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성에게 첫눈에 반했을 때 귀에서 종이 울린다고 한다. 나는 아주 가끔 책 속의 한 구절에서 멈춰 서서 그럴 때가 있다. 그 구절 하나에서 시간이 멈춘 듯 주위가 고요해지며 마음이 멈춰 버린다. 그리고 그 글 안에서 계속 머물고 싶다. 그럴 땐 책을 잠시 덮고 숨을 크게 쉬며 먼 곳을 쳐다본다.

글을 충분히 소화하며 마음이 충분히 머물도록 느끼고 싶은 것이다. 그런 이유로 나는 계속 흐르는 오디오북은 잘 듣지 못한다. 세상의 온갖 다양한 책과 다양한 글자 속에서 간혹 한번씩 쿵 하고 종이 울릴 때, 나는 작가와 사랑에 빠진다.

작가의 삶이 왠지 나의 삶 같고, 글을 쓸 당시의 작가의 마음이 곧 내 마음 같다. 내 마음이지만 규정조차 할 줄 몰라서 구겨 넣었던 상황을, 글은 속 시원하게 긁어준다. 나의 상처 난 마음, 뾰족한 마음, 불편한 마음을 정확히 집어내서 표현해 준다. 어쩔 때는 당연한 줄 지나쳤던 일상 속 건조한 감정을 아주 소중하게 여겨줘서 내가 다시금 바라볼 기회를 만들어준다.

종이 울리는 그 순간, 나는 혼자가 아니고 세상 누군가도 그런 감정을 느끼고 있음을 알고 안도한다. 종이 울리는 그 순간, 나는 또 다른 세계를 알게 되고 행복해진다. 뮤지컬 "빠리빵집" 주인공 영준 역시 종이 울리는 순간이 있었다. 그는 한 때 시인을 꿈꾸던 문학 소년이었지만, 현재는 공무원인 무뚝뚝한 아빠이다. 그의 아들 성우는 아빠가 어색하고 아빠처럼 재미없게 살지 않고 하고 싶은 일이나 평생 하고 살고 싶은 파티쉐 지망생이다. 아빠와 평소 대화가 없던 성우는, 아빠가 젊은 시절 시인을 꿈꾸었다는 걸 전혀 모른다.

극의 중간에 영준은 왜 자기가 어린 시절 시를 소중히 여기게 되었는지에 대해 성우에게 알려준다. 담담히 대사를 시작하는 듯하다가 갑자기 "단어 하나, 하나" 라는 넘버가 나오며 음악이 깔린다. 이내 아름다운 선율과 함께 담담한 말투의 음색으로 눈이 그렁그렁하게 노래를 부르는 배우의 눈을 보며 나도 함께 눈물이 차올랐다. 
 
무대  뮤지컬 빠리빵집 무대.

▲ 무대 뮤지컬 빠리빵집 무대. ⓒ 김아람

 
 
단어 하나, 하나 - 뮤지컬 빠리빵집 넘버 중 

한없이 푸르른 바다, 배 위에서 미소 짓는 아버지
하나씩 떨어지는 빗방울이 세상을 채우던 어느 날
바닷속에 숨어버린 뒷모습 다신 볼 수 없었어.
그때 책상에서 골라든 시집 하나
나를 알아주던 단어 하나, 하나
괜찮다 말해주던 단어 하나, 하나
남겨진 나에게로 단어 하나, 하나 그렇게 위로가 되었어.

색 바랜 종이 위에, 연필을 잡고 써 내려가는 마음
그 순간만큼은 혼자가 아닌 것처럼 느껴지곤 해
눈을 감아도 그리운 이들이 보이지 않아 슬픈 밤.
글자 너머로 닿을 것 같은 그리움.

매일 밤 잠들기 전 상상해.
나의 단어들이 누군가의 마음에 닿아 위로가 되어주기를.

나를 알아주던 단어 하나, 하나
괜찮다 말해주던 단어 하나, 하나
눈물을 닦아주던 단어 하나, 하나
그렇게 내 품이 되어준 시
 
 뮤지컬 '빠리빵집' 출연진.

뮤지컬 '빠리빵집' 출연진. ⓒ 김아람

 

어쩌면 세상의 모든 사람이 글을 쓰는 이유는 하나인 것 같다. 내가 쓰는 단어가 누군가의 마음에 닿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글을 쓸 때는 나를 위하는 마음으로 시작할지라도, 그 글이 누군가와의 공감과 소통까지 이를 때 비로소 작가도, 독자도 행복해진다. 그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을 때 나는 대나무숲에 외치기 위해서 비밀글을 썼었다. 하지만 결국 그 비밀글을 누군가가 읽고서 내 마음을 공감해 줬다면, 또는 그 비밀글을 누군가 읽고 위로를 받았다면, 나는 조금 더 빨리 털고 일어날 수 있었을 것 같다. 대나무숲 역시 끝도 없이 들어줄 누군가를 가상으로 스스로 설정했을 뿐이었다.

그저 들어주는 것, 읽고 공감해 주는 것 만으로 큰 위로가 되고 위안이 된다. 또 글로서 큰 위로와 위안을 받으면 또 누군가에게 그런 사람이 되고 싶기도 하다. 그러고 보면 인간이란 참 신기한 존재다. 항상 누군가에게 이해받고 사랑받고 싶어하는 나약한 존재이기에, 문학과 예술 같은 거대한 은유의 작품이 탄생해왔나 보다.

무뚝뚝하던 아빠 영준을 아들 성우는 결국 이해하게 된다. 그리고 늙어버린 아빠의 꿈을 위해서 시집 한 권을 선물해 준다. 어린 나이에 아버지를 여의고 시에서 위로를 받던 영준은, 이제 아들 성우에게 진정한 이해를 받으며 미래를 살아갈 것이다. 뮤지컬 "빠리빵집"을 창작한 작가의 마음은 아름다운 노래로서 내 마음에 닿았고, 나는 충분히 포근해졌다. 
 
 2023년 초연작 한국 창작 뮤지컬 '빠리빵집'.

2023년 초연작 한국 창작 뮤지컬 '빠리빵집'. ⓒ 김아람

 
덧붙이는 글 해당 글은 개인 브런치에도 실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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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 많은 제주도에 사는 말수의사입니다. 사람보다 말을 더 사랑하는 이유를 글로 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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