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시 명감독이야. 저 때는 너무 길게 찍어서 힘들었는데, 소리만 지른다고 생각했는데, 지금 보니 아주 명작이야."
 
지난해 11월 말 한국영상자료원에서 1961년 제작된 <배신> 비공식 시사회가 개최됐다. 주연으로 출연했던 배우 엄앵란은 60년 만에 공개되는 작품에 큰 소리로 찬사를 보냈다. <배신>은 정진우 감독의 두 번째 작품으로 신성일, 엄앵란이 처음으로 같이 출연한 영화였다.
 
당시에는 다른 작품 촬영하느라 영화를 제대로 못 챙겨봤다는 엄앵란은 60년 만에 영화를 보며 정진우 감독의 연출력을 극찬했다. 정진우 감독은 오랜만에 보는 자신의 옛 작품에 잃어버렸던 자식을 만난 양 뿌듯한 표정이었다. 엄앵란의 찬사도 정진우 감독을 미소 짓게 했다.
 
이날 시사는 시나리오 없이 작품만 발견된 상황에서 디지털 작업을 마친 후 원본과 차이를 확인하기 위해, 연출한 감독에게 직접 확인하는 자리였다. 정진우 감독이 개인적으로 초청한 인사들도 함께 자리했다. 정 감독은 "원본과 비교해 일부 애정 신이 빠져 있으나 큰 차이가 없다"고 말했다.
 
사라졌던 영화 KBS 창고에서 발굴 
 
한국영상자료원은 26일 기자간담회를 열고, <배신>을 포함해 그간 유실돼 실체를 확인할 수 없었던 영화들이 발굴됐다고 밝혔다. 극영화 16편과 일부 장면 및 사운드가 유실, 훼손되어 불완전판으로 보유 중이던 극영화 19편 등이다. 이들 영화는 연간 100편 이상의 한국영화가 제작되었던 1960년대부터 1970년대 중반에 집중돼 있다.
 
이들 작품 중 <배신>(정진우, 1964)을 비롯해 <어머니의 힘>(안현철, 1960), <서울로 가는 길>(이병일, 1962), <목메어 불러봐도>(김기, 1968), <석녀(石女)>(김수용, 1969) 등 5편은 지난해 디지털화했고 6월 일반 관객에게도 공개할 예정이다.
      
한국영화의 첫 번째 르네상스 시기였던 1960년대 제작된 영화는 모두 1541편이다. 그중 영상자료원 보유 편수는 730편으로 절반에 못 미친다. 제작된 지 60년 안팎의 영화들의 발굴 작업은 쉽지 않은 일이지만, 최근 자료원이 많은 노력으로 소중한 역사자료들을 찾아내고 있다는 것은 고무적이다.
 
이번 영화 필름이 발견된 곳은 KBS 수원센터 창고였다. 2022년 필름 전용 보존고가 아닌 일반적 환경에서의 필름 보존 연한이 한계점에 도달했다고 판단한 영상자료원은 아날로그 필름수집 중·단기 계획을 수립해 조사하던 중 1980년대 이전 촬영 및 방영된 필름을 방송국에서 보존하고 있음을 확인했다고 한다.
 
개국 시점이 가장 빠른 KBS(한국방송, 1961년 12월 31일 개국)와 KTV(한국정책방송원, 1948년 창립된 국립영화제작소의 후신)에서 보존 중인 다량의 8mm와 16mm 필름을 조사하던 과정에서 KBS 창고에서 길게는 60년 이상 잠자고 있던 88편의 16mm 극영화 방영본 필름을 발굴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날 간담회에는 <배신>의 정진우 감독과 김종원 영화평론가가 참석했다. 대부분의 감독들이 세상을 떠난 상태라 발견 작품 중 유일한 생존 감독으로 참석한 정진우 감독과 1세대 평론가로 한국영화평론가협회의 창립회원이기도 한 김종원 영화평론가는 옛 작품의 감회와 의의를 설명했다. 두 원로는 지난 11월 비공식 상영 때도 함께 자리했었다.
 
<배신>은 흑백영화임에도 빼어난 영상미를 구현하고 있다. 정진우 감독의 젊은 시절 연출력이 돋보이는 수작이다. 당시 극장에서 한 작품만 상영하는 환경에서 서울 아카데미 극장에서 관객 10만을 동원한 흥행영화였다.
 
정진우 감독은 "20대 시절 만든 영화로 전형적인 한국영화 문법에서 벗어나 새로운 기법으로 만들고 싶어 제작한 작품이다"라며 "언어보다는 영상 중심으로 이야기를 풀어내는 시도를 다양하게 적용했고, 일례로 남녀 주인공의 이별을 남자 주인공이 근무하는 제재소에서 커다란 원목이 반으로 갈라지는 이미지로 표현했다"고 말했다.
 
또한 촬영 에피소드에 대해 "신성일과 엄앵란이 연기하면서 연출 지시를 안 했는데도 실제로 키스를 했다"며 "이후에는 매번 키스를 하더라"고 말해 웃음을 자아냈다. <배신>에는 청평에서 촬영된 수상 보트 장면에서 두 사람의 키스하는 모습이 등장한다.

김종원 평론가는 "1960년대는 한국영화의 행복한 시기로 한국영화가 된다는 인식이 생겨나면서 정부의 지원이 시작됐고, 신상옥, 김기영, 유현목, 이만희, 김수용 감독 등이 등장하면서 빼어난 작품이 많이 나왔다"고 설명했다. 
 
전문가 원장 덕분에 굵직한 성과 잇따라
 
한국영화를 찾아내 이를 보전하는 영상자료원의 최근 성과는 두드러진 측면이 있는데, 영화계에서는 전문가가 원장의 존재 이유를 보여주고 있다는 평가가 나온다. 과거 영화 문외한인 인사들이 정치권의 낙하산으로 내려와 논란만 일으키던 데 비해, 최근 잇따르고 있는 영상자료원의 굵직굵직한 성과는 주목받을만하다.
 
최근 하명중 감독의 1986년 작품 <태>가 공개될 수 있었던 것도, 전문가 원장에 대한 신뢰가 바탕이 됐다. 하명중 감독이 원장에게 메일을 보내면서 디지털 복원이 이뤄졌고, 영화가 나온 지 30년이 가까운 시점에서 재평가되기도 했다.

김종원 평론가는 "원장의 전문성이 없으면 오늘의 이런 자리가 없다"면서 전문가로서 원장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이어 "앞서 나가는 선도적 역할의 중요성과 함께 영상자료원에 대한 외부의 인식을 제고시켜야 한다고 주문했다. 정진우 감독도 "한국영화의 역사를 알고 이해가 있어야 하는 자리인데, 사진기자 출신들이 차지하는 경우가 있었다"며 "확실히 전문가가 일을 다르게 한다"고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김홍준 원장은 "영상자료원을 잘 안다고 생각했으나 상상 이상으로 많은 일을 한다. 단순히 수집 보전이 아니라 현재 한국영화를 기록하는 일을 담당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어 "다양한 업무를 수행하고 있기에 원장으로서 역할뿐만 아니라 박물관장, 도서관장, 출판사 대표, 극장장 등을 맡고 있다"며, "매년 예산 고민이 많다"고 덧붙였다.

영상자료원에 따르면 필름으로 된 한국영화의 디지털화가 시급한 현실에서 현재 복원 대상작이 795편으로 현재 속도로 진행된다면 20년이 소요된다고 한다. 디지털화에 대한 예산 증대가 절실하다는 것이다.
 
한국영화의 위상이 높아지면서 고전영화에 관심도 늘어나고 있는데, 한국고전영화를 볼 수 있는 영상자료원 유튜브 채널은 구독자가 85만이고, 200편의 영화가 서비스되고 있다. 이중 일부 작품은 조회 수가 1000만~4000만 회를 넘기는 등 관심이 폭발적이다. 전 세계에서 접속이 가능하기 때문으로 보인다.
   
한편 1974년 필름보관소로 출발한 한국영상자료원은 올해로 창립 50주년을 맞이했다. 자료원은 50주년 5대 사업으로 ▲한국영화 국가 등록문화재 추가 등재 ▲한국영화 100선 선정·발표 ▲고전영화 디지털 복원작 해외 특별전 추진 ▲디지털 영상 아카이빙 심포지엄 개최 ▲시네마테크운동 컬렉션 구축 및 공개를 선정했다고 밝혔다.
 
특히 시네마테크운동 컬렉션은 한국영화운동에서 1990년대 이후 한국영화 중흥기의 바탕이 된 문화학교 서울 등으로 대표되는 시네마테크 활동의 역사를 되짚는다는 점에서 주목되고 있다. 최근 수년간 상당한 자료들이 확보돼 정리 작업 중이며 올해 4분기 중에 공개될 예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