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스틸컷 <Nazis at Nuremberg>

▲ 영화 스틸컷 ⓒ 디즈니플러스

 
독일의 도시 뉘른베르크(독일어: Nürnberg, 영어: Nuremberg)는 1945년 11월부터 1946년 10월까지 국제형사재판이 열렸던 곳이다. 제2차 세계대전의 전쟁범죄자들이 한자리에 모여서 재판을 받았다. 당시엔 '국제군사재판'으로 불렸다. 검사와 변호사는 세계대전 승전국이자 연합국(미국, 영국, 프랑스, 러시아)에서 맡았는데, 대체로 미국과 영국이 주도하는 분위기였다.
 
피고인들은 패전국 독일의 고위급 나치들이었다. 히틀러, 괴벨스, 힘러는 제외됐다. 그들은 이때 이미 세상에 없었다. 스스로 목숨을 끊었기 때문이다. 하여 그때까지 자칭 타칭 히틀러의 2인자 괴링, 막판에 히틀러가 지명한 후임 독일 총통 되니츠를 비롯해 20명 안팎의 고위급 나치들이 재판에 피고인으로 회부되었다.
 
이 재판은 처음부터 끝까지 녹음되었다. LP레코드판으로 무려 2000장 분량이다. 이 다큐멘터리는 LP레코드판을 하나하나 디지털화하는 과정에서 발견된 사실들 가운데 중요한 내용들을 가려 편집한 영화다. 이 영화에는 녹음된 음성뿐 아니라 당시 촬영된 영상도 활용되었다.
 
재판 초기 재판정은 뜻밖에도 활기를 띠었다고 한다. 평상시였다면 도무지 만나볼 수 없었던 유명인사(?)들을 집합케 한 전무후무한 재판이었기 때문일까?
 
전범들의 자부심
 
스무 명 남짓의 고위급 나치들은 이구동성으로 '무죄'를 주장하였다. 무죄를 주장하는 그들의 목소리는 하나같이 강세가 높았고, 거기엔 오묘한 자부심마저 들어있었다. 재판이 진행되면서, 즉 영화가 진행되면서, 그들의 어조는 조금 낮아지고 느려지기는 했지만 자부심마저 사라지지는 않았다. 끝까지 당당한 그들의 모습은 전혀 죄인 같아 보이지 않는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날 때까지 대부분의 사람들은, 세계대전의 시작이 폴란드 때문인 줄 알았다. 폴란드가 독일 라디오 방송국을 선제공격했고 이에 대해 독일이 반격하는 과정에서 우발적으로 전쟁이 일어났다고 그동안 알려져 있었다. 그런데, 증인으로 소환된 한 중간관료급 나치가 증언하기를, 그 공격은 독일의 자작극이었다는 것이다. 독일 방송국을 공격한 폴란드인은 없었다. 폴란드 군복을 입은 독일 집단수용소 재소자들이 있었을 뿐. 이 증언을 들은 괴링은 그 자리에서 화를 버럭 냈다. 양심에 따른 증언을 괘씸하게 여겼다. 괴링은 이 재판 전체를 부당한 것으로 생각했다.
 
그런데 뉘른베르크 재판정에서는 이 재판 자체를 부당한 것으로 간주하면서 때로 검사를 노려보는 등 대결구도를 취한 나치들이 괴링 말고도 많았다. 아니 거의 대다수였다. 극소수 한두 명이 협력적인 태도를 보였다. 형량을 줄여보자는 의도가 있었을 수도 있고, 실제로 나치로서 저지른 범죄들에 대하여 후회하고 사죄하는 마음이 들어서였을 수도 있다. 재판부는 그들의 깊은 마음속 심리를 알아낼 수는 없었다.
 
당시 재판부가 그들의 깊은 심리를 알 수는 없었지만 그들의 지능은 측정할 수 있었다. 괴링을 포함해 고위급 나치들의 지능지수는 꽤 높았다. 예컨대 괴링과 되니츠는 130을 훨씬 웃돌아 상위 2%에 속했다. 흔히 우리는 자녀들의 지능지수가 높기를 바란다. 도덕성이 높기를 바라는 마음보다 더 큰 것 같다. 물론 지능지수 높은 사람들이 모두 범죄자가 되는 건 아니다. 
 
연합국의 전쟁범죄는 어디로 갔을까?
 
그런데 뉘른베르크 재판은 당대에 연합국의 전쟁범죄는 단 한 건도 다루지 않는다는 비판을 받기도 했다. 독일 포로 대량학살 여러 건(말메디 즉결처형, 다하우 학살 등), 연합군의 대규모 강간 사건, 폴란드군 장교 학살 후 증거인멸, 히로시마와 나가사키 핵폭탄 투하로 인한 민간인 학살 등 연합국 측이 저지른 전쟁범죄들이 적지 않았다. 이 전쟁범죄들은 연합국들의 상호묵인 하에 뉘른베르크 재판에서 언급되지 않았으나, 그렇다 하여 역사에서 완전히 소멸되지는 않았다. 아래의 웹사이트는 그 점을 알려준다. (참고: https://listverse.com/2012/12/14/top-10-allied-war-crimes-of-world-war-ii/)
 
영화 말미에서, 전문가들은 뉘른베르크 국제형사재판이 국제공동체의 중대 관심사인 전쟁범죄를 재판할 수 있게 하는 의미있는 '선례'였다는 점을 밝힌다. 르완다 대학살, 유고슬라비아 사태 등에 대하여 국제사회가 재판을 통해 개입해야 할 일들이 일어났을 때 뉘른베르크 재판 선례를 따라 재판을 열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런 일들이 제법 많이 일어나면서 2002년에 국제형사재판소(ICC)가 설립되었고 여러 나라들이 국제형사재판소의 '로마규정'을 비준하였다. 우리나라도 비준국 중 하나다.
 
그러나 로마규정에 서명을 안 하거나 서명은 했지만 비준을 하지 않은 강대국들이 아직 있어서(대표적으로 미국), 집단살해죄, 인도에 반한 죄, 전쟁범죄, 침략범죄 등을 다루는 ICC가 현재 상태 완벽하고 강력하게 초국가적 힘을 발휘하지는 못한다. 그럼에도, 뉘른베르크 국제군사재판이 ICC를 이끌어냈다는 점은 의미가 깊다. 이 다큐멘터리는 바로 그 점을 짚어준다.
 
최근 ICC가 이스라엘 전쟁범죄, 잔학행위에 대하여 조사하겠다고 발표했다. 로마규정 비준을 하지 않은 나라 중 하나인 이스라엘을 향해 로마규정에 기반한 ICC가 어느 정도까지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을까, 기대 반 걱정 반이다.
나치 뉘른베르크 국제형사재판소 이스라엘 전쟁범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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