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12.14 13:21최종 업데이트 23.12.14 13: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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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공론장은 다이내믹합니다. 매체도 많고, 의제도 다양하며 논의가 이뤄지는 속도도 빠릅니다. 하지만 많은 논의가 대안 모색 없이 종결됩니다. 소셜 코리아(https://socialkorea.org)는 이런 상황을 바꿔 '대안 담론'을 주류화하고자 합니다. 구체적으로는 ▲근거에 기반한 문제 지적과 분석 ▲문제를 다루는 현 정책에 대한 날카로운 비판을 거쳐 ▲실현 가능한 정의로운 대안을 제시하고자 합니다. 소셜 코리아는 재단법인 공공상생연대기금이 상생과 연대의 담론을 확산하고자 학계, 시민사회, 노동계를 비롯해 각계각층의 시민들과 함께 만들어가는 열린 플랫폼입니다. 기사에 대한 의견 또는 기고 제안은 social.corea@gmail.com으로 보내주시기 바랍니다.[기자말]
연애, 결혼, 출산을 포기한 삼포세대, 내 집 마련과 인간관계까지 포기한 오포세대를 넘어 N포세대로, 헬조선으로 이어지는 암울한 청년세대가 기득권을 누리며 안락하게 살고 있는 '60년대생'과 극적으로 대비되는 시대다. 이름도 모르고 만나보지도 못했지만, 1960년대에 태어났다는 이유만으로 나의 동년배, 후배, 선배가 시대의 죄인이 되고 꼰대가 되는 시대다. 억울하지 않다. 누명을 썼다는 생각도 들지 않는다. 60년대생만의 책임이 아니라고 강변하고 싶지도 않다. 누가 뭐라 하든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대한민국, 청년들이 헬조선이라고 부르는 이 나라는 기성세대가 만들어 놓은 세상이기도 하니까.

언제인지 정확히 기억나지 않는다. 어디인지도 기억나지 않는다. 학교 강의실일 수도 있고, 다른 강연장이었을 수도 있다. 청년들에게 물었다. "60년대생이 기득권층이라고 생각하세요?" 잠깐의 침묵. 자신 있게 이야기하는 청년들도 있었고, 머뭇거리며 조금은 미안하다는 듯 이야기하는 청년들도 있었다. 대답의 강도는 차이가 있었지만 그들의 대답은 한결같았다. "네, 그렇다고 생각해요." "왜 그렇게 생각하시죠?" 나와는 무관한 일이라는 듯이 담담하게 이유를 물었다. "대기업에 취직 못 한 사람이 없을 만큼 좋은 일자리가 넘쳤잖아요!" "원서만 내면 대기업에 취업했다고 들었어요."


그랬던 것 같기도 하다. 삼성, 현대, 럭키금성(LG), 쌍용, 대우(1997년 외환위기를 겪으면서 해체된 재벌그룹), 효성, 선경(SK) 등 대기업은 졸업도 하지 않은 학부 4학년생 수천 명을 신입사원으로 미리 뽑을 정도였으니까. 학과 사무실에는 대기업의 추천서가 넘쳐났다. 조미료를 조금 치면 대학 캠퍼스에서는 동네 강아지도 대기업 입사원서를 입에 물고 다닐 정도였다. 교수들도 인정이 넘쳤다. 4학년생이 취업했다는 합격증만 제출하면, 수업을 듣지 않고도 학점을 받고 졸업할 수 있었다. 그땐 그런 시대였던 것 같다. 이 개천, 저 개천, 내가 살았던 개천(내가 살았던 동네 옆에 진짜 개천이 있었다!)에서도 용이 승천하는 일이 종종 있었다. 열심히 노력하면 누구나, 세숫대야에 세숫물만 떠 놓아도 용이 날 것 같은 그런 시대.

60년대생은 꿀빠는 세대?
 

60년대생의 견고한 기득권을 비판해야 하지만 동시에 우리는 왜 한국 사회에서 N포세대와 ‘수저계급’이라는 한탄이 공존하는지를 생각해야 한다. ⓒ 셔터스톡

 
"여러분의 부모님은요?" 조금 전과 달리 긴 침묵이 이어졌다. 90년대생인 청년의 부모 대부분은 나와 같은 60년대생일 가능성이 높다. "여러분의 부모님도 기득권층이라고 생각하세요?" 대답을 꼭 들어야겠다는 듯이 다시 물었다. 다시 긴 침묵. 대답이 없었다. '말이 되는 질문을 해라.' 청년들이 마음 속으로 이렇게 되물었을지도 모른다. '우리 부모가 기득권층이면, 내가 이렇게 고생하도록 놔두겠냐.' 맞는 말이다. 부모는 기득권층으로 안락한 삶을 누리는데, 자녀는 삼포세대, 오포세대, N포세대가 되어 헬조선에서 죽도록 고생한다는 것이 말이 되는 이야기인가.

청년들은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청년들의 부모 대부분은 주말도 없이, 휴일도 없이 '월화수목금금금'을 열심히 살아온(살고 있는) 평범한 사람들이다. 자신의 노후는 제대로 준비 못 하지만, 당신들의 개천에서도 용이 날 수 있다는 실낱같은 기대를 버리지 않은 분들이다. 있는 돈 없는 돈, 있는 정성 없는 정성 다 쏟아 부으며 자녀 교육에 모든 것을 거는 분들이다. 밤낮 없이 일해도 항상 돈에 쪼들려 사는 분들. 돈 때문에 집안이 조용한 날이 없는 분들. 청년들은 생각했을 것이다. '내 부모가 기득권층이라고?' '지나가는 개가 웃을 일이다.'

어떤 청년은 자신 없는 목소리로 "그래도 그때는 지금보다 나았잖아요. 그런 의미에서 부모님도 기득권층이라고 이야기할 수 있죠"라고 답했다. 상대적 조건을 이야기하는 것이면 그래 그럴 수 있다. 하지만 그 말을 했던 청년도, 그 청년의 말을 듣고 있던 우리도, 선뜻 동의하기 어려웠다. 고개를 숙인 채 눈시울을 붉힌 청년도 있었다. 미안했다. 안온(필명)이 <일인칭 가난>에서 담담하게 이야기했던 것처럼 대부분 청년은 부모의 고단한 삶을 너무나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아니, 어쩌면 청년도 부모의 그 고단한 삶을 함께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실제로 1960년대에 태어나 1980년대에 4년제 대학에 다닌 1960년대생의 비율은 대단히 낮았다. 1980년 고등학교 졸업생 중 4년제 대학에 진학한 비율은 11.2%였다. 졸업정원제로 입학정원이 30% 늘어난 1985년에도 4년제 대학 진학률은 17.8%에 불과했다. 당시는 대학교에 진학한다는 것 자체가 이미 특권이었다. 1960년대에 태어난 대부분의 기성세대는 중·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생계를 위해 산업전선에 뛰어들어야 했다. 지금 청년의 부모 대부분이 바로 그들이다.

N포세대와 수저계급의 공존

청년들의 초롱초롱한 눈을 보면서 강단에 올라 한국 사회의 모순을 이야기하는 것이 점점 더 버거워진다. 청년들과 나의 차이는 빈털터리 청년과 기득권 386세대 간 차이가 아니었다. 그 차이는 같은 시대에 태어나 다른 삶을 살고 있는 청년의 부모와 기득권 386세대 간의 차이였다. 그 차이는 강남에 즐비하게 늘어선 고층아파트처럼 높고 분명해 보였다.

60년대생의 견고한 기득권을 비판해야 한다. 하지만 동시에 우리는 왜 한국 사회에서 삼포세대, 오포세대, N포세대와 '수저계급'이라는 한탄이 공존하는지를 생각해야 한다. 몇 년 전 청년들 사이에서 유행했던 수저계급은 부모의 사회경제적 지위와 청년세대의 성공 여부가 밀접히 관련된 한국 사회의 현실을 적나라하게 드러낸 풍자였다. 금수저는 부모의 자산이 20억 원 이상이거나 가구의 연 수입이 2억 원 이상인 청년, 흙수저는 부모의 자산이 5천만 원 미만이거나 연 수입이 2천만 원 미만인 청년을 일컫는다.

조금이라도 상식이 있는 사람이라면, 누가 상위권 대학에 진학하고 누가 그렇지 못하는지 알고 있다. 누가 상위권 대학에 진학하는지 안다면, 누가 졸업 후에 치열한 경쟁을 뚫고 전체 일자리 중 10~20%에 불과한 괜찮은 일자리를 차지할지 또한 알 수 있다. 2023년을 기준으로 상위 15개 대학의 입학정원에 서울 이외 지역에 있는 의학계열을 더하면 전국 대학의 입학정원 35만 명 대비 약 13%가 된다. 청년들이 갈 수 있는 괜찮은 일자리가 전체 신규 일자리의 10%라면 상위권 대학의 입학정원은 이를 조금 넘는 규모이고, 괜찮은 일자리가 20%라면 이 일자리의 2/3에 해당하는 규모이다.

모든 청년이 N포세대라면, 수저계급이 세간의 논란이 될 이유가 없다. 한국 사회에서 부모의 사회경제적 지위가 청년세대의 삶을 결정한다는 것은 국제기구가 발간한 보고서에도 그대로 나타난다.

선진국 클럽이라고 부르는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의 2021년 보고서에 따르면, 한국인은 부모의 부가 성공적인 인생을 살아가는 데 중요하다고 인식하는 비율이 무려 46%나 됐다(내가 개별적으로 물어본 결과에 따르면 지금은 거의 대부분이 그렇게 생각한다. 100%다). OECD 회원국 중 3번째로 높았고 OECD 평균의 두 배였다. 반면 보편적 복지국가의 전형으로 알려진 핀란드는 그 비율이 6%에 불과했다. 북유럽에서는 부모가 일용직 노동자이건, 의사이건, 변호사이건, 청년의 성공적 삶과 큰 관련이 없었다. 한국 사회는 내가 아니라 부·모가 내 삶을 결정하는 사회가 된 것이다.

60년대생이 사라진다면 괜찮아질까?
 

최근 세대 담론에 대한 다양한 주장들이 나오고 있지만, 세대 갈등의 이면에 놓인 불평등의 본질을 총체적·구조적으로 접근한 경우는 드물다. ⓒ 셔터스톡

 
<386 세대유감>에서는 저자들이 "386세대의 전면적 퇴장을 주장하는 것은 아니"라고 했지만 어느 날 갑자기 기득권 60년대생이 모두 사라지는 세상을 상상해 보자. 어느 경제학자의 말처럼 학계, 정계, 언론계, 문화계, 정치계, 관계, 노동계, 시민단체에서 주도적 역할을 하는 60년대생들이 일자리·임금·연금을 양보하면 헬조선이 사라지고, 다시 개천에서 용이 나는 사회가 될까?

물론 "무능한 꼰대 집단"은 줄어들 것 같다. 하지만 헬조선이 사라지고, 전국의 수많은 개천에서 용들이 다시 승천할 것 같지는 않다. 소수 기득권 60년대생이 차지했던 자리를 다음 세대(90년대생)가 운 좋게 이어받는다고 해도, 능력마저 세습되는 세습능력주의가 만연한 한국 사회에서 그 자리가 부모의 사회경제적 지위와 관계없이 모든 청년에게 골고루 돌아갈 가능성은 거의 없다. 기득권 60년대생이 사라지면, 그 자리는 기득권 60년대생이 온 힘을 다해 길러낸 그들의 기득권 90년대생 자녀들이 독차지할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실제로 2016년 '한국사회 기회불평등에 대한 조사'(동그라미재단) 자료를 분석한 연구에 따르면 부모의 사회경제적 지위가 높을수록 서울 소재 4년제 대학을 졸업할 가능성이 높고, 노동시장에서도 경제적 보상이 높은 직장을 가질 확률이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 놀랍지 않다. 된장을 꼭 먹어봐야 된장인지 아는 것은 아니니까. 누구나 알고 있는 이야기이다.

타도 기성세대 vs. 타도 자본주의

최근 세대 담론에 대한 다양한 주장들이 나오고 있지만, 세대 갈등의 이면에 놓인 불평등의 본질을 총체적·구조적으로 접근한 경우는 드물다. 기존의 접근방식은 대략 세 가지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첫 번째 시각은 특정한 시기에 태어난 세대가 동질적 집단이란 것을 전제로, 60년대생이 움켜쥔 기득권이 세대 간 불평등의 본질이라고 주장한다. 그래서 세대 불평등을 완화하기 위해서는 60년대생이 기득권을 내려놓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두 번째 시각은 "꿀 빠는 세대"란 없다고 단언하며 세대를 중심에 놓고 불평등을 설명하는 주장을 비판한다. 세대 담론은 정체성 정치의 산물, 지배계급에 대한 분노의 전도된 표현으로 보는 입장이다. 세 번째 시각은 세대 문제를 능력주의 절대화의 필연적 결과로 접근하는 시각이다.

세 시각 모두 세대 문제를 바라보는 장점이 있고, 각각의 주장 또한 흥미로운 논쟁거리를 제공한다. 그러나 곤혹스럽게도 세 시각을 모두 더해 보아도 청년층에게 왜 지금과 같은 일이 벌어졌는지, 그 문제를 완화하기 위해 우리 사회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 근원적이고 구조적인 답을 찾기는 어렵다. 몇 가지 정책과 프로그램을 통해 청년세대가 직면한 삶의 질곡을 완화할 수 있을 것처럼 주장하지만, 내가 생각하기에는 이러한 주장은 미시 '정책만능주의'라는 또 하나의 신화를 만드는 것이다. 그래서 하지 말자는 것은 아니다. 다만 지금 청년들이 직면한 위기가 몇 개의 미시적 정책으로 완화될 수 있을지 의문이다. 또 다른 형태, 또 다른 세대 간 불평등을 반복적으로 양산할 뿐이다.

정체성 정치를 넘어 서로 손잡고 불평등을 만든 지배권력에 대항해야 한다는 주장도 당위론적으로 맞는 이야기다. 그러나 서로 손잡고 어깨동무하는 연대의 정치를 주장하는 것은 공허하다. 연대를 위한 현실적·실천적 과제를 도출하는 것은 쉽지 않다. 무엇을 위한 연대의 정치인지, 어떤 사회를 만들어 가기 위해 우리가 연대해야 하는지에 대한 상이 잠정적으로라도 없다면, 연대의 정치는 좋은 구호에 그칠 가능성이 높다.

능력주의를 원인으로 접근하는 시각은 한국 사회에서 신자유주의가 심화하는 과정을 통해 세대 문제를 이해할 수 있게 한다. 그러나 이 또한 한국 사회에서 왜 능력주의가 극단화되었는지를 구조적이고 총체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충분한 논거를 제공하지는 못했다.
 

특권을 가진 소수의 기성세대가 이 괴물 같은 헬조선을 만들었다. 하지만, 그 기성세대 집단을 비난한다고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 사진은 드라마 <오징어게임>의 한 장면 ⓒ 넷플릭스

 
문제의 근원을 국내 노동시장에서만 찾고, 논쟁의 초점이 국민국가에만 맞춰져 있는 한계를 넘어서야 한다. 한국 노동시장 구조는 단순히 노동시장만의 문제가 아니다. 이 문제는 한국 경제의 성장방식, 산업구조의 변화와 밀접히 연관되어 있다. 더 나아가 한국의 산업구조, 성장방식은 국제적 분업구조·가치사슬과 밀접히 연관되어 있고, 이는 세계 자본주의의 큰 흐름에 따라 변동한다.

한 나라의 집권세력이 그 나라의 모든 것을 마음먹은 대로 할 수 있다고 가정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다. 어떤 집권세력도 제멋대로 국가를 운영할 수 없다. 실제로 세계화와 신자유주의는 국가의 자율성에 큰 재갈을 물렸다. 국민국가는 거시경제정책이라고 하는 환율, 이자율, 재정 등에 대해 완전한 통제권을 갖고 있지 않다. 기술 변화 또한 매우 급진적으로 일어나 불과 수십 년 만에 아날로그가 지배하던 세상이 디지털 세상으로 바뀌었다. 2008년 금융위기와 코로나19 위기로 논란은 있지만, 국제교역은 전체적으로 보면 전례 없는 수준으로 높아졌다. 기후변화는 모든 위기를 압도하는 이 시대의 가장 심각한 위기로 부상했다.

이런 세계적 변화들이 국내 요인, 더러는 우연적 요소와 맞물리고 사회경제적 위기가 증폭되면서 헬조선이 만들어진 것이다. 세대 갈등은 그 증폭된 위기가 포퓰리즘으로 표출되는 한국적 방식이다. 우리는 한국과 유사한 청년 문제에 직면한 서구 사회에서 청년들이 왜 '타도 기성세대'가 아니라 '타도 자본주의'에 열광하는지 진지하게 고민해야 한다.

각자의 합리적 선택이 위기 불러온다

저출산 현상은 우리 사회가 직면한 이러한 문제의 성격을 분명하게 보여준다. 정부가 저출산에 대응하기 위해 (믿기 어렵지만) 2006년부터 2021년까지 280조 원을 지출했다고 하는데도 왜 합계출산율은 인구학자들이 불가능하다고 이야기했던 1.0 이하로 내려가 0.6대로 치닫는 것일까?

저출산의 원인을 모르나? 모두가 알고 있다. 청년들을 위한 좋은 일자리를 늘리고, 안정적 주거를 보장하며, 모든 청년이 성별, 부·모의 사회경제적 지위와 관계없이 동등한 기회를 갖는 사회가 되지 않는 한 우리는 저출산 함정에서 빠져나올 수 없다. 사회·경제·정치의 구조를 바꾸지 않고, 우리가 부·모의 사회경제적 지위와 관계없이 합당한 노력을 하는 모두에게 좋은 일자리, 안정적 주거, 동등한 기회가 보장되는 나라를 만들 수 있을까? 나는 불가능하다고 믿는다.

진보와 보수를 떠나 각자의 합리적 선택이 우리 모두를 위기에 빠뜨리고 있다는 것이 점점 더 분명해지고 있다. 이제 우리는 미시·개별 정책적 접근에서 벗어나 우리가 직면한 위기를 총체적으로 보아야 한다. 어렵고 힘들다고 우리가 구조적 대안에 눈 감는다면, 우리에겐 다른 길이 없고, 다른 길이 없다면 우리의 미래도 없다.

마지막으로 이야기하고 싶다. 그렇다. 특권을 가진 소수의 기성세대가 이 괴물 같은 헬조선을 만들었다. 백번 비난받아 마땅하다. 하지만, 그 기성세대 집단을 비난한다고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 지금 20~30대 청년들은 10~20년 후엔 단 한 명도 빠짐없이 기성세대가 된다. 지금 청년세대가 특권 없는 대부분의 기성세대와 손잡고 이 헬조선을 해체하지 않으면, 10~20년 후 지금 청년들은 헬조선을 더 심각하게 만들고 방조한 똑같은 기성세대가 된다.

무엇을 해야 할지, 어떻게 해야 할지 모두 다른 생각을 갖고 있겠지만 우리가 연대하지 않으면 이 헬조선에서 벗어날 수 없다. 모든 세대에겐 각각의 시대적 소명이 있듯, 문제를 공유하고 차이를 좁혀가며 "타도 기성세대"가 아니라 "타도 헬조선"을 위한 길을 찾아보자. 간곡히 부탁드리고 싶다.
 

윤홍식 / 소셜 코리아 편집·운영위원장(인하대 사회복지학과 교수) ⓒ 윤홍식

 
필자 소개 : 이 글을 쓴 윤홍식 인하대 사회복지학과 교수는 <소셜 코리아>의 편집·운영위원장을 맡고 있습니다. 관심영역은 복지국가를 정치, 경제, 복지의 통합적 관점에서 살펴보는 것입니다. 학계에서는 한국사회정책학회장(전), 시민사회에선 참여연대 사회복지위원장(전)을 역임했고, 주요 저서로는 <한국 복지국가의 기원과 궤적>(1~3), <이상한 성공> 등이 있습니다.
덧붙이는 글 이 글은 <소셜 코리아>(https://socialkorea.org)에도 게재됐습니다. <소셜 코리아> 연재 글과 다양한 소식을 매주 받아보시려면 뉴스레터를 신청해주세요. 구독신청 : https://socialkorea.stibee.com/subscrib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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