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03.07 07:06최종 업데이트 24.03.07 07: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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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월 14일 네덜란드의 반도체 장비업체 ASML이 발표한 2023 연차보고서 ⓒ ASML


지난 기사(윤 대통령, 반도체산업 죽일 건가? 외국 보고서에 담긴 진실 https://omn.kr/27ngu)에서 대통령님께 ASML 2023 연차보고서에 담긴 내용을 설명했습니다. ASML이 한국의 재생에너지 부족으로 인해 자사의 사업에 어려움을 겪고 있고, 계속 이러다간 우리 반도체 기업들이 ASML 장비를 사지 못하는 어처구니없는 경우가 생길 수도 있다는 내용이었습니다. 오늘은 그 보고서에 있는 다른 내용을 더 살펴보려고 합니다.

ASML은 세계에서 가장 큰 반도체 장비 제조사이자, 노광장비의 90% 이상을 차지하는 준독점기업입니다. 노광공정이 반도체 생산에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고, 거기서 ASML 장비가 필수적이라, ASML의 장비 판매 대수만 가지고도 각국 반도체 업체의 투자 진행 상황을 파악할 수 있을 정도입니다. 예를 들어 ASML의 최신 장비인 하이 NA-EUV 다섯 대가 인텔의 팹 하나에 설치되었을 경우 다른 공정의 장비는 몇 대가 필요하고 그 팹의 전체적인 생산량이 얼마일지 예측 가능하다는 식입니다.

한국 뛰어넘어 ASML의 두 번째 고객이 된 중국

그럼 2023년 한 해, ASML은 어느 나라에 가장 많은 장비를 팔았을까요? 항상 가장 많은 장비를 사고 있는 대만? 대통령이 세계 최대의 시스템반도체 클러스터를 만들겠다고 공언한 한국? 아시아에 맡긴 반도체 제조를 다시 본국으로 끌어오겠다는 미국?

저마다 다른 나라를 짐작할 수 있겠지만 중국을 제일 먼저 떠올릴 사람은 많이 없을 겁니다. 미·중 반도체 갈등 이후 첨단공정에 사용되는 EUV는 아예 중국에 팔지 못하고 있으니까요. 하지만 보고서에 뜻밖의 결과가 나와 있습니다.
  

2020년 이후 ASML의 지역별 연간 매출액 변화. 반도체 갈등과 상관없이 중국향 수출은 매년 늘었습니다. 특히 2023년 매출은 크게 뛰었습니다. ⓒ 이봉렬

 
1위는 언제나 그랬듯 80억 유로(11조 5617억 원)의 장비를 구매한 대만입니다. 2위는 모두의 예상을 뒤엎고 72억 유로(10조 4055억 원)의 중국입니다. 한국은 69억 유로(9조 9719억 원)로 3위, 미국은 우리의 절반도 안 되는 31억 유로(4조 4801억 원)로 4위, 요즘 우리 언론으로부터 반도체로 부활한다는 칭찬을 듣고 있는 일본은 우리의 10분의 1도 안 되는 6억 유로(8671억 원)로 5위입니다.

최근 몇 년간 중국은 ASML에 늘 세 번째로 큰 고객이었습니다. 미·중 반도체 갈등과 상관없이 중국의 ASML 장비 구매액은 2020년 이후 매년 증가했습니다. 최신 노광장비인 EUV는 미국의 압력으로 사지 못하고 있지만, 그 전 세대인 DUV 장비는 생산되는 대로 매집을 했습니다.


보고서에 따르면 2022년까지는 공급 물량이 충분하지 못해 중국이 달라는 대로 다 공급하지 못했지만 2023년에는 DUV 장비 생산이 늘어 중국으로의 수출이 크게 늘었다고 합니다. ASML은 중국 덕분에 장사를 제대로 잘했습니다. 2022년 대중국 수출액이 29억 유로(4조 1911억 원)였는데 2023년 72억 유로(10조 4055억 원)로 250%나 증가해 이제는 한국을 제치고 두 번째로 큰 고객이 되었습니다. 같은 기간 한국은 조금 느는 데 그쳤고, 대만은 오히려 조금 줄었습니다.

그럼, 미국이나 일본의 반도체 장비 기업들은 어떨까요? 미국의 대표적인 반도체 장비 기업인 AMAT의 최대 고객은 중국입니다. 한국이나 대만보다 중국에 더 많은 장비를 판매합니다. 2022년 대비 대중국 반도체 장비 수출액은 거의 변함이 없습니다. 지난해 7월 떠들썩하게 대중국 반도체 장비 수출 규제를 발표한 일본의 경우 대표적인 반도체 장비 기업인 TEL도 중국이 가장 큰 고객입니다. 일본 정부의 수출 규제 중에도 2022년 대비 판매가 6.9% 줄어드는 데 그쳤습니다.

대통령님은 미국, 일본, 네덜란드 등과 반도체 동맹을 맺었다고 하지 않았나요? 동맹이라는 건 그 반대편에 적국을 상정한 것이고, 대통령님은 틈나는 대로 그 적국이 중국이라고 밝히지 않았습니까? 반도체 전쟁 중에도 우리 반도체 동맹의 대표적인 반도체장비 업체들은 대중국 수출을 크게 늘리거나, 변함없거나, 줄어도 조금 줄었을 뿐입니다.

그럼 우리나라는 어떨까요? 우리나라는 앞서 소개한 동맹국 회사 규모의 반도체 장비 기업이 없으니, 반도체 장비 전체 수출액을 살펴보죠. 한국무역협회 중국무역통계를 보면 우리나라 대중국 반도체 장비 수출은 전년 대비 23.9%가 줄어서 중국 내 시장점유율이 3.2%포인트나 줄었습니다. 반도체 동맹국 중 우리 기업의 타격이 가장 심각한 겁니다.

여기서 하나 더 눈여겨봐야 할 게 있습니다. 중국 세관의 통계에 따르면, 2023년 반도체 장비의 수입액은 전년 대비 14% 증가한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중국의 수입이 줄어 우리의 수출이 따라 줄어든 게 아니라 중국이 수입을 늘렸음에도 우리나라의 대중국 반도체 장비 수출은 오히려 줄어든 겁니다.
  

2023년에는 대중국 흑자를 기록 중인 10대 품목들이 하나도 빠짐없이 무역수지가 악화됐습니다 ⓒ 한국무역협회 보고서

 
우리가 중국과 대립하는 동안 중국 점유율 높인 나라들

이런 사례는 또 있습니다. 지난 2월, 무역협회가 내놓은 "최근 대(對)중국 무역수지 적자 원인 진단과 평가"라는 제목의 보고서에 따르면 "반도체 장비, 석유제품, 컴퓨터 등 3개 품목은 중국의 대(對)세계 수입이 증가한 반면, 우리의 대(對)중국 수출과 시장 점유율은 모두 하락"한 걸로 나타났습니다. "우리 주요 수출품목 중 중국의 수입이 증가하면서 동시에 한국의 점유율이 상승한 품목은 전무"하다는 게 무역협회의 분석입니다.

우리 정부는 지난해 내내 우리 수출이 회복되지 않는 이유가 중국의 경기가 좋지 않아서라고 했습니다. 하지만 중국이 수입을 늘려도 우리나라 제품에 대한 수입은 비례해서 늘지 않았다고 보고서는 이야기합니다.

보고서 내용을 조금 더 볼까요? "대(對)중국 무역수지를 주도하는 20개 품목(흑자 10+적자 10) 중 15개 품목의 수지가 감소"했으며, 특히 흑자를 기록 중인 10대 품목의 경우에는 하나도 빠짐없이 무역수지가 악화됐습니다. 무역수지 악화는 반도체, 합성수지, 비누 치약 및 화장품, 무선통신기기 등 특정 분야를 가리지도 않았습니다.

무역수지 악화는 우리가 수출한 것보다 더 많이 수입했기 때문일 수도 있습니다. 그럼 이건 어떨까요? 중국이 수입하는 상위 20대 품목 중에서 13개 품목이 중국 수입시장에서 점유율이 하락했다고 합니다. 한국의 점유율이 하락한 품목에서 아세안, 일본, 미국, 대만 등의 점유율이 상승해 우리 몫을 차지하기 시작했습니다. 우리가 반도체 동맹이라며 중국과 대립하는 동안 아래에서 보듯 전 세계 여러 나라가 우리 대신 중국에서 점유율을 높여가고 있습니다.

"점유율 상승국가 : 석유제품(말련), 반도체장비(네덜란드, 싱가포르), 컴퓨터(베트남, 대만), 반도체(일본, 대만), 합성수지(미국, 일본), 기초유분(미국, 말련), 디스플레이(대만, 독일), 화장품(프랑스, 이태리), 기구부품(독일,태국), 철강(인니), 광학기기(태국,일본), 계측제어기(미국,독일), 동제품(콩고, 러시아)"
  

우리의 대중국 주력 수출 제품의 점유율이 떨어지고 그 자리를 다른 나라가 차지하고 있다는 보고서 내용 ⓒ 무역협회

 
중국 벗어나니 2년 연속 무역적자

왜 이런 일이 벌어졌을까요? 보고서는 우리 기업들의 수출경쟁력이 약화 돼서 그렇다고 합니다. 수십 년간 중국에서 연간 100억 달러에서 400억 달러의 흑자를 내며 승승장구하던 우리 기업들의 수출경쟁력이 왜 하필이면 대통령님 취임 직후부터 이렇게 바닥으로 떨어지게 된 걸까요?

대통령님이 한미일 반도체 동맹국의 일원으로 탈중국 선언을 하고, 중국의 역린인 양안 관계에 개입하면서 모든 관계에서 중국과 멀어졌습니다. <조선일보>는 대통령님과 보조를 맞춰 "중국 벗어나니 세계가 보이더라, 중(中)의 압박이 부른 반전" 같은 기사로 탈중국을 부추겼습니다. 그 결과가 바로 1992년, 중국과의 수교 이후 31년 만의 첫 무역수지 적자라는 충격적인 성적표 아닐까요? 2년 연속 연간무역수지 적자는 도대체 얼마 만인지 기억도 나지 않습니다.

미국과 일본이 반도체 분야에서 대중국 규제를 선언하며 크게 대립각을 세우고 있는 것 같지만, 이처럼 실제로는 예전과 별단 다르지 않게 반도체 장비 무역을 하고 있습니다. 미국, 일본, 네덜란드의 반도체 장비 기업들에게 중국은 전체 매출의 30% 이상을 차지하는 세계 최대의 고객이기 때문에 정부의 규제 속에서 다양한 방법을 찾아 수출을 진행하고 있습니다. 중국 입장에서도 이 세 나라로부터 반도체 장비를 사고 싶지 않아도 기술적으로 대체 불가능하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수입합니다.

하지만 우리나라의 반도체 장비 기업들은 상황이 다릅니다. 중국은 우리 반도체 장비 수출의 50% 이상을 차지하는 최대 고객입니다. 하지만 우리의 반도체 장비는 각 분야에서 대체 불가능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지는 않습니다. 한국산 장비가 아니더라도 다른 나라 장비로 대체가 가능합니다. 우리가 잃은 반도체 장비 시장점유율을 네덜란드와 싱가포르가 벌써 가져가고 있습니다.

미국과 일본 정부가 중국을 향해 규제의 목소리를 높여도 그 나라 기업들은 방법이 있지만, 우리 정부가 중국과 다툼을 벌이면 우리 기업들은 방법이 없다는 말입니다. 제조업 경쟁국인 중국과 반도체 가치사슬을 두고 머리를 맞대면 서로에게 도움이 될 방법이 있을 텐데 왜 그렇게 중국에 적대적이기만 한지 이유를 모르겠습니다.
 

윤석열 대통령이 지난 2월 4일 서울 용산 대통령실 청사에서 가진 KBS '특별대담 대통령실을 가다'에서 박장범 KBS 앵커와 대담을 하고 있다. ⓒ 대통령실

  
대통령님은 지난 2월 4일 KBS와의 특별대담에서 중국과의 새로운 관계 설정을 묻는 앵커의 질문에 "한중관계 문제에 대해서 그렇게 크게 우려할 거는 저는 아니라고 봅니다"라고 답했습니다. 수교 후 31년 만에 처음으로 대중국 무역적자를 낸 상황에서도 한중관계를 우려하지 않는 대통령님을 보면서 저런 정치가 과연 우리에게 무슨 소용인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정치가 국민을 걱정하는 게 아니라 국민이 정치를 걱정하는 상황이 길어진다면, 정치를 바꿔야겠단 생각을 하게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전 그렇게 될 날이 그리 멀게만 느껴지지는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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