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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 포스팅/책 이야기

한글날을 공휴일에서 제외시킨 이유 들어보니, 기가 막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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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글날을 공휴일로 복원해야만 하는 이유

 

일본의 언어학자이자 판화작가인 노마 히데키는 그의 저서 <한글의 탄생>에서 한글의 탄생을 동아시아 문화의 역사 속에서 일대 사건이었다고 표현했다. 한글을 모국어로 하지않는 외국인도 한글의 우수성을 이렇게 찬양하는데 정작 우리는 우리말인 한글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을까? 한글의 우수성을 배우고 익히기는커녕 한글날의 숭고한 정신을 지키는 것만도 힘에 부치는 게 현실이다. 외래종교의 창시자 탄생일도 공휴일로 지정된 마당에 한글날이 그저 이름뿐인 기념일에 그치고 있는 현실은 문화가 경쟁력이라는 최근의 추세와도 맞지 않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최근에 한글날을 공휴일로 재지정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힘을 받고 있다는 것이다. 

 

최근 국회 문방위 소속 여야의원들은 1949년 국경일로 지정돼 공휴일로 됐다가 1991년부터 법정 공휴일에서 제외된 한글날을 공휴일로 복원해야 한다는 데 의견을 같이하고 법안발의를 추진하고 있다고 한다. 한편 문화체육관광부의 한글날 여론조사에 따르면 10월 9일을 한글날로 인지하고 있는 성인이 64%에 불과하다고 한다. 특히 20대의 경우 한글날 인지율은 32.7%에 이른다고 문화강국을 부르짖는 위정자들의 목소리가 얼마나 허울좋은 구호에 불과한지 개탄하지 않을 수 없다. 그렇다면 공휴일이었던 한글날이 왜 법정 공휴일에서 제외되었을까.

 

정치와 자본의 희생양이 된 한글날

 

한글날이 법정 공휴일에서 제외된 1991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1990년대는 1980년대의 치열한 민주화 투쟁의 산물이었다. 1987년 6.10 항쟁은 수십년간 지속된 군사정권 하에서 퇴보할 수밖에 없었던 민주주의 쟁취를 향한 욕구가 봇물처럼 터져나와 이 땅에 진정한 민주주의의 시대를 열게 한 역사적 순간이었다. 민주주의를 향한 열망은 정치 뿐만 아니라 노동, 교육 등 사회전반에 걸쳐 횃불처럼 타올랐다. 직장에는 정당하게 노동자의 권리를 요구할 수 있는 노동조합이 생겼고, 각급 학교에도 참교육 실현을 위한 교직원노동조합이 조직되기 시작했다. 

 

새 시대가 성큼 다가올 것만 같았던 그날의 함성은 양김 즉 민주화 투쟁의 양대산맥이라 불렸던 김대중, 김영삼의 분열로 다시 군인 출신인 노태우가 집권함으로써 치열했던 6.10 항쟁의 열기는 반쪽짜리 민주주의 시대를 여는 데 그치고 말았다. 게다가 김영삼이 집권욕 때문에 군부정권과 손을 잡음으써 뜨겁게 타올랐던 민주화 열망에 찬물을 끼얹고 말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회전반에 스며든 민주화의 열망은 사그러들 수 없는 시대적 요구였다. 이에 위협을 느낀 권력과 자본은 민주화 열기에 제동을 걸기 위해 1987년 이후 급격하게 성장하고 있던 노동조합을 견제하기 시작했다. 1991년 한글날이 법정 공휴일에서 제외된 것도 이런 권력과 자본 논리 때문이었다. 쉬는 날이 많아서 노동생산성이 떨어진다는 이유였다. 또 기업의 비용증가로 경제적 손실이 크다며 한글날을 법정 공휴일에서 제외한 것이다. 

 

과연 그럴까. 올해 기획재정부가 발표한 '한국 고용의 현주소: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와 주요 고용지표 비교'에 따르면 우리나라의 주당 평균 근로시간은 OECD 국가 중 최고 수준으로 조사됐다. 반면 노동생산성과 실질임금은 OECD 국가 중 중간 수준인 것으로 나타났다. 최근 보도에 의하면 우리나라의 최저임금은 심지어 태국보다 낮은 수준인 것으로 밝혀졌다. 쉬는 날이 많아서 노동생산성이 떨어진다는 말이 얼마나 허구맹랑한 논리인지 단적으로 보여주는 수치라고 할 수 있다. 결국 한글날을 법정 공휴일에서 제외한 것은 노동자 탄압의 또 다른 명분일 뿐이고, 문화를 권력과 자본 논리에 이용한 천박한 문화인식의 대표적 사건이라고밖에 할 수 없다.

 

한글날의 유래

 

우리말인 한글은 일제 강점기를 거치면서 오히려 더 단단한 체계를 갖출만큼 우리 문화의 핵심이다. 또 현존하는 문자 중에서 유일하게 창제 연월일과 창제자가 있는 언어이기도 하다. 유네스코가 한글을 세계기록문화유산으로 지정한 것도 한글의 독창성과 무형문화로서의 가치를 인정했기 때문일 것이다.

 

국립국어연구원 조남호 교수에 따르면 우리나라에서 한글날 기념식을 처음으로 거행한 것은 1926년이라고 한다. 당시 조선어연구회와 신민사가 공동으로 주최한 기념식은 지금의 10월 9일이 아닌 11월 4일에 거행되었는데 음력 9월에 『훈민정음』을 완성했다는 실록의 기록에 근거해 음력 9월 29일에 해당하는 1926년 양력 날짜가 11월 4일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음력 9월 29일을 양력으로 환산하면 매년 다른 날짜에 기념식을 거행하게 됨으로 1931년부터는 보편화되고 있는 양력 생활 양식에 맞춰 『훈민정음』이 발포된 9월 29일의 양력 날짜인 10월 29일로 한글날 기념일을 바꾸고 거행해오다 양력이 1582년 이후 그레고리력으로 바뀌었다는 전문가들의 의견에 따라 1934년부터는 양력 10월 28일에 한글날 기념식을 거행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1937년 중일전쟁 이후 일본 제국주의의 우리문화 말살 정책이 본격화되면서 기념식을 거행하기 힘들어졌고 특히 1942년에는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기념식을 주관할 사람들이 모두 투옥되는 사태가 발생해 10월 28일 한글날 기념식 자체가 열리지 못했다고 한다.

 

오늘날 10월 9일 한글날은 1945년 이후의 일이다. 1940년 7월에 발견된 『훈민정음』 해례본에 나오는 기록에 따라 음력 9월 상순(上旬)의 마지막 날인 9월 10일을 양력으로 다시 계산해 10월 9일을 한글날로 정하고 오늘에 이르고 있다.

 

한편 '한글'이라는 이름은 남분분단 현실과도 밀접한 연관이 있다고 한다. 당초에는 1942년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옥고를 치르기도 했던 외솔 최현배 선생이 처음 지은 것으로 알려졌으나 한글날을 10월 9일로 정한 조선어학회가 1948년 남쪽과 북쪽에 각각 독립정부가 들어섬으로써 북쪽 정부 이름이 조선인민민주주의공화국이 되어 '조선'이라는 단어를 사용하기 힘들어진 상황에서 정인승 교수가 조선어학회 대신 한글학회로 바꾸자고 제안한 데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앞서도 언급했지만 한글이 우리문화의 총체라는 것은 일제의 문화말살정책의 탄압을 견디며 발전해왔다는 데서도 그 의의를 찾을 수 있다. 세종대왕이 『훈민정음』을 반포하기는 했지만 여전히 한문이 경험 축적을 후세에 남기는 기록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었다. 그러나 일제 강점기 조선어학회를 비롯한 선각자들의 노력으로 한글은 정신문화 기록의 주체가 되기 시작했고, 월북 작가인 이태준은 1939년 <문장강화>라는 책을 통해 기존에 한문에 토를 단 정도에 불과했던 한글을 세련되게 발전시키는 데 큰 역할을 하기도 했다. 즉 이태준의 <문장강화>는 겉으로는 글을 어떻게 써야하나의 주제를 다루고 있지만 그 속내를 들여다보면 문화 암흑기인 일제 강점기 시절 우리 언어인 한글을 살리기 위한 고단한 노력이 숨어있음을 알 수 있다. 

 

오늘은 제566돌 한글날이다. 한글날을 법정 공휴일로 재지정해야 한다는 공감대는 단순히 노는 날이 하루 더 늘어난다는 뜻이 아니다. 권력과 자본 논리에 의해 압살당한 우리 문화의 총체인 '한글'을 제자리로 돌려놓고 그 의미를 되새기자는 것이다. 특히 외래문화의 유입과 정보통신의 발달로 정체도 알 수 없는 단어들이 한글을 대신해 일상어가 되는 요즘 한글날의 복원은 단순히 법정 공휴일 이상의 의미가 있다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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