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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전 근 10년만에 화엄사에 다녀왔습니다. 당시 학창시절 큰 맘 먹고 나섰던 지리산 종주의 출발지로 들렀던 터라 제대로 감상하지 못해서인지, 아니면 짧지 않은 세월이 흘러서인지 마치 처음 가본 곳 같더군요. ^^
어쨌든 너무나 유명한 사찰이라 한번쯤 가보신 분들도 참 많을 것 같은데요. 규모도 규모이거니와 무게감이 절로 느껴지는 절이니, 쉬어가는 편안한 마음으로 함께 방문해 보시면 좋을 듯 합니다. 자 그럼 출발...~~


대구에서 화엄사까지는 대략 2시간 30분정도 걸립니다. 따로 소개하겠지만 섬진강을 옆에 두고 가는 길이 드라이브코스 유명한 벚꽃길이라 그것만으로도 유명하죠. 
주차장에 주차를 하고 조금 걸어가면 이렇게 입구가 나타납니다. 조금은 왜소해 보이는 첫관문인데요. 요기를 지나면 본격적인 웅장함을 만날 수 있으니 실망은 금물...^^. 
현판에는 지리산화엄사라고 새겨져 있습니다. 관문일뿐이지만 상단의 장식들이 예사롭지 않네요. 

화엄사

화엄사(華嚴寺)는 전라남도 구례군 마산면 황전리에 위치한 백제 시대 사찰로 지리산 국립공원 내에 위치하고 있다. 이 절이 이름 높은 까닭은 신라 문무왕 때 의상대사(義湘大師)가 ‘화엄경’을 선양하여 화엄 10대 사찰의 하나가 된 때문이다.

544년(백제 성왕 22년, 신라 진흥왕 5년)에 연기조사(緣起)가 창건하였다. 절 이름은 화엄경(華嚴經)의 화엄 두 글자를 따서 붙인 것이라고 한다. 643년(선덕여왕 12)에 자장법사(慈藏)이 증축하였고, 석존사리탑(釋尊舍利塔)·7층탑·석등롱(石燈籠) 등을 건조하였다.
《봉성지(鳳城志)》에 따르면, 신라 문무왕 때 의상국사(義湘國師)가 왕명을 받아 석판에 화엄경 80권을 새겨 절에 보관하고 있다고 하였다.
875년(헌강왕 1) 도선(道詵)이 다시 증축했다.
1593년(선조 26)에 불타 버리고 1630년 벽암선사(碧巖禪師)가 7년을 걸려 재건하였다. 대웅전은 1636년(인조 14)에, 각황전(覺皇殿)은 1643년(인조 21)에 보제루(普濟樓)·명부전(冥府殿)·원통전(圓通殿)·영산전(靈山殿)·응향각(凝香閣)·적묵당(寂默堂)·금강문(金剛門)·천왕문(天王門) 등이 차례로 복구되었다.
그 후 1701년(숙종 27)에 화엄사를 선교양종(禪敎兩宗)의 대가람(大伽藍)으로 하였다

-위키백과-

▶ 참조 : 화엄사 홈페이지 
http://www.hwaeomsa.org/



방문객을 위한 배려인지, 입구부근에 이렇게 목을 축일 수 있는 샘이 자리잡고 있습니다. 


금강문이네요. 본격적으로 경내에 들어설때 처음 만나는 관문입니다. 


어느 사찰이든 입구에서 가장 흔하게 만나는게 사천왕상인데요, 화엄사는 이렇게 이름모를 이들이 먼저 반겨주는 군요. 장사와 코끼리를 탄 소년....뭔가 이야기가 있을 것 같은 구성인데요. 미처 거기까지 살피고 오지는 못했습니다. 일단 패스...~~^^


금강문을 지나쳐 몇걸음 가면 바로 이어진 건물이 천왕문입니다. 4천왕상이 특유의 부릅뜬 눈과 장식, 그리고 무기를 챙겨들고 있습니다. 역시나 발밑에는 도깨비들을 밟고 서 있습니다. 

전 어딜 가든 이 우락부락한 분들 보는게 참 재밌더군요. ^^


경내에 들어서면 요렇게 방문객들을 위한 샘이 다시 마련되 있습니다. 역시 맛은 한번 봐야죠..^^ 


화엄사는 독특한 건물들이 꽤 많습니다. 대웅전에 오르기전 아래쪽에 세워진 보제루도 그중하나인데요. 지면에서 무릅길이 정도 띄워서 지어진 건물로 승려분들이 모일때 사용하는 일종의 강당입니다. 군더더기 없는 장식이지만 마치 학교를 연상시키는 이유도 그때문인듯 합니다.


보제루를 지나 대웅전 바로 아래에 세워진 보물132호 동오층 석탑입니다. 화려하지는 않지만 주변과 잘 어울리는 것 같습니다. 사진에 없지만 왼쪽편에 거의 같은 석탑이 하나 더 있습니다. 


대웅전입니다. 어느 절에든 가면 가장 중심에 가장 잘 보이는 곳에 가장 큰 건물이 대웅전인데요. 화엄사는 특이하게 좀 있다가 보실 각황전이 이 대웅전보다 훨씬 웅장합니다. 그래도 역시 규모는 다른 사찰의 대웅전보다 작지 않습니다. 게다가 위치나 전망은 대웅전이 가장 중심이더군요. 보물299호로 지정되 있습니다.


짜잔 드디어 오늘의 주인공(?) 각황전입니다. 사실 화엄사에 다녀와서 꼭 포스팅을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게한 장본인인데요. 느끼셨는지 몰라도 사실 화엄사 자체에 대해서는 별루 할 이야기가 많지 않더라구요. 그래서 사실 사진도 제대로 안찍고 주로 눈으로만 보고 있던 차에 각황전이 떡하니 눈에 확 들어온 겁니다. 
사진으로도 느껴지겠지만 각황전은 우선 그 크기가 사람의 시선을 압도합니다. 게다가 그냥 크기만 큰게 아니라 뭐랄까요. 카리스마가 있는 건물입니다. 

각황전

국보 제67호. 본래 이름은 장육전. 부처님의 몸을 가리켜 장육금신(丈六金身)이라고 해서 본래 장육전에는 석가 여래의 모습만한 금색의 불상을 모셔놓았던 것으로 추정되고 있으며, 본래 이 건물은 신라 문무왕 10년(670)에 의상대사가 3층, 사면 7칸의 장육전을 건립하고 사방벽에 화엄석경을 새겼다고 하나 애석하게도 장육전은 임진왜란 때 불타버려 당시의 모습이나 불상은 찾아볼 수가 없다. 화엄사가 임진왜란 때 소실된 후 30년 만인 조선 인조 14년(1636) 벽암선사가 복구했으나 각황전만은 복구되지 못했다가 조선 숙종 25년(1699) 계파대사가 중건했다. 현재의 건물은 1643년(인조 12)에 재건한 것이다. 성층(成層)으로 높이 쌓은 석단(石壇) 위에 서향(西向)하여 서 있다. 정면 7칸(26.8m), 측면 5칸(18.3m), 높이 15m로 내부 전체가 한 칸의 방으로 만들어졌다. 충층(中層)의 웅대한 건축물로써 그 내부에는 청판(廳板)을 깔아 중앙의 5칸 3면에 기둥을 세웠다. 기둥 하나 하나는 한 그루의 나무로만 만들어져 있다. 중앙에 불단을 설치하여 거대한 불상을 안치하고 천장을 우물정자 모양으로 주변이 경사지게 한 것은 우리나라에서 그 예가 드물다.

-위키백과-


각황전 내부 모습입니다. 겉에서 보면 3층으로 보입니다만 실제로 안쪽은 층이 없이 모두 한칸으로 틔워져 있습니다. 


커다란 기둥이 줄지어 서있는 것도 특징인데요. 워낙 규모가 큰 건물이다보니 기둥들의 규모도 예사롭지 않습니다. 또한 주요 기둥들은 모두 나무 한그루씩 통째로 들어가 있습니다. 천장에도 굵은 나무들이 서로를 의지하며 거대한 건축물을 떠 받들고 있네요.


안쪽 공간이 넓어서인지 불상들도 왠지 조금 작아보이는데요. 뒤 배경의 벽화들과 잘 어우러져 소박하면서 안정된 느낌을 줍니다. 


천장입니다. 좀 어두운 실내라 제대로 안 찍혔는데요. 꽃문양으로 보이는 바둑판형 도안입니다. 


다른 쪽에서본 나무기둥 모습입니다. 이 기둥은 위쪽이 조금 굽은 모양이군요. 각황전을 지었던 목수들의 모습이 떠오르네요. 참 대단하죠. 어떻게 이런 건물을 지을 수 있었을까요. 크레인도 전기톱도 없던 시절에 말이죠. 이 거대한 기둥들도 어떻게 세웠던 걸까요. 


각황전 바깥쪽 기와아래 부분들은 의외로 소박합니다. 만들었던 당시엔 있었을런지 모르지만 알록달록한 단청은 찾아볼수 없습니다. 나무 고유의 빛깔이 그대로 드러나 있는데요. 그럼에도 아주 잘 짜맞춰진 조립식 조각품같이 보일 정도로 오밀조밀한 느낌을 주네요. 


한쪽 처마 끝엔 풍경이 달려있습니다. 역시나 별다른 꾸임없는 모습입니다. 


옆면의 문도 마찬가지입니다. 군더더기없는 깔끔한 모습입니다. 햇볕이 조금씩 올라 두드릴뿐 아무도 쉽사리 손대지 못할 것 같습니다. 


하나 하나 손으로 깍아 짜맞추었을텐데요. 요즘 공방에 재미를 들여서 그런지 예사로 보이지 않더군요. ^^. 그냥 잘 만든게 아니라 아름답기까지 하니..참 대단합니다. 


각황전 뒤로 대웅전과 각황전 앞 석등이 보입니다. 뒤쪽에 겹겹히 자리한 산들과 참 잘 어우러진 모습이네요. 한폭의 그림 같죠. ^^ 저 석등도 국보 12호입니다. 현존 석등 중에 가장 크다고 합니다.


각황전 뒤를 올라가는 계단 옆으로 동백숲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순식간에 숲속에 들어선 듯 합니다. 계단을 따라올라가면 석가모니 진신사리를 모신 적멸보궁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잠시 계단을 올라가면 나타나는 석탑인데요. 모양새가 예사롭지 않습니다. 잠시 공부좀 하고 가실까요..^^. 옛유물들도 알고 보면 다르게 보인답니다.

화엄사 사사자삼층석탑

국보 제35호. 높이 6.7m. 사사자삼층석탑은
 불국사 다보탑과 비교되는 탑으로 그 형식면에서도 아주 독특하다. 기본 구조형은 2층기단 위에 삼층석탑의 기본형을 따르고 있으나 상층기단에서 특이한 의장(意匠)을 보인다. 하층기단면에는 3구씩의 안상을 조각하여 그 안에 천인상(天人像)을 양각하였고 모두 보관(寶冠)과 영락(瓔洛)으로 몸을 장식했다. 삼층기단은 우주(隅柱)를 대신하여 암수 두 쌍의 사자를 배치하고 두상에는 연화대를 얹어 갑석을 받치고 있다. 탑신부는 일반형의 탑신과 같으나 1층 탑신 사면에 문살형을 모방하여 조각하고 그 좌우로 인왕상, 양측면에 사천왕상, 배면에 보살상을 양각했다.석탑 바로 앞은 화엄사를 창건한 연기조사의 어머니인 비구니의 모습이라고 하면 석등의 무릎을 꿇어 앉아 있는 숭상은 어머니에게 효성이 지극하였던 연기조사가 차공양을 하는 모습이라고 한다.이 탑에서는 통일신라시대 당시 신앙의 일면과 함께 조각의 독특한 재주를 엿볼 수 있으며 현재 국내에 남은 사자탑 가운데 가장 우수한 작품으로 불국사의 다보탑과 함께 한국석탑의 쌍벽을 이룬다.

-위키백과-


사사자삼층석탑 맞은편엔 설명에 나와있는 연기조사의 모습입니다. 사사자석탑에 있는 어머니에게 차를 올리는 모습입니다. 효성이 아주 지극했다고 합니다. 

건물마다 보물, 국보가 즐비한 화엄사인지라 제대로 담아오지 못한 것이 아쉬운데요. 다른 건 몰라도 각황전 만큼은 꼭 한번 가서 찬찬히 보시고 마음에 담아오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마지막으로 소설 태백산맥에 등장하는 각황전 목수 이야기를 소개합니다. 

각황전을 이루어낸 그 어느 이름 모를 목수의 금강석같이 견고한 신심과 원력 앞에 삭발승의 부끄러움이 새롭게 도지는 탓일 것이었다. 
열아홉 나이에 불사에 참여한 그 목수가 각황전을 다 짓고 났을 때는 일흔아홉이 되어 있었다 한다. 실로 60년의 세월이 흘러간 것이고, 그는 그동안 각황전 언저리를 한 번도 벗어난 일이 없었다. 
완공과 함께 머리에 동여맨 수건을 푼 그는 각황전 돌계단을 걸어내려와 뒷개울로 사라졌다. 그는 한나절이 넘도록 몸을 씼었다. 그리고 그날 밤 조용히 눈을 감았다.
그가 눈을 감자 어둠에 묻혀 있던 경내가 갑자기 휘황한 빛으로 밝아졌다. 놀란 대중들이 밖으로 나와 보니 한 마리의 백학이 현란한 빛을 뿜으며 각황전 위를 너훌너훌 날고 있었다.
그 백학은 각황전 위를 세 번 돌고는 홀연히 어디론가 사라졌다. 
그 목수를 어찌 기술자라고만 부를 수 있을 것이가. 각황전이 어찌 솜씨로만 이룩되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인가. 솜씨 뛰어난 기술자였을 뿐이라면 그 목수가 어찌 60년의 세월을 견디고 참아낼 수 있었을 것인가. 
매시가 차가운 인내로 채워졌음이고, 하루하루가 뜨거운 신심으로 타올라 마침내 시공계를 초월하는 경지에 들어 60년을 하루로 초월한, 청정한 영혼이 빚어낸 솜씨는 또 어떠했으랴. 이미 범상을 벗어난 그 솜씨로 빚어낸 것이기에 각황전은 저리도 빼어나고 신비로운 불전이 된 것인가.

- 태백산맥 2권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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