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BS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의 한 장면.

SBS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의 한 장면. ⓒ SBS

 
'일본군 위안부'는 과거 일본이 식민지 및 점령지의 여성을 대상으로 한 강제납치와 인신매매, 전시강간 등의 성범죄 행위로 운영된 제도로서 일본 제국주의의 대표적인 전쟁범죄 중 하나다. 특히 한국인 일본군 위안부 문제는 지금까지도 한일관계에서 오랫동안 해결되지 못한 역사적 과제로 남아있다.

그리고 식민지에서 여성으로 태어났다는 죄로 인하여 어린 나이에 멀리 이국땅까지 끌려가 온갖 고초를 겪어야 했던 한 여인의 비극적인 이야기는 지금 우리에게 깊은 울림을 남긴다.
 
12월 28일 방송된 SBS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에서는 '오지 할머니의 비밀'편을 통하여 55년 만에 캄보디아에서 한국으로 돌아온 한 할머니의 안타까운 사연을 전했다.
 
캄보디아에서 만난 '한국 할머니'

1996년 사업가 황기연씨는 업무차 캄보디아의 오지를 방문했다가 우연히 히치하이킹을 하던 싯나라는 여성을 만났다. 두 사람은 대화를 나누던 중 싯나가 자신의 할머니도 한국인이라고 밝혔다. 그때만해도 두 사람은 이 인연이 훗날 어떤 나비효과로 이어질지 전혀 상상도 하지 못했다.
 
얼마 후 기연씨는 동업자 이광준씨와 함께 친분이 생긴 싯나와 할머니인 훈씨를 만났다. 그런데 훈 할머니는 까무잡잡한 피부에 짧게 자른 머리, 두꺼운 안경에 큰 눈까지 누가 봐도 전형적인 캄보디아 토박이같은 외모를 지니고 있었고 정작 한국어는 한마디로 하지 못했다. 하지만 훈 할머니는 자신이 한국인이라 계속해서 주장했다.
 
의구심이 말끔히 풀리지는 않았지만 그럼에도 인연이라 생각한 기연씨와 광준씨는 싯나에게 두 사람의 가사도우미 자리를 제안했다. 그리고 얼마 후 두 사람은 일상적인 집안일을 하는 싯나의 모습에서 동남아인들과는 다른 전형적인 한국인들만의 생활 습관들을 발견하고 놀랐다. 싯나는 집안일을 가르쳐준 사람이 훈 할머니라고 밝혔다.
 
이에 기연씨와 광준씨는 다시 한번 훈 할머니를 만났다. 그녀는 여전히 진짜 한국인이 맞다고 주장했다. 성은 기억이 나지 않지만 이름은 나미, 고향은 진동이라고 서툰 한국어로 고백한 할머니는 마지막 소원으로 "죽기 전에 한국에 가서 가족을 꼭 한 번 만나고 싶다. 나를 좀 도와달라"고 간곡하게 호소했다.
 
훈 할머니가 정말 한국인이라면 어쩌다가 머나먼 캄보디아까지 오게 된 것일까. 기연씨 일행은 할머니가 17~18살 때이자 일제강점기인 1942경에 고향을 떠나 캄보디아로 오게 되었다는 정보를 바탕으로 그녀가 혹시 일본군 위안부 강제동원과 관계된 것은 아닌지 추측했다. 기연씨 일행이 조심스럽게 질문하자 할머니는 눈물을 흘리며 처음으로 그동안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 했던 자신이 살아온 여정을 고백하기 시작했다.
 
 SBS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의 한 장면.

SBS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의 한 장면. ⓒ SBS

 
2차세계대전 당시 일본은 자신들이 점령한 아시아 태평양 곳곳에 위안소를 설치했고 식민지와 점령지의 여성들을 강제로 데려왔다. 한반도에서 이동이 용이한 부산항과 인접한 경상도 일대에서 다수의 여성들이 위안부로 끌려왔고, 훈 할머니도 그들중 한 명이었다.
 
기연씨 일행은 대화를 나누면서 훈 할머니가 그녀가 한국인이고 위안부 피해자라는 확신을 가지게 됐다. 그녀는 해방된 지 50년이 지났는데도 아직 고국에 돌아오지 못하고, 캄보디아 오지에 잊혀진 채로 남게 된 것.
 
기연씨 일행은 이 사연을 한국인 법무부와 외교부에 전했다. 그러나 관계 부처들은 처음에는 할머니가 한국인이라는 증거가 없다며 곤란하고 귀찮다는 반응으로 일관했다. 이에 기연씨 일행은 포기하지 않고 캄보디아 언론에 할머니 사연을 제보했다. 기사가 보도되면서 비로소 캄보디아는 물론이고 한국 언론에도 큰 이슈가 됐고 뜨거운 취재경쟁이 시작됐다.
 
하지만 수많은 제보와 취재에도 불구하고 훈 할머니의 고향과 진짜 가족은 좀처럼 찾을 수 없었다. 할머니도 어린 시절의 기억을 되찾지 못했다. 시간이 흐르면서 여론의 관심은 서서히 식었고 오히려 할머니에 대한 불신과 의구심을 드러내는 시선도 생겨나기 시작했다. 심지어 할머니가 위안부 피해자라고 밝힌 이유가 정부 지원금을 받으려는 속셈이 아니냐는 의혹까지 제기됐다.
 
그럼에도 할머니는 "누가 뭐라 해도 난 한국인이다. 믿어주지 않는다면 어쩔 수 없다. 살아서 고향 땅을 한 번 밟고 싶다는 것 외에 바라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라고 호소했다.
 
훈 할머니 이야기
 
 SBS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의 한 장면.

SBS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의 한 장면. ⓒ SBS

 
훈 할머니는 정말로 모든 기억을 잃은 것일까. 의혹이 계속되던 가운데 또다른 위안부 피해자 김복동 할머니가 나서서 훈 할머니를 만났다. 김복동 할머니는 1993년 UN인권 위원회에서 위안부 피해 사실을 최초로 증언한 인물이었다. 동병상련의 아픔을 겪었던 김복동 할머니와의 만남에 훈 할머니는 말없이 눈물만 흘렸다.
 
훈 할머니는 그동안 말로 자신이 겪은 일을 직접 이야기하지는 않았지만 그녀를 면담했던 연구원은 짧은 증언 속에서도 드러나는 '몸의 언어'에 주목했다. 위안부 할머니들이 피해 사실을 증언할 때 공통점은 정말로 끔찍하게 몸서리치는 표정과 몸짓이었고, 그것도 절대로 꾸며낼 수 없는 고통의 흔적들이라고 한다. 훈 할머니가 보인 반응 역시 위안부 할머니들의 피해 사실 증언 시 나타나는 특징과 동일했다고 한다.
 
할머니는 천천히 조금씩 자신의 이야기를 시작했다. 당시 일본군이 어느날 찾아와 이유도 알려주지 않고 자신과 비슷한 여성들을 부산항으로 끌고 가 배에 태웠다. 조선 여자들이 도착한 곳은 점령지인 싱가포르의 일본군 위안소였다.
 
일본군은 할머니에게 '하나코'라는 일본식 이름을 붙여주었고 매일같이 찾아와 끔찍한 성폭력을 저질렀다. 견디다 못한 할머니는 몇 차례나 탈출을 시도했지만 그때마다 붙잡혔다. 그녀는 일본군이 이동하는 곳마다 따라다녀야 했고, 베트남을 거쳐 캄보디아까지 도착했다. 할머니는 그 과정에서 일본군의 온갖 성범죄와 폭력에 시달리며 몸에 흉터가 남는 등 고통을 당해야 했다.
 
1945년, 캄보디아에서 훈 할머니는 다다쿠마 쓰토무라는 일본군 장교를 만난다. 그는 캄보디아 국왕 경비대를 훈련시키는 책임자였다. 다른 일본군과 달리 다다쿠마는 할머니를 젠틀하게 대하여 반지까지 선물할 만큼 애정을 표현했다고 한다.
 
일본이 2차대전에서 패망하면서 일본군은 점령지를 버리고 떠나야 했다. 곳곳에서 일본군들은 위안부를 살해하거나 전쟁터에 방치하고 떠나기 일쑤였다. 훈 할머니가 있던 캄보디아는 프랑스군이 점령했고 다행히 한 단체에서 조선인의 본국 송환을 추진했다.

한국으로 돌아가려는 훈 할머니를 붙잡은 것은 다다쿠마였다. 그는 자신이 캄보디아에 머물며 계속 싸울 것이라며 훈 할머니에게 곁에 있어 달라고 애원했다.
 
훈 할머니는 다다쿠마의 말을 믿고 한국 귀환을 포기하고 캄보디아에 남았다. 두 사람은 프랑스군의 눈을 피하여 캄보디아의 밀림에 숨었고, 할머니는 이때부터 훈이라는 캄보디아식 이름도 얻었다. 이듬해 그녀는 다다쿠마의 딸인 카오를 낳았다. 손녀인 싯나는 바로 카오의 딸이었다. 훈 할머니는 연고도 없는 캄보디아의 오지에서 어린 딸을 데리고 그 오랜 시간을 숨어 지내야 했다.
 
훈 할머니는 어린 딸을 키우며 다다쿠마가 돌아오기를 기다렸다. 하지만 다다쿠마는 몇 년 뒤 훈 할머니를 배신하고 또다른 중국인 부인과 결혼을 하여 새로운 가정을 꾸렸다. 그는 프랑스의 식민 통치가 끝난 후 훈 할머니와 카오를 버려두고 일본으로 돌아가버렸다.

그렇게 할머니는 아는 사람 하나 없는 캄보디아에 딸과 둘만 남겨진 채로 버려졌다. 할머니는 살아 남기 위해 모국어도 버리고 조국과 기억까지 잃어버리고 캄보디아인으로 살아가야만 했던 것이다.
 
다다쿠마는 훈 할머니가 한국인 위안부 피해자라는 걸 증명해줄 수 있는 유일한 인물이었다. 그는 일본으로 돌아간 후 출세하여 자국 의회에서 아시아태평양 연합의원의 일본 사무국장까지 지내고 있었다. 그는 취재진의 등장에 당황했고 딸의 존재도 부정했지만, 마지막 일말의 양심은 있었는지 훈 할머니를 아예 모른척하지는 않았다.
 
다행히 다다쿠마의 증언으로 훈 할머니가 한국인 위안부 피해 사실은 확실하게 증명될 수 있었다. 비로소 모든 의혹을 벗은 할머니는 1997년 8월 드디어 한국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할머니는 자신의 한국 본명을 한글로 직접 작성하여 "내 이름은 나미입니다. 혈육과 고향을 찾아주세요"라는 직접 한글로 쓴 종이 한 장을 꺼내 보였고, '아리랑'을 부르며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SBS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의 한 장면.

SBS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의 한 장면. ⓒ SBS

 
할머니는 고향인 진동과 가족들의 행방을 찾아나섰다. 할머니의 이야기를 취재하던 지역 신문 사회부의 김주완 기자는, 그녀의 부친이 과거에 엿을 만들어 팔았다는 증언을 토대로 마산시 진동면 일대를 끈질기게 탐문취재한 끝에 할머니의 고향과 호적, 생가를 마침내 찾아냈다.
 
훈 할머니의 본명은 바로 '이남이' 1남 3녀 중 행방불명된 둘째딸이었다. 김 기자는 이제 가족들을 수소문했다. 안타깝게도 부모님과 언니는 돌아가시고 유독 둘째 누나를 따랐던 남동생도 끝까지 누나를 찾기 위해 노력하다 불과 5년 전 세상을 떠나 안타까움을 자아냈다.
 
당시 유일하게 여동생 이순이씨만이 살아있었다. 시골에 거주하느라 소식을 전혀 듣지 못하여 연락조차 하지 못했던 순이 할머니지만, 핏줄에 끌리는 본능처럼 할머니의 사진을 보자마자 곧바로 친언니임을 알아봤다고 한다. 유전자 검사 결과 두 사람이 친자매가 맞다는 사실이 최종 확인되었고, 두 할머니는 서로 부둥켜안고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
 
17살의 소녀는 일흔이 넘은 할머니가 되어 고향과 가족의 품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정식으로 주민등록증을 받고 이름을 되찾은 이남이 할머니는 영구 귀국을 결정했다. 당시 할머니는 누구보다 행복해했다고 한다.
 
하지만 정작 한국으로 돌아온 이후에는 마음과 달리 생활이 쉽지 않았다고 한다. 언어 문제로 의사소통이 어려웠고, 캄보디아에 두고 온 가족들에 대한 향수도 갈수록 깊어졌다. 결국 할머니는 다시 캄보디아로 돌아갔고 그곳에서 2001년 2월 15일에 세상을 떠났다.
 
이남이 할머니는 생전에 다음 생이 있다면 "쥐띠 남자로 한국에서 태어나고 싶다"는 말을 남겼다고 한다. 남자로 태어나 다시는 그런 끔찍한 일을 겪고 싶지 않다는 할머니의 소박한 바람이 아니었을까.
 
하나코, 훈, 남이. 여러 가지의 이름을 지니고 살아야했던 그녀는 비록 시대의 비극에 휘말려 모국의 언어와 평범한 삶까지 빼앗겨야 했지만, 평생토록 그 고운 성품은 잃지 않았다고 한다. 그녀를 기억하는 이들은 모두 남이 할머니가 누구보다 정이 많고 가족에 대한 사랑이 깊었던 사람이라고 회상했다.
 
일본군 위안부 문제는 해방 후에도 한참동안 잘 알려지지 않았다가 용기를 내 세상 밖으로 나와 증언해준 할머니들 덕분에 해방 50년이 되어서야 알려지기 시작했다. 이남이 할머니 사연 덕에 세계적으로 더 많은 사람들이 위안부 문제를 인식하게 됐다. 그녀와 마찬가지로 해외로 끌려갔다가 돌아오지 못하고 현지에 버려진 제2, 3의 이남이 할머니같은 사례는 아직도 곳곳에 해결되지 않은 문제로 남아있다.
 
2023년 12월 현재, 대한민국에는 아홉 명의 위안부 피해자만이 생존해있다. '인간의 존엄성'이란 인간이라는 이유만으로 사람은 존재 가치가 있으며 그 인격은 존중받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분들의 존엄성을, 우리도 일본도 잊지 말고 기억해야 할 엄중한 역사의 교훈이다.
꼬꼬무 이남이할머니 일본군위안부 전쟁범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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