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옛날 포스팅/북 리뷰

우리는 독도에 대해서 얼마나 알고 있는가?

반응형

고요 속의 폭풍이라는 말이 딱 어울리는 요즘이다. 인터넷 공간에서는 그야말로 폭풍이 휘몰아치고 있지만  오프라인 특히 언론에서는 남의 나라 일인양 침묵 모드가 진행형이다. 15만건의 댓글도 뉴스가치로서 인정받지 못하는 대한민국 언론 현실을 안타까워해야 할지, 분노해야 할지. 분명한 것은 21세기 우리가 처한 현실이라는 것이다.

대한민국 언론이 외면하는 가운데 왜 누리꾼들은 수많은 댓글로 인터넷을 뜨껍게 달구고 있는 것일까? 2008년 한일정상회담에서 일본 후쿠다 야스오 총리가 '교과서에 다케시마로 쓸 수 밖에 없다'고 말하자 이명박 대통령이 '지금은 곤란하다. 기다려달라'고 발언한 내용 때문이다. 당시 이 내용을 보도했던 일본 유력 일간지 요미우리 신문은 당시 기사가 오보가 아니었다고 주장하고 있다. 반면 우리 정부는 명백한 오보라며 맞대응을 한다면 일본의 전략에 말려드는 꼴이라며 애매모호한 답변만을 되풀이하고 있다. 이 발언이 사실이라면 영토 관련 문제에 대한 군통수권자로서의 자격에 분명한 결격사유가 됨은 자명한 일이다. 


한∙일간 독도 문제가 불거질 때마다 주목을 받는 웹사이트가 있다. 사이버 외교 사절단 역할을 자임하고 있는 ‘반크(VOLUNTARY AGENCY NETWORK OF KOREA, www.prkorea.com)’라는 단체이다. 반크는 1999년 출범 이래 세계 각국의 웹사이트나 교과서 등에 노출된 한국에 대한 왜곡된 정보를 바로잡는 일을 해오고 있다. 특히 일본의 독도를 비롯한 역사왜곡에는 숨어있던 역사 자료들을 발굴해 일본의 주장을 무력화시키곤 했다. 반크의 이런 활동은 우리 정부의 안일한 독도 문제 대응에 경종을 울리는 계기가 되었다.

[우리역사 독도]의 저자 호사카 유지 교수는 일본 출신 귀화 한국인이다. 고국을 등지면서까지 ‘독도는 대한민국 땅’이라고 주장하는 그의 모습에서 학자적 양심이란게 바로 이런 거구나 하는 숙연함이 느껴진다. 그렇지만 유지 교수는 독도 문제에 대해 맹목적인 한국편(?)만 들지는 않는다. 독도가 우리역사라는 주장에 대해서는 역사고증을 통한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주장을 펼친 반면 우리의 안일하고 맹목적인 ‘독도는 우리땅’에 대해서는 날카로운 비판을 숨기려 하지 않는다.
 

저자는 새 정부가 출범할 때마다 강조하는 ‘미래지향적 한∙일관계’와 ‘조용한 외교’에 대해 가차없는 비판을 내뱉는다. ‘미래지향적’이라는 용어 자체가 일본이 과거 침략역사를 은폐하기 위해 사용해 왔다는 점에 주목한다. 미래지향적 관계의 시작은 잘못된 과거에 대한 청산으로부터 시작해야 한다는 것이다. 또 현재 우리나라가 독도를 실질적으로 지배하면서 굳이 긁어 부스럼내는 게 마땅치 않아 조용한 외교를 강조하지만 그사이 일본은 국제사회에 독도의 한국지배의 부당성을 알리는 데 열을 올리고 있다는 것이다.

정부의 이런 잘못된 독도 인식으로 인해 국제사회에서는 독도가 한국땅이라기보다는 일본땅이라는 인식이 지배적인 것도 사실이다.

저자는 독도문제를 고찰하는 일본인들의 시각을 역사적으로 논리적으로 반박하면서 독도가 우리땅이라는 합리적인 결론을 도출해 낸다.
저자는 일본인들의 영토문제를 고찰하는 시각을 다음과 같이 네 가지로 정리한다.

첫째, 문제의 땅 독도는 역사적으로 어느 나라가 먼저 자국의 땅이라고 인식했는가?

둘째, 독도는 역사적으로 어느 나라가 실효지배를 해왔는가?


셋째, 어느 나라가 먼저 독도를 자국의 영토라고 선언했는가?


넷째, 독도는 국제법이나 국제조약상, 현재 어느 나라 영토로 되어 있는가?


일본이 독도에 대해 알기 시작한 시점은 일본학계에서도 17세기 이후라는 시각이 지배적이다. 반면 우리는 삼국사기에 따르면 이미 5세기 신라 이사부가 우산국을 정벌했다는 기록이 나온다. 당시 울릉도를 우산국이라고 했기 때문에 일본에서는 독도에 대한 직접적인 언급이 없다고 주장하지만 독도가 울릉도에서 가시거리에 있기 때문에 일본의 주장은 억지에 불과하다. 즉 7세기에 편찬된 일본에서 가장 오래된 역사서인 [일본서기]에도 8세기에 제작된 관찬지도인 [쿄키도]에도 울릉도나 독도에 대한 언급은 없다. 반면 우리는 고려시대를 거치면서 조선시대에 이르는 역사서에 울릉도에 대한 언급이 꾸준히 제기되어 왔고 15세기인 조선 세종 때 비로소 울릉도와 독도가 ‘무릉도’와 ‘우산도’로 정립되기에 이른다.

일본이 독도가 자기 땅이라고 우기는 것 중에 하나가 역사적으로 한국이 독도를 실효지배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아마도 조선 태종 이후 왜구의 침략이 잦아져 공도정책을 시행함으로써 울릉도에 사람이 살지 않았다는 것 때문에 이렇게 주장하고 있으나 공도정책 또한 우리의 주권이 울릉도와 독도에 미치고 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즉 사람이 살지는 않았지만 울릉도와 독도는 여전히 조선의 영토였다는 것이다.

일본이 독도의 자국의 영토로 선언한 때는 1905년이다. 기존에 일본은 울릉도를 다케시마(竹島), 독도를 마쓰시마(松島)라고 불렀다. 현재 일본이 독도를 다케시마로 부르는 것도 1905년 이후인데 역사적 근거없이 무리한 주장을 하다보니 생긴 오류라고 할 수 있다.

독도 문제에 있어 가장 빠질 수 없는 인물이 안용복이다. 소위 ‘울릉도 쟁계’라 부르는 울릉도를 둘러싼 조일분쟁의 중심에 서 있는 인물이다. 조선어민들과 일본어민들이 충돌한 후 일본으로 연행된 안용복이 조선으로 송환되면서 양국간에 울릉도(독도 포함)에 대한 영토문제가 서류상으로 정리가 되는데 에도 막부가 울릉도를 조선땅으로 인정하기에 이른다. 안용복은 2차 도일을 통해서도 울릉도가 조선땅임을 재차 확인하는 성과를 거두게 된다. 그러나 일명 ‘안용복 사건’은 대마도주의 아버지 소 요사자네가 다이라노 요시자네라는 이름으로 보낸 답신에서 조선의 잘못을 하나하나 지적함으로써 현재까지도 울릉도와 독도 영유권 문제의 불씨로 남아있다.


일본이 국제적으로 독도가 자신들의 땅이라는 점을 줄기차게 제기하고 있는 근거가 되는 사건이 바로 1951년 패전국 일본과 연합국 사이에 조인된 [샌프란시스코 조약]이다. 당시만 해도 미국을 비롯한 연합국이 독도를 일본령으로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1952년 일본은 의도적으로 독도를 미국의 폭격 연습장으로 제공했다. 그러나 우리 정부의 항의로 미군은 독도를 폭격 연습장에서 해제했다. 미군이 독도를 한국령으로 인정했다는 충분한 근거가 되는 것이다.

호사카 유지 교수는 독도 문제에 대한 우리의 대응방식으로 [손자병법]의 知彼知己면 百戰百勝이라는 문구를 강조한다. 앞서 간단히 언급했듯이 일본은 역사적으로 독도가 일본 영토였다는 근거를 찾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국제사회에 대한 꾸준한 설득과 홍보로 독도를 분쟁 지역화하고 있다. 우리도 향후 독도에 대한 논리적 근거를 발굴해 국제사회를 설득한다면 일본의 왜곡된 주장은 한낱 물거품으로 사라질 것이다.

1980년대 초 정광태가 불러 유행시킨 [독도는 우리땅]이라는 가요가 있다. 당신의 독도에 대한 지식이 이 노래 가사 수준에 머물러 있다면 [우리역사 독도]를 꼭 한번 읽어보기 바란다.

*집은 책으로 채우고 화원은 꽃으로 메꾸어라*

신화읽기의 길라잡이;이윤기의 신화 시리즈

2011년 여강여호 서평도서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