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vN STORY <벌거벗은 한국사>의 한 장면.

tvN STORY <벌거벗은 한국사>의 한 장면. ⓒ tvN STORY

 
온달(溫達)과 평강공주(平岡公主)는 삼국시대 고구려의 실존인물이자 한국사에서 가장 유명한 커플이기도 하다. 바보로 불리우던 가난하고 볼품없던 인물이 지혜롭고 아름다운 왕의 딸을 만나 일약 영웅으로 인생역전에 성공하고, 나라를 위하여 싸우다가 장렬한 최후를 맞는 극적인 서사는 한편의 영화로 손색이 없다. 바보 온달과 평강공주의 로맨스는 정식 역사서인 <삼국사기>에도 수록된 엄연한 실화이며, 오늘날까지도 전래동화와 설화 등으로 전해지는 한국인이라면 모르는 이들이 없는 유명한 이야기로 남았다.
 
1월 10일 방송된 tvN 스토리 <벌거벗은 한국사> 90회에서는 '삼국사기에도 박제된 전설의 커플, 평강공주는 어떻게 바보 온달을 영웅으로 만들었나'편을 통하여 온달 설화의 진실과 숨은 비화에 대하여 조명했다.

6세기 후반 고구려 25대 평원왕(平原王,559년-590년) 재위기, 동아시아의 강국이었던 고구려는 북방에서는 돌궐의 침공, 남방에서는 신라의 성장으로 위협을 받고 있었고, 안으로는 귀족들의 분열까지 겹치며 혼란하던 시절이었다. 평강공주는 바로 평원왕의 딸로 태어났다.
 
평원왕의 또다른 시호는 평강상호왕(平岡上好王)이다. 우리에게 널리 알려진 평강공주라는 호칭은 공주의 본명이나 봉호가 아니라 '평강왕의 딸'이라는 뜻이다.
 
평원왕은 한국사의 군주들 중에서 인지도가 낮지만 학계에서는 고구려 후기의 중흥을 이끈 명군이라는 평가를 받는다. 그는 선정에 힘써서 백성을 위하여 누에를 쳐 따뜻한 옷을 입히고 무리한 국가사업을 하지 않았다고 한다. 시호에 평안할 평(平)자가 들어간 것은 혼란하던 국제정세 속에 민생을 돌보고 국력을 부흥시켜 고구려 사회에 평안을 가져다준 왕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삼국사기>에 나오는 평강공주의 로맨스
 
 tvN STORY <벌거벗은 한국사>의 한 장면.

tvN STORY <벌거벗은 한국사>의 한 장면. ⓒ tvN STORY

 
온달 설화에 따르면 평강공주는 엄청난 울보였고, 평원왕은 사랑하는 딸의 버릇을 고쳐주기 위하여 공주가 울 때마다 '네가 계속 울면 바보 온달에게 시집보낸다'라고 으름장을 놓았다고 한다. 평강공주는 그 이야기에 놀라 울음을 그쳤다.
 
그런데 이 이야기는 설화만이 아니라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역사사인 <삼국사기> 온달 열전에 버젓이 수록된 실화이기도 하다. <삼국사기>는 고려시대에 집필되었는데, 후대에 고구려 영토였던 평양 지역에서 전승된 기록과 이야기들을 모아 온달전을 만든 것으로 추정된다.

온달 열전을 보면 '너덜너덜한 옷을 입고 해진 신발을 신은 채로 사람들이 모여 사는 곳을 왔다갔다하니 당시 사람들이 그를 보고 바보 온달이라고 하였다'고 기록되어있다. 온달은 홀어머니를 모시고 살았고, 시장에서 음식을 구걸해야 할 만큼 가난한 사람이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우리에게 '바보 온달'이라는 이미지로 알려진 것은 <삼국사기> 원문에도 기록된 우온달(愚溫達)이라는 표현 때문이다. 여기서 우(愚)자에는'어리석다'는 의미도 있지만, '우직하다'거나 '심성이 착하다'는 의미로도 쓰인다. 또한 학계에서는 이 표현이 온달이 정말 바보라서가 아니라, 공주와는 결혼할 수 없는 신분의 차이를 표현한 것이라고 해석하기도 한다.
 
평강공주가 16세가 되었을 무렵, 고구려의 유력 귀족 집안인 상부 고씨 가문과 혼담이 오가기 시작한다. 하지만 평강공주는 돌연 아버지 평원왕에게 "대왕께서는 항상 말씀하시길 저는 온달의 아내가 되어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지금 어찌하여 그 말씀을 고치라 하십니까"라고 항변하여 잘나가는 귀족을 마다하고 정말로 온달에게 시집가겠다고 주장했다.
 
당황한 평원왕은 "그저 어릴 때 울음을 그치게 하려고 한 말이다. 온달과 결혼시킬 생각은 전혀 없었다"라고 해명하며 설득했지만 공주는 "임금은 실없는 말이 없다고 하였습니다. 대왕의 명령은 잘못되었습니다. 저는 감히 명령을 받들 수 없습니다"라고 고집을 피웠다.

얼핏보면 철없는 사춘기 딸의 반항같은 행동이지만, 그만큼 왕의 명령이 갖는 무거움을 중요하게 여겨야 한다는 평강공주의 논리도 명분과 설득력이 있었기에 평원왕으로서는 난처할 수밖에 없었다.
 
결국 화가 치민 평원왕은 "진실로 나의 딸일 수 없다. 어찌 같이 살 수 있겠는가. 너의 갈 곳으로 가라"며 평강공주를 내쫓았다. 물론 이 역시 평원왕의 진심은 아니었고 공주를 엄하게 꾸짖어서 고집을 꺾으려고 했던 것이다. 하지만 평강공주는 숙이기는커녕, 정말로 짐을 싸서 궁을 나와 버렸고, 그녀가 향한 곳은 바로 온달의 집이었다.
 
평강공주는 온달과 그의 어머니를 만나 청혼했다. 사기에 따르면 크게 놀란 온달은 "이는 어린 여자가 마땅히 할 행동이 아니니 사람이 아니라 여우 귀신일 것이다. 나에게 다가오지 마라"고 손사래를 치며 질겁했다고 한다. 온달의 시점에서 보면, 귀한 신분에 어여쁜 여인이 갑자기 등장하여 볼품없는 가난뱅이인 자신에게 시집 오겠다고 하니 믿지 못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온달의 모친 역시 서로 신분이 맞지 않는다며 공주를 만류했다.
 
결국 평강공주는 문전박대를 당하고 생애 처음으로 길가에서 노숙까지 하는 신세가 된다. 하지만 공주는 물러서지 않고 다시 온달을 찾았다. 공주는 "진실로 마음을 같이 할 수 있다면 어찌 반드시 부귀해진 다음에야 함께할 수 있겠습니까?"라며 온달을 간곡히 설득했다.
 
그제야 공주의 진심을 알게된 온달은 크게 감동했다고 한다. 결국 두 사람은 신분의 차이를 뛰어넘어 정식으로 부부가 됐다.
 
결혼 후 달라진 온달
 
 tvN STORY <벌거벗은 한국사>의 한 장면.

tvN STORY <벌거벗은 한국사>의 한 장면. ⓒ tvN STORY

 
한편으로 이는 당시 고구려의 상대적으로 자유로운 결혼풍습을 보여주는 장면으로 해석되기도 한다. 평강공주처럼 여성이 먼저 남성에게 적극적으로 구애하고, 심지어 신분에 얽매이지 않는 혼인에 성공하는 모습은, 당대는 물론이고 현대의 기준으로 봐도 파격적이다.
 
평강공주는 혼인을 맺은 이후 남편 온달을 치밀하게 내조했다. 공주가 궁궐을 나오면서 미리 챙겨온 값비싼 재물 덕분에 온달 가족은 가난에서 벗어나 살림살이가 여유로워졌다. 이제 공주는 온달을 일반 백성들을 위한 고구려의 교육기관이던 경당으로 보내어 학문과 무예를 배우게 했다. 온달은 아내의 주도면밀한 내조 속에 밤낮으로 책을 읽고 무예를 연마하며 무사의 꿈을 키우기 시작했다.
 
평강공주의 지혜와 안목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일화가 있다. 당시 무과시험을 준비하는 데 있어서 군마는 필수였다. 평강공주는 온달을 나라에서 운영하는 국영목장에 보내어 굳이 병들고 볼품없는 잡마를 구매해오도록 당부했다. 국영목장에는 혈통이 우수한 좋은 말들이 많았지만 눈에 띄는 명마는 가격이 매우 비쌌다. 평강공주는 일부러 저렴한 잡마를 구매한 뒤 집에서 정성들여 보살피며 몸 상태를 회복시켜 남편 온달이 타게 될 훌륭한 명마로 바꾸어놓았다고 한다.
 
온달은 고구려의 주요 국가행사이자 사냥대회인 '수렵제'에 참가하여 남다른 궁술과 승마 실력을 선보이며 장인인 평원왕의 눈에 들었다. 평원왕은 온달의 정체와 늠름한 무장이 된 모습을 보고 크게 놀랐다. 수렵제 이후 평원왕은 온달과 평강공주를 왕실로 불러들어 마침내 부부의 혼인을 인정하고 온달을 무장에 임명했다. 바보라고 손가락질 받던 온달이 이제 어엿한 왕실의 일원으로 인정 받는 인생역전에 성공한 것이다.
 
온달은 이후 장인 평원왕을 따라 중국 후주(後周)와의 전쟁에 종군하여 공을 세웠다. 평원왕은 크게 기뻐하며 신하들 앞에서 "이 사람이 바로 내로 사위다"라고 칭찬했다고 한다. 온달이 전공을 세운 이후 처음으로 그가 부마(사위)라는 사실을 대외적으로 공표하는 순간이었다.

온달과 평강공주 부부에게도 뜻깊은 순간이었다. 온달에게 자신의 인생을 바꿔준 평강공주의 존재는 아내를 넘어 평생의 은인으로 여겨졌을 것이다.
 
평원왕이 사망하고, 그 뒤를 이은 26대 영양왕의 시대에 이르러 온달은 출정을 자청하여 신라에게 빼앗긴 한강 유역을 수복하겠다고 요청한다. 당시 고구려는 후주와의 전쟁에서 승리하며 북방경계선이 어느 정도 안정을 되찾았고 이 틈에 잃어버린 남쪽 영토도 되찾을 수 있다는 자신감이었다. 온달은 출정하며 "계립현과 죽령(지금의 충주, 단양 일대)의 서쪽 지역을 되찾아오지 못한다면 돌아오지 않겠다"는 포부를 드러냈다.

하지만 동화의 끝은 해피엔딩이 아니었다. 온달이 이끄는 군대는 아단성에서 신라군과 교전을 벌였다. 하지만 온달은 전투 중에 신라군의 화살을 맞아 공을 세우기도 전에 허무하게 목숨을 잃고 말았다. 또한 고구려군의 대장이었던 온달의 사망은 곧 신라와의 전쟁에서 패배했음을 의미한다.
 
<삼국사기>에는 온달의 최후를 이렇게 묘사하고 있다. 온달의 시신을 담은 관은 수십명의 군사가 함께 들어올리려고 해도 마치 땅에 붙은 듯 전혀 움직이지 않았다고 한다. 마치 온달의 원혼이 한을 품고 이승을 차마 떠나지 못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런데 평강공주가 나타나 관을 어루만지며 "죽음과 삶이 이미 결정되었습니다. 돌아가시지요"라고 하자 그제야 거짓말처럼 관이 움직였다고 한다. 이처럼 온달과 평강공주의 세기의 로맨스는 안타깝게도 비극으로 막을 내렸다.
 
 tvN STORY <벌거벗은 한국사>의 한 장면.

tvN STORY <벌거벗은 한국사>의 한 장면. ⓒ tvN STORY

 
그렇다면 실제 역사에서의 온달과 평강공주는 과연 어떤 인물이었고 어디까지가 사실일까. 온달 설화가 판타지가 아닌 엄연한 실화라는 것을 감안하고 다시 보면, 수많은 의문점이 존재하는 것을 알 수 있다.
 
신분제 사회에서 고귀한 공주가 가난한 평민, 그것도 바보와 결혼했고, 심지어 왕이 그것을 방치했다는 것은 상식적으로 납득이 되지 않는다. 그래서 학계에서는 실제의 온달은 바보도 가난한 평민도 아니었고, 몰락한 하급 귀족이나 갓 성장한 부유한 평민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다만 왕실이 유력 가문과 혼인을 맺던 당대의 관행상, 온달이라는 인물이 왕실의 일반적인 통혼권 관행의 범위 밖에 있었던 인물임은 분명해보인다. 온달이 바보로 알려지게 된 것도, 평강공주와의 혼인을 반대하는 불만 세력들에 의하여 폄하의 의미로 불려졌을 가능성이 높다.
 
또한 평원왕은 온달과 평강공주의 결혼을 반대하지 않았고, 오히려 처음부터 '계획된 혼인'이었다는 가설도 있다. 설화에는 평원왕이 어린 평강공주의 울음을 그치게 위하여 온달의 이름을 들먹였다고 하는데, 만일 온달이 진짜 바보이고 별 볼 일 없는 평민에 불과했다면 어떻게 국왕과 공주가 일개 백성의 이름과 내력까지 알고 있었을까.
 
당시 평원왕은 왕실에 위협이 되는 귀족들을 견제하기 위하여 친위세력을 육성할 필요성을 느꼈다. 온달이 왕실과 가까운 친위집단이나 신진세력과 관계된 인물이었고, 이를 포섭하기 위한 과정으로 평강공주와의 결혼을 추진했다면 개연성이 맞아떨어진다. 당연히 온달과 평강공주의 결혼을 반대하는 세력도 존재했을 것이다. 평원왕은 이를 무마시키기 위하여 겉으로는 반대하는 척하면서 공주의 일탈을 핑계로 온달과 결혼을 시킨 후 나중에 시간이 흘러서 왕실로 자연스럽게 다시 불러들였다는 해석이다.

온달의 최후를 맞이한 곳으로 알려진 아단성은, 현 충북 단양의 온달산성 혹은 현 서울 광진구 일대의 아차산성 등으로 추정되고 있다. 학계에서는 이를 두고 두 가지 가설 사이에서 아직도 해석이 분분한 상황이다.
 
온달의 죽음 이후 고구려는 한강 유역을 끝내 다시 되찾지 못했고, 이후 신라와 당나라가 연합한 나당동맹으로 오히려 멸망하여 역사속으로 사라진다. 실제 역사에서는 패장으로 전사한 온달의 최후가 더욱 안타깝고 극적으로 묘사된 이유는 무엇일까.

온달의 최후는 한민족 역사상 가장 화려한 전성기를 누렸던 고구려를 통하여 '영광의 시절'을 되찾고 싶었던 후대인들의 염원과 안타까움이 반영된 것으로 해석된다. 그렇게 온달은 바보에서 고구려의 영웅으로, 평강공주는 그 영웅을 만들어낸 위대한 여인으로 역사에 영원히 이름을 남기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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