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BS <그것이 알고싶다>의 한 장면.

SBS <그것이 알고싶다>의 한 장면. ⓒ SBS

 
"피해자가 세 번이나 신고했는데도 경찰은 '모른다'라는 거다. 경찰이 가장 결정적인 질문을 하지 않았다. 절차? 절차도 중요하지만, 그보다 가장 중요한 건 '피해자가 위험하냐, 안전하냐'라는 것을 판단해야 하는데, 다 실패했다."
 
지난 2021년 4월 스토킹 처벌법이 제정된 이후 약 3년이 흘렀다. 그런데 과연 법과 공권력은 스토킹으로 인한 무고한 죽음을 멈추게 하고 있는가. 전문가가 날린 일침은 우리 사회에 뼈아픈 질문을 던진다.
 
2월 24일 방송된 SBS 시사고발 <그것이 알고싶다> 1386회에서는 '추락과 멍키스패너, 부산 연쇄 스토킹 사건'을 통하여 스토킹 범죄의 충격적인 현실과 위험성을 조명했다.
 
올해 24세의 고 이민경씨는 긍정적이고 밝은 성격으로 주변에서도 평판이 좋았고 새로운 남자친구와는 갓 연애를 시작한 시점이었다고 한다. 그녀는 2월에는 대학졸업을 앞두고 있었고 5월에는 호주로 워킹홀리데이까지 기획해놓은 상태였다. 언젠가 이탈리아에서 피자집을 열겠다는 꿈을 이야기하던 그녀는, 지난 1월 7일 새벽, 자신이 거주하던 부산의 한 오피스텔 9층에서 추락하여 돌연 세상을 떠났다.
 
민경씨를 발견하고 119에 처음 신고한 것은 그녀의 전 남자친구였다는 김씨였다. 놀랍게도 김씨는 민경씨가 사망한 당일날 늦은 시간까지 그녀의 집에 함께 있었던 것으로 드러났다. 김씨는 2시 20분까지 민경씨의 집에서 말다툼을 하다가 나왔는데 건물 밖으로 나온 뒤 민경씨가 1층 앞에 추락하여 쓰러진 모습을 목격했다고 한다.
 
그런데 알고보니 민경씨와 김씨는 이미 헤어진 상태였다. 민경씨는 김씨와 연애하던 기간에도 그의 지나친 집착과 통제에 힘들어했고 심지어 빈번하게 데이트 폭력까지 당한 것으로 드러났다. 김씨는 민경씨의 집에서 난동을 부리고 폭행을 저질러서 친구들과 이웃의 신고로 경찰이 출동한 것도 여러 차례였다. 민경씨는 온몸에 시퍼렇게 멍이 든 사진을 증거로 남기기도 했다.
 
견디다못한 민경씨는 결국 몇 차례나 결별을 통보했다. 하지만 김씨는 이별을 받아들이지못하고 계속해서 민경씨를 집요하게 스토킹하며 일방적인 만남을 요구해온 것으로 드러났다. 심지어 민경씨의 집에 무단으로 침입하여 자살을 할 것을 암시하며 민경씨를 협박하기도 했다. 옆에서 상황을 지켜본 민경씨의 지인들은 "사랑의 방식이 아니었다. 흡사 영화에 나오는 무서운 한 장면 같았다"고 진술했다.
 
스토킹 피해자의 죽음
 
 SBS <그것이 알고싶다>의 한 장면.

SBS <그것이 알고싶다>의 한 장면. ⓒ SBS

 
사망 당일 새벽에도 민경씨가 새로운 남자친구와 데이트를 하던 스크린야구장까지 김씨가 나타나기도 했다. 남자친구는 민경씨의 안전을 우려하여 그녀를 집 앞까지 데려다줬지만, 놀랍게도 김씨는 이미 그녀의 집안에서 기다리고 있었던 것으로 드러났다. 김씨는 민경씨와 미리 약속을 했다고 주장했지만 유족과 친구들은 김씨의 스토킹을 두려워하고 있었던 민경씨가 그럴 이유가 없다고 일축했다.
 
인근 CCTV를 확인한 결과, 민경씨가 추락하던 당시의 모습이 찍혀 있었다. 민경씨는 창밖으로 떨어지기 직전까지 누군가가 함께 있는 모습이 포착됐다. 그러자 김씨는 진술을 번복하여 민경씨가 떨어지는 순간에도 방에 함께 있었다고 인정했다. 하지만 민경씨의 추락사에 대해 자신은 무관하다고 변명했다. 유족들은 민경씨의 의사에 반하여 지속적으로 스토킹을 했던 김씨가 민경씨를 죽음에 이르게 한 것이라고 의심했다.
 
전문가들은 김씨의 심리에 대하여 "이 여성(민경씨)에게 버림받는 것에 대한 공포가 상당한 수준으로 고조가 되어 있다. 가해자의 평상시 성향으로 봤을 때 분노를 표출했을 가능성이 있다", "가해자가 없었다면 민경씨의 추락은 결코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라고 단언했다. 민경씨의 추락사는 명백히 스토킹의 폐해와 폭력으로 인하여 벌어진 사건이라는 것.
 
민경씨의 가족들은 민경씨가 이전에도 김씨로부터 여러 차례 자살 협박을 받았고, 참다못해 그녀도 "창 밖으로 뛰어내려 죽겠다"며 맞대응했더니 김씨가 비로소 행동을 멈췄다는 이야기를 들은 일이 있다고 진술했다. 어쩌면 민경씨의 사망 당시 상황도 비슷했던 것이 아닐까.
 
CCTV에는 민경씨가 추락하기 전에 난간을 필사적으로 붙잡고 있는 듯한 모습이 포착됐다. 심리 전문가들은 이를 두고 "자살하려는 사람의 행동과는 거리가 멀다"라고 분석하며, 민경씨가 굳이 난간에 매달리는 위험한 행동을 스스로 해야만 했던 정황을 두고는, "자살이라는 행동을 스토킹의 협박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하여 사용한 상황은, 그만큼 가해자로부터 심각한 폭력에 대한 위협을 느끼는 순간이었을 가능성이 크다"라고 추정했다.
 
반면 김씨의 법률대리인은 사망 당일 폭행은 없었고, 연인간의 다툼이었다며 스토킹이라고 보기도 어렵다고 주장했다. 또한 민경씨가 이전에도 김씨와 다툴 때 난간에 올라간 적이 있다며 망인에게 책임을 돌렸다.
 
한편 민경씨의 유족들은 경찰이 3번이나 거듭된 신고에도 피해자를 적절히 보호하려는 조치가 없었다며 지적했다. 경찰은 피해자의 의사를 존중하여 절차대로 처리했다는 입장이다.

하지만 허민숙 국회 입법조사처 연구관은 피해자 측이 세 번이나 신고했는데도 경찰이 상황을 제대로 몰랐다고 하는 게 문제라고 지적하며, 가장 중요한 '피해자가 위험하냐, 안전하냐'라는 것을 판단하는 데 실패한 경찰의 안이한 대응이 초래한 문제점을 신랄하게 비판했다.
 
 SBS <그것이 알고싶다>의 한 장면.

SBS <그것이 알고싶다>의 한 장면. ⓒ SBS

 
스토킹 피해에 대한 경찰의 안이한 대처는, 민경씨만의 사례가 아니었다. 공교롭게도 민경씨의 오피스텔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인근에 거주하던 한은영(가명)씨도 지난해 3월 충격적인 일을 겪었다. 헤어진 전 남자친구 권씨가 은영씨의 직장까지 찾아와서 다시 교제를 요구하다가 거절당하자, 미리 준비해온 흉기로 은영씨를 공격한 것이다.
 
권씨는 멍키스패너로 은영씨의 머리를 내리치고, 칼로 가슴 부위까지 찔렀다. 비명소리를 들은 직원들이 달려와 권씨를 제압했지만 은영씨는 중상을 입었고, 직원들 역시 부상을 당했다. 은영씨는 간신히 응급수술로 겨우 목숨을 건졌지만 지금도 심각한 육체적-정신적 후유증에 시달리고 있었다.
 
권씨는 살인미수 등의 혐의로 15년형을 선고 받고 대법원 판결을 앞두고 있다. 이미 피습사건 발생 전부터 권씨는 은영씨의 집에 무단으로 침입한 뒤 자해 소동을 벌이며 협박했다고 한다. 권씨는 경찰로부터 접근금지를 고지받고도 태연하게 은영씨에게 협박문자를 보내기도 했다. 그리고 경찰은 이를 보고도 피해자에게 메시지를 차단하면 된다고 답한 게 고작이었다고 한다.
 
은영씨는 이후로도 거듭된 권씨의 스토킹에 "정말 죽을 것 같다. 너무 무섭다"고 반복적으로 호소했다. 그런데 경찰은 은영씨의 신상에 문제가 없다고 판단해서 별다른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는 입장을 밝혔다. 심지어 담당 수사관은 권씨가 다른 여자친구가 생겨서 고향에 내려간다는 말만 그대로 믿고 권씨를 풀어줬다.
 
결국 경찰은 은영씨가 변을 당하고 난 뒤에야 권씨를 체포했다. 은영 씨는 "경찰이 저를 직접 대면하지 않았는데 왜 신상에 문제가 없다고 생각했는지 모르겠다"며 황당해했다. 공교롭게도 고 민경씨와 은영씨의 사건을 담당한 경찰서는 모두 같은 관할구역이었다. 하지만 경찰은 그저 절차대로 필요한 조치를 다했다는 입장만 반복할 뿐이었다.
 
심리전문가인 김태경 교수는 "스토킹을 하는 사람들의 성향 자체가 집요하고 집착적이다. 앙심을 품으면 혼자 풀지 않는다. 이들의 분노가 저절로 해소되지 않기 때문이다"라고 설명하며 "스토킹 범죄가 무서운 게 바로 그 지점이다. 끝나지 않는 네버엔딩 스토리라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표창원 범죄심리 분석가도 "여전히 우리 사회가, 경찰이, 스토킹 가해자의 특성을 정확히 모르고 있다. 스토커를 이해한다고 착각하고 자만하고 있다. 그 결과가 이런 끔찍한 사건으로 돌아오는 것"이라고 경고했다.
 
권씨가 은영씨의 집에 무단침입했던 날, 경찰이 상황의 심각성을 파악하여 그를 체포했다면, 가해자와 피해자는 즉시 분리되었을 것이고 은영씨의 피습 사건은 아예 벌어지지 않았을 수도 있다. 전문가들은 "접근금지 조치를 어기고 있다는 것은, 가해자가 법을 준수할 생각이 없고 상대에게 언제든 보복할 수 있다는 '신호'를 준 것이다. 경찰은 이를 막을 수 있는 조치들을 한 것이 보이지 않는다"라고 지적했다.
 
 SBS <그것이 알고싶다>의 한 장면.

SBS <그것이 알고싶다>의 한 장면. ⓒ SBS

 
2021년 '노원구 세모녀 살인사건'은 스토킹 범죄가 결국 살인으로 이어진 대표적인 사례다. 범인 김태현은 이미 범행 수개월 전부터 피해자를 집요하게 스토킹해며 치밀하게 범행을 준비해온 것으로 드러났다. 이사건으로 스토킹 범죄의 위험성에 대한 사회적 경각심이 높아지는 계기가 되었고, 스토킹 처벌법 개정으로까지 이어졌다.
 
지난해 7월 스토킹처벌법이 개정되면서 빈틈으로 거론되던 반의사불벌죄(피해자가 처벌을 원하지 않으면 피고인을 처벌할 수 없음) 조항은 최근 폐지되었다. 이제는 피해자가 설사 처벌불원 의사를 밝혔더라도 공권력이 가해자를 수사하고 처벌할 수 있게 됐다. 수사단계에서 가해자에게 위치추적 전자발찌도 부착할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현실은 달랐다. 민경씨는 경찰과의 대면을 통한 적극적인 처벌의지를 보이지 않았다는 이유로 스토킹 피해자로서의 적절한 보호조치를 받지 못했다.
 
익명을 요구한 일선 경찰들은 "스토킹범죄의 경우 돌발적인 상황을 예측하기 힘들다. 또한 자칫 체포를 했다가 과잉 대응 문제 등으로 번지게 되면 경찰 조직이 책임져주는 게 아니라 개인에게 떠넘기는 현실"을 이유로 대처가 소극적일 수밖에 없는 속사정을 밝혔다.
 
현행법에 따르면 피해자 보호를 위하여 가해자가 긴급응급조치와 잠정조치를 위반할 경우, 벌금에서 징역형까지 받을 수 있다. 그러나 은영씨의 피해사례를 감안하면 사후에 가해자에게 떨어지는 형량이 큰 의미가 있는지 의문이다.
 
전문가들은 특정한 해당 사례에 대하여 '의무적 체포'를 적용하고 오히려 경찰이 체포하지 않은 이유를 작성하도록 하는 강력한 조치가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영국 법무부는 '괴롭힘 방지법'을 통하여 스토킹 등 괴롭힘 범죄를 저지른 가해자를 영장없이도 체포할 수 있도록 규정하고 있다. 그러나 한국에서는 아직 이러한 의무적 체포 규정이 존재하지 않는다.
 
허민숙 조사관은 민경씨의 사례를 거론하며 "이 젊은 여성이 얼마나 고군분투했고 살려고 노력했고 최선을 다했고, 최대한 많은 사람들을 보호하면서 헤어지려고 최선의 노력을 다했는지 생각해봐야 한다"고 눈시울을 붉히며 "스토킹에 대한 오해가 풀려야 한다. 문제는 '반복'이다. 똑같은 사건이 일어나면 피해자는 또 사망하거나 치명상을 입을 것"이라고 경고했다.
 
한국은 영국이나 캐나다 등 먼저 스토킹 처벌법을 도입한 나라들에 비하여 30년 가까이나 늦었다. 하지만 스토킹처벌법은 범죄로부터 피해자를 보호할 수 있는 끝이 아니라 단지 시작에 불과하다. 

다른 나라들의 경험을 반면교사 삼아 우리의 현실을 반영하여 좀 더 부지런히 고민하다보면, 시행착오를 줄이고 법이 올바르게 자리잡을 수 있는 시간을 단축할 수 있지 않을까. 그래야 우리 곁에서 스토킹으로 고통받는 또다른 피해자들의 소중한 생명을 지키고 비극을 막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것이알고싶다 스토킹범죄 스토킹처벌법 부산스토킹살인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