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용 'The Line of Obsession' 공연 사진

무용 'The Line of Obsession' 공연 사진 ⓒ 한국문화예술위원회

 
"발레의 본질은 무엇인가?"

2월 17일부터 18일까지 서울 대학로에 위치한 아르코예술극장 대극장에서 공연한 정형일 발레크리에이티브(Ballet Creative)의 <The Line of Obsession>은 다소 상투적인 질문에서 시작한다. 창작 작품을 고안하는 대부분의 예술가들이 그러하듯 대중에게 공개하는 메시지엔 계기가 뒤따르기 마련이다. 이에 무용계에서 뜨거운 행보를 보여주고 있는 정형일(49) 안무가는 자신이 속한 예술장르의 본질에 관한 고민을 오랫동안 떨쳐내지 못했다.

'발레의 본질'에 관한 앞선 질문에 다양한 의견을 기대할 수 있겠지만, 필드에서 자신의 이름을 내건 단체로 수많은 무용수들과 15년 가까이 동고동락하고 있는 그로부터 보다 직관적인 소감을 들을 수 있었다. 

"발레의 본질을 찾는 작업은 거듭 반복되는 과정을 거쳐 무대화에 이르기까지 아티스트에게 강박이라는 무게를 안겨 줍니다." 

여기에 한 발 더 나아가, 그가 작품에서 발레의 선을 만들 때 비슷한 고민을 다른 예술세계에서 영감을 얻었다고 고백했다. 그것은 추상미술의 아버지라 불리는 '피에트 몬드리안(1872~1944)'의 대표 이미지였다. 몬드리안이 수직과 수평의 선으로 그림을 그려왔 듯, 그는 가장 기본적인 선을 만나 움직임을 만드는 과정에서 비슷한 고민에 빠진 것이다. 단순하게 보이지만 규칙적인 발레의 몸짓과 몬드리안이 추구했던 선과 도형을 더해 색채를 입혀보는 과정은 두 예술가의 고민이 크게 다르지 않아 보인다. 덧붙여 정 안무가는 사전 인터뷰를 통해 '본질을 찾아가는 과정에서 이에 대한 상세한 설명을 들을 수 있었다.   

"안무가는 발레가 공간을 디자인하고, 공간은 발레의 움직임을 발현하는 요소로서 단순하게 이미지와 상징성을 초월하는 것뿐 아니라 두 관계가 '협응하는' 작품에 관심을 가졌어요. 이런 의미에서 몬드리안의 수직·수평적 선이 만들어낸 '강박의 선'(line of obsession)과 발레의 그것을 묘하게 대비시켰죠. 이것은 몬드리안의 시각적인 이미지를 통해 발레의 본질에 관해 많은 것을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고전발레의 대표적인 캐릭터로 불리는 '백조'와 '요정'을 파괴하고, 몬드리안의 선과 공간으로 표현되는 움직임과 영상을 통해 진정한 발레의 본질을 꿰뚫어 보는 것을 목적으로 삼았다. 또한 정씨는 "가장 발레다운 '컨템포러리 발레'가 무엇이고, 어떤 모습으로 진화해야 하는지 묻고 답하는 시간이 되길 바란"다고 사전 인터뷰에서 밝힐만큼 발레의 본질이 이번 공연에서 첫 번째 목표라고 분명히 밝혔다. 

영감을 얻는 방식에서 시각의 범위를 넓혀
 
 무용 'The Line of Obsession' 공연 사진

무용 'The Line of Obsession' 공연 사진 ⓒ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정 안무가가 작품을 무대화하는 과정에서 몇 가지 주목할 점을 발견했는데, 필자는 우선 '영감을 얻는 방식'을 강조하고 싶다. 이번에 선보이는 <The Line of Obsession>은 서두에 말했듯 본질의 선을 강박적으로 탐구했던 몬드리안의 방식에서 출발했다. 작품을 이야기하기에 앞서 몬드리안에 관한 소개를 덧붙이려 한다. 디자인, 패션, 인테리어 등을 초월해 다양한 영역에 걸쳐 동시대 예술세계에 크고 작은 영향을 끼쳐온 추상주의 화가.

심지어 그의 화풍은 스티브잡스가 만든 아이폰 디자인 철학의 출발점이라는 소문이 생겨날 정도다. 수평과 수직으로만 이루어진 단순 명료한 방식으로 자신만의 독특한 영역을 구축한 몬드리안. 이처럼 형태와 색채를 최소화해야 사물의 본질에 다가갈 수 있다고 생각한 몬드리안은 사물을 보이는대로만 그리지 않고 그 안에 숨겨진 내면의 질서를 찾으려고 애썼다. 선과 면을 토대로 삼색을 활용해 신조형주의라는 새로운 예술관을 선보였는데, 그것의 주된 목적은 사물의 본질을 파헤치기 위함이라 못 박았다. 

작품에 대한 사전 설명을 듣고 공연을 봐서 그렇겠지만, 무대의 배경으로 사용된 이미지는 낯설지 않다. 드라마나 카페의 귀퉁이에서 한 번쯤은 보았을 법한 색채와 도형이 공연장을 가득 채운다. 정확히 어디라고 콕 집어서 말할 순 없지만 옷이나 백화점, 가전제품 등 어디에선가 마주했을 듯한 데자뷔를 느꼈다. 빨강·파랑·노랑 등 3원색의 기본 비주얼은 대부분의 사람들 머릿속에 자리잡고 있을 것이다. 하얀 배경에 세 개의 강렬한 색의 이미지는 오직 선과 면으로만 구성된다. 단순하지만 강렬한 느낌을 자아내는 독특한 화풍을 가진 몬드리안의 이미지는 그렇게 정형일의 발레로 재탄생됐다. 

이렇게 정 씨가 작품을 완성할 때 2차원적인 그림에서 영감을 얻은 사례는 이전에도 본 적이 있다. 특히 제10회 대한민국발레축제에서 선보인 전작 <The Line of Scene>는 김홍도의 붓 터치가 만들어낸 무동의 생명감 넘치는 선을 발레로 표현한 것이다. 당시에 어느 평론가는 "무대 위에서 표현된 직관적이고 감각적인 안무는 정형일의 정서인지, 정형일이 표현한 김홍도의 정서인지 오랫동안 여운을 남긴다"라고 평했다. 이렇듯 김홍도의 정서를 토대로 정형일의 상상력을 더해 무대 위에서 움직임으로 완성된 전작의 사례를 통해 시각적인 영상미에서 무대의 움직임으로 이끌어낸 정형일의 방식은 결과물을 위해 여러 개의 촉수를 곤두세우고 있는 그만의 예리한 관찰력을 엿볼 수 있었다. 

강박과 집념에 관한 상식을 파괴해

<The Line of Obsession>에서는 그동안 발레에서 환상적인 캐릭터로 간주되었던 발레 요정과 백조를 파괴한다. 정씨는 발레가 더이상 요정과 백조라는 판타지를 넘어 진정한 본질의 모습을 보고 싶었다. 그래서 발레의 본질에 다가가기 위해 고전발레 속 주인공인 백조와 요정을 재정의할 수밖에 없었는데, 그동안 발레에서 환상적인 캐릭터로 기억된 백조의 파괴는 발레가 인간의 표현한계를 초월하려는 진화의 욕구로 해석되며, 세상에 아름다움을 전달하고자 하는 본질이자 강박이라 믿은 것이다. 

이처럼 상식을 넘어서려는 정씨의 노력은 그가 작품세계를 이어오면서 놓지 않았던 또 하나의 집요한 끈이 됐다. 필자가 그를 처음으로 만난 것은 지금으로부터 6년 전이다. 당시에 주목받는 발레 연출가로 이름을 날렸던 정형일 안무가는 같은 공연장(아르코예술극장 대극장)에서 <투 퍼더스(Two feathers)>를 올려며 이런 질문을 던졌다. 

"과연 흑조는 사악한 존재일까?" 

이런 엉뚱한(?) 질문에 대부분의 사람들은 약간의 웃음을 내비추며 그에게 '상식에 반하는 물음'이라고 내몰았을 것이다. 그럼 그들이 말하는 상식의 기준은 누가 만들었으며, 어떻게 생겨나게 되었는지 되묻고 싶다. 당시에 이 공연을 접하고 정씨를 만나면서 백조와 흑조에 관한 선입견에 관해 몇 가지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다. 

아마도 사람들 주장하는 근거는 1877년 볼쇼이극장에서 초연된 <백조의 호수>에서 흑조 오딜은 사악한 존재라고 지칭했기 때문일 것이다. 필자가 당시에 공연을 접하고 이에 관한 내용으로 어느 일간지에 글을 실었던 적이 있다(관련기사 : '블랙 스완'은 사악한가, 선입견을 넘는 무용').
 
마법에 걸린 백조 오데트를 사랑하는 왕자 지크프리트를 속여 사랑을 빼았았고, 흑조 오딜의 이런 사악함은 백조 오데트의 순수함을 더욱 도드라지게 만들었을 뿐이다. 그러나 정 안무가는 "그것이야말로 선입견의 시작"이라고 힘주어 말했다. 흑조 오딜이 왕자의 사랑을 얻으려 하는 데는 나름의 애틋한 사연이 있을 수 있다는 것. 그래서 "백조에도 악함이 있고, 흑조에도 선함이 있을 수 있다"고 말했다. 그는 흑조에게도 우리에게 익숙한 '백조의 왈츠'에 맞춰 춤출 기회를 주었다. 그는 그렇게 우리 상식을 파괴하면서 백조와 흑조를 그저 '두 개의 깃털'로 그린다. 정형일 안무가는 당시에는 백조의 뒤에 숨어있던 인간의 본질적인 속성에 대한 고민을 놓지 않았다. 오히려 흑조의 내면 속을 들여다보려고 노력함으로써 누구도 쉽게 정의내릴 수 없는 선과 악의 공존과 혼란스러움을 당시의 작품을 통해서 말하려고 했던 것이다.  (2018.07.05. 한겨레신문 기사 중 일부)

그렇다면 이번 공연에서도 흑조와 백조의 동일한 잣대는 이전과 다르지 않게 적용됐다. 60분에 이르는 러닝타임을 반으로 갈라 무대 위에서 군무를 맞춘 무용수들은 일괄적으로 흑조와 백조의 의상을 입고 공연했다. 전반부는 발레의 상징적인 색깔이라 기대하는 흰색을 과감하게 포기하여 어두운 배경과 혼연일체 된 색이 지배한다. 무용수의 색깔을 가지고 선입견을 갖지말고 무대와 음악, 배경, 안무가 어우러진 종합예술을 관람하길 바라는 정 씨의 숨은 의도를 엿보았다.

작품은 잔잔하게 흘러가지만 몬드리안의 직선적인 이미지와 결합하여 무용수들의 직선적 움직임이 배경과 조화를 이룬다. 하지만 후반부는 앞선 음악, 무대와는 다르게 하얀 의상을 입은 무용수들이 공간을 색다르게 채워간다. 시간이 흐를수록 이전과는 다른 방식의 군무가 음악에 맞춰 극적 긴장감을 몰아친다. 마지막 몇 분을 남기고 장면의 전환을 위해서 잠시 멈추었을 때에 무용수의 거친 숨소리마저 느껴질 정도로 때로는 강렬하게 때로는 단순하게 발레가 완성되는 과정을 객석에서 느낄 수 있었다. 

정형일이 작품의 본질을 찾아가는 과정
 
 무용 'The Line of Obsession' 공연 사진

무용 'The Line of Obsession' 공연 사진 ⓒ 한국문화예술위원회

 
<The Line of Obsession>은 색의 배열이나 선들이 모여 만든 격자 형식의 그리드(Grid)와 함께 결을 맞춘다. 직선의 길이와 서로 다른 원색들이 모여 만들어낸 시각적 에너지가 무용수의 몸동작과 감응하며 강박적인 발레의 선을 만든 과정은 이번 공연에서 가장 눈여겨봐야할 백미이다. 무대는 하나의 장면 안에서 정체되어 있지 않고 끊임 없이 변화를 시도한다. 그리드와 원색의 변화에 따라 장면별로 음악의 속도를 조절함으로써 60분 공연 내에서도 몇 개의 발레를 마주할 수 있는 다양한 경험을 했다. 그렇다면 발레가 요정, 백조라는 판타지 넘어 본질은 무엇일까? 그동안 미의 본질이며 발레의 본질이라고 생각했던 조화와 균형이라는 구조로부터 만들어지는 선이 가장 아름다운 발레라고 믿어 왔지만, 몬드리안처럼 수직과 수평이 자연과 하나된 본질의 선이 된 것을 통해 발레의 본질을 상상하게 된다.

<The Line of Obsession>에서는 발레, 음악, 무대 등 장면별로 구상 중인 영상이 단순히 움직임과 조화를 이루는 것에 그치지 않고 음악의 흐름과도 완벽하게 밸런스를 잡은 것이 눈에 띈다. 이것은 정 안무가가 초기 구성 단계부터 영상, 안무, 음악을 면밀히 준비했다고 강조했는데, 여느 발레의 그것과 심도가 다를만큼 시청각의 감각을 총동원해야 제대로된 공연을 맛볼 수 있을 정도다. 몬드리안의 2차원적인 그림에서 출발해 3차원적인 발레의 본질을 입체적으로 표현하기 위한 융합적 시도는 안무가를 넘어서 전체를 조망하는 연출자로서 정 씨의 모든 역량을 쏟아부은 것으로 보인다. 

또한 몬드리안의 시각적인 이미지가 작품의 주제를 가장 잘 표현할 수 있는 부분이기 때문에 영사기를 활용한 발레와 공간의 협응에 주목해야 한다. 이것은 몬드리안의 상징적인 이미지를 있는 그대로 배치하지 않고 재해석하여 발레가 표현하려는 주제를 여러 개의 장면으로 분할시켰다. 이렇게 모인 각 장면들은 무대 배경뿐 아니라 대부분의 사람들이 눈치채지 못하는 바닥까지 영상의 효과에 힘을 주어 그의 메시지가 다각적인 효과를 극대화시켰다. 

발레에서 가장 상징적인 백조가 되기 위해 무대 위에서 발레리나의 노력을 주목해보자. 그러면 백조가 되기 위해 발레리나의 열망과 꿈이 만들어낸 강박의 선이 무엇인지 짐작할 수 있다. 이들은 최고의 퍼포먼스를 보여주기 위해서 일정 수준 이상의 균형을 유지해야 하는 강박에 짓눌렸을 것이고, 때로는 아름다운 선을 갖기 위해 절대적인 비율이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무게에 사로잡혔을 것이다. 이것은 추상미술의 아버지라 불리는 몬드리안이 만들어 낸 강박적 선을 빗대어 발레의 본질을 꿰하고 있는 셈이다. 고전 클래식의 이야기 속 진부한 내용에 갇혀 있는 발레의 대표적인 캐릭터를 파괴하고 발레의 본질이 무엇인지 되돌아보게 만드는 것. 동시대를 대표하는 컨템포러리 발레가 과거의 그것과 어떻게 다른지를 이번 작품에서 발견할 수 있게 된다. 

상식을 깨는 열린 상상력의 정형일의 고집

지난해 서울문화재단에서 처음으로 선보인 '제1회 서울예술상'에서 무용 부문 우수상을 받은 정형일 안무가는 전작 <Edge of Angle>에서도 융복합을 시도하여 많은 이들로부터 호평을 받은 바 있다. 그가 수상작으로 선정된 내용을 살펴보면, "라흐마니노프의 피아노 협주곡 '파가니니 주제에 의한 랩소디'를 시각화한 아름다운 미장센과 3D영상 프로젝션을 활용한 그래픽과 안무 구도를 통해 관객들에게 심리적인 쾌감을 선사했다. 그동안 무대에서 실현하기 어려웠던 구도의 배치와 표현의 한계를 초월한 공간을 연출함으로써 공간과 발레가 필연적인 관계임을 증명했고, 발레와 영상 움직임과 공간의 관계가 조화를 이루는 새로운 무대 미학을 선보였다."라고 이유를 들을 수 있었다.

이처럼 정형일 발레크리에이티브는 정형일 예술감독을 중심으로 지난 2010년부터 '컨템포러리 창작 발레'를 구현하며 독자적인 영역을 구축해온 단체이다. 발레가 가지고 있는 미학적 구도의 효과를 극대화하기 위한 미니멀하고 세련된 무대와 영상을 구현하는 것이 던체의 특징이다. 여기에 인간의 신체가 가지고 있는 구조적 조형미가 강조된 정형일 만의 고유한 움직임을 무대 위에서 발현한 것이 돋보였는데, 이것은 예술성·작품성·대중성이 균형 잡힌 레퍼토리의 지속적 개발을 위하여 컨템포러리 발레 네트워크의 구심점이 되고자 하는 정 안무가의 한결같은 고집을 엿볼 수 있다. 

단순하게 무용수의 몸짓으로 승부를 걸지 않고 대사만 없을뿐 무대 위에서 모든 것을 쏟아낸 정형일의 발레는 그만의 색깔이 분명하다. 무대, 음악, 영상, 배경, 의상 등 모든 구성요소에서 어느 하나 빼놓을 수 없는 완벽한 종합예술을 구현한 <The Line of Obsession>은 정씨는 자신의 이름을 내건 단체를 15년 가까이 이끌고 있는 원동력인 '상식을 깨는 열린 상상력'의 결과물이 아닐까. 
정형일 발레 창작산실 아르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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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는 빼고 문화만 씁니다." 매주 금요일마다 한겨레신문에 예술가를 만나 이야기를 들어보는 '사람in예술' 코너에 글을 쓰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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