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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기사의 사진은 모두 네거티브 필름(Fuji C200)을 이용해 촬영 후 직접 스캔했으며 사이즈 조정 등 기본적인 보정만 했음을 밝힙니다.[기자말]
올 겨울 전북 지방에는 눈 대신 비가 많이 내렸다. 비단 전북 뿐아니라 강원 지역도 산간지방이 아니면 눈 구경이 어려웠다. 설경을 담기 위해서는 300km 이상을 운전해 인제나 평창으로 가거나 1000m 이상의 산을 올라가야했다.

그런데 전라북도에 대설주의보가 떴다. 2월 16일 오전부터 17일 오전까지 특보는 계속됐다. 17일 아침 최대한 간단히 가방을 챙겨 전주 한옥마을로 향했다. 기와지붕에 소복하게 내려앉은 눈을 한 달 넘게 기다리던 차였다.

카메라는 Contax S2를 챙겼다. 1992년도에 생산된 아주 오래된 카메라이지만 셔터스피드가 4000분의 1초까지 작동하고 렌즈 군의 해상력 또한 좋다. 노출계를 제외하고는 모든 파트가 배터리 없이 기계식으로 움직이기 때문에 추운 날에도 걱정없이 쓸 수 있다.

지붕 위로 눈이 쌓이는 소리가 들렸다
   
어느 골목에서 밤새 내린 눈이 깔끔하게 쌓여있다. ⓒ 안사을
    
야쿠르트 아줌마 눈길 위에서 천천히 동네를 누비시는 배달원 ⓒ 안사을
 
이른 아침이어서인지 인적이 드물었다. 굵은 눈 알갱이가 지면과 건물을 건드리는 소리만이 고요한 거리를 가득 메웠다. 거기에 오래된 필름카메라의 셔터 소리가 가끔 더해졌다. 평소엔 걷던 거리를 차를 타고 조금 더 돌다가 오목대 올라가는 길로 향했다. 그곳에서는 한옥마을을 위에서 내려다 볼 수 있다.

노상주차장은 텅 비어있었다. 차를 멈추고 카메라를 품 속에 넣은 채 계단을 올랐다. 눈발이 꽤 굵었다. 데크를 20m 정도만 걸어가면 기와지붕이 촘촘히 보이는 포인트가 나온다.
 
오목대 올라가는 길 저 계단을 올라 왼쪽으로 쭉 가면 오목대가, 조금 가다가 오른쪽으로 틀면 둘레길이 나온다. ⓒ 안사을
   
눈 내린 한옥마을 기와지붕이 촘촘히 있는 모양새가 마치 전시회장의 설치미술품 같다. ⓒ 안사을
 
눈은 고르게 전주의 기와지붕을 덮었다. 하얗고 공평한 풍경이었다. 이곳 한옥마을은 유명세를 띠면서부터 무분별한 상업 공간으로 변했다는 비판을 받기도 하지만 이런 모습을 보면 여전히 고전적인 미를 풍기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옛날에는 이 시각 즈음 집집마다 연기나 수증기가 올라왔을 것이다.

시간이 촉박해 서둘러 향교로 향했다. 말 그대로 '틈새여행'이었다. 출근 복장을 갖추고 이리저리 돌아다니는 마음이 분주하면서도 활기찼다. 그 와중에도 순간 순간 집중해 고즈넉함과 여유로움을 느낄 수 있도록 스스로 노력했다.

일방통행 구조 때문에 차로 향교를 가려면 전주천변길을 타게 된다. 편도 1차로의 길을 천천히 가다보면 간간히 마을이 보인다. 마침 눈이 펑펑 내렸고 어릴 적 살았던 동네의 향수가 물씬 다가왔다.
 
겨울 동네 함박눈이 펑펑 내리는 작은 마을 ⓒ 안사을
 
지나다니는 차가 한 대도 없어서 잠시 차를 멈추고 사진을 찍었다. '가랑비에 옷 젖는 줄 모른다'는 속담이 있지만 함박눈 또한 그에 못지 않았다. 젖는 줄 모르고 잠시 길을 오가다, 다시 운전석에 앉으니 머리와 어깨에서 물이 뚝뚝 떨어졌다. 

천변길(전주천동로)로 들어선 후 360m 정도 가면 전주향교문화관이 나온다. 여기서 좌회전을 하면 향교의 입구가 보인다. 입구에 세워진 누각은 '만화루'이다. 
 
만화루 "공자의 도로 만물이 화생한다"는 뜻을 가진 성어에서 따온 것. 많은 향교의 정문 누각에서 사용하는 명칭. ⓒ 안사을
    
내삼문 만화루(외삼문)을 지나면 보이는 내삼문 ⓒ 안사을

내삼문 안쪽으로는 중앙에 대성전이, 좌우에 동무와 서무가 있다. 이 세 건물은 유생들이 공부했던 공간이 아니라 공자 및 많은 성현들의 위패를 모신 곳이다. 보통 향교는 명륜당이 앞에 있고 대성전이 뒤에 있는데 전주향교는 전묘후학의 배치가 특징이다.

대성전 뒤로 가면 명륜당과 동재, 서재가 있고 그 가운데 유명한 은행나무가 있다. 그곳까지 가보고 싶었으나 틈새여행의 시간적 한계도 있었고, 전체 정경을 담고있는 다른 이들을 배려하는 차원에서 다시 내삼문과 외삼문을 차례로 통과했다.
 
대성전 눈발이 조금 약해지기를 기다렸다가 담은 사진 ⓒ 안사을
   
외삼문과 내삼문 사이의 뜰 첫 발자국을 남기고 싶었지만 다른 이를 위해 남겨두었다. ⓒ 안사을
 
두 번에 걸친 진안 틈새여행

한옥마을 출사 후 곧바로 서둘러 출근을 하고 조금 이른 퇴근을 했다. 오후 세시 쯤이었는데 전주에서 진안까지 한 시간이면 충분하니 어둡기 전에 몇 컷의 사진을 담을 수 있을 것 같았다. 화심마을에서 동상면으로 올라가는 길을 택했다.

눈이 그치긴 했지만 고도가 높고 응달진 곳이 많은 도로라 눈이 그대로 쌓여있었다. 언덕의 높은 곳에 잠시 쉬어갈 만한 주차장이 있어서 잠시 차를 멈췄다. 올 겨울 내 고장에서 처음 밟아보는 두꺼운 눈이었다.   
 
동상로 언덕에서 퇴근 복장 그대로여서 발목까지 쌓인 눈이 신발 속으로 계속 들어왔다. ⓒ 안사을
     
멀리 보이는 밤티마을 전 사진의 주차장에서 내려다보이는 마을. 운장산 자락에 둘러싸여있다. ⓒ 안사을
   
일몰까지 시간이 별로 없어서 주로 지방도를 돌며 경치를 감상했다. 함박눈이 계속 내리기 그치기를 반복했다. 눈이 내릴 때는 굵은 눈발이 운치있었고 잠시 그칠 때는 멀리까지 보이는 경치가 아름다웠다.

전주로 복귀할 때는 모래재길을 통해 내려왔다. 보룡재를 통과하는 전진로보다 경사가 급하고 좁은 옛길이다. 어둠이 빨리 내려 아쉬웠지만 다음 날 아침 일찍 다시 올 것을 마음 속으로 기약하며 아쉬움을 달랬다.
  
빨간 트랙터 온 세상이 하얗게 되니 농기계마저 그림같았다. ⓒ 안사을
 
눈꽃이 활짝 모래재 중간에 있는 나무에 눈꽃이 활짝 피었다. ⓒ 안사을
 
다음 날 아침, 해가 뜨기도 전에 차에 시동을 걸었다. 주어진 시간은 2시간이 채 되지 않았다. 보룡재를 넘어간 뒤 모래재보다 더 옛길인 곰티재를 넘어 복귀할 예정이었다. 곰티로는 아직도 포장돼 있지 않다. 진안에서 전주방면으로 모래재로를 타고 가다가 신정리 장승마을에서 곰티로로 갈아탄 후 소양면 신촌리 방향으로 가면 된다.

이곳은 '겨울왕국'이었다. 가드레일이 없는 임도에 눈이 두껍게 쌓여있었고 먼저 지나간 차들의 발자국이 있었다. 새 눈은 비교적 미끄럽지 않지만 밟힌 눈은 더 미끄럽기에 조심스럽게 차를 몰았다. 날씨도 참 좋아서, 출근만 아니었으면 중간에 차를 멈추고 만덕산 정상까지 걸었을 것이다.
 
곰티로에서(1) 비포장도로의 시작점(사진의 역방향)이자 겨울왕국의 시작점 ⓒ 안사을
   
곰티로에서(2) 밝은 아침햇살이 눈꽃을 더욱 새하얗게 만들었다. ⓒ 안사을
   
곰티로에서(3) 익산-포항 고속도로 아래를 지나면 곧 신촌리에 다다른다. ⓒ 안사을
 
꼭 거창해야만 여행은 아니다. '틈새여행', 가끔은 '쪽여행'이라고 부르기도 하는 이런 짧은 여정은 마음을 살찌운다. 물론 일상 속에서 이 정도의 자투리 시간이 자주 찾아오지는 않는다. 하지만 마음 속에 틈새여행의 소망을 품고 사는 사람이라면 갑자기 찾아온 시간의 조각을 금세 여행으로 탈바꿈할 수 있을 것이다.
태그:#전주, #진안, #겨울여행, #필름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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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립 대안교육 특성화 고등학교인 '고산고등학교'에서 교사 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필름카메라를 주력기로 사용하며 학생들과의 소통 이야기 및 소소한 여행기를 주로 작성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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