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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 포스팅/북 리뷰

세금만 축내는 노인이라고? 내가 역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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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당허고 지옥이 그만큼 칭하가 날라나?/최현숙 지음/이매진 펴냄/2013 

 

최근 몇 번의 선거를 특징짓는 키워드를 꼽으라면 단연 세대간 갈등일 것이다. 한국 현대사를 지배했던 3(김영삼, 김대중, 김종필)의 퇴장 이후 선거 때마다 반복되던 지역적 투표행태는 괄목할만한 수준은 아니지만 조금씩 옅어지고 있지만 그 자리를 비집고 들어온 세대별 투표행태는 시간이 흐를수록 더 견고해지고 집요해지고 있다. 당장 6.4지방선거를 앞두고 쏟아지는 여론조사만 봐도 이런 흐름은 각종 이슈를 덮고도 남을 만큼 위력적임을 알 수 있다. 지역적 투표행태도 그랬지만 새롭게 부각되고 있는 세대별 투표행태의 고착화도 여느 나라에서나 볼 수 있는 일반적인 투표 형태 즉 저소득층과 소외계층은 진보를, 고소득층과 기득권 계층은 보수를 지지하는 일반적인 상식을 무너뜨리고 있다. 이런 결과는 노인 인구의 급증과도 무관하지 않다.

 

빠르게 고령화 사회로 진입하고 있는 우리나라 노인 빈곤율은 전체 노인 인구의 50%에 육박해 OECD 국가 중 압도적인 1위로 알려졌다. 하지만 노인 세대의 투표는 복지나 분배를 강조한 진보보다는 경쟁과 성장을 기치로 내건 보수 쪽으로의 쏠림 현상이 뚜렷해지고 있다. 심지어 박근혜 정부의 복지 공약 폐기에도 불구하고 노인 세대의 보수 쏠림 현상은 더욱 심화되고 있고 노인 세대의 일방적인 지지는 박근혜 정부의 든든한 버팀목 역할을 하고 있다

 

 

이런 아이러니한 현실을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나이를 먹을수록 안정을 추구한다고는 하지만 그들 앞에 놓인 현실에 비해 지나친 쏠림 현상이 아닐 수 없다. 문제는 이런 비상식적인 투표 행태가 세대간 갈등을 부추기는 원인이 되고 있다는 것이다. 젊은 세대는 기성 세대를 향해 '세금만 축내는 노인들'이라고 비아냥 거리고, 노인 세대는 젊은이들을 '세상 물정 모르는 치기 어린 것들'로 맞받아친다. 어느덧 세대간 갈등과 반목의 치유는 우리 사회가 극복해야 할 가장 큰 난제가 되고 말았다. 그렇다면 세대간 갈등의 치유는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하는 것일까? 노동당 소속 정치인이기도 한 최현숙의 책 <천당허고 지옥이 그만큼 칭하가 날라나?>에서 희미하나마 그 해답을 찾을 수 있는 길이 보인다.

 

천당허고 지옥이 그만큼 칭하가 날라나?

 

<천당허고 지옥이 그만큼 칭하가 날라나?>는 이매진 출판사에서 기획하고 있는 ‘15소녀 표류기의 첫 번째 책이다. 저자의 말을 빌리자면 흔해빠진 할머니들의 흔해빠진 이야기. 그래서 저자는 세 여성 노인의 생애사는 사실 관계와 객관성을 시비할 수 있는 구술사口述史라기보다 지극히 주관적이고 인지와 기억이 왜곡될 가능성이 전제된 구술사口述辭라고 완곡하게 표현하지만 세 노인의 삶은 한국 현대사의 질곡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독자에 따라 구술사口述史일 수도 있고, 구술사口述辭일 수도 있지만 빈 수레처럼 요란하기만 한 우리사회의 소통에 대해 소통이란 이런 것이다라는 것을 보여주고 있음에 주목해야 할 것이다.

 

우리네 어머니이고, 할머니인 세 여성 노인의 살아온 이야기는 사실 새로울 것이 없다. 누구나 한번쯤은 들어봤을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젊은 세대는 노인 세대의 사고와 선택에 대해 꼰대들의 그것으로 치부하기 일쑤다. ? 그 동안 들어왔던 그들이 살아온 이야기는 그저 흘러간 대중가요처럼 무의미하게 기억 속에서 잊혀졌기 때문이다. 하지만 저자는 흘러간 대중가요에 불과했던 노인들의 이야기를 작정하고 다시 끄집어 낸다. 그것도 저자는 들어주기만 하는 아주 일방적인 소통으로 말이다. 어쩌면 그 동안 우리는 노인 세대가 젊은 세대의 생각만 이해해 달라고 강요하고 우리의 이야기만 들어달라고 앙탈을 부렸는지도 모른다. 정치적으로 아니 요즘 현실을 감안할 때 전혀 어울릴 것 같지 않은 세 여성 노인과 진보 정치인의 소통이 새삼 감동스러운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은 아닐까?

 

책에 등장하는 세 여성 노인의 이름은 김미숙(89), 김복례(87), 안완철(81)이다. 안완철 노인은 저자의 어머니이기도 하다. 이들은 일제 강점기에서부터 한국전쟁, 산업화와 군부독재 시대를 거쳐 민주정부에 이르기까지 질곡 많은 한국 현대사의 산 증인이다.

 

그때 여자들 스무 살까지 시집을 안가면 ‘덴시따이’라구, 그래 그 정신대. 그거에 뽑혀나가니까 허겁지겁 시집들을 보낸 거야. 나도 곧 그 나이가 되는 거지. 그래서 덴시따이 뽑혀갈까봐 겁이 나 가지고, 허겁지겁 시집을 보낸 거야. 열여덟 때야. 아무리 급해도 혼인이니까 골라서 간다고 간 게, 시골로 갔어. 평양서 오십 리 정도 들어가는 시골이야. 외아들에 시어미만 있는 간단한 집으로, 골라 골라 보낸 거지. 내가 성격이 좀 쎄고 안 차분하니깐, 시집살이 안 할 거 같은 편한 집으로 고른 거지.-<천당허고 지옥이 그만큼 칭하가 날라나?> 중에서-

 

혼란한 시기에 여성과 아동은 어쩔 수 없이 사회적 약자가 될 수밖에 없다. 게다가 삼종지도를 강요당했던 가부장적 사회에서 여성이 받았던 사회적 차별은 삶 자체가 투쟁일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지극히 또 일방적으로 보수적인 그들의 선택을 두고 말이 많지만 사실 그들이 살아온 길은 어느 진보 정치인보다 더 치열했고 극적이었다.

 

댄스홀 나가면서랑 미군들이랑 살면서, 애를 수도 없이 떼었어. 낳은 적은 없어. 생긴 거 같으면 병원 가서 진찰해서 떼구, 떼구 그랬지. 하나 있는 아들 키우기도 그렇게 힘든데, 아닌 말로 내 인생이 어떻게 될지 모르는데 어떻게 애를 또 낳냐구? 더구나 혼혈아를. 살림하는 미군한테 말도 안 하고 혼자 가서 뗐어. 하긴 결혼할 작정한 그 싸진하고는 애를 낳을 생각을 했어. 근데 그 사람이 원래 자식이 둘 있어서 그런가, 좀 피하더라구. 같이 산 게 길지 않아서 그런가, 안 생겼어. 뱃속에서 죽은 것들한테야 그것도 생명인데 생각하면 불쌍하다 싶지만, 길게 보면 안 낳는 게 훨씬 나은 거지. 난 좀, 거기 여자들로는 나이가 든 축이었거든.-<천당허고 지옥이 그만큼 칭하가 날라나?> 중에서-

 

진보의 본질이 일상과의 끊임없는 투쟁이 아닐까? 제목 천당허고 지옥이 그만큼 칭하가 날라나?’는 저자의 어머니이기도 한 안완철 노인이 남부럽지 않았던 어린 시절에도 불구하고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겪어야 했던 여성으로서의 차별과 가장 노릇을 제대로 하지 못했던 남편 대신 자식들을 키우기 위해 집 장사에서부터 사채 놀이까지 할 수 있는 일은 다 해야만 했던 기막힌 인생사를 한탄하며 하는 말이다. ‘칭하가 정확히 방언인지 아니면 외래어인지 잘 모르겠지만 차이쯤으로 해석이 가능하지 싶다. 사회적 약자였던 세 여성 노인에게 인생은 그야말로 천당과 지옥을 오간 굴곡진 삶 그 자체였을 것이다.

 

밥이 진보다

 

그렇다면 저자는 흔해빠진 노인들의 흔해빠진 이야기를 통해 무엇을 말하고 싶었을까? 얼마 전 TV에 출연한 여론 전문가에 따르면 박근혜 정부의 지지율은 심각한 실정을 하지 않는 이상 40% 아래로는 떨어지지 않을 것으로 분석했다. 그 이유는 노인 세대의 지지율이 확고하기 때문이다. 또 그 배경에는 박정희 시대에 대한 향수가 있기 때문이라고 분석했다. ‘박정희 향수’. 그것은 바로 가난에서 벗어나게 해 주었다는 믿음이다. 젊은 세대는 박정희 향수를 독재 시대의 유물로 치부하지만 평생 헐벗고 굶주린 일상을 경험했던 노인 세대에게는 분명 다른 의미일 것이다. 그렇다고 노인 세대가 박정희가 정권 연장을 위해 저질렀던 수많은 악행들을 모르는 바도 아니다. 아이러니하게도 노인 세대의 박정희 향수속에서 진보정치가 나아가야 할 방향을 봤다면 정치의 자도 모르는 일개 독자의 지나친 상상이고 억측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밥이 진보라는 엄중하고 엄연한 현실을 살아가고 있다는 점이다.

 

과거 10년의 진보정권(일반적으로 진보정권이라 부르지만 필자는 민주정부였을 뿐 진보정부는 아니었다고 생각한다. 다만 일반적인 평가에 의하면)에서 인권이 개선되고 사회 시스템이 민주적으로 바뀌는 등 정치적으로는 적지 않은 성과를 낸 것도 사실이다. 문제는 정치는 정치일 뿐. 개인들의 삶이 나아졌나를 따지고 들면 진보정부였다는 사실이 무색해진다. 또 요즘 박근혜 정부의 과거로의 회귀를 두고 국민들이 분노할 줄 모른다며 자성의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한편으로는 진보의 위기이기도 하다. 게다가 이석기 사태와 새로운 통합 신당 출현이 눈앞에 다가오면서 그 흔한 야권연대에서도 진보 정당은 찬밥 신세다. 이제 진보 정치가 살 길은 하나다. 정치적인 구호보다는 국민들의 먹고 사는 문제에 역량을 집중해야 한다. 분노할 줄 모르는 게 아니라 먹고 사느라 분노할 기력이 없는 것이다.

 

사람은 무엇으로 행복해지는가는 개인적이며 정치적인 질문이다. 진보 정치를 합네 하며 계급차별을 강령에 넣고 온갖 회견문과 피켓과 말로 선언하지만, 가난한 사람들의 이야기는 들리지 않고, 그런 사람들과 만나지도 않았다. 아마 진보 정치는 가난한 사람들에게 말하기보다 듣기를 더 많이 해야 하고, 그 사람들의 이야기와 느낌과 욕망을 상세하게 들어야 할 것이다.-<천당과 지옥이 그만큼 칭하가 날라나?> 중에서-

 

진보 정치인이기도 한 저자의 자기 고백이자 요양 노동을 통해 깨달은 진보 정치가 걸어야 할 미래의 모습이기도 하다. 저자는 책을 통해서 세대간 갈등의 치유는 진정성 있는 세대간 소통으로부터, 진보 정치는 세 여성 노인들의 삶처럼 소외된 이들의 이야기를 듣는 데서부터 시작해야 한다는 것을 에둘러 강조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마지막으로 젊은 시절 미군 부대 근처에서 어찌어찌 일했던 김미숙 할머니가 과거를 회개하라는 목사인 아들 부부에 대한 넋두리는 그들의 이야기는 들어주지 않고 꼰대취급만 하는 젊은 세대에게 보내는 분노의 절규처럼 들린다.

 

다른 회개래면 할 거 많아두, 난 그 회개는 안 나와. 나도 예수 믿지만, 난 그런 게 별루 죄라고 생각이 안 돼. 여자 혼자 벌어먹고 사느라 한 일인데, 내가 도둑질을 했어 살인을 했어? 그리고 그렇게 임신된 거를 다 낳았어 봐. 그걸 누가 책임지고 키울 거야? 거기서도 미군이랑 살림하던 여자들은 많이들 낳았어. 남자 붙잡아놓을래니까, 남자가 낳자 그러면 낳는 거지. 그러다가 백이믄 아흔 다섯은 남자 혼자 미국 들어가든가, 안 나타나든가 하구, 그 새끼는 여자 혼자 책임이 되는 거야. 그렇게 혼혈아 낳아서 많이들 결국에는 미국으로 입양 보내고 하는 거지. 붙들고 키운 사람들 보면, 어린 것들이 손가락질당해서 학교도 못 가고 직장도 못 다니고, 그러드라고. 나 하나로 끝나면 될 걸 왜 애까지 않아서 그 설움을 또 만드냐구? 그걸 회개하라니 말이 돼?-<천당하고 지옥이 그만큼 칭하가 날라나?>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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