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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걸어서 역사속으로'는 국내 역사문화 유산의 멋과 서사를 찾아 떠나는 답사기입니다.[편집자말]
 
삼랑사지 겨울 풍경 1200년 전 어느 추운 겨울날 정수 스님은 이곳에서 황룡사 가는 길에 죽어가는 여인을 발견하고 그녀를 살렸다. ⓒ 홍윤호
 
얼어 죽어가는 여인을 끌어안고 살려낸 스님의 이야기
 
신라 제40대 애장왕 때(800~809) 일이다. 황룡사에 머물던 정수 스님은 눈이 많이 쌓이고 날이 저물어 추운 겨울날, 삼랑사에서 일을 보고 황룡사로 돌아오고 있었다. 날이 추워 발길을 재촉하면서 천엄사 문밖을 지날 때였다. 가난한 여인이 아이를 낳고 길바닥에 누워 있는데, 거의 숨을 쉬지 않아 얼어 죽기 직전이었다.

정수 스님은 이를 보고 망설임 없이 그 여인을 안아주었다. 스님의 체온 덕택에 여인은 한참 만에 의식이 돌아왔다. 정신을 차린 그녀에게 자신의 승복을 모두 벗어 덮어주고는 자신은 벌거벗은 채로 황룡사로 달려가 거적으로 몸을 덮고 밤을 보냈다.
 
한밤중에 궁궐 뜰에 하늘의 외침이 들렸다.

"황룡사의 승려 정수를 왕사로 봉해야 마땅하다."

궁궐에서 즉시 사람을 보내 조사하고 그 사실을 자세하게 전달했다. 이에 왕은 정수를 대궐로 맞아들여 국사로 삼았다.
 
<삼국유사> 제5권에 나오는 정수 스님의 이야기다. 눈 쌓인 추운 겨울날 밤 아이를 낳고 죽어가는 생모를 안아주고 옷을 벗어 덮어주어 살려낸 한 스님의 미담이자, 가난한 여인의 삶을 통해 빈부격차의 현실을 적나라하게 보여준 서사다. 당시 신라는 가장 화려한 전성기를 누리고 있었다. 이런 이야기를 하필이면 <삼국유사> 제5권 마지막에 실은 의도는 무엇이었을까.
 
삼랑사지 여름 풍경 지금은 당간지주 하나만 남아 있지만, 역사서에는 여러 번 기록에 나오는 오래된 사찰이다. ⓒ 홍윤호
 
당시 신라는 <삼국유사>에서도 묘사했듯 "시내부터 바닷가까지 집이 즐비하고 담장이 서로 이어져 있었으며, 초가집이 단 한 채도 없었던" 대도시였다. 집을 금으로 입힌 35개의 금입택(金入宅)이 있었으며, "길가에 노래와 음악 소리가 가득하여 끊이지 않았고, 숯으로 밥을 지어 먹어 땔나무를 쓰지 않았"다.
 
어쩌면 지금의 대한민국 이전까지는 가장 화려하고 풍족했을 통일신라의 수도는 사회적 번영과 문화 발전의 성수기였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그 신라의 정신세계를 이끈 불교 사찰 앞에서 가난한 여인이 아이까지 낳은 채 죽어가는 현실 또한 엄연히 존재했다.
 
저자 일연이 살았던 시기, 그리고 그가 <삼국유사>를 쓴 시기는 고려의 몽골 침입기였다. 그는 역사에 없었던 대규모 전쟁과 그로 인한 피해를 목격했다. 장기적 전쟁이 계속되는 가운데 수많은 민초들이 생존의 위기에 내몰리는 모습을 봤고, 그 와중에 자신이 몸담은 불교계의 타락상을 지켜보았다. 전쟁이 끝난 후 몽골의 병화로 불타버린 황룡사의 폐허를 목도하기도 한 승려였다.
 
그래서 그가 쓴 <삼국유사>에는 국가적 위기 상황에서 실추된 자존심과 주체성을 회복하기 위한 강렬한 역사의식이 나타나 있지만, 동시에 불교 설화의 외피를 입힌 불교계 비판, 화려함 뒤에 감추어진 허위의식과 권위 의식, 정치와 종교계의 타락과 부패를 비판하는 숱한 이야기들이 함께 실려 있다.

특히 이 이야기들에서 현실의 타락과 권위를 비판하기 위해 등장하는 절대적 권위자인 부처(혹은 다양한 모습의 보살)는 대부분 노인과 젊은 여성, 어린아이 등 힘없는 평범한 민초의 모습으로 나타난다. 이런 모습으로 형식과 권위, 신분의식에 얽매여 본질을 보지 못하는 권력가와 귀족을 꾸짖거나 비판한다.

단, 그렇다 해도 해피엔딩으로 끝나는 이야기가 많다. 그래도 일연은 희망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다. 정수 스님의 이야기는 그러한 많은 이야기들 중 하나이다.
 
한편 아무리 삼국의 역사를 다루었다고 하지만 그는 자신의 책에서 그 시대 최대의 성과물인 팔만대장경에 대해서는 단 한마디도 언급하지 않았다. 현실의 전쟁을 목격하고 숱한 사람들의 희생을 목격한 큰스님의 눈에는 큰 돈을 들여 부처님의 힘으로 몽골을 물러나게 하겠다는 그 발상이나 성과물이 그다지 탐탁하지 않았으리라.
 
해질 무렵 삼랑사지 당간지주에 걸린 저녁 해 삼랑사지는 해질녘에 가면 분위기가 있다. ⓒ 홍윤호
 
삼랑사지와 골프연습장의 불편한 동거
 
해질 무렵 삼랑사지에 들렀다. 폐사지의 해질녘 풍경은 스산하지만 마음을 착 가라앉히기도 한다. 저물어가는 햇살이 사찰터 전체를 비추면 그 안온한 햇살에 편안함을 느낀다.
 
사찰터는 경주의 서쪽을 관통해 포항으로 흘러나가는 형산강 바로 옆에 있다. 경주 시외버스터미널에서 500m도 채 안 되는 가까운 거리라서 걸어서도 10분 만에 갈 수 있다. 삼랑사지에 여러 번 걸어갔지만, 아직껏 이 거리를 걸어서 삼랑사지에 가는 다른 사람을 본 적은 없다.
 
삼랑사지는 경주에 여행 오는 사람들이 잘 들르지 않지만, 역사서에는 여러 번 이름을 남긴 사찰이다. 당시 경주에는 수많은 사찰들이 있었기에 역사서에 이름을 남긴 사찰들은 역사적 의미가 있는 사찰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지금은 달랑 당간지주 하나만 남기고 있는 폐사지에 불과하다. 그래도 사찰터만은 잘 정비돼 있어 당시의 규모와 성세를 어림잡아 가늠해 볼 수 있는 것이 그나마 다행이다.
 
유일하게 역사의 흔적을 남기고 있는 당간지주는 보물 제127호로 지정돼 있다. 높이는 3.66m. 비례와 균형이 잘 조화를 이룬 미끈한 몸체의 당간지주이다. 일반적인 통일신라의 다른 당간지주와 비교해서 크지도, 작지도 않은 적당한 높이와 굵기를 지니고 있다.

삼랑사는 진평왕 19년(597)에 창건됐다고 하는 오래된 사찰이지만, 당간지주는 통일신라의 일반적인 양식을 보이고 있다. 통일신라 때 경흥의 이야기가 남아 있는 것으로 보아 이 시기에 전체적인 중창이 이루어지지 않았을까 추측해 본다.
  
개인적으로 아쉬운 게 한 가지 있다. 삼랑사지 옆에 문을 닫은 골프연습장이 방치돼 있다는 점이다. 관광객이 거의 찾지 않는 곳이긴 하지만 역사서에 여러 번 기록이 남은 사찰이고 국가 보물로 지정된 당간지주가 우뚝한 사찰터인데, 주변 환경 정비가 잘 안 되는 듯해 안타깝다. 하지만 삼랑사지 일대만 문화재 보호 지정 구역으로 지정돼 있기 때문에 주변 사유지까지는 어떤 조치를 취할 수 없다. 새로운 발굴로 절터가 확장되거나 유물이 나오지 않는 한 현 상태가 계속될 수밖에 없다.

(* 통일신라의 빛과 그림자 - 경주 삼랑사지, 노서동 석불입상 ②로 이어집니다.)
 
삼랑사지와 골프연습장의 불편한 동거 삼랑사지 바로 옆에 이미 망해버린 골프연습장이 그대로 방치되어 있다. ⓒ 홍윤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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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작가, 문화유산답사 전문가, 역사 전공과 여행을 결합시켜 역사여행으로 의미를 찾는 사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