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국민은 신속한 재판을 받을 권리를 가진다." 헌법 제27조 제3항입니다. 하지만 이 헌법 조항은 잘 지켜지고 있지 않습니다. 재판 지연 문제가 날로 심각해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올바른 판결이 나왔다고 하더라도, 너무 많은 시간이 흐른 탓에 실질적인 구제를 받기 어렵거나 당사자가 사망했다면, 정의가 실현됐다고 할 수 있을까요. <오마이뉴스>는 '정의의 유효기간'이 지난 재판 지연 사례를 추적하고, 우리보다 먼저 사회적 논의를 진행한 독일에서 그 대안을 찾고자 합니다.[편집자말]

판사 출신인 더불어민주당 이탄희(오른쪽), 최기상 의원이 11월 23일 서울 여의도 국회 의원회관에서 재판 지연의 원인과 대책에 대해 답변하고 있다. 두 의원이 지난해 11월 판사 정원을 2026년까지 1000명 증원하는 법안을 발의했지만 국회 논의는 답보 상태다. ⓒ 남소연

"저는 '재판 늦게 해주면 우리 가족 다 죽어요, 그러면 당신은 살인자' 이런 서면을 받아본 적도 있다. 얼마나 무섭던지... (소송당사자가) 그걸 내더라도 법관들이 응답할 의무가 없다. 저도 응답을 못했다."

최기상 국회의원이 판사 시절을 회상하며 내놓은 말이다. 만약 법관들에게 여기에 응답할 의무를 부과한다면, 소송당사자의 어려움이 풀리고 신속한 재판이 이뤄질까. 최기상 의원의 생각은 "그렇다"이다. 그가 지난해 대표 발의한 민사소송법 개정안의 주요 내용이기도 하다.

"(소송당사자가 재판 날짜를 지정해달라고) 신청했을 때 적어도 (재판 날짜를) 지정하지 못하는 이유를 답하도록 의무를 부과한다면, 법관들이 처음부터 재판을 계획하고 진행할 때 헌법적 책무인 신속할 재판을 받을 권리를 보장해야겠다는 인식을 더 많이 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함께 자리한 이탄희 국회의원은 "'5분 재판', '서류 재판'을 없애야 한다"면서 거들었다. 그는 "신속한 재판을 위해서는 재판방식의 선진국화와 판사 수 증원이 필요하다"라면서 "(비유적으로 표현하면) 공장라인을 현대화하고 라인 수를 늘려야 한다. 과거와 같이 판결문을 많이 찍어내는 방식으로 돌아갈 수는 없다"라고 강조했다.

지난 11월 23일 재판 지연 문제 해결에 힘쓰고 있는 최기상·이탄희 의원(더불어민주당)을 국회의원회관에서 만났다. 아직 재판 지연 문제를 둘러싼 사회적 논의는 아직 활발하지 않은 상황에서, 두 의원은 21대 국회에 입성한 후 재판 지연 해결을 위한 여러 법안을 내놓았다.

최기상 의원은 20년 넘는 판사 생활을 했고, 2018년 상설화된 전국법관대표회의 초대 의장을 맡기도 했다. 그는 당시 '양승태 대법원'의 사법농단에 적극적으로 문제제기한 판사로 꼽힌다. 2008년 판사 생활을 시작한 이탄희 의원은 2017년 법원행정처의 판사 뒷조사를 폭로한 내부고발자로서 주목을 받았다.

재판 지연은 고등법원 부장판사 승진제도 폐지 탓?

최근 몇 년 동안 법원에서는 왜 재판 지연 문제가 심각해진 것일까. 일부에서는 고등법원 부장판사 승진제도 폐지 탓이라고 주장한다. 오석준 대법관은 지난 8월 인사청문회에서 "(제도 폐지로) 사건 처리가 늦어지게 되고 통계를 신경 안 쓰게 되니까, 폐단이랄까 부작용이 있는 건 부인할 수 없다"라고 말했다.

판사 출신인 최기상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11월 23일 서울 여의도 국회 의원회관에서 재판 지연의 원인과 대책에 관한 질문에 답하고 있다. ⓒ 남소연

- 재판 지연의 주요 원인이 고등법원 부장판사 승진제도 폐지라는 주장을 어떻게 생각하나.

최기상 : "민망한 분석이다. 전혀 동의할 수 없다. 최근 법관들이 신속한 재판을 할 의무·책무를 무겁게 받아들이는 부분이 많이 옅어졌다. 법관들이 헌법상 책무를 제대로 이행하도록 하는 법원행정처의 리더십 문제가 있다."

이탄희 의원은 재판 지연 문제를 '사법부의 저출생 문제'라고 비유했다. 이 의원은 "'판사 개개인이 일을 열심히 안 해서'라고 접근해선 더 안 된다. 저출생 문제를 요즘 청년들이 이기적이고 아이를 낳기 위해 희생하지 않는다는 것으로 연결하면 타당한 분석이 아닌 것과 같다"라고 지적했다. 그는 후진국형 재판방식과 판사 수 부족을 재판 지연의 주요 원인으로 제시했다.

"소액 재판은 '5분 재판'이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고, 형사재판은 '서류재판'이라는 악명을 가지고 있다. 공판중심주의의 핵심은 매일 법정을 여는 것인데, 그렇게 처리하는 사건의 비율은 1%도 안 될 것이다. 국민은 스마트폰을 원하는데, 방직공장에서 스마트폰을 만들 수 없다. 공장라인을 현대화하고 그 수를 늘리는 것처럼, 후진국형 재판방식을 바꿔야 하고, 판사 수를 증원해야 한다."

최근 불법파견 근로자지위확인 소송 등 노동사건에서 소송기간이 10년을 넘긴 경우가 잇따라 나왔다. 최기상 의원은 이를 두고 '계급 사법'이라는 말을 꺼냈다. 그는 "사건을 다루는 태도에 사법의 계급적 인식들이 반영되는 경우를 말한다"면서 "사법부나 헌재는 국민의 기본권·인권 보장을 위한 최후의 보루인데, 유독 노동사건에서는 산업과 기업에 미치는 영향을 과하게 생각한다"라고 지적했다.

지난 5월 헌법재판소는 집단적으로 근로제공을 거부하는 단순 파업에 업무방해죄를 적용해 처벌하는 것이 노동3권(단체행동권)을 침해하지 않는다는 '합헌' 결정을 내렸다. 헌법소원심판 제기 10년 6개월 만에 나온 판단이었다. 이 의원은 "만약 위헌 결정이 나왔다면, 지난 10년 동안의 판결을 다 뒤집을 수 있겠느냐"면서 "절차 지연이 결과에도 영향을 준 사례"라고 비판했다.

법원은 판사 수 증원을 원할까

3214명 → 4214명

이탄희·최기상 의원이 지난해 11월 발의한 각급 법원 판사 정원법 개정안의 내용이다. 5년에 걸쳐 판사 정원을 1000명 늘리자는 것이다. 지난 1년 동안 국회 법제사법위원회에서 이를 둘러싼 논의는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다.

- 왜 논의가 안 됐나?

이탄희 : "꾸준히 논의하려면 중점 심사 대상 법안으로 삼아야 하는데, 여야 합의가 필요하다. 여야 한쪽에서 중점적으로 처리하자고 하면 보통 정파적으로 상대방은 반대한다. 또한 부처에서 요구하는 경우엔 여야가 정파적 이익과 관계없이 중점 심사 대상 법안으로 올리는 경우가 많다. 결국 법원행정처가 원하는 법안이 아닌 경우에는 집중적으로 심사가 잘 안된다. 법원행정처에도 책임이 있다."

- 법원행정처는 판사 증원에 찬성하지 않나.

최기상 : "법원행정처에서 반대하지 않겠지만, 법무부·기획재정부가 반대할 테니 현실적으로 어렵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할 것 같다. 또한 국회의원들은 보통 시민들의 재판 지연에 대한 문제의식을 인식하지 못할 가능성이 크다. 국회의원들이 공직선거법 관련해서 당선무효형을 받으면 재판이 늘어질수록 좋은 것 아닌가."

판사 출신인 더불어민주당 이탄희(오른쪽), 최기상 의원이 11월 23일 서울 여의도 국회 의원회관에서 재판 지연의 원인과 대책에 대해 답변하고 있다. 두 의원이 지난해 11월 판사 정원을 2026년까지 1000명 증원하는 법안을 발의했지만 국회 논의는 답보 상태다. ⓒ 남소연

대법원은 지난 9월 재판 지연 문제가 심각한 상고심 개선안으로 대법관을 4명 증원하는 방안을 내놓았다. 이탄희 의원은 이를 두고 "언 발에 오줌 누기"라고 지적했다. 이탄희 의원은 지난 2020년 대법관을 현재 14명에서 48명으로 증원하는 법원조직법 개정안을 대표 발의한 바 있다.

"훨씬 더 적극적이고 큰 폭의 증원이 필요하다. 대법관 1인당 국민 수, 상고심 사건 수에 관한 통계를 감안하면, 우리나라 대법관 수를 4~5배 증원해야 OECD(경제협력개발기구) 평균 수치에 다다를 수 있다. 국민은 선진국 수준의 판결을 요구하고 있는 만큼, 대법관 숫자도 선진국 수준만큼 확보돼야 한다."

이 의원은 "법원이나 법조계에서 잘못 들고 있는 해외 사례가 미국 연방대법원 대법관이 9명이라는 것"이라면서 "우리나라 대법원 역할을 하는 곳은 주 대법원들이에요. 주 대법원에 있는 대법관들을 합치면 우리나라 대법관 숫자보다 몇십 배 더 많다"라고 말했다. 최기상 의원도 독일의 경우를 들면서 대법관의 대폭 증원을 강조했다. 독일의 경우, 일반법원과 전문법원에서 상고심을 담당하는 대법관 숫자는 모두 300여 명에 달한다.

- 법관의 다양성을 위해서도 필요하다고 법관 증원이 필요하다고 주장해왔다.

이탄희 : "올해 신규 판사 임용 예정자 7명 중 1명이 김앤장법률사무소 출신이다. 언론보도에 따르면 신임 법관 3명 중 1명은 강남3구 출신이고 강원도 출신 판사는 없었다. 기존 가지고 있었던 만큼의 다양성 수준이나마 유지하려면, 다양한 판사들이 법원에 진입할 수 있는 루트를 열어줘야 한다."

최기상 : "법관들은 살아온 만큼 재판한다. 법관을 한번 뽑으면 (임기가) 10년인데, 너무 허술하다. 약자 보호가 사법의 본령이다. 소수자와 약자들과 살아본 경험 없는 사람들이 어떻게 그 이해의 폭이나 깊이가 있을 수 있겠나."

독일 재판지연보상법은 대안이 될 수 있을까

독일의 재판지연보상법(법원조직법 198조, § 198 GVG)에 대한 관심도 커지고 있다. 독일에서는 2011년 마련된 재판지연보상법에 따라, 소송당사자는 재판을 지연시키는 재판부에 지연 경고(Verzögerungsrüge)를 할 수 있다. 과도한 재판 기간으로 불이익을 받은 경우 상급법원 등에 보상 청구 소송을 제기할 수 있다. 이는 재판 독립을 훼손하지 않는 선에서 판사의 신속한 재판을 유도하는 압력 또는 부담으로 작용한다는 점에서, 최기상 의원의 발의한 민사소송법 개정안과 유사한 점이 있다.

그 개정안에 따르면, 소송당사자가 재판 날짜를 지정해달라고 신청하면, 재판장은 이를 지정하거나 지정하지 못하는 이유를 설명해야 한다. 또한 재판장이 민사소송법 199조에 따른 5개월의 재판 선고 기간을 지키지 못할 경우, 그 사유를 당사자에게 설명하고 판결문에 기재해야 한다.

독일에서 재판지연보상법을 마련된 것은 재판 지연에 대한 권리구제절차를 마련하라는 유럽인권재판소의 판결에 따른 것이다. 과거 독일에는 재판 지연에 대한 권리구제절차가 없었고, 헌법재판소와 법원 역시 도움이 되지 못했다. 현재 우리나라 상황과 똑같다. 헌법 27조 3항이 신속한 재판을 받을 권리를 규정하고 있음에도 헌법재판소와 법원은 재판 지연에 따른 권리 침해나 손해를 호소하는 소송당사자의 손을 들어준 적이 없다. 이탄희 의원의 말이다.

"강제동원 피해 생존자와 유족 등이 법원행정처가 관여된 재판 지연을 두고 국가가 손해를 배상해야 한다는 취지의 소송을 냈다. 현재 1심 진행 중이다. 법원 판결을 통해 신속한 재판을 받을 권리가 구체적으로 확인되면 이를 근거로 더 많은 제도적 대안을 모색해야 한다. 독일의 재판지연보상법을 하나의 검토 대상으로 삼아, 좋은 제도를 설계할 때 참고할 수 있을 것 같다."

최기상 의원 역시 같은 의견을 나타냈다.

"독일의 논의는 우리 논의에 큰 도움이 될 것이다. 독일의 경우 법관 독립이 우리보다 더욱 엄격한데도 이런 제도를 도입한 것 아닌가. 우리나라도 (법관에게) 고의·과실이 있으면 국가배상청구소송을 제기할 수 있겠지만 관련 판례도 없고 그런 심리가 제대로 이뤄질 것이라고 기대하기 어렵다. 적어도 이 제도(재판지연보상법)는 고의·과실을 불문하고 (재판 지연에 따른 손실을) 인정하는 제도이기 때문에 의미가 있다. 국내 학자들이나 법원행정처가 도입 경위 등에 대해 연구를 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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