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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 포스팅/한국대표단편소설

소금이 조미료? 소금은 생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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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경애의 <소금>/1934년

내가 태어난 곳은 신안의 작은 섬마을이다. 지금은 어느분 때문에 유명해지기는 했지만 어릴 때만 해도 육지구경은 연례행사가 될만큼 낙도 중의 낙도요, 오지 중의 오지였다. 으레 섬이라면 다들 주업이 어업일 거라고 생각하지만 섬주민 대다수는 농업에 종사하고 있다. 비단 내가 태어난 섬만의 특성은 아니다. 굳이 바다와 관련된 업종이 있다면 갯벌이 잘 발달되어 있는 탓에 염전이 많다는 것이다. 세계 3대 갯벌 중 하나인 신안에서 생산되는 소금은 세계적으로도 그 명성이 자자하다. 소금 얘기를 시작하려다 잠시 옆길로 새고 말았지만 지금도 소금을 볼 때면 어릴 적 소금창고에 대한 공포와 호기심에 대한 추억에 잠기곤 한다.

소금의 역사는 지구의 역사다. 또 인류의 역사이기도 하다. 지구 생성 당시 지표의 바위에서 뿜어져 나오던 스증기와 염화수소가 바위 속 산화나트륨과 충돌해 그 중 이루가 염화나트륨이 되어 증발한 후 차츰 지구가 식으면서 수증기가 비가 되어 내릴 때 소금이 함께 녹아 땅에 쌓이며 바다가 생성되었다고 한다. 중앙대 식품공학과 하상도 교수에 따르면 인간에게 소금은 생존과 직결되기 때문에 오래 전부터 소금을 얻기 위해 투쟁이 있어 왔으며 고대에는 소금이 권력이고 부의 원천이었다고 한다. 또 조선시대에는 소금을 생산하는 어민들에게 일정한 세금을 징수하고 자유로운 유통과 처분의 권한을 부여하는 사염제와 관염제가 병행되었으며 소금의 완전 전매제는 일제시대부터 시행된 제도로 1961년 염전매법이 폐지된 후 종전의 국유염전과 민영업계로 양분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고 한다.

강경애의 소설 『소금』은 인간의 생존과 직결되는 소금을 매개로 어느 여인의 기구한 삶을 통해 일제 강점기 조선민중의 궁핍한 삶과 현실을 자각해 가는 과정을 숨가쁜 전개로 풀어나가는 작품이다. 일제 강점기 조국과 타국의 중간지점이었던 만주로 이주한 봉염의 어머니는 공산당에게 남편과 아들을 잃고 지긋지긋한 가난에 두 딸마저 잃어버린 시대의 아픔을 온 몸으로 부대끼며 살아가는 인물이다. 소설 내내 그녀의 분노는 공산당과 가난에 집중된다. 그러나 어떤 사건을 계기로 시대의 모순을 자각하는 과정에서 민중들이 기대야 할 이데올로기를 깨닫게 된다는 카프계 문학이다. 물론 강경애는 당시 카프에서 활동한 적이 없는 작가지만 그녀의 소설은 짙은 카프적 경향을 띠고 있다.

그렇다면 소설에서 '소금'은 어떤 상징적 의미를 지닐까?

소금은 삶을 영위하는 최소한의 조건이다

웰빙과 다이어트가 대세를 형성하고 있는 요즘에야 건강상 이유로 소금에 대한 시선이 바뀌었다고는 하지만 우리 몸이 정상적으로 작동하는데 소금은 없어서는 안될 필수 영양소라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소금이 없다면 더 이상 인간으로서의 기능은 할 수 없다. 즉 앞서도 언급했듯이 소금은 인간의 생존과 직결된다. 소금은 생명이다. 그렇다면 소설 『소금』에서 소금이 의미하는 바는 분명해 진다. 

어떤 때 남편은 식욕을 충동시키고자 하여 고춧가루를 한 술씩 떠넣었다. 그러고는 매워서 눈이 뻘게지고 이맛가에서는 주먹같은 땀방울이 맺히곤 하였다. "고춧가루는 왜 그리 잡수셔요" 하고 그는 입이 벌어지다가 가슴이 무둑해지며 그만 입이 다물어지고 말았다. 동시에 음식을 맡아 만드는 자기, 아아, 어떻게 해야 좋을까? -『소금』 중에서-

이 부부에게 이 가족에게 소금은 단순히 입맛 돋우는 조미료가 아니다. 생존을 위해 끊임없이 투쟁해야 하는 대상이다. 소금이 없으니 메주는 썩기 일쑤고 장이라고 담가봐야 맹숭맹숭하니 기운만 빠질 뿐이다. 이들에게는 중국인 지주 팡둥보다도 소금을 얻기 위한 투쟁이 급선무다. 삶의 최소한마저 지켜내지 못한 이들에게 소금은 당시 민중들의 고달픈 삶을 보여주는 상징적 소재라고 할 수 있다.

그녀는 소금으로 모순된 세상을 깨부술 빛을 보았다

지독한 가난은 그녀에게서 남편을 빼앗아 갔고 아들을 훔쳐갔다. 급기야 딸마저 잃어 버렸고 중국인 지주 팡둥의 폭행으로 생긴 어린 것마저 열병으로 떠나 보내고 말았다. 그녀에게 중국경찰과 마적단 그리고 공산당은 그녀의 삶을 위협하는 존재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다. 그녀에게 이념이란 가질 수도 없었고 가질 필요도 없었다. 그녀에게 최고의 이데올로기는 밥이기 때문이다.

 남편과 아들의 목숨을 앗아간 공산당이 그녀에게 가지는 의미는 극적 반전을 이루게 된다. 그녀가 생존을 위해서 선택한 최후의 길은 다름아닌 소금밀수였다. 남자들도 감당키 어려운 여정을 그녀는 고통을 참아가며 동행해야만 했다. 비록 혼자의 몸이지만 살기 위한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그 여정 길에 만났던 공산당, 복수심으로 가득찼던 그녀에게 공산당원들은 동무라고 불렀다. 그러나 여전히 그녀에게 공산당은 원수였고 그 자리에서 복수를 감행하지 못한 자신이 너무도 부끄럽고 비열할 뿐이었다.

'소금자루를 뺏지 않던 그들이었다. 그들이 지금 곁에 있으면 자기를 도와 싸울 것 같다. 아니 꼭 싸워줄 것이고 ○○○ 내 소금을 빼앗은 것은 돈 많은 놈이었구나!' 그는 부지중에 이렇게 고함쳤다. 이때까지 참고 눌렀던 불평이 불길같이 솟아올랐다. 그는 벌떡 일어났다. -『소금』 중에서-

중국 경찰에게 사염을 판매한 혐의로 체포되면서 그녀는 그녀가 싸워야 할 대상에 대한 자각이 이루어진 것이다. 다소 어설프고 뜬금없는 결말같지만 보통의 민중들이 현실을 자각하는 과정은 그렇게 복잡한 과정을 거치지 않는다 것. 

여전히 냉전적 이데올로기가 위력을 발휘하고 있는 우리 사회에서 소설에 언급되는 공산당이 불편할 수도 있다. 그러나 여기서 공산당은 간도 지역을 근거로 활동했던 항일무장독립투쟁 세력 쯤으로 받아들이면 어느 정도 불편함이 해소되지 않을까 싶다.

이왕 소금이 주제이니 오늘도 엉뚱한 말로 결론을 맺을까 한다.
요즘 일본 대지진을 두고 일부 목사들의 발언이 논란이 되고 있는 모양이다. 이들도 교회당 안에서는 신자들을 향해 '세상에 빛과 소금이 되라' 고 설교할 것이다. 그러나 이들이 과연 소금의 의미를 알기나 할까? 또는 예수가 설파한 사랑을 알기나 할까? 이들은 그저 예수를 팔아 재산을 축적하고 기름기 좔좔 흐르는 배부른 목사에 불과할 뿐이다. 예수나 부처가 설파했던 사랑과 자비는 우주적 의미를 지닌다. 이들은 옛 성인들의 사랑을 그들만의 사랑으로 폄하시키고 있는 사이비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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