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vN STORY <벌거벗은 한국사>의 한 장면.

tvN STORY <벌거벗은 한국사>의 한 장면. ⓒ tvN STORY

 
경종(景宗) 이윤(1688-1720)은 조선 20대 국왕으로 숙종과 장희빈의 아들이자 영조의 이복형이다. 아버지 숙종과 동생 영조가 모두 긴 치세와 굵직한 사건들로 역사적 인지도가 높은 데 비하여, 경종은 별다른 업적도 없이 불과 4년이라는 짧은 재위기간만 남기고 젊은 나이에 요절하면서 주목도가 떨어지는 경향이 있었다.
 
하지만 어머니의 비극적 최후와 아버지의 냉대, 그리고 동생과의 갈등에 이르기까지, 경종은 평생에 걸쳐 그 누구보다도 파란만장한 삶을 살아야했던 비운의 왕이었다. 심지어 마지막 순간까지도 정쟁에 휘말려 정적관계가 되어버린 이복동생에 의한 '독살설'을 남기고 비극적인 최후를 맞이해야 했다. 경종의 치세는 짧았지만, 그의 의문스러운 죽음이 남긴 미스터리는 이후 수십년간 후유증을 남기며 조선 왕실의 정통성을 뒤흔드는 또다른 비극의 씨앗이 됐다.
 
1월 24일 방송된 tvN 스토리 <벌거벗은 한국사> 92회에서는 '장희빈의 아들, 경종은 정말 동생 영조에게 독살당했나'편을 통하여 경종의 인생과 최후를 둘러싼 미스터리를 조명했다.
 
금지옥엽이었던 아들 경종

경종은 1688년(숙종 15년) 후궁이었던 장희빈과 숙종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숙종으로서는 28세의 나이에 얻은 첫 아들이었다. 조선 후기로 갈수록 왕손이 귀해졌고 숙종과 그 아버지 현종은 모두 외동아들이었다. 더구나 어머니 장희빈은 후궁이지만 숙종의 남다른 사랑을 받고 있었다. 가뜩이나 사랑하는 여인에게서 후계자가 될 귀한 아들까지 얻은 숙종의 기쁨이 남다를 수밖에 없었던 이유다.
 
숙종은 태어난 지 100일도 되지 않은 경종을 원자(왕세자가 책봉되지 않은 왕의 맏아들)로 책봉한다. 당시 정비인 인현왕후에게 비록 후사가 없었지만 아직 건재했고, 왕실의 종법상 원자가 될 적장자는 오직 정비에게서 낳은 아들에게만 인정되어야 했기에 신하들은 반대했다.
 
하지만 다혈질에 고집불통이었던 숙종은 강력한 왕권을 앞세워 이를 무시했다. 또한 경종이 원자로 책봉된 지 불과 4개월 만에 정비였던 인현왕후를 폐위하여 궁밖으로 쫓아낸다. 그로부터 4일 뒤에는 원자의 생모인 장희빈을 중전의 자리에 올렸다. 한편으로 이는 숙종이 서인세력을 축출하고 남인세력을 등용한 정권교체인 기사환국(己巳換局)의 후속조치이기도 했다.
 
1690년에는 불과 3살의 나이에 경종이 세자로까지 책봉되며 공식적인 왕의 후계자로 인정받기에 이른다. 이때만 해도 후계자로서 경종의 입지는 탄탄했고 아버지 숙종의 두터운 신뢰와 총애를 받던 금지옥엽이었다.
 
하지만 경종의 나이 7살이던 1694년, 경종과 조선의 운명을 바꾸는 대사건이 일어난다. 아버지 숙종이 갑술환국(甲戌換局)을 일으켜 집권세력이던 남인이 몰락하고 서인 정권이 다시 집권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당시 붕당구도에서 남인 세력은 장희빈과 손을 잡고 있었고, 서인 세력은 인현왕후를 지지하고 있었다. 숙종은 환국을 통하여 남인세력을 견제하고 다시 왕권을 강화하려고 했고, 이는 곧 장희빈의 몰락을 의미했다.
 
숙종은 사이가 멀어진 장희빈을 중전에서 후궁으로 다시 강등시키고, 인현왕후를 다시 궁으로 불러들여 복위시킨다. 원래 후궁 소생의 원자와 세자는 중전의 아들로 입적되는 게 원칙이었기에 법적으로 세자인 경종은 인현왕후의 아들이 됐다. 멀쩡히 친모가 살아있던 상황에서 하루아침에 어머니가 뒤바뀐 것이다. 앞으로 경종이 겪게 될 비극적인 인생의 서막이었다.
 
실록에 따르면 경종은 '인현왕후를 섬기시매 자애와 효도에 틈이 없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총명했던 경종은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새어머니 인현왕후에게 아들이자 세자로서 효를 다하며 현명하게 처신했다. 인현왕후 역시 원수의 아들이라고 할수 있는 불편한 관계에도 불구하고 '왕세자를 자기 소생처럼 어루만져 사랑하였다'고 한다.
 
하지만 숙종의 후계자이면서 '장희빈의 아들'이라는 미묘한 배경은, 경종을 자신의 의지와 무관하게 정쟁의 소용돌이로 몰아넣고 있었다. 갑술환국으로 집권한 남인세력은 이후 반대파에 대한 처리와 후계자 문제를 둘러싸고 강경파인 노론(老論)과 온건파인 소론(少論)으로 다시 분열되었다. 소론은 왕세자인 경종을 지지했으나, 노론은 숙종의 또다른 아들인 연잉군(훗날의 영조)을 지지하며 세자교체를 원했다.
 
1701년 1월, 경종을 아껴주던 인현왕후가 35세의 나이로 일찍 세상을 떠난다. 친자식처럼 자신을 보살펴줬던 새어머니를 잃은 슬픔을 가누기도 전에, 이번에는 생모 장희빈에게 죽음의 그림자가 닥쳐오기 시작했다. 장희빈이 인현왕후에게 저주를 내려 죽음에 이르게 했다는 충격적인 이야기로 적발된 것.
 
장희빈은 이전부터 숙종과 조정의 골칫거리가 된 상태였다. 중전에서 폐위되었지만 세자의 친모라는 정치적 지위는 여전히 무시할 수 없었다. 장희빈은 인현왕후가 살아있을 때도 자신이 세자의 친모라는 것을 내세워 인현왕후로부터 절을 받겠다고 난동을 부리는가 하면, 자신에게 불손한 이들에게는 훗날 세자가 왕위에 오르면 무사하지 못할 것이라고 협박하며 경종을 난처하게 만들었다.
 
숙종은 인현왕후 저주 사건까지 발생하자 훗날 경종에게 화근이 될 수 있는 장희빈을 이 기회에 숙청하기로 결심한다. 이에 경종은 숙종 앞에서 거적을 깔고 무릎을 끓으며 어머니를 용서해주기를 청했다. <당의통략>에 따르면 경종은 "신의 어머니가 그릇된 일을 했는데 신이 알지 못할 리 없으니 함께 죽기를 청합니다"라고 호소했다고 한다. 어린 세자가 자신의 목숨까지 걸고 어떻게든 어머니를 구하려고 했던 처절한 심경을 보여준다.
 
하지만 숙종은 장희빈을 용서해줄 마음이 없었고, 끝내는 강제로 사약을 먹여서 장희빈을 사사시킨다. 14살의 경종은 그렇게 새어머니의 죽음에 이어, 이번에는 친어머니가 죄인으로 전락하여 비참하게 죽는 모습을 두 눈으로 지켜봐야 했다.
 
숙종의 냉대... 더욱 위태로워진 자리
 
 tvN STORY <벌거벗은 한국사>의 한 장면.

tvN STORY <벌거벗은 한국사>의 한 장면. ⓒ tvN STORY

 
장희빈 사후, 경종의 처지는 더욱 위태로워졌다. 숙종은 장희빈의 아들인 경종에 대한 어린 시절의 총애가 무색하게 노골적으로 냉대하기 시작했다. 숙종은 경종이 자신의 뜻에 조금이라도 어긋나는 모습을 보이면 수시로 장희빈의 이름을 들먹이면서 "누구의 자식인데 어찌 그렇지 않겠는가?", "누굴 닮아 저모양인지 모르겠다"라고 비난하며 엄하게 꾸짖었다고 한다. 경종에게는 가슴을 후벼파는 상처였을 것이다.
 
감당할 수 없는 일들을 겪으며 경종의 성격도 점점 변해갔다. 실록에 따르면 경종은 어머니의 변고를 지켜본 이후 큰 충격을 받아 '근심하고 조심하는 것이 심해졌고 잠을 자는 것도 처음과 같지 못했다'고 한다. 야사에는 경종이 벽을 보고 혼자 대화하거나 야밤에 홀로 궁궐을 배회하는 등 이상행동을 일삼았다는 이야기들도 나온다.
 
말년의 숙종은 경종을 그리 탐탁지 않아 했고 실제로 세자 교체까지 고려한 정황이 곳곳에서 드러난다. 1717년 숙종이 노론의 영수인 재상 이이명을 불러들여 단독으로 은밀하게 대화를 나눈 정유독대(丁酉獨對) 사건이 벌어진다. 두 사람이 나눈 대화의 내용은 정확하게 알려지지 않았지만, 학계에서는 숙종과 노론이 연합하여 경종을 폐하고 연잉군으로의 세자교체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얼마 뒤 숙종은 건강을 이유로 세자인 경종에게 국정을 위임하는 대리청정(代理聽政)을 명한다. 만일 경종이 대리청정을 하다가 무언가 잘못을 저지르기라도 한다면 이를 구실로 세자를 교체하려는 것이 숙종과 노론의 구상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를 눈치챈 소론은 강력하게 반대하지만 숙종은 자신의 결정을 밀어붙였다.
 
그런데 실록에 따르면 경종은 대리청정 기간 동안 "여러 업무를 재결하는 것이 모두 사리에 합당했으며 일을 당하면 모두 위에 품한 뒤에 행해서 감히 마음대로 독단하지 않음을 보였다"고 한다. 경종이 의외로 대리청정을 잘해냈고 흠잡힐 만한 일을 전혀 하지 않으며 현명하게 처신했음을 보여준다. 노론은 입장이 난처해졌고 여기에 숙종의 건강이 크게 나빠지며 세자교체는 점차 명분과 타이밍을 잃게 된다.
 
1720년 6월 8일, 숙종이 재위 46년 만에 결국 세상을 떠난다. 경종이 대리청정을 시작한 지 3년 만이었다. 이로써 33살의 경종은 무려 30년 가까이 이르는 조선왕실 역사상 최장기 세자 생활을 마감하고 마침내 조선의 20대 국왕에 등극했다.
 
왕위에 오른 뒤에도 시달린 경종

하지만 경종이 왕위에 올랐으나 정작 조정은 반대파인 노론 세력이 장악하고 있었다. 경종이 즉위한 후, 조중우라는 유생이 선왕 숙종의 실정을 비판하며 임금의 생모인 장희빈의 작호 회복을 요청하는 상소를 올렸다. 하지만 노론 세력은 이를 강하게 비판했고 경종은 압박에 못 이겨 조중우를 유배 보내야 했다. 조중우는 유배길에 의문의 죽음을 당한다.
 
기세등등한 노론은 이번에는 아직 후사가 없던 경종에게 동생인 연잉군을 세자로 책봉하라고 요구한다. 조선 왕조에서 동생이 후계자가 된 경우는 3대 태종과 13대 명종이 있었지만, 경종과 연잉군의 사례처럼 절차와 법도를 건너 뛰고 신하들이 왕을 다그쳐서 후계자를 세운 경우는 전무후무했다.
 
병약하다고는 하지만 아직 34살에 불과하던 경종에게 불과 여섯 살 어린 동생을 후계자로 세우라는 노론의 압박은, 무력만 쓰지 않았을 뿐 사실상 왕권에 대한 '쿠데타'나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이번에도 경종은 노론의 요구를 순순히 수락하고 연잉군은 28세의 나이에 왕세제(후계자가 될 동생)에 책봉된다.
 
결과적으로 경종은 사망할 때까지 후사를 보지 못했다. 여기에는 한 충격적인 야사가 전해지는데, 생모인 장희빈이 사사될 당시 곁에 있던 아들 경종에게 "나를 이렇게 만든 이씨 집안의 대를 끊어놓겠다"고 저주하며 경종의 성기를 잡아뜯었다고 한다.
 
중상을 입은 경종은 이후 자식을 낳을 수 없는 몸이 되었다. 이후 경종이 내내 병약한 모습을 보인 것이나, 30대까지 후사가 없음에도 후궁을 들이지 않은 것. 그리고 노론이 왕권을 대놓고 무시하면서 연잉군의 세제 책봉을 강하게 요구할 수 있었던 것도 모두 후사를 보지 못한 경종의 몸 상태와 관련이 있다는 해석이다. 하지만 이를 뒷받침할 만한 구체적인 기록이나 근거는 발견되지 않았다.
 
1721년 기세등등한 노론 강경파들은 이번에는 세제인 연잉군에게 별다른 이유도 없이 대리청정을 시킬 것을 요구한다. 경종은 이번에도 노론의 요구를 순순한 윤허한다. 하지만 이에 경악한 소론이 결사반대하면서 사태가 커졌다.
 
정통과 명분을 중시한 조선사회에서 왕권을 위임하는 대리청정은 그 이상의 엄청난 정치적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 왕이 후계자에게 대리청정을 명하더라도 후계자와 신하들은 '충성'을 증명하는 의미에서 반대하는 게 관행이었다. 그런데 국왕이 멀쩡하게 건재한 상황에서 신하가 왕에게 대리청정을 먼저 요구하거나 그에 동참했다는 것은, 한마디로 왕권을 능멸하는 반역 행위나 다름없었다.

노론 측도 뒤늦게 사태를 파악하고는 대리청정을 거두어달라는 소론의 요청에 동참한다. 이에 경종은 못 이기는 척 얼마 후 대리청정의 명을 거두었다. 하지만 이것이야말로 경종이 절치부심하며 기다렸던 순간이었다.
 
얼마 후 경종은 전격적으로 연잉군을 앞세워 왕을 몰아세우는 반역행위를 했다는 이유로 김창집, 이건명, 이이명, 조태채의 노론 측 4대신을 '4흉'으로 지정하여 파직시키고 유배를 보냈다. 이로써 하루아침에 노론 정권이 무너지고 소론 정권이 득세하는 신축환국(辛壬士禍)이 이루어졌다.
 
실록에는 "하룻밤 사이에 군주의 결단을 크게 휘둘러 군흉을 물리치니 천둥이 울리고 바람이 휘몰아치며 하늘과 땅이 뒤집히는 듯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동안 나약하고 소극적이던 모습이 아니라, 마치 아버지 숙종을 연상시키듯 단호한 호랑이같은 모습으로 신하들을 제압한 것이다. 그동안 때를 기다리고 있다가 대리청정 사건으로 명분을 얻자마자 기습작전처럼 과감한 환국을 단행시킨 경종의 반전 면모를 보여준 장면이었다.
 
또한 1년 뒤에는 노론 세력이 세자 시절의 경종을 암살하려 시도했었다는 목호룡의 고변이 폭로된다. 분노한 경종은 유배된 사흉을 비롯하여 노론 대신 60여 명을 처형하는 임인옥사(壬寅獄事, 삼수의 옥)를 단행한다. 이로써 경종의 왕권을 위협하던 노론 세력은 궤멸적인 타격을 입게 된다. 놀랍게도 재위기간 내내 병약했던 경종이 유일하게 아프지 않고 활기왕성했던 시기가 임인옥사를 전후한 8개월간이었다고 한다.
 
하지만 경종에게는 아직 풀지 못한 문제가 남아있었다. 바로 세제인 연잉군이었다. 원칙대로라면 노론이 추대하려했던 연잉군 역시 역모에 연루되어 처벌을 피할 수 없었다. 연잉군은 죄를 청하며 세제의 자리에서 물러나겠다고 요청한다.
 
그러나 경종은 놀랍게도 연잉군을 추궁하지 않고 왕세제 자리도 그대로 유지하라는 처분을 내린다. 왜 경종은 자신의 왕권을 위협하는 정적이자 원수나 다름없던 연잉군을 용서했을까. 당시 후사가 없던 경종에게 왕위를 물려줄 만한 혈통은 이복동생인 연잉군 말고는 대안이 없었다. 경종도 연잉군을 속으로는 미워했을 수도 있지만, 개인의 감정을 억누르고 국왕으로서 나라의 안위라는 대의를 우선했던 것이다.
 
죽음에 얽힌 이야기
 
 tvN STORY <벌거벗은 한국사>의 한 장면.

tvN STORY <벌거벗은 한국사>의 한 장면. ⓒ tvN STORY

 
1724년 8월 25일 병악하던 경종의 건강이 급격히 악화되며 35세의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난다. 역경 끝에 왕이 되었고 비로소 제대로 된 왕권을 찾았다고 할 무렵에 경종은 겨우 4년의 재위만 남기고 일찍 세상을 떠났다.
 
왕세제였던 연잉군이 그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르니 조선 21대 국왕 영조다. 영조는 탕평책을 내세우며 경종에 의하여 몰려났던 노론 세력을 다시 불러들였다.
 
그런데 영조는 즉위와 동시에 선왕 경종을 독살했다는 괴소문에 시달려야 했다. 경종이 사망하기 며칠 전, 영조는 제대로 식사를 하지 못하던 경종을 위하여 특별히 게장과 감을 올렸고 경종은 모처럼 이를 맛있게 먹었다고 한다. 하지만 그날 저녁부터 경종은 복통과 설사에 시달리며 건강이 급격히 악화되었고 결국 5일 만에 세상을 떠나고 만다.
 
<본초강목>에 따르면 게장과 감은 둘 다 차가운 기운을 지니고 있어서 함께 먹으면 복통을 유발하기에 궁합상 금기시되는 음식 조합이다. 또한 영조는 위중한 경종에게 어의가 제조한 탕약과는 성분상 상극인 인삼과 부자를 먹이도록 억지로 강요했다는 이야기도 나왔다. 이를 두고 궁지에 몰린 노론과 영조가 결탁하여 일부러 경종을 암살한 게 아니냐는 소문이 나돌았다.
 
경종의 의문스러운 최후는 이후 두고두고 영조의 정통성에 발목을 잡는 아킬레스건이 된다. 1728년(영조 4년) '이인좌의 난'도 바로 경종의 복수를 내세운 소론 세력이 일으킨 반란이 된다. 소론 세력은 영조의 재위기간 내내 경종의 죽음에 대한 의문을 제기했고, 영조는 소론 신하로부터 면전에서 조롱과 비난을 당하는 수모를 겪기도 했다.
 
하지만 학계에서는 영조가 경종을 실제로 독살했을 가능성은 낮다고 평가한다. 경종은 이미 이전부터 건강이 나빴고 영조는 가만히만 있어도 후계자가 될 수 있는 상황이었다. 오히려 진작에 죽일 수도 있었던 영조를 끝까지 보호하고 살려준 것이 경종이었다.

영조도 이런 의혹에 한이 맺혔는지 <천의소감>이라는 책을 통하여 "올빼미와 승냥이같은 흉악한 무리가 감히 말해서는 안되는 일(경종 독살설)까지 언급하였다"며 억울함을 토로하기도 했다.
 
경종은 그동안 병약하고 불운한 왕으로만 알려져 왔다. 하지만 경종은 나름의 결단력과 정치감각을 지닌 인물이었고, 불행한 어린 시절과 건강문제만 아니었다면 더 많은 치적을 남긴 훌륭한 군주가 될 수도 있었다. 무엇보다 개인의 감정에 연연하지않았던 경종의 대인배적인 결단이 있었기에 조선은 이후 '영조-정조 르네상스 시대'로 불리우는 중흥의 기틀을 마련할 수 있었다는 점에서 경종의 역사적 역할은 결코 가볍지 않다.
 
 tvN STORY <벌거벗은 한국사>의 한 장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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