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방송된 KBS 2TV 드라마 <고려 거란 전쟁>은 1010년 전후 거란족 요나라의 침략을 막아내는 과정을 묘사하고 있다. 드라마 속의 고려인들은 '중과부적'(적은 수로 많은 적과 싸울 수 없다는 뜻의 사자성어)이라는 말이 무색할 정도로 40만 거란대군에 용감히 맞서 싸우고 있다.
 
고려와 거란이 전쟁을 벌일 당시의 중국 왕조는 송나라다. 이 나라 역사를 기술한 <송사>의 고려열전은 고려 인구를 '남녀 이백십만 명'으로 집계했다. 1010년보다 훨씬 이후의 상황을 기술하는 대목에서 이 수치가 나왔으므로, 이에 따르면 1010년 전후에는 고려 인구가 이보다 적었다는 말이 된다.
 
고대의 인구통계가 불완전하기는 하지만, 중요한 것은 11세기 고려 인구가 그 정도 규모로 인식됐다는 점이다. 그런 인식이 존재하는 상황에서 40만 대군이 고려를 침입했다. 고려인들이 볼 때, 이 숫자는 자국 인구의 5분의 1에 육박하는 것이었다.

거란 대군 40만은 그 정도로 경악스러운 규모였다. <고려 거란 전쟁> 속의 백성들이 보여주는 공포감은 실제의 공포감보다 훨씬 낮다고 볼 수밖에 없다. 그런 극한의 공포감 속에서도 고려인들은 용감하게 싸웠다. 군인들뿐 아니라 승려들까지 무기를 집어들고 전장으로 뛰어나갔다.

승려들의 활약상
 
 KBS2 <고려 거란 전쟁> 11화 관련 이미지.

KBS2 <고려 거란 전쟁> 11화 관련 이미지. ⓒ KBS2

 
이런 모습이 지난 16일 방송된 <고려 거란 전쟁> 제11회의 14분경에 잠시 묘사됐다. 길거리에 모인 백성들이 "힘을 모아 싸웁시다!", "황제를 위하여 싸웁시다!"라고 외치는 장면에 뒤이어, 불상의 모습과 함께 승려들이 무기를 분배받는 장면이 나왔다. 연로한 스님은 기도를 올리고 승려들은 무기를 들고 떼를 지어 몰려나갔다.
 
이 장면을 연상케 하는 역사 기록이 <고려사>의 축약판 겸 보충판인 <고려사절요>에 나온다. <고려 거란 전쟁>에 등장하는 지채문 장군(한재영 분)과 탁사정 장군(조상기 분)이 <고려사절요> 현종 편에 등장한다.
 
이 책은 음력으로 현종 1년 12월 12일(1011년 1월 18일)에 있었던 지채문의 활동을 서술하는 대목에서 "병진일에 마침내 사정 및 승려 법언과 함께 병력 9천을 인솔하고 임원역 남쪽에서 맞서 싸워 3천여 급을 참수했다"라며 "법언은 죽었다"라고 기술한다.
 
지채문이 탁사정 및 법언과 함께 9천 병력을 거느리고 서경 임원역에서 거란군 3천 명을 전사시켰다고 했다. 승려 법언이 두 명의 관군 장수와 대등하게 나열된 것은 법언 역시 지휘관이었기 때문이다. 이는 9천 병력 중 상당부분이 법언 휘하의 승군이었음을 추론케 한다.
 
승려들의 활약상은 이 정도에 국한되지 않았다. 사찰이 아닌 민가에 거주하는 이른바 재가화상(在家和尙)들도 거란과의 전투에 뛰어들었다. 1123년에 송나라 사신단의 일원으로 고려를 방문한 서긍은 <고려도경>이라는 보고서에서 "이전에 거란이 고려에 패배한 것도 바로 이들 때문"이라고 말했다. 3차례에 걸친 요나라의 침공이 무위로 끝난 데는 승군의 역할도 컸던 것이다.
 
국방 문제를 다루는 <고려사> 병지(兵志)는 제15대 주상인 숙종(재위 1095~1105) 때의 일을 설명하는 부분에서, 국가가 군대를 동원할 때마다 사찰 승려들을 징발하여 정부군에 편입시켰다고 설명한다. 평소에는 승려로, 전시에는 군인으로 자동 변신하게 만드는 시스템이 마련됐던 것이다. 군대 가기 싫어 사찰로 도망가는 일이 용이하지 않았으리라는 생각을 갖게 만드는 사례다.

역사학자 신채호는 <조선상고사>에서 재가화상을 고구려판 화랑인 조의선인과 함께 서술한 뒤 "신수두 제단을 지키는 흑의 무사"에서 승군이 기원했다고 설명한다. 흑색 복장을 하고 고조선의 최고 제단인 수두(소도)를 지키던 무사들이 승군의 초창기 모습이라는 설명이다.
 
이런 전통은 영화 <노량: 죽음의 바다>의 배경인 임진왜란 때도 이어졌다. 이순신과 권율 같은 관군 사령관뿐 아니라 사명대사나 서산대사 같은 승병장들도 있었기에, 조선은 이 전쟁에서 국토를 지킬 수 있었다.

승군의 전통
 
 KBS2 <고려 거란 전쟁> 11화 관련 이미지.

KBS2 <고려 거란 전쟁> 11화 관련 이미지. ⓒ KBS2

 
고조선 시대에는 국선도(신선교)에 속하고 고려나 조선시대에는 불교에 속했다는 외형상 차이가 있기는 하지만, 평소에는 수행자로 살다가 비상시에 전사가 되는 승군의 본질은 고조선시대나 조선시대나 별반 다를 바 없었다. 20세기 한국 종교들이 항일투쟁과 민주화투쟁에 기여한 것처럼 그 이전의 종교인들은 일본·중국·유목민들로부터 민족을 지키는 일에 스스로를 아낌없이 헌신했다.
 
승군의 전통이 이처럼 오래 이어진 데는 한국사 시간에 등장하는 역사 용어와도 관련이 깊다. 불교나 토지제도와 관련해 자주 나오는 고려시대 사원전(寺院田)이 그것이다.
 
사찰이 보유한 노비와 토지는 사찰이 과도한 정치적 영향력을 갖게 만드는 부작용을 낳았다. 동시에, 이는 거란족 같은 이민족이 침입할 때마다 사찰이 강력하고 안정적인 의병 활동을 하는 밑바탕이 됐다. 조선시대 의병장들이 주로 지주가문 출신이었던 데서도 느낄 수 있듯이, 사찰이 경제력을 매개로 행사하는 사회적 영향력은 비상시에 승군이 신속히 가동되게 하는 데에 기여했다.
 
2002년에 <한국중세사연구> 제13호에 실린 구산우 창원대 강사의 논문 '고려시기의 촌락과 사원'은 1980년에 나온 강진철의 연구성과를 기초로 "고려 말 사원전은 약 10만 결에 이르는 것으로 추정되는데, 이는 전국 토지의 1/6에 이르는 막대한 규모"라고 기술했다. 수행에 전념해야 할 종교가 이처럼 과다한 재산을 보유한 것은 옳지 않지만, 이것이 바탕이 되어 비상시에 승군 조직이 가동됐다는 점도 부인할 수 없다.
 
위의 <고려사> 병지에 따르면, 숙종 때 정부군에 편입된 승군은 항마(降魔)군으로도 불렸다. 이런 데서도 느낄 수 있듯이, 거란족 같은 외적이 침입하면 종교인들은 마귀를 퇴치한다는 심정으로 무기를 들고 전장으로 뛰어나갔다. 그래서 그것은 민족적 열정인 동시에 종교적 열정이었다.
 
거란족 같은 이민족 병사들의 입장에서 보면, 종교적 열정을 갖고 달려드는 그들의 모습이 섬뜩했을 수도 있다. 군복도 제대로 갖추지 않고 머리에 투구도 쓰지 않은 사람들이었다. 그런 사람들이 자신들을 마귀처럼 대하면서 목숨도 돌아보지 않고 마구 싸움을 걸어오면, 기존의 전투 문법에 익숙한 이민족 병사들은 당황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런 종교인들이 어쩌다 한두 번 나타난 게 아니라 이민족이 침략할 때마다 나타나 임무를 수행한 뒤 퇴장했다. 고려가 동아시아 최강 거란족의 침략을 번번이 막아낸 데는 이것이 커다란 동력으로 작용했다. 드라마 <고려 거란 전쟁>이 관군의 역할만 지나치게 조명하는 게 아쉬운 이유다. 
고려거란전쟁 여요전쟁 승군 승병 재가화상
댓글4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kimjongsung.com.일제청산연구소 연구위원,제15회 임종국상.유튜브 시사와역사 채널.저서:대논쟁 한국사,반일종족주의 무엇이 문제인가,조선상고사,나는 세종이다,역사추리 조선사,당쟁의 한국사,왜 미국은 북한을 이기지못하나,발해고(4권본),패권쟁탈의 한국사,한국 중국 일본 그들의 교과서가 가르치지 않는 역사,조선노비들,왕의여자 등.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