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03.30 17:20최종 업데이트 24.03.30 17: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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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0년대 경성소방서 직원들의 신사참배. 일제는 조선 곳곳에 신사를 세우고 종교 신자들을 비롯한 조선인들에게 신사 참배를 강요했다. ⓒ 서울특별시 소방재난본부

 
제국주의는 식민지의 정치·경제뿐 아니라 식민지인의 심리에도 영향을 줬다. 제국주의는 인간 착취를 위한 시스템이므로 식민지인들의 복종을 유도하고자, 이를테면 내선일체론 유포나 신사참배 강요 등의 방법으로 심리적 조작을 시도했다. 제국주의가 종교를 첨병으로 앞세운 것도 이와 무관치 않다.

민족대표 33인은 모두 종교인이다. 기독교 16명, 천도교 15명, 불교 2명이다. 이들 종교인들이 1919년 3·1운동을 주도한 배경 중 하나는 한국 종교에 대한 제국주의의 탄압에서 찾을 수 있다. 일제는 한국 착취에 방해가 되는 존재로 한국 종교들을 대했고, 이는 한국 종교의 활로에 부정적 환경을 조성했다. 이런 압력으로부터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서라도 한국 종교는 3·1운동으로 나아가지 않을 수 없었다.


3·1운동의 결과로 서울·상하이·블라디보스토크에 세워진 3개의 임시정부를 상하이 대한민국임시정부로 통합하는 데 기여한 독립운동가이자 <한국통사> 저자인 역사학자 박은식은 1920년에 펴낸 <한국독립운동지혈사>에서 일제의 종교 탄압을 비중 있게 서술했다.

그는 "일본인들은 우리 민족에 대하여 우리 역사를 없애는 데 그치지 않고 언어·서적·예의·문화·윤리·풍속 모두를 모조리 없애려 하였다"라며 "각 종교에 대해서는 더욱 힘을 쏟았다"고 설명했다. 이랬으니 종교단체들은 민족을 지키는 것은 물론이고 자신들을 지키기 위해서라도 일제에 항거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일제의 탄압을 받은 대표적 종교는 대종교·기독교·불교·천도교다. 서양제국주의와 달리 일본제국주의는 기독교까지 탄압했다. 기독교의 유일신 신앙은 일왕(천황) 숭배와 충돌했다.

항일에 나선 양붕진과 미륵교인들

그런 유력 종교들을 탄압을 받은 것은 당연히 아니다. 한국의 전통 신앙들도 그 대상이 됐다. 후고구려 궁예가 강렬한 인상을 남긴 미륵신앙 혹은 미륵불교 신앙도 제국주의의 탄압을 피해 가지 못했다.

이는 미륵신앙 신도들이 항일의 길로 나서는 원인이 됐다. 북제주군이 펴낸 <제주 항일인사 실기>에 소개된 양붕진(梁鵬進, 1895~1945)도 그런 투사다. 제주 지역 항일 투사들을 정리한 이 책은 양붕진이 '일본은 멸망한다'는 예언을 퍼트리다가 체포됐다고 설명한다.

양붕진은 일본이 동학군 진압을 빌미로 경복궁을 점령하고 조선왕조를 장악한 이듬해에 태어났다. 조선의 운명을 어둡게 하는 검은 그림자가 점점 커지던 시대에 성장한 그는 서른 즈음부터 일제 멸망을 예언하는 선지자가 됐다.

그는 일제가 1944년에 멸망할 것이라는 '복음'을 전파했다. 4로 끝나는 해의 간지는 새로운 10년의 출발점인 갑(甲)으로 시작한다. 1944년 갑신년에 한국이 독립을 얻으리라는 희망을 퍼트렸던 것이다. 그는 "지상 천국인 용화(龍華)세가 출현한다"라 미륵사회의 도래를 예고했다. 흔히 말하는 자주독립의 세상, 해방의 세상이 그가 말하는 용화세계·미륵사회였다.

제주도 한가운데인 오라동에 사는 그는 처음에는 보천교 신자였다. 증산교 교주인 강일순의 지지자였다가 강일순 사후에 독자 세력을 구축한 차경석이 1921년에 세운 신흥종교의 신자였던 것이다.

보천교는 종교 차원을 떠나 국가 선포의 단계까지 나아갔다. 차경석은 교주에 머물지 않고 황제까지 자처했다. 1922년 10월 26일 자 <동아일보> 3면 우중단은 덕유산에서 천제를 거행하고 국가를 선포한 이 사건과 관련해 "차경석은 이번에 새로운 국호와 관제 등을 발표하얏다는대, 국호는 대시국(大時國)이라 하고 자긔가 친히 황뎨가 되고"라고 보도했다.

국명 앞에 관용적으로 붙이던 대(大)를 빼면, 차경석이 세운 국가는 시나라였다. 일제 당국은 일왕의 권위에 도전한 시나라를 가만 두지 않았다. 압력을 견뎌내지 못한 시나라는 얼마 안 가 친일 단체로 변모했다. 보천교는 시국대동단이라는 단체를 만들어 '대동아 단결'을 외치기 시작했다.

이는 1924년과 1926년에 보천교 내부에서 혁신운동이 촉발되는 배경이 됐다. 양붕진은 이 시기인 1926년에 32세 나이로 '시나라'에 들어갔다가 얼마 뒤 나왔다. <제주 항일인사 실기>는 "1927년 봄 전북 금산면 금산리에 가서 김종화를 만나 그의 권유로 미륵교에 귀의"했다고 말한다.

김종화는 법명이 종화(鐘華)인 독립운동가 김석윤(1877~1949)이다. 유학자 출신 승려이자 의병장인 그는 미륵신앙의 거점인 금산사에서도 수행했다. 그가 금산사에 있을 때 동향 출신인 양붕진이 그 영향을 받았던 것이다.

제주대 사학과 한금순 강사가 2013년에 <대각사상> 제19집에 기고한 '승려 김석윤을 통해 보는 근대 제주인의 사상적 섭렵'은 "1942년 제주도의 미륵교의 항일운동에도 김석윤의 영향을 받은 사람들이 참여"했다고 말한다.

이 논문에 언급된 1942년 사건은 양붕진을 비롯한 미륵교인들이 독립운동 혐의로 체포된 일을 가리킨다. 김석윤의 영향을 받은 사람들이 독립운동을 했다는 것은 김석윤이 미륵신앙과 더불어 독립사상을 가르쳤음을 보여준다. 식민지 한국인들의 머릿속에 미륵신앙을 퍼트려, 일본제국주의가 오염시킨 부분들을 씻어내고자 했던 것이다.

고문 후유증... 광복 못 보고 사망한 양붕진
 

<제주 항일인사 실기> 겉표지 ⓒ 제주시

  
33세 때 미륵신앙을 접한 양붕진은 포교 활동에 뛰어들었다. 그의 포교 활동은 곧 독립운동이었다. <제주 항일인사 실기>는 "변호찬·이두생·양계초·송태옥 등과 함께 적극적인 포교 활동을 하였다"라고 설명한다.

그러면서 "이 민족종교는 일망무지(日亡無地)라는 깃발을 들어 일본은 망하고 곧 밝은 새 세상이 출현한다고 믿고 있었으며"라고 설명한다. 일본은 망하리라, 무늬 없는 천 같은 맑은 세상이 도래하리라는 기치를 내걸고 항일운동 지지자들을 모았던 것이다.

양붕진의 '포교' 활동은 47세 때 발각됐다. 위 책은 "1942년에 이 내용이 탄로되어 핵심 신도 양계초, 양붕진, 송태옥, 이두생 등은 체포되고, 1943년 2월 16일 광주지법 목포지청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으로 각각 징역 10월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받아 형이 확정될 때까지 심한 고문과 옥고를 치렀다"고 알려준다.

광주지방법원 형사부의 1944년 2월 4일 자 판결문에 따르면, 일제 재판부는 독립운동가인 김기섭 목사에게 징역 1년 6월을 선고하면서 "기독의 재림과 천년왕국의 건설 등으로 국민의 국체 관념을 교란시켜 기독교리에 의하여 통치하도록 하는 국체 변혁의 목적을 가지고"라고 판시했다. 예수의 재림과 천년왕국의 도래를 설교한 것이 일본의 국가체제에 위반되는 반체제 범죄라고 판시했던 것이다.

일제는 일왕의 재림이 아닌 그리스도의 재림을 설교하는 것도 위험시했고, 일왕 세상이 아닌 미륵 세상을 전파하는 것도 위험시했다. 양붕진이 집행유예가 딸린 징역형을 선고받은 것은 그의 선전이 일제의 한국 착취에 방해가 됐기 때문이다. 미륵교 교주인 독립운동가 정인표는 1943년에 전주지방법원에서 징역 8년을 선고받았다. 이는 일제가 일왕 이외의 신들을 얼마나 질투하고 위험시했는지를 보여준다.

양붕진의 사례는 일제가 한국인들을 강제 동원하고 한국 경제를 착취하기 위해 한국인들의 심리와 신앙에 얼마나 깊숙이 개입했는지를 보여준다. 일제는 일왕 숭배에 대한 의심의 싹이 생기지 않도록 하고자 미륵 신앙 같은 전통 신앙의 흐름도 이처럼 예의주시했다.

양붕진은 국가보훈부가 지정한 독립유공자 명단에는 들어 있지 않다. 대한민국은 그를 인정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의 목숨은 민족에 바쳐졌다. <제주 항일인사 실기>는 "그는 모진 고문과 옥고 끝에 그 여독으로 1945년 7월 16일 사망하니 조국 광복 1개월 전의 일이었다"라고 설명한다.

그의 사망 1개월 뒤에 일제는 패망했지만, 그가 꿈꾼 용화세계는 아직 오지 않았다. 한국에 용화세계가 도래했음을 알리는 증표는 독립운동가들이 올바른 대우를 받고 친일청산이 마무리되는 것이다. 양붕진 같은 인물이 독립유공자로 지정되는 것도 중요하지만, 용화세계가 빨리 도래하도록 좋은 세상을 만드는 것도 중요한 과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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