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BS <고려거란전쟁>의 한 장면.

KBS <고려거란전쟁>의 한 장면. ⓒ KBS

 
안 그래도 친미국가로 분류되던 한국이 미국·일본과 더욱 밀착함에 따라, 북한은 물론이고 중국·러시아도 한국을 대하는 태도가 달라졌다. 한국을 막 대하는 국가가 종전에는 '1개'였지만, 지금은 그 숫자가 늘어나려 하고 있다.
 
북한은 통일도 필요 없다며 남한을 "제1의 적대국가, 불변의 주적"으로 규정하면서 압박하고 있고, 러시아는 우크라이나 전쟁에 끼어들지 말라며 한반도 문제에도 점점 개입하고 있다. 중국과의 관계에서는 경제적 손실이 크게 발생했다.
 
안보를 명분으로 한미동맹과 한미일 군사협력을 강화했는데, 오히려 안보가 약해졌을 뿐 아니라 경제에서까지 손실이 발생했다. 미국과 일본에 편향된 외교의 결과를 톡톡히 치르고 있는 셈이다.
 
고려 균형외교의 결실

KBS <고려거란전쟁>의 배경인 고려 전기는 이 점에서 모범이 될 만하다. 중국 송나라(북송)와 거란족 요나라 사이에서 균형외교를 지향했고, 이로 인해 따돌림을 당하거나 고래 싸움에 새우 등 터지는 일을 겪지 않았다.
 
고려는 제6대 주상인 성종(재위 981~997)부터 제8대 주상인 현종(재위 1009~1031) 때까지 요나라의 대규모 침공을 3차례나 받았다. <고려거란전쟁>에서도 묘사됐듯이, 현종 즉위 이후의 제2차 침공 때는 요나라 성종(요성종)이 40만 대군을 직접 이끌고 침공했다.
 
이런 중에도 고려는 요나라와의 관계가 파탄나지 않도록 힘썼다. 요나라의 군사적 침공을 물리치면서도 동아시아 최강인 요나라의 위상을 받아들였다. 송나라가 아닌 요나라를 황제국으로 인정하고 요나라에 사대했다. 요나라에 사대한 것을 높이 평가할 수는 없겠지만, 요나라와 거듭 전쟁하면서도 요나라와 동맹한 것은 고려 조정이 감정에 치우치지 않으려 애썼기 때문이다.
 
그런 중에도 고려는 송나라와의 관계 역시 존중했다. 요나라의 눈치를 살피며 송나라에도 사신을 파견해 군사협력을 추진하기도 했다. 어느 한 나라를 무조건 믿고 따르기보다는 정세가 바뀔 가능성에 항상 대비했던 것이다.
 
이 같은 균형외교는 고려가 송나라·요나라 양쪽의 배척을 받는 결과로 연결되지 않았다. 도리어 고려의 국제적 위상을 고양시키는 결과로 이어졌다. 이를 보여주는 것 중 하나가 송나라 역사서인 <송사>의 고려열전에 기록돼 있다.
 
고려열전은 송나라가 정화(政和)라는 연호를 쓰던 시기에 고려 사신을 "하국(夏國)의 위에 두었다"고 알려준다. 휘종황제 때인 1111~1117년 사이에 송나라가 서북쪽에 인접한 서하(西夏)보다 고려를 더 높이 예우했다는 설명이다. 서하보다도 높였다는 표현은 고려를 최고로 예우했다는 의미였다.
 
정화 연간이면 고려 현종이 사망한 지 80년이 지난 뒤다. 특히 현종 시절에 첨예하게 전개된 균형외교의 결과로 고려왕조가 송나라로부터 최고의 예우를 받았던 것이다.
 
 KBS <고려거란전쟁>의 한 장면.

KBS <고려거란전쟁>의 한 장면. ⓒ KBS

 
균형외교가 어느 정도의 성과를 거뒀는지는 정통 중국왕조인 송나라의 태도에서도 나타나지만, 송나라를 억압하며 동아시아 최강 지위를 유지한 요나라의 태도에서도 반영된다. 이를 보여주는 사례 중 하나를 <고려사>에서 확인할 수 있다.
 
제1차 고려거란전쟁(여요전쟁)이 발발해 외교관 서희가 투입됐을 당시의 고려 군주가 성종 임금(재위 981~997년)이다. <고려사> 성종세가에 따르면, 이 군주는 음력으로 광종 11년 12월 26일(양력 961년 1월 15일) 출생해 성종 16년 11월 29일(997년 10월 27일) 사망했다. 961년에 태어나 36세 때인 997년에 세상을 떠났던 것이다.
 
성종의 사망 직후라 분위기가 어수선했던 성종 16년 12월이었다. 양력으로는 998년 1월 2일부터 30일까지에 해당하는 시기였다. 이때, 요나라 사신이 도착했다. 그런데 방문 목적이 고려 상황과 맞지 않았다. 조문 사절이 아니라 축하 사절이었던 것이다.
 
성종의 후임인 목종 때의 역사를 기록한 <고려사> 목종세가는 성종 16년 12월을 설명하는 대목에서 "이 달에 거란이 천우위대장군 야율적열을 파견해 천추절을 축하했다"고 말한다. 음력 12월에 태어난 성종의 생일인 천추절을 축하하는 사신이 요나라에서 파견됐던 것이다. 성종의 사망을 통보하는 사신이 요나라 조정에 당도하기 전에 야율적열이 고려로 떠났기 때문에 벌어진 일이다.
 
외국 군주의 생일을 축하하는 사신인 하생신사(賀生辰使)가 동아시아 최강국인 요나라에서 고려로 파견된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고려 성종의 생일은 천추'절'이었다. 절이라는 표현을 사용하는 칭절(稱節)은 황제에게나 국한된다고 인식되던 시절이었다.
 
그런 시절에 요나라는 고려의 사대를 받으면서도 고려 군주의 생일을 천주절로 인정했다. 그런 뒤 생일 축하 사절을 파견했다. 고려를 황제국으로 예우했음을 보여주는 자료로 해석될 만한 사례다.
 
하생신사로 본 고려의 위치
 
 KBS <고려거란전쟁>의 한 장면.

KBS <고려거란전쟁>의 한 장면. ⓒ KBS

 
이런 하생신사는 고려와 요나라의 관계에서 많이 발견된다. 이런 사신이 파견된 것을 두고, 역사학계는 요나라가 고려를 특별히 예우한 증거로 평가한다.
 
일례로, 2005년에 <한국사학보> 제20호에 실린 박재우 서울대 규장각 책임연구원의 논문 '고려 군주의 국제적 위상'은 "요·금이 고려 군주의 생일에 사절을 파견한 것은 이들 국가의 고려 인식이 단순히 국왕의 나라만은 아니었음을 의미한다"라고 말한다. 왕의 나라가 아니라 황제의 나라에 준하는 예우를 했기에 하생신사를 파견했다는 언급이다.
 
요나라가 고려를 얼마나 중시했는지는 사신 파견 횟수에서도 나타난다. 김한규 서강대 교수가 1999년에 펴낸 <한중관계사 I>은 916~1125년에 "요가 고려에 사절을 파견한 것은 모두 212차례였고 고려가 요에 사절을 보낸 것은 모두 173차례였다"고 기술한다.
 
2013년에 <역사와 현실> 제89호에 실린 역사학자 이승민의 '10~12세기 하생신사 파견과 고려-거란 관계'는 "<요사> 기록 중 불분명하거나 오류인 부분들을 제외하고도 거란 사신이 대략 220회, 고려 사신이 대략 150회 정도 왕래한 기록이 남아 있다"고 기술한다.
 
사신을 더 많이 보내는 쪽은 아무래도 외교적 열세에 놓이기 쉽다. 고려가 보낸 사신보다 요나라가 보낸 사신이 더 많다는 것은 고려의 균형외교가 상당한 성과를 거뒀음을 의미한다. 균형외교가 고려의 위상을 높이는 결과를 가져왔던 것이다.
 
고려의 위상이 높았던 것은 고려가 어느 한편을 일방적으로 편들었기 때문이 아니다. 그랬다면 고려를 2중대로 취급하면서 함부로 대하는 국가들이 늘어났을 수도 있다. 고려가 대우를 받은 것은 남들의 분쟁에 불필요하게 끼어들지 않고 자기만의 길을 소신껏 걸은 결과다. 남과 남의 관계에서 균형을 지키는 데 그치지 않고 자신의 길을 가는 데서도 균형을 지켰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고려는 줄을 잘 선 국가다. 요나라나 송나라에 줄을 대지 않고 자기 자신에게 줄을 선 국가였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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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mjongsung.com.일제청산연구소 연구위원,제15회 임종국상.유튜브 시사와역사 채널.저서:대논쟁 한국사,반일종족주의 무엇이 문제인가,조선상고사,나는 세종이다,역사추리 조선사,당쟁의 한국사,왜 미국은 북한을 이기지못하나,발해고(4권본),패권쟁탈의 한국사,한국 중국 일본 그들의 교과서가 가르치지 않는 역사,조선노비들,왕의여자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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