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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 포스팅/한국대표단편소설

엉뚱한 상상, 소설 '돈'과 무분별한 언론 보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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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豚)/이효석/1933년

 

눈만 뜨면 연예인들의 잡다한 일상이 새까맣던 TV를 화려한 색으로 가득 채운다. 어디 TV 뿐이겠는가! 우리네 일상 속 대화에서도 연예인들의 일거수일투족은 우리네 삶을 속박하는 제도나 시스템에 대한 딱딱한 이야기보다 더 재미있고 상대의 관심을 끄는데 이만한 얘깃거리도 없다. 가수 누구와 탤런트 누구가 사귄다느니, 가수 누구는 16살 연하의 또 다른 가수와 사귄다느니, 심지어 탤런트 누구는 띠를 두 번이나 도는 연하의 누구와 사귄다느니, 모 스포츠 스타와 모 연예 스타의 몰래 데이트 장면이 우연히 찍혔다느니, 며칠 전까지만 해도 모 예능 프로그램에 나와 마치 잉꼬부부의 표상인 양 수다를 떨던 연예인 부부가 이혼했다느니, 심지어 자살한 유명 스타의 장례식은 실시간으로 생중계 되기도 한다.

 

정보의 홍수라는 표현을 쓰는 요즘이지만 이런 연예계 에피소드 하나쯤 모르고 있으면 시대에 뒤떨어진 야만인 취급을 받기가 일쑤다. 그러니 재미없는 교양 프로그램들은 언제 시작해서 언제 종영되었는지조차 알지 못한 채 시청자들의 관심 밖 이야기로 전락하고 만다. 아무리 몸에 좋은 약도 과하면 독이 되는 법이다. 인간을 이성적 동물이라고 자화자찬 하지만 생태계에서 인간만큼 감성과 감정의 지배를 받고 사는 동물도 드물다. 남자고 여자고 성인이라는면 영계(?)에 환장을 하는 게 부인할 수 없는 요즘 세태다. 베르테르 효과라고 했던가? 연예인들의 자살은 곧바로 일반인들의 모방 자살로 이어진다.

 

 

 

 

이효석의 소설 <돈(豚)>을 읽으면서 감각적이고 감성적인 기사로 도배된 우리 미디어 환경을 떠올리는 이유는 의도야 어찌됐건 받아들이는 입장에서는 결코 그저그런 재미있는 흥미거리에 그치지 않는다는 것이다. 때로는 그 속내는 모른 채 겉으로 드러난 연예인들의 사생활을 모방하기도 하고 심지어 악용하는 경우도 적지 않다는 것이다. 비단 연예인들 관련된 기사만은 아니다. 무분별하게 보도되는 각종 기사들은 사람들의 잠재 의식 속에서 악마의 씨앗이 되기도 한다. 눈이 부실 정도의 문명을 이룩한 인간이기도 하지만 가장 나약한 존재가 또 인간이기 때문이다.

 

이효석의 단편 <돈(豚)>은 단편문학의 백미로 일컬어지기도 한다. 1933년 『조선문학』10월호에 발표된 <돈(豚)>은 이효석이 경향문학에서 순수문학으로 전향한 뒤 발표한 대표적인 작품 중 하나다. 문학 평론가들에 의하면 <돈(豚)>은 자연과 인간의 동화를 잘 묘사한 작품이라고 한다. 이런 빼어난 작품에서 연예인이 어쩌고 미디어가 어쩌고를 떠올리고 있으니 책읽기의 한계를 적나라하게 노출시킨 것 같아 부끄럽기 그지 없다. 어쩌겠는가. 필자의 수준이 이 모양이니.

 

이런 엉뚱한 생각을 한 데는 소설 <돈(豚)>에서 주인공 식이가 돼지 접붙이기를 보며 엉뚱하게도 도망가버린 분이를 향한 성적 욕망을 떠올리기 때문이다. 보는 사람에 따라서, 듣는 사람에 따라서 다양한 그림이 그려지는 게 인간이다. 절제하지 못한 미디어 보도의 뒤에도 좋든 나쁘든 이런 무수한 상상들이 존재하지 않을까 싶은 것이다. 식이에게 돼지 접붙이기는 삶 그 자체인데도 말이다.

 

파장 후의 광경이언만 분이의 그림자가 눈앞에 어른거리는 식이는 몹시도 겸연쩍었다. 잠자코 섰는 가칠한 암퇘지와 분이의 자태가 서로 얽혀서 그의 머리속에 추근하게 떠올랐다. 음란한 잡담과 허리 꺾는 웃음 소리에 얼굴이 더 한층 붉어졌다. 환영을 떨쳐 버리려고 애쓰면서 식이는 얽어매었던 돼지를 풀기 시작하였다. 농부는 여전히 게걸떡거리며 어른어른 싸도는 욕심 많은 씨돋을 몰아 우리 속에 가두었다. -<돈(豚)> 중에서-

 

소설 <돈(豚)>에 나타난 욕망은 단순히 성적 그것에만 국한되지는 않는 듯 하다. 돈(錢)에 대한 인간의 욕망이 결부된 인간의 추한 모습인지도 모르겠다. 소설의 시대적 배경이 일본 제국주의의 강점기라는 점에서 일제가 대륙 침략의 야욕을 위해 이용된 당시 조선사회의 근대적 풍경이 그것이다.

 

철로를 끼고 올라가 정거장 앞을 지나 오촌포 한길에 나서니 장 보고 돌아가는 사람들의 그림자가 드문드문 보인다. 산모퉁이가 바닷 바람을 막아 아늑한 저녁빛이 한길 위를 덮었다. 먼 산 위에는 전기의 고가선이 솟고 산 밑을 물줄기가 돌아내렸다. 온천 가는 넓은 도로가 철로와 나란히 누워서 남쪽으로 줄기차게 뻗쳤다. 저물어 가는 강산 속에는 아득하게 뻗친 이 두 줄기의 길이 새삼스럽게 식이의 마음을 끌었다. -<돈(豚)> 중에서-

 

이미 순수문학으로 전향한 작가이기에 시대적 상황에 대한 비판보다는 인간의 끝없는 욕망이 그려낸 근대사회의 추한 풍경인지도 모를 일이다. 어쨌든 근대문명의 풍경들이 그려지고 이후 식이의 불행은 그런 다양한 인간의 욕망에 대한 비극적 결말일 것이다. 그게 성적 욕망이든, 물질적 욕망이든.

 

주인공 식이에게 삶의 전부이자 야릇한 욕망의 시발점이었던 돈[암퇘지]이 물질 문명의 상징적 대상인 기차에 치어 죽고만다. 피 한 방울 찾아볼 수 없을만큼 흔적조차 없이, 기차가 들고 간 것 같아서 아득한 철로 위를 바라보지만 벌써 기차는 그림자조차 없다.

 

요즘 외국인들에게 한국사회는 동경의 대상인가 보다. 그들이 알고 있는 한국과 달리 우리 미디어 속 풍경은 지구촌 어디보다 유쾌하고 감각적인 세상이기 때문이다. 정작 화려한 우리 미디어 속 세상 뒤에는 노동자와 학생, 청년, 가장들의 죽음이 잇따르고 있는데 말이다. 심지어 미디어 속 풍경이 세상의 전부인 양 착각하며 살아가고 있는 이들이 적지 않다는 것은 미디어에 의해 왜곡된 우리 사회의 비루한 현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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