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년 명절때마다 일가친척이 모여서 함께 조상에게 제사를 지내는 모습은 전통적인 한국 사회에서 익숙한 풍경이었다. 특히, 여성들이 제사 준비와 명절 스트레스로 고통받으며 시댁에서 갈등을 빚는 모습은, 지금까지도 시집살이와 가부장제의 모순을 대표하는 상징적인 장면으로 여겨진다.
 
이러한 전통적 관습들은 모두 '유교 문화'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 유교가 한국사에서 가장 큰 영향력을 가지게 된 것은 조선 시대부터다. 조선은 왜 수많은 사상 중에서 하필 유교를 국가 이념으로 정했을까. 지금까지도 이어지고 있는 유교 이데올로기는 한국의 역사와 한국인의 가치관에 어떤 영향을 미쳤을까.
 
12월 20일 방송된 tvN 스토리 역사 강연 <벌거벗은 한국사> 87회에서는 조상제사와 시집살이의 놀라운 기원, 조선은 어떻게 유교의 나라가 되었나'편을 통하여 오늘날의 한국 사회에 큰 영향을 미친 유교의 역사를 조명했다.
 
유교(儒敎)는 고대 동아시아에서 태동한 철학사상의 일종으로, 중국 춘추전국시대의 사상가 공자(孔子, 기원전 551-479)에 의하여 체계화하고 설파되면서 불교-도교와 함께 동양철학을 대표하는 삼교의 하노 자리매김했다. 본래는 유학(儒學)이라 하여 인간과 사회의 심리, 도덕, 정의 등을 논하는 학문적인 의미가 강했으나, 후대에 이르러 공자를 성인으로 숭상하게 되면서 종교적 의미가 강화된 유교로 변화했다.
 
공자는 왜 유학을 만들었을까. 공자가 살아가던 춘추전국시대(春秋戰國時代, 기원전 770-221)는 전란의 시대로 백성들은 고통받고 도덕과 정치가 모두 무너진 혼란의 시대였다. 공자는 난세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질서의 회복이 시급하다고 생각했고, 윤리에서 정치까지 아우르는 보편적인 철학을 연구했다. 공자 이후 수많은 제자들이 그 뜻을 이어나가면서 유교는 중국의 중심 사상이 된다.
 
시간이 흘러 유교는 한반도에도 전파된다. 유교가 한국사에 영향을 미치기 시작한 것은 삼국시대(기원후 약 3세기-676년)부터지만, 당시에는 일부 귀족계층만이 배우는 고급 학문 정도였다. 고려 시대까지만 해도 한국인의 생활방식과 가치관은 민간 전통 관습과 불교식 생활양식이 주류를 이루고 있었다.
 
그런데 고려 후기인 13-14세기에 접어들면서 신유학(新儒學)이 등장하여 당시 사회에 새로운 바람을 일으킨다. 당시 고려는 원 간섭기를 거치면서 외세의 잦은 침략과 부패한 정치, 기득권화된 불교의 타락으로 극심한 혼란에 빠져있었다. 지식인 사회에서도 변화와 개혁의 필요성을 절감하는 인식이 만연해 있었다.
 
당시 고려의 유학파 지식인 계층을 통하여 전파된 신유학의 사조가 바로 성리학(性理學, 혹은 주자학)이다. 공자의 유학을 계승한 학파들은 그 해석에 따라 훈고학(訓詁學), 양명학(陽明學)등으로 나뉘게 되며, 남송 시대의 철학자 주자(朱熹)가 창시한 성리학은 당시 사회적 모순을 지적하고 불교와 도교의 폐단을 극복하려는 학문으로 등장했다. 훗날의 보수적인 이미지와 달리, 여말선초 시대의 성리학은 당대의 현실을 반영한 최신 학문이자 실천적 사상에 더 가까웠다.
 
성리학 사상을 바탕으로 부패하고 낡은 고려를 바꾸어야 한다고 주장하고 나선 세력이 신진사대부(新進士大夫)들이다. 이들은 다시 고려라는 체제내에서의 변혁을 주장하던 온건개혁파와, 왕조 교체를 주장하는 급진개혁파로 나뉘게 된다. 정도전으로 대표되는 급진개혁파가 이성계라는 신흥무인세력과 손을 잡고 건국한 나라가 바로 조선이다.
 
조선은 성리학적 이상국가의 건설을 목표로 '유교의 나라'를 건국 이념으로 표방했다. 하지만 복잡하고 심오했던 성리학 이념을 백성들에게 이해시키고 실생활에 접목시키는 일은 결코 쉽지않았다. 더구나 조선의 창업 과정에서 벌어진 피의 역사는 조선 건국 세력이 강조하려던 유교적 이념과는 정면으로 모순되는 것이기도 했다.
 
조선 유교가 강조하는 핵심 덕목은 의(義) 혹은 의리(義理)라고 할 수 있다. 말 그대로 사람으로 지켜야할 바른 도리를 의미한다. 임금에 대한 충성(忠)과 부모에 대한 효도(孝)라는 가치도 곧 의리에서 파생된 하위 개념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이러한 유교적 이념에서 평가하자면 조선 건국 세력의 행보에는 수많은 모순이 발생하게 된다. 이성계와 신진사대부는 고려에 대한 충성을 배신했다는 점에서 왕조 교체의 당위성에 큰 흠집을 남겼다. 더구나 건국한지 6년만에 태종 이방원이 '왕자의 난(1398)'을 일으켜 아버지 이성계를 몰아내고 이복형제들을 죽이며 집권하는 사태까지 벌어지며 충효의 개념마저 무너지게 된다.

아이러니하게도 자신들은 의리를 배반하며 집권했던 세력들은, 이후 조선의 안정화를 위하여 다시 의리를 필요로 하게 된다. '최후의 승자'가 된 태종은 더 이상의 반란과 혼란을 막기 위하여 누구보다 유교적 이념을 확립하여 엄격한 통치 질서를 강화하려고 했다.
 
1403년 태종은 오늘날의 유교식 예법 가이드북이자 관혼상제와 일상생활에서의 예절을 설명하는 가례(家禮)를 전국에 배포하며 본격적으로 유교 이념의 보급에 나섰다. 가례는 통례(通禮,일반 예절), 관례(冠禮, 성인식), 혼례(婚禮, 결혼식), 상례(喪禮, 장례식), 장례(葬禮, 제사) 등으로 나뉘어 보통 사람들이 살면서 한번씩은 꼭 마주치게 되는 행사를 통하여 인간의 예절과 도리를 담아냈다.
 
가례는 엄격한 가부장제나 남녀차별, 나이와 항렬에 따른 서열화 등 자유와 평등을 강조하는 현 시대의 가치관으로는 맞지않는 부분이 많지만 당시에는 국가적으로 장려했던 예법이었다. 태종은 사대부들이 먼저 가례를 잘 실천하여 모범을 보이면 평민들에게도 자연스럽게 유교적 이념이 잘 전해지리라고 생각했다.
 
세종 시대에는 전주에서 김화라는 인물이 아버지를 살해하는 패륜 범죄를 저질러 능지처참되는 사건이 발생한다. 이를 계기로 세종은 효라는 개념을 백성들에게 더 널리 전파하기 위하여 1434년 윤리교훈서인 삼강행실도(三綱行實圖)를 편찬한다.

이 책에는 우리 나라와 중국에서 충신, 효자, 열녀 100여명의 사례를 기록했다. 여기서 삼강(세 가지 강령)은 군위신강(君爲臣綱, 군주와 신하), 부위자강(父爲子綱, 부모와 자식), 부위부강(夫爲婦綱)으로 충과 효, 그리고 정절을 모든 백성들이 지켜할 도리로 강조했다. 세종은 백성들의 이해를 돕기 위하여 삼강행실도를 지방에 보급하면서 글만이 아니라 그림을 그려서 설명하도록 했다.
 
이처럼 오늘날까지도 우리에게 당연하게 여겨지는 효의 개념은, 알고보면 지속적인 사상 교육의 산물인 것이다. 물론 이전도 효도라는 덕목은 존재했지만 유교화되기 이전까지는 체계적인 교육은 없었고 부모학대같은 패륜범죄에 대한 사회적 인식도 부족했다.
 
또한 조선 왕실은 책을 보급하는데서 그치지 않고 집집마다 가묘(家廟)를 의무적으로 짓게 하여 조상을 섬기는 제사(祭祀) 문화를 정착시키는데 힘썼다. 효경(孝經)에 따르면 '효란, 하늘의 불변의 기준이요, 땅의 떳떳함'이라고 설명할만큼, 유학에서는 효의 가치를 우주의 원리로 승화시킬 정도로 중시했다. 선조에게 효를 구현하는 방식이 제사였고, 곧 제사란 유교를 대표하는 핵심의식으로 자리잡았다.
 
또한 당시 조선 시대 사람들의 인식에서 세상의 중심은 중국이었다. 유교 역시 중국에서 전파된 것이었다. 중국에 사대하던 조선 사람들은 문화적으로 강대국인 중국의 예법을 따르는 것이 문명화라고 생각했다. 유교식 제사를 강조한 것은 조선 시대의 기준으로서는 그들 나람의 '국제화'수단 이기도 했다.

하지만 고려 시대까지만 해도 절에 위패를 모시던 불교식 문화에 익숙해있던 사람들에게 가묘와 유교식 제사를 강요하는 일은 쉽지 않았다. 심지어 사대부들도 난색을 표시했다. 실록에는 제사를 제대로 지내지 않는 이들을 적발하여 처벌해야 한다는 논의도 기록되었을 정도였다. 오늘날 우려에게 알려진 유교식 전통 제사 문화가 정착된 것은 무려 200여년이나 지난 조선 중기 무렵이 되어서부터였다.
 
조선 초중기까지만해도 딸과 아들이 돌아가며 친가와 외가 제사를 번갈아 지내는 경우도 흔했다. 하지만 조선 중기에 양난(임진왜란-병자호란)을 거치고 유교가 점차 교조화(敎條化)되기 시작하면서 종법(宗法)에 따라 족보에서 제사에 참석할 인원은 남성 집안의 8촌까지로 정리되었고, 철저히 남성(맏아들)이 제사를 주관하게 었다. 17세기 중반 이후에 접어든 조선은 가부장제와 남녀차별로 대표되는 철저한 '부계 중심의 질서'가 엄격히 뿌리를 내리게 된다.
 
시간이 흐르면서 유교의 변질과 함께 제사 문화도 달라지기 시작했다. 17세기 초까지는 주자가례에서 제시한 제사상 가이드는 참고용일뿐 절대적인 것은 아니었다. 사대부 사이에서 가례 규정을 절대화하는 문화가 형성되면서 제사도 형식에 집착하는 분위기가 강해졌고 이는 집안이 어려워도 제사상은 챙기겠다는 왜곡된 인식으로 나타났다. 한편으로 제사의 의미를 조상을 모시는 효의 방식이 아니라, 자신과 집안의 과시를 위한 수단으로 변질되어 버렸다.
 
조선 후기에 이르면 신분제 질서가 흔들리면서 새롭게 떠오른 중인 계급들을 중심으로 양반의 생활과 호려한 제사를 모방하는 현상가지 만연하기 시작한다. 정작 예법의 원작자이자 조선 사대부들이 그토록 숭상했던 주자 본인은 '제사는 공경하고 사랑하는 마음을 다하는 것만이 중요할 뿐이다'라고 이야기했던 것을 감안하면 아이러니하다.
 
또한 조선의 유교화 과정에서 빼놓을 수 없는 변화는 여성의 가정 내 지위다. 상대적으로 여성의 지위가 높았던 고려와 달리, 조선은 여성에게 '며느리로서의 역할'을 강조했다. 오늘날 우리에게 기혼 여성을 가리키는 보편적인 의미로 쓰이는 주부(主婦)라는 말은 조선시대에는 살림살이를 맡아 꾸려가는 안주인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

조선 시대의 가정에서 시어머니는 경제권을 가진 주부로 집안살림을 통솔하는 권한을 가지고 있었다. 며느리는 집안의 경제적 권력자인 시어머니를 따르고 본받는 것이 당연한 의무로 여겨졌다. 혹독한 시집살이는 주부로 인정받아 경제권을 물려받을 자격을 인정받기까지 필수적인 과정으로 여겨졌다.
 
시간이 흘러 며느리가 아들을 출산하거나 시어머니가 나이가 들면 경제권을 자연히 며느리에게 물려주게 된다. 시어머니가 안방을 며느리에게 준다는 것(안방물림)은 집안의 주부권이 교체된다는 상징적인 의미가 있다. 조선시대에 양반가의 부인을 '안방마님'이라고 칭하게 된 이유다.
 
물론 조선시대에도 시집살이가 항상 통했던 것은 아니다. 사대부가의 일기 등을 보면 기센 며느리가 남편이니 시어머니를 구타하고 욕을 했다는 기록들도 존재한다. 아이러니하게도 엄격한 가부장적인 분위기에 갇힌 조선 사회였던만큼 집안의 체면을 고려하여 며느리의 폭력을 차마 털어놓지 못하던 사례도 있었던 것이다.

상속 문화도 유교적 이념의 영향을 받은 시대에 따라 변화했다. 고려시대에서 조선 초중기까지는 아들과 딸의 구분없는 공평한 유산상속이 이루어졌다. 그러나 조선 중기에 접어들면서 제사를 주관해야하는 맏아들을 중심으로 남녀의 재산 분배 차이가 발생하게 된다.
 
대한민국이 건국된 이후에도 초창기에는 조선 시대부터 이어져온 장자 중심의 상속권이 지켜져왔다. 하지만 이후 다시 몇차례의 민법 개정(1991년-현재)을 거치며 오늘날에는 딸들도 결혼 여부와 상관없이 재산을 공평하게 상속받을 수 있게 될만큼 변화했다.
 
이처럼 유교식 예법들은 아직도 여전히 전통으로 우리 사회 곳곳에 남아있지만, 자유와 인권, 평등을 강조하는 민주주의 사회로 접어들며 낡은 질서들은 시대에 맞게 대체되었다. 2005년에 호주제(戶主制)가 폐지된 것은 한국 사회에서 양성 평등의 진화를 보여주는 상징적인 사건으로 평가받는다.
 
전통이란 결국 시대의 흐름에 따라 변화하는 것이다. 누군가의 일방적인 희생으로 강요되는 전통은 폭력과 다르지 않다. 지키고 싶은 전통이라면 본인이 먼저 지키면 되는 것이다. 

현대까지도 명절을 중심으로 이어지고 있는 유교식 전통 제사 문화는 가족과 남녀 갈등의 원인이 되고 있다. 예법이나 제사의 본래 취지는 망각한채 허례허식과 고정관념에만 집착한다면 그것이 과연 지키고 계승해야할 미풍양속(美風良俗)이라고 부를 수 있을지 고민이 필요한 시점이다.
벌거벗은한국사 조선 유교 주자가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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