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12.15 15:47최종 업데이트 23.12.15 15: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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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덜란드를 국빈 방문 중인 윤석열 대통령이 13일(현지시간) 헤이그의 이준 열사 기념관을 방문, 송창주 기념관장(오른쪽) 부부와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2023.12.14 [공동취재] ⓒ 연합뉴스

 
윤석열 대통령이 네덜란드 국빈 방문 중인 지난 13일 오후에 헤이그의 리더잘과 이준열사기념관을 들렀다. 1907년에 만국평화회의가 열린 장소와 이준 열사가 순국한 장소를 찾아간 것이다. 대통령실은 "대한민국 대통령으로서 최초 방문"이었다며 보도자료에서 이렇게 말했다.

"대통령은 루터 총리에게 리더잘은 고종황제가 이상설·이준·이위종 3인의 헤이그 특사를 파견해 대한제국의 주권 회복을 호소하고자 했던 제2차 만국평화회의가 열린 곳으로 한국에게 역사적으로 매우 의미 있는 장소라고 강조했습니다."


"대통령은 대한민국 대통령으로서 이준열사기념관에 처음으로 방문한 것을 뜻 깊게 생각한다며 어려운 상황에서도 국권 회복과 독립을 위해 애쓰신 순국선열들의 희생 덕분에 오늘날의 자유 대한민국이 존재하는 것이라고 강조했습니다. 또한 대통령은 자유·정의·평화를 위해 헌신하신 열사의 정신을 가슴 깊이 새기고 이준 열사의 애국정신과 평화를 향한 숭고한 뜻을 알리는 노력을 정부도 계속 지원해 나가겠다고 밝혔습니다."

서울 강서구청장 보궐선거 패배 후 윤 정권은 역사전쟁의 속도 조절로 비칠 만한 움직임들을 보이고 있다. 신원식 국방부장관은 11월 3일 출입기자단 간담회에서 홍범도 흉상 이전과 관련해 "국민 설득에 생각보다 오랜 시간이 걸리고 국가보훈부에서 준비할 사항도 있다"며 "연내엔 어려울 것 같다"고 발언했다.

이달 4일의 강정애 국가보훈부장관 후보자 지명도 그런 움직임의 하나로 볼 수 있다. 강정애 후보자의 시할아버지인 독립운동가 권준은 약산 김원봉과 함께 의열단 결성에 참여했고, 시아버지인 독립운동가 권태휴는 김원봉이 주도한 조선의용대에서 활동했다. 국가보훈부를 앞세워 김원봉을 폄하해온 윤 정권이 강 후보자를 보훈부장관에 내정하고 김원봉과의 인연이 널리 알려지게 한 것은 눈길을 끌 만하다.

대한민국 대통령의 입에서 "국권 회복과 독립을 위해 애쓰신 순국선열들의 희생 덕분에"라는 말이 나오는 것은 조금도 낯설지 않다. 하지만, 윤석열 정권에서 이런 말이 나오면 그 의도와 배경이 궁금해질 수밖에 없다. 이번 헤이그 발언 역시 역사전쟁의 역풍을 맞은 윤 정권이 국면 타개를 모색하는 과정에서 나왔다는 점에 주목하게 된다.

역사 퇴행 부각시킨 헤이그 방문

그런데 어떤 의도였든 간에, 이번 방문은 윤 정권의 역사 퇴행을 오히려 부각시킬 만한 일이다. 1907년에 벌어진 사건은 2023년에 벌어진 사건과 유사한 구조를 띠고 있다. 그래서 윤 정권이 만국평화회의를 강조하게 되면, 이 정권의 굴욕외교가 오히려 강조될 여지가 없지 않다.

일본은 강제징용 피해자들이 한국 법원에서 피해배상을 받지 못하게 영향력을 행사했다. 전범기업인 미쓰비시나 일본제철의 재산이 한국에도 있으므로, 한국 법원이 정상적인 결정만 내려도 피해자들이 조금이나마 한을 풀 수 있다. 일본 정부는 자신들이 직접 할 수 없으므로 윤 정권을 움직여 이에 제동을 걸고 있다. 또, 한국 정부가 전범기업의 책임을 떠안도록 유도했다.

강제징용 피해자들과 한국 국민들이 전범기업의 피해배상을 관철시키고자 하는 것은 잘못된 한일관계를 바로잡기 위해서다. 일제 식민지배는 무효이며 이에 기초한 노동자·위안부·군인 강제동원 역시 불법이라는 점을 확실히 하는 것이 일차적 목적이다.

이준·이상설·이위종과 호머 헐버트가 1907년에 네덜란드 헤이그를 찾아간 것 역시 잘못된 한일관계를 바로잡기 위해서였다. 1905년 11월 17일에 강요되고 18일 새벽에 서명된 을사늑약(을사보호조약·제2차 한일협약)이 무효이며 이에 기초한 일본의 한국 억압이 불법임을 국제사회에 알리기 위해서였다.

특사 중 한 명인 호머 헐버트는 1949년에 40년 만의 한국 방문을 성사시켰다가 도착 1주일 만인 그해 8월 5일 한국 땅에서 숨을 거뒀다. 고종황제가 영국왕 조지 5세에게 전달하라며 그에게 건넨 친서는 고종과 헐버트의 심정이 징용 피해자들과 크게 다르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헐버트 (Home B. Hulbert 1863~1949) 박사. ⓒ (사)헐버트 박사 기념사업회

 
김동진 헐버트박사기념사업회장 겸 서울과학종합대학원 겸임교수가 쓴 <파란눈의 한국혼 헐버트>에 따르면, 현대 한국어로 번역된 고종의 친서는 "대한제국은 1905년 11월 18일 일본의 불의로 맺어진 을사늑약이 사기임을 선언합니다"라며 대한제국 황제가 조약에 서명할 권한을 부여한 일이 없으며 대신들에 의해 조약이 서명된 내각회의는 불법이라고 강조했다.

고종은 무효·불법을 강조하며 사법적 해결을 모색했다. 위 친서는 "대한제국 정부가 일본의 침략주의를 헤이그 국제중재재판소에 제소함에 있어 귀국이 도움을 주시"기를 당부한다고 했다. 징용 피해자들이 법원의 도움을 받으려 하는 것처럼, 고종과 특사단 역시 국제 법원의 힘을 빌리고자 했던 것이다.

외교권을 빼앗기기는 했지만 아직은 독립국인 대한제국의 특사단은 일본의 주권이 미치지 않는 네덜란드까지 가서 만국평화회의에 호소하고 국제중재재판소의 도움을 기대했다. 징용 피해자들은 일본의 주권이 미치지 않는 한국 법원을 무대로 일본과 싸우고 있다.

이런 상황에 대해 일본은 외국 정부를 움직이는 방법으로 대처했다. 1907년에는 만국평화회의 의장국인 러시아 등을 움직였고, 2022년부터 금년까지는 윤석열 정부를 움직였다. 115년 간격으로 벌어지는데도, 이 두가지 사안에서 나타난 일본의 대처법은 매우 비슷하다. '자격'을 문제 삼으며 '파투'를 내려는 접근법이 공통적으로 나타났다.
 

네덜란드를 국빈 방문 중인 윤석열 대통령과 마르크 뤼터 네덜란드 총리가 13일(현지시간) 헤이그의 116년 전 만국평화회의가 열렸던 리더잘(기사의 전당)을 방문, 관계자로부터 설명을 듣고 있다. 2023.12.14 [공동취재] ⓒ 연합뉴스

 
1907년과 2023년

1899년 제1회에 이어 1907년에도 헤이그에서 열린 제2회 만국평화회의는 당초 예정보다 1년 연기된 행사였다. 김동진 회장의 책에 인용된 이태진 서울대 교수의 학술대회 발표문은 "원래 제2차 만국평화회의가 1906년 8월에 개최될 예정이었고, 이미 1905년 10월에 한국이 초청을 받았으나 일본이 한국이 초청된 사실을 알고 회의를 1년 연기하도록 배후에서 조종"했다고 설명한다.

을사늑약 직전에 대한제국이 초청을 받은 이 같은 상태를 흐지부지시킬 목적으로 일본이 채택한 전략은 '대한제국은 자격이 없다'는 점을 각인시키는 것이었다. 헤이그에 파견된 일본 대표단이 받은 본국 훈령에도 이것이 반영됐다.

2015년에 <한일관계사연구> 제51집에 수록된 한성민 대전대 강사의 논문 '제2회 헤이그 만국평화회의 특사에 대한 일본의 대응'은 <헤이그만국평화회의 일본외교문서>를 근거로 "이들에게 내려진 훈령의 첫 조항은 '한국이 제2회 평화회의에서 그것을 대표하지 못하도록 할 것'이었다"라고 설명한다.

일본은 외국 대표단을 상대로도 동일한 부탁을 했다. 위 논문은 "일본 대표단은 러시아와 네덜란드를 상대로 한국의 평화회의 참가 저지를 위한 외교적 노력을 전개하여 회의 개회 전날인 14일 러시아로부터 '한국은 결코 제2회 평화회의에 초청되지 않았음'을 확인받았다"고 기술한다.

대한제국도 초청을 받았고 정식 특사단이 헤이그에 파견됐는데도, 일본은 '한국은 참가 자격이 없다'는 논리를 밀어붙였다. '한국은 없다'를 강조하는 이런 전략은 오늘날의 일본 정부가 강제징용 및 위안부 피해자들을 상대하는 과정에서는 '일본은 없다'로 나타나고 있다.

일본은 강제징용과 관련해서는 전범기업과 자국 정부의 책임이 없음을 강조한다. 위안부 소송에 대해서는 '이 재판에 일본 국가는 없다'는 주장으로 대응한다. 주권국가는 타국 법정에 서지 않는다며 위안부 재판에 대해 '노쇼'로 일관한다.

2021년 1월 8일 이옥선 할머니 등을 비롯한 원고 12명이 서울중앙지방법원에서 승소 판결을 받자, 그날 스가 요시히데 총리는 "주권국가는 타국의 재판권에 복종하지 않는다"며 "이 소송은 각하돼야 한다"고 주장했다. 법정에 설 수 없는 주체를 피고로 세웠으므로 본안 심리 자체를 거부하는 각하 결정을 내려야 한다고 주장한 것이다.

일본은 외국 정부가 자국민에게 손해를 끼칠 때는 국가면제를 인정하지 않고 자국 법정에 세우는 '외국 등에 대한 우리나라의 민사재판권에 관한 법률'을 두고 있다. 그러면서도 위안부 피해자들이 제기한 소송에 대해서는 '일본은 없다'며 발뺌을 하고 있는 것이다.

1907년에 한국인들은 무효·불법을 내세우며 한일관계를 바로잡고자 했다. 지금의 징용·위안부 피해자들도 무효·불법을 호소하며 한일관계를 바로잡으려 하고 있다. 하지만, 그때나 지금이나 일본은 별반 다르지 않다. 1907년에는 '대한제국은 없다'는 전략으로, 오늘날에는 '일본은 없다'는 전략으로 맞서고 있다. 그리고 오늘날의 일본에 대해 윤 정부는 상당한 조력을 제공하고 있다.

이처럼 1907년 헤이그에서 벌어진 일은 지금의 한일관계에서 벌어지는 일과 비슷한 측면들이 있다. 이 상황에 대해 윤석열 정부는 깊이 연루돼 있다. 대통령실은 "대한민국 대통령으로서 최초 방문"이라며 리더잘 및 이준열사기념관 방문을 홍보하고 있지만, 이는 일본의 파렴치한 행태에 대한 윤 정권의 조력 제공을 부각시킬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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