내는 데 희열을 느끼는 사람들에 단호히 반대한다"(김창섭 메이플스토리 총괄 디렉터)는 입장을 밝혔다. '맹목적으로 타인을 혐오하는 데 부끄러움을 느끼지 못하고, 몰래 드러내는 데 희열을 느끼는 사람들'에 대해서는 누구나 반대한다. 나도 그렇다. 그런 사람이 있다면 말이다.

그러나 가상의 적을 상정해놓고, 발본색원하겠다며 엉뚱한 피해자를 앞장서 양산하는 블랙 컨슈머가 있고 이에 기업이 동조한다면 이건 다른 문제다. 공격의 대상이 된 여성 창작자 A씨는 '집게손'을 그리지 않았으며 해당 영상의 다른 부분을 담당한 것으로 밝혀졌다.

A씨는 5일 여성신문과의 인터뷰에서 "디시인사이드에 이름, 얼굴, 카카오톡, 네이버 블로그 등 신상이 유포되면서 각종 비난을 듣게 됐다"며 "X(구 트위터)를 통해 '한강 드가자'는 메시지가 오기도 했다"고 토로했다. 결과적으로 뿌리는 A씨에게 퇴사를 권유했다가 나중에 철회했다. 이는 매출의 대부분을 쥐락펴락하는, 거대 원청사 넥슨에 '납작 엎드리는' 모습을 보여야 했기 때문이라고, 뿌리 측은 경향신문에 전했다.

'nigga'와 '집게손'은 다르다
 

'집게 손 모양' 논란이 인 게임 메이플스토리 엔젤릭버스터 홍보 영상 중 한 장면. ⓒ 넥슨

 
여기서 또 하나의 행위자인 넥슨 노동조합이 등장한다. 넥슨 노조는 넥슨 규탄 집회 및 기자회견을 감행한 상위 노조인 민주노총을 규탄하고 나섰다. 배수찬 지회장은 지난달 29일 입장문을 내고 "우리와 어떠한 논의도, 사안에 대한 이해도 없이 기자회견을 진행했다"며 "우리에게 민주노총이 정말 필요한지에 대해 원점부터 재검토할 것"이라고 밝혔다. 이어 "산하 지회에 대한 존중이 없다"며 "(논란이 된) 손가락의 의미가 무엇인지 모를 정도였다"는 말도 남겼다.

그는 "의도를 가졌느냐 그렇지 않느냐를 떠나 유저에게 불편함을 줄 수 있는 콘텐츠를 수정하려는 노력은 필요하다. 다만 그것이 작업자 개인 검증으로 이어져서는 안 된다"며 "현재 많은 조직에서 검수 과정 중 정신적, 육체적 스트레스를 호소하고 있다. 회사와 논의해 방법을 찾아보겠다"고 설명했다. 배 지회장은 이어 한 유튜브 영상에 출연해 집게손에 관한 의견을 피력하기도 했다.

민주노총이 산하 지회와의 논의 없이 집회를 감행하고 입장을 냈다면, 그건 노조 차원에서 상의해봄 직한 일이다. 그러나 게임을 검수하느라 넥슨의 노동자들이 겪고 있는 정신적‧육체적 스트레스의 근원을 따지는 것이 더 앞서 이뤄져야 하는 일이다.

'게임에 몰래 집게손 표식을 넣고 희열을 느끼는 일련의 페미니스트'라는 남초 커뮤니티의 도식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사원들에게 검수를 지시한 넥슨의 경영진이야말로 노동자들이 불필요하게 겪는 스트레스의 원흉이다. 시시비비를 따지기 전에 원청 대기업으로부터 사과부터 종용 받았던 협력업체에 있는 것이 아니다.

배 지회장은 집게손을 두고 "남자가 만들었더라도 상관 없다"면서 "핵심은 의도와 상관없이, 어떤 표현 자체에 불편함을 호소한다면 맥락이 이해될 때 충분히 받아들여질 수 있는 것 아닌가"라고 전하기도 했다. 그러면서 BTS의 노래 'Fake Love'에 들어있던 한국어 가사 '니가'를 예시로 들었다. '니가'가 흑인 비하 표현인 'nigga'를 떠올리게 한다는 지적을 듣자, BTS는 미국 공연에서 이를 수정해서 불렀다.

그러나 'nigga'와 '집게손'은 다르다. 'nigga'는 미국에서 사회적으로 과소 대표되는, 소수자인 흑인을 향한 혐오 표현이었다. 한국을 넘어 전 세계가 향유하는 글로벌 아티스트인 BTS가 부르는 노래에 이를 상기하게 하는 가사가 포함됐다면 BTS는 이러한 의견을 충분히 고려할 만하다. 그러나 '집게손'은 여성의 몸을 수치화했던 유구한 남성들의 악습에 대항한 '미러링'이라는 소수자들의 대항 문화였고, 지금은 그 의미마저 바래서 힘을 잃었다.

현재 한국 사회에서 집게손은 혐오 표현이 아니라, 혐오를 빌미로 여성을 공격하고픈 이들 혹은 피해 의식을 가진 이들이 부러 찾는 '트리거(방아쇠)'다. 그 자체로는 무해한 집게손을 근거로 자행된 어마무시한 폭력(여성 창작자의 신상 노출, 제작사에 찾아가 위력 행사, 해당 창작자의 노동권 박탈)이 이를 입증한다. 집게손은 애당초 '없는 혐오'로 혐오의 판을 여는, 만능열쇠가 됐다.

성별‧국적‧세대를 넘어 즐길 수 있는 게임? 이미 글렀다
 

한국여성민우회 등 9개 시민단체가 지난 11월 28일 오전 경기 성남시 분당구 넥슨코리아 사옥 앞에서 게임문화 속 페미니즘 혐오몰이를 규탄하는 긴급 기자회견을 열었다. ⓒ 김화빈


"많은 사람들이 즐기는 게임이었으면 한다. (중략) 단순 숫자로 말하는 것이 아니라 성별, 국적, 세대를 넘어서서 온 가족들이 즐길 수 있는 게임이었으면 한다." 앞서 등장한 김창섭 디렉터가 넥슨 메이플스토리 제작진의 이름으로 밝힌 심정이었다. 이러한 게임에 일부 유저가 불편함을 느끼게 하는 요소가 들어가서는 안 된다는 얘기였다. 배수찬 지회장의 뜻과 정확히 겹친다.

그러나 나는 넥슨의 게임에서 누군가가 느꼈다는, 실체가 불분명한 불편함을 넘어 뾰족한 혐오의 기운을 느낀다. 일부 남초 커뮤니티 유저, 안티 페미니스트들의 헛발질이 연신 골망을 뒤흔들도록 적극 동조한 세력이 넥슨이라는 이름의 골키퍼이기 때문이다. 무분별한 외부 공격에 수년간 함께 일한 협력 업체에 고개부터 숙일 것을 압박했다는 의혹을 받고 있는 원청업체 또한 넥슨이다.

김 디렉터가 거듭 힘주어 말하던, 게임 유저를 뜻하는 단어 '용사님'에는 혐오 조장 세력만 있는 것인가. 넥슨의 게임을 성별, 국적, 세대를 넘어 즐길 수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소싯적 '용사님'이었던 나부터, 마우스를 쥔 손이 자동 집게 모양이 됐던 그 시절을 반성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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