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국민은 신속한 재판을 받을 권리를 가진다." 헌법 제27조 제3항입니다. 하지만 이 헌법 조항은 잘 지켜지고 있지 않습니다. 재판 지연 문제가 날로 심각해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올바른 판결이 나왔다고 하더라도, 너무 많은 시간이 흐른 탓에 실질적인 구제를 받기 어렵거나 당사자가 사망했다면, 정의가 실현됐다고 할 수 있을까요. <오마이뉴스>는 '정의의 유효기간'이 지난 재판 지연 사례를 추적하고, 우리보다 먼저 사회적 논의를 진행한 독일에서 그 대안을 찾고자 합니다.[편집자말]

10월 18일 <오마이뉴스> 취재팀이 찾은 독일 헤센주 카셀(Kassel) 소재 연방사회법원(Bundessozialgericht) 대법정의 모습. ⓒ 오마이뉴스

최근 재판 지연 문제에 관심을 두고 있는 한 변호사에게 주변에 재판 지연 사례가 있는지 물었다. 그의 동료변호사가 재판 지연으로 속앓이를 하고 있다는 답변이 돌아왔다. 그에게 동료변호사와 연결해달라고 했다. 며칠 뒤 답을 받았다.

"기자와 만나 대화한 내용이 기사화되면 재판에 불이익이 있을 수 있으니, 기자와 만날 수 없다고 해요."

우리나라에서 판사의 재판 진행을 묻고 따지는 일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고위 법관도 그렇게 할 수 없다. 우리나라 헌정사 최초의 '탄핵소추안 국회 가결' 훈장을 단 임성근 전 서울고등법원 부장판사 쪽은 2019년 첫 재판에서 "(임 전 부장판사는) 법관들의 재판업무에 관여할 일반적 직무권한이 없다"면서 "재판권은 재판장의 신성불가침한 영역"이라고 말할 정도였다.

하지만 독일 법정 분위기는 사뭇 다르다. 소송당사자는 재판을 지연시키는 재판부에 지연 경고(Verzögerungsrüge)를 할 수 있고, 이후 과도한 재판 기간으로 불이익을 받은 경우 상급법원 등에 보상 청구 소송을 제기할 수 있다. 재판지연보상법(법원조직법 198조, § 198 GVG)이 존재하기에 가능한 일이다.

이 가운데 지연 경고는 재판 독립을 훼손하지 않는 선에서 판사에게 신속한 재판을 하라는 압력으로 작용한다. 하지만 그 한계도 명확하다. 법적 구속력이 없기 때문이다. 재판 지연 예방 효과가 확실히 검증된 것은 아니다.

우리나라 대법원 격인 연방일반법원(Bundesgerichtshof) 판사(대법관) 출신 라인하르트 그레거(Prof. Dr. Reinhard Greger) 프리드리히-알렉산더 대학교(Friedrich-Alexander-Universität Erlangen-Nürnberg) 석좌교수는 올해 발표한 논문에서 지연 경고를 다음과 같이 비유했다.

"이 빠진 칼이다."

재판지연보상법을 둘러싼 논의는 현재 진행형

라인하르트 그레거(Prof. Dr. Reinhard Greger) 프리드리히-알렉산더 대학교(Friedrich-Alexander-Universitat Erlangen-Nurnberg) 석좌교수가 10월 21일 인터뷰 도중 자료를 찾아보고 있다. ⓒ 오마이뉴스

통계를 살펴보면, 독일의 재판 지연은 우리나라처럼 날로 심각해지고 있다. 그레거 교수가 분석한 통계에 따르면, 2010년 주 지방법원(Landgericht)의 1심~항소심 처리 기간은 평균 19.7개월이었는데, 2020년에는 24.7개월로 늘었다. 주 고등법원(Oberlandesgericht)의 1심~항소심 처리 기간은 2010년 28.5개월이었는데, 2019년에는 33.5개월로 늘었다.

이런 가운데 재판지연보상법 관련 통계를 확인할 수 있는 일반 민사사건과 사회보장제도 관련 사건에서만 지난 8년 간 6100건의 재판 지연 보상 청구 소송이 제기됐다. 연 평균 760건이다. 이 숫자가 의미하는 것은 무엇일까.

그레거 교수는 "연구한 바에 따르면, 지연 경고를 한 뒤 그 중 10%만 소송으로 이어지고, 그 가운데 8%만 승소한다"면서 "재판지연보상법이 재판 지연 예방에 효과적이지 않다는 것을 보여준다. 만약 효과적이라면 (재판 지연이 줄어들어) 소송은 줄어야 하지 않겠느냐"라고 지적했다.

2011년 재판지연보상법 입법 과정에서 더욱 강력한 제도 도입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있었다. 법적 구속력 있는 제도가 필요하다는 것이었다. 당시 신속한 재판과 법관의 독립이라는 가치가 맞부딪힌 가운데, 법적 구속력은 없는 지연 경고와 사후적인 재판 지연 청구 소송이라는 절충안이 나온 것이다. "현재의 재판지연보상법은 재판 지연의 근본적인 해결책이 아니라는 것"이 그레거 교수의 판단이다.

다만, 자녀 양육권 문제 등 일부 사건에서 법적 구속력 있는 지연 경고 제도가 마련됐다. 관련 유럽인권재판소 판결이 있었고, 자녀 양육권 문제의 시급성도 고려됐다. '가사사건 및 비송사건 절차법 155b조'(§ 155b FamFG)에 따르면, 당사자가 절차 지연을 주장하면, 법원은 한 달 안에 그에 관한 판단을 내려야 한다. 정당한 주장이라고 판단되면, 신속한 처리를 위한 적절한 조치를 취해야 한다.

얼마나 지연돼야, 재판 지연일까

재판 지연 판단 기준인 '과도한 재판 기간' 둘러싼 논란도 현재 진행형이다. 개별 사건마다 특수성이 있기에 명확한 기준을 정하는 것은 쉽지 않다. 그렇다고 그 기준이 명확하지 않으면 법관의 자의적인 판단이 우려된다. 독일에서는 법원마다 기준의 설정 여부가 다르고, 기준이 있더라도 같지 않다.

자체 규정으로 각각 12개월과 24개월의 재판 준비·숙고 기간을 정한 일부 전문법원(사회법원·재정법원)을 제외하면, 일반법원과 나머지 전문법원에서는 통상적인 사건 처리 기간을 기준으로 재판 지연을 판단한다.

10월 18일 만난 독일 연방사회법원(Bundessozialgericht) 10부(재판지연전담재판부) 판사들. 왼쪽부터 옌스 칼텐슈타인(Dr. Jens Kaltenstein) 부장판사, 크리스티안 메케(Dr. Christian Mecke) 부부장판사, 하르트비크 오트머(Hartwig Othmer) 판사. 중간에 있는 여성은 연구관으로 이번 인터뷰에 참관했다. ⓒ 오마이뉴스

사회보장제도 관련 소송의 상고심을 담당하는 연방사회법원(Bundessozialgericht) 재판지연전담재판부 옌스 칼텐슈타인(Dr. Jens Kaltenstein) 부장판사(대법관)는 "사회법원에서는 12개월의 재판 준비·숙고 기간을 판사에게 부여하고 있다"면서 "그동안 각종 절차를 진행한 사실이 확실히 규명되지 않으면 지연 경고를 보낼 수 있고, 보상 청구 소송을 제기할 수 있다"라고 강조했다.

이에 그레거 교수는 "재판부가 평균적인 처리 기간 내에 사건을 처리했다고 하더라도, 어떤 소송당사자들에게는 그 기간이 너무 늦어, 재판을 진행하는 게 무용지물이 될 수 있다"라고 지적했다.

재판 지연이 인정될 경우 책정되는 연 1200유로 내외의 보상금도 논란거리다. 그레거 교수는 "임대인이 임차인을 강제퇴거한 사건이 있었는데, 재판 기간만 16년이었다. 그 가운데 7년의 재판 지연만 인정됐고 8700유로(약 1200만 원)의 보상금이 나왔다"면서 "당사자에게 8700유로는 의미가 없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반면, 미하엘 브레너(Prof. Dr. Michael Brenner) 예나 프리드리히-쉴러 대학교(Friedrich-Schiller-Universität Jena) 법대 교수는 "(입법 과정에서) 더욱 신속한 재판을 위해서라면 보상금으로 1만 유로를 책정했을 것이다. 하지만 충실한 재판을 하려는 판사에게 부담을 줄 수 있기 때문에 중간적인 선택을 한 것"이라고 밝혔다.

보상금이 큰 의미가 없다는 의견도 있다. 국가가 재판 지연을 인정한다는 것만으로도 어떤 사람에게는 충분한 위로나 보상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현재 독일에서는 소송 건수는 줄어드는데, 재판은 길어지고 있다. 법원 쪽은 그 이유로 사건의 복잡성을 내세우고 있다. 그레거 교수는 "책임을 돌리는 것 같다"라고 일침을 놓았다. 그는 "재판지연보상법은 의미가 있지만 한계가 있다. 근본적인 처방이 필요하다"면서 "재판 진행 단계별로 기간을 정해 재판 자체가 빨리 진행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근본적인 해결책"이라고 말했다.

재판지연보상법은 한국에도 도입될 수 있을까

재판지연보상법을 둘러싼 다양한 평가 속에서 모두가 동의하는 것은 법원과 판사들이 신속한 재판을 위한 노력을 시작했다는 점이다. 독일 판사의 입에서 이와 같은 말을 들을 수 있었다. 사회보장제도 관련 소송 항소심을 다루는 베를린-브란덴부르크주 사회법원(Landessozialgericht Berlin-Brandenburg) 37부(재판지연전담재판부) 자비네 유크나트(RnLSG Sabine Jucknat) 판사의 말이다.

"과거에는 재판지연 문제를 인식하지 못하다가 재판지연보상법이 생기면서 재판 지연에 더욱 민감하게 대응해야 한다는 인식이 생겼다. 또한 법원 내부에서 개별 판사 비판이 아니라 왜 재판지연이 발생하는지와 관련한 판사 교육 프로그램이 많이 진행됐다. 이로 인해 모든 판사가 그런 건 아니지만, 판사의 태도가 바뀌었다. 특히 의미 있는 지연 경고를 받으면 재판을 신속하게 진행하려고 노력한다."

그는 이어 "일부에서는 재판 지연 보상 청구 소송이 홍수처럼 쏟아질 것이라는 우려가 있었지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라고 말했다. 같은 법원의 토마스 드라파트(Dr. Thomas Drappatz) 공보판사는 "재판지연보상법 이전에는 재판이 지연돼도 소송당사자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었다"면서 "현재 권리구제수단이 마련된 것 자체가 큰 의미를 가진다고 할 수 있다"라고 강조했다.

유크나트 판사는 재판지연보상법의 한국 도입을 두고 신중한 입장을 내놓았다.

"사실 독일에서는 재판지연에 따른 보상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지만, 유럽인권재판소 판결에 따라 반강제적으로 도입하게 된 것이다. 한국에서도 판사에게 신속한 재판을 하라는 압력을 넣는 방안이나 재판 지연 보상 제도를 도입하기 위해서는 충분한 사회적 논의가 필요할 것이다."

10월 24일 베를린-브란덴부르크주 사회법원(Landessozialgericht Berlin-Brandenburg) 토마스 드라파트(Dr. Thomas Drappatz) 공보판사(왼쪽)와 재판지연전담재판부 유크나트 (Jucknat) 판사가 베를린과 브란덴부르크 주 문장 앞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 오마이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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