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명성왕(東明聖王, 재위 기원전 37년~19년)은 한민족 역사상 손꼽히는 대국인 고구려(高句麗)를 건국한 초대 군주로, 본명인 주몽(朱蒙)으로도 유명하다. '알에서 태어난 사내아이가 나라를 세우는 시조가 되었다'는 판타지스러운 이야기는 고대의 '건국 신화'에서 흔히 등장하는 서사이기도 하다. 과연 주몽의 신화는 어디까지가 사실이고, 그 신화 속에 담겨있는 진정한 의미는 무엇일까.
 
3월 13일 방송된 tvN 스토리 <벌거벗은 한국사> 99회에서는 '인기드라마 주몽의 실제기록, 알에서 태어난 주몽은 어떻게 고구려를 세웠나'편을 통하여 고구려 건국신화의 진실과 숨은 의미를 조명했다.
 
신화(神話, Myth)는 말 그대로 신들의 이야기 혹은 신성한 이야기를 의미한다. 현대의 관점에서 보자면 비현실적인 내용에 가깝지만, 신화의 진정한 가치는 단순히 과장된 허구를 넘어서 '역사적 사실을 기반으로 고대인들이 자신들의 해석과 의미를 덧붙인 것'이라고 정의할수 있다.
 
'고구려가 건국됐다'는 실존했던 역사적 사건 위에, '사람이 알에서 태어났다'같은 일어날 수 없는 일화들을 상상하며, 초월적이고 신성한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 바로 신화의 기원이 된다. 이를 통하여 '고구려는 건국부터 신성한 나라'라는 정통성과 자부심을 높이기 위한 정치적-사상적 의미를 담고 있는 것이다.
 
고구려 건국 신화의 시작

주몽이 태어날 무렵인 기원전 1세기 당시, 한민족의 영역인 한반도와 만주 일대는 부여, 예, 맥, 진국 등 소국들이 뭉쳐진 연맹체 국가들이 공존하던 시기였다. 주몽의 고향은 동부여 지역으로 아버지 해모수(解慕漱)와 어머니 유화(柳花) 사이에서 태어났다.
 
<삼국사기> '동명왕'편에 기록된 고구려 건국신화에 따르면 '유화는 주몽을 낳을 때 좌편 겨드랑이로 알 하나를 낳았는데 크기가 닷되들이만 하였다'고 한다. 어머니의 겨드랑이에서 태어났다는 이야기는 불교의 창시자인 석가모니를 연상시킨다. 유화가 낳았다는 알의 크기인 '닷되'는 현대의 기준으로 9리터에 이르며. 이는 타조알의 3~4배에 이르는 엄청난 크기다.
 
비범한 존재가 평범한 사람의 모습이 아닌 알에서 태어났다는 난생설화(卵生說話)는 한국을 비롯한 아시아의 신화에서 흔하게 등장한다. 알은 둥그런 태양을 닮아 신성한 존재로 여겨졌고, 이는 곧 그안에서 태어난 인물이 '태양과 하늘을 잇는 신성한 존재'라는 의미를 담고 있었다.
 
주몽의 아버지 해모수는 천제(天帝)의 아들이고, 어머니 유화는 압록강을 다스리는 강의 신인 하백(河伯)의 딸이었다. 천제는 말 그대로 하느님(GOD)를 뜻하고, 그 아들인 해모수의 이름에는 태양을 상징하는 천부신(天父神)이라는 의미가 담겨있다.

유화의 이름은 버드나무 꽃을 의미하며 대지의 풍요로움을 관장하는 지모신(地母神)을 상징했다. 이처럼 부모가 각각 하늘과 땅을 상징하는 '신성한 존재'라는 것은, 그 후손인 주몽이 알에서 태어났다는 놀라운 이야기와 인물의 권위에 당위성을 부여하는 장치다.
 
유화는 압록강변의 웅심이라는 연못에서 동생들과 놀다가, 우연히 해모수를 만나 서로 사랑에 빠지게 된다. 하백은 해모수와 유화가 자신의 허락없이 정을 통한 것을 질책했다. 이에 해모수는 하백을 찾아가 재주를 겨루는 시험에서 모두 승리하며 유화와의 혼인을 허락받는 데 성공한다.
 
하지만 해모수와 유화는 세상의 균형을 위하여 각각 하늘과 땅을 돌봐야 하는 사명이 있었기에 계속 함께할 수는 없었다. 해모수는 태양이 뜨는 아침에는 지상으로 돌아와 나라를 돌봤고, 해가 지면 다시 하늘로 돌아가야 했다. 처음부터 온전히 이루어질 수 없는 존재였던 두 사람의 비극은 이미 예고된 것이었다.
 
하백은 혼인식 날 해모수에게 7일간 잠드는 약을 먹였고, 잠든 해모수를 유화와 함께 가죽주머니에 넣고 수레에 실었다. 해모수와 유화를 함께 하늘로 올려보내려는 하백의 계략이었다. 하지만 술이 일찍 깬 해모수는 당황하여 유화를 두고 혼자 하늘로 승천해버렸다. 이에 분노한 하백은 유화를 동부여의 강 우발수로 보내어 유배형에 처했다. 유화는 살아남기 위하여 강의 물고기를 훔쳐먹으며 연명했다고 한다.
 
동부여의 왕이었던 금와는 유화의 사연을 듣고 안쓰럽게 여겨서 특별히 별궁에서 지낼 수 있도록 배려했다. 그런데 얼마 후 유화가 아이를 가지게된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햇빛이 유화를 따라와 그녀가 피하였는데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따라왔으며, 햇빛이 닿은 이후 임신을 했다'는 것이다. 해는 하늘의 신인 해모수를 상징하며 햇빛의 형태로 자신의 후손을 잉태하게 했다는 것은 실제로 해모수와 유화의 관계가 이어져왔음을 상징한다.
 
금와왕은 유화가 알을 낳았다는 소식을 꺼림칙하게 여겨서 강제로 버릴 것을 지시했다. 하지만 마구간에 두어도 말이 밟지 않고. 깊은 산에 버리니 모든 짐승이 호위하였으며, 구름이 끼고 음침한 날에도 항상 알 위에는 햇빛이 비쳤다고 한다.
 
결국 금와왕은 포기하고 유화에게 알을 돌려줬다. 이후 시간이 흘러 알이 깨지며 한 아이가 탄생하니 그가 바로 주몽이다. <삼국사기>에는 '한 아이가 껍질을 부수고 나왔는데 골격과 의표가 영특하고 호걸다웠다'며 주몽의 첫 탄생을 묘사하고 있다.
 
주몽은 부여의 속어로 '활을 잘쏘는 사람'을 의미했다. 이름처럼 주몽은 어릴 때부터 비범한 활솜씨로 명성이 높았다고 한다. 주몽의 이름은 사서와 기록마다 조금씩 다르게 등장하는데 추모(鄒牟), 추몽(鄒蒙), 중모(中牟) , 중해(衆解) 등으로 표기는 다르지만 비슷한 발음을 지닌 이름들이다.
 
나이가 장성하면서 주몽은 남다른 영특함으로 인하여 주변의 시기와 건제를 받게 된다. 금와왕은 주몽에게 마구간에게 말을 돌보는 비천한 일을 맡겼다. 금와왕의 아들 대소는 주몽이 훗날의 화근이 될 것을 우려하여 그를 제거하려고 했다. 부여에서 끊임없는 푸대접과 견제에 시달리던 주몽은, 결국 20대 초반이 되어 자신만의 나라를 건국하여 꿈을 펼치기로 결심했다.
 
신화에 담긴 여러 메시지들

주몽은 자신을 따르던 오이(烏伊), 마리(摩離), 협보(陜父)라는 세 측근과 함께 부여를 탈출할 계획을 세웠다. 학계에서는 실제로 주몽이 단 세 사람만 데리고 떠났다기보다는, 이들이 부여 내에서 주몽을 따르던 세력 집단의 수장이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이들이 주몽과 함께 기꺼이 위험한 고난의 길을 자처했다는 것은, 그만큼 건국시조로서 주몽의 남다른 리더십을 암시하는 대목이기도 하다.
 
주몽의 일행은 부여군의 추격을 피하여 남쪽으로 도주하다가 큰 강을 만나 위기에 직면하게 된다. 이에 주몽은 '나는 천제의 손자요, 하백의 외손인데 지금 난을 피하여 여기에 이르렀으니 황천과 후토는 나를 불쌍히 여기시어 속히 배와 다리를 주소서'라고 호소했다.
 
주몽이 간절한 소원을 담아 들고 있던 활로 강물을 내리치니, 강에 있던 물고기와 자라떼가 뭉쳐서 다리를 만들어줬고, 주몽 일행은 무사히 추격군을 피하여 강을 건널 수 있었다고 한다. '신의 후손'으로서 주몽이 새로운 나라를 건국할 만한 당위성과 능력이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한 일화다.
 
부여를 떠난 주몽은 기원전 37년 졸본에 도읍을 정하고 마침내 고구려를 건국한다. 주몽은 여기에 고구려 최초의 왕성인 '오녀산성(五女山城, 현 중국 랴오닝성 환인시)'을 건설했는데 당대에는 흘승골성(紇升骨城)이라고 불렸다고 한다. 2000년 전 당대의 축성기술을 비롯한 고구려의 문화를 잘 보여주는 오녀산성은 현재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어 있다.
 
주몽은 나라의 이름을 고구려로 정하면서 스스로 자신의 성을 고씨(高氏)로 삼고 태왕(太王)의 자리에 올랐다. 그런데 왜 주몽은 국호을 고구려로 정했을까. 중국의 역사서인 한서(漢書) 등에 따르면 이전부터 '고구려현'라는 지명이 존재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주몽이 이 지역에서 건국하면서 지명을 그대로 차용하여 나라의 이름으로까지 삼은 것이다.

또한 고구려의 옛말에서는 돌을 쌓아올린 성(城)을 구루(溝婁)라고 불렀다고 한다. 고구려는 '높고 큰 성'이라는 의미로 크고 굳건한 성처럼 훌륭한 나라를 만들겠다는 건국세력의 의지가 담긴 국호이기도 하다.

주몽은 고구려를 건국하고 세력을 키워 주변 세력들을 하나씩 복속시켜 나갔다. 토착세력이던 비류국의 왕 송양이 고구려에 저항하며 맞서자, 주몽은 전쟁을 일으키는 대신 흰 사슴을 잡아와 매달고 비류국에 비가 내리도록 하라고 협박했다고 한다. 이에 흰 사슴이 울기 시작한 후로 비류국에는 비가 끊임없이 내려 홍수가 일어나 온 나라에 물에 잠기게 된다.
 
그제야 송양은 주몽이 천제의 후손이라는 것을 인정하고 직접 고구려로 찾아와 항복한다. 주몽은 송양을 제후에 봉하고 비류국으로 직접 건너가 채찍을 한 번 휘두르니 거짓말처럼 홍수가 물러갔다고 한다.
 
고대에 흰 사슴은 인간과 하늘을 잇는 신성한 동물로 여겨졌다. 이처럼 신성한 동물마저도 마음껏 부릴 수 있는 주몽이 그만큼 특출한 능력을 지닌 존재임을 부각시키는 일화다. 한편으로 주변국을 복속시키며 정복활동을 통하여 성장한 고구려 건국 초기의 모습을 엿볼 수 있는 장면이기도 하다.
 
주몽의 먼 후손인 고구려 20대 국왕 장수왕은 414년, 아버지를 기리기 위하여 '광개토대왕릉비(현 중국 지린성)'을 건설하면서, 여기에 고구려 건국신화 및 초기의 역사도 기록해놓았다. 비석의 내용에 따르면 주몽의 최후는 하늘에서 내려보낸 황룡을 타고 천상으로 올라갔다고 기술하고 있다. 마지막까지도 신의 아들로서 그 신성함을 부각시키는 내용이다.
 
중국 사서인 <후한서>에 따르면 '구려후 추'라는 실존 인물이 등장하는데 바로 고구려 건국시조인 주몽을 뜻하는 것으로 추정된다. 실존한 역사적 인물과 여러 가지 신화적 상상력이 덧붙여져서 후대까지 계승된 것이 오늘날까지 이어지는 '주몽 신화'로 완성됐다.
 
고구려는 이후 주몽의 아들 유리왕을 거쳐 손자인 대무신왕 시대에 이르러 부여를 복속시키고 대소왕을 제거하며, 한반도 북부의 유일한 패자로 자리매김한다. 이로써 주몽으로부터 시작된 고구려 초창기의 건국신화는 비로소 그 한 페이지의 막을 내리게 된다.
 
신화는 그 자체로 역사가 될 수는 없지만, 역사에서 비롯되는 것이 곧 신화라고 할수 있다. 신화는 단순히 신비하고 허무맹랑한 이야기가 아니라, 그 나라와 세계가 탄생하는 과정에 상상력이 덧붙여져서 전승되며 그 역사와 민족을 지탱하는 소중한 기록으로 남는다. 역사를 올바르게 계승하고 해석하기 위한 하나의 과정으로서 신화를 이해해야 하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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