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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많은 젊은이들이 군사독재정권의 억압에 항거하던 시절, 80년대 보안사의 강압과 가혹행위 속에 수백명이 강제징집됐고 그들을 대상으로 '녹화사업'이 진행됐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6건의 의문사가 발생했다.

현재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가 파악하고 있는 강제징집 피해자 규모는 군 당국의 공식 통계로만 447명(81.11∼83.11). 그들에게 과연 무슨 일이 있었는지, 의문사위원회는 오는 17일부터 22일까지 5차례에 걸쳐 집단간담회를 열어 녹화사업(82.9∼84.11) 대상자 256명 중 200여명의 증언을 청취할 계획이다.

<오마이뉴스>와 의문사위원회는 군사정권이 이들 강제징집/녹화사업 피해자들에게 가한 가혹한 인권유린의 실체를 명확하게 밝히는 작업의 일환으로 이 시리즈를 기획한다. - 편집자 주


▲ 82-83년 '녹화사업' 기간 중 군대에서 의문사한 6명의 대학생들. 왼쪽 상단에서부터 시계 방향으로 김두황(고려대), 이윤성(성균관대), 최온순(동국대), 한희철(서울대), 정성희(연세대), 한영현(한양대).
ⓒ 유가협
벌써 20년 전의 일이다. 학교에서 같이 공부하던 친구들이 하나둘 감옥으로 군대로 끌려갔다. 감옥에 간 친구들보다 군대에 간 친구들이 더 늦게 돌아왔다. 가끔씩 휴가 때 나오는 친구들을 조심스럽게 만나야 했다. 군대에 간 친구들 중에 더러는 아예 돌아올 수 없는 길로 떠난 친구들도 있었다.

1982년 7월 23일 가장 먼저 연세대 정성희가 죽었다. 자살이라고 했다. 철책 근무 중 비관 자살하여 총으로 자신의 머리를 쏘고 죽었다고 했다. 그 소리를 들은 우리는 절대 군대는 가지 말자고 다짐했다. 군대에 가느니 구속되는 것이 차라리 더 낫다고 생각했다. 그렇지만, 자기 맘대로 감옥과 군대를 선택할 수 없었다. 그 선택은 우리가 하는 것이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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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두환 군사정권에 항거하는 시위는 그래도 끊이지 않고 일어났다. 누르면 누를수록 거세게 번져갔다. 정권은 그런 대학생들을 감옥보다는 군대에 보내는 것을 선호했다. 경찰서에 잡혀가 시위 가담이나 조직 가담에 대해 조사를 받다가 병무청 직원이 만들어온 서류들을 얼결에 작성하고, 그날로 대학생에서 훈련병이 되어 전방 사단 훈련소에 입소해야 했다. 부모에게도 교수에게도, 친구와 선배에게도 다녀온다는 말 한 마디 남길 새 없이 그렇게 떠나야 했다.

그리고, 군대에서 기다리고 있는 것은 항시적인 관찰과 감시였다. 편지는 뜯겨져 중요한 대목은 아예 붉은 볼펜으로 밑줄쳐졌다. 그때는 제대로 알지 못했지만, A, B, C 등급별로 정기적으로 동향 관찰 보고가 올라갔다. 연대 보안대로, 사단 보안대로, 그리고 보안사령부로 이 동향관찰은 보고되었다.

그리고 군 생활 내내 불안하게 녹화사업을 기다렸다. 붉게 물든 좌경사상을 푸른색의 온건 사상으로 바꾸겠다는, 독재 권력만이 꿈꿀 수 있는 일이었다. 어느 날 갑자기 날아온 휴가 통보는 보안대가 부르는 것이었다.

불려가서 '나의 20년', '성장기'란 제목으로 자신이 살아온 20여년 삶을 고스란히 고해 바쳐야 했다. 한 번으로 끝날 때도 있지만, 두 번이고, 몇 번이고 재작성을 지시하였고, 앞의 것과 틀리면 그 이유를 설명해야 했다.

자신의 삶을 고해 바치는 일도 자존심 뭉개지는 일이지만, 다음에는 사상검증을 통과해야 했다. 물론 우리는 경찰서에서 조사를 받으면서 요령을 터득하고 있었다. 나는 자유민주주의자로 단지 군사독재를 반대한 것이었다.

우리들 중 때로는 서울 보안사령부로 불려가는 친구들도 있었다. 과천의 한 아파트, 퇴계로 대한극장 맞은 편의 진양상가 내 아파트가 보안사가 안가로 만들어 놓은 곳이었다. 친구들은 군복으로 갈아입고, 언제 끝날지 모르는 조사를 받아야 했다.

발바닥을 두들겨 맞으면서, 온몸을 두들겨 맞으면서 학생운동 시절의 활동에 대해 조사를 받아야 했다. 끝내 죽어도 불 수 없는 동료들의 이름, 하마터면 입 밖으로 튀어나올지도 모르는 동료들의 이름을 감추기 위해 애꿎은 사람의 이름을 대기도 했다.

그렇게 조사를 받고도 다시 특별한 휴가를 받아 학교로 친구를 만나러 가야 하는 이들도 있었다. 그들에게는 임무가 주어졌다. 어느 어느 조직의 중심적인 활동을 하는 사람들, 회원들의 명단, 수배자의 소재지, 어느 조직의 편제와 활동 등등, 어느 것 하나 만만한 것은 없었다.

대충 집에 틀어박혀 있다가 휴가를 마치고 복귀하는 친구도 있었고, 학교에 들어가 사실대로 말하고 대충 말을 맞추어 허위 보고를 하고 때우는 경우도 있었다. 그렇지만, 끝내 보안사의 감시로 마음 내키지 않은 프락치 활동을 했던 친구들도 있었다. 그들은 한편으로는 보안사로부터 괴로움을 당했고, 한편으로는 친구들의 따돌림을 당해야 했다.

서울대생 한희철은 강제징집을 당한 것은 아니지만, 휴가 중에 친구를 도와주려다 보안사에 연행되어 조사 받으며, 운동 동료들의 이름을 불어야 했다. 고문 끝에 불은 것이지만, 자신으로 인해 친구이 보안사에 가서 조사를 받아야 한다는 고통 때문에 그는 자신이 겪은 일을 세상에 알리고 죽기로 결심한다. 그는 1983년 12월 10일 새벽, 근무지에서 총을 가슴에 쏘고 죽어갔다.

이렇게 부당하게 절차도 완전히 무시당한 채 군대에 끌려갔던 대학생들이 1981년부터 1983년까지 3년 동안 447명이라는 것이 지금까지 군 당국이 공식 확인한 것이다. 물론 여기에는 많은 수가 빠져 있다. 이들 중 256명이 녹화사업을 받았다고 한다.

정성희로부터 한희철에 이르기까지 그 기간 동안 고려대 김두황, 동국대 최온순, 한양대 한영현, 성균관대 이윤성이 죽어갔다. 1983년 5월에서 8월 사이 네 명의 특수학적변동자(강제징집자)가 죽어간 것이었다. 아직껏 이들의 죽음은 자살로 규정되어 있을 뿐이다. 그리고, 훨씬 많은 사람들이 과거의 상처를 안은 채로 살아가고 있다.

그 20년 전의 비극을 우리는 밝히려고 한다.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가 설치된 지도 어언 1년 9개월. 2년 가까운 세월 동안 녹화사업의 실체를 밝히려고 많은 노력을 기울였고, 상당 부분에서 성과도 있었다.

아직 조사가 종결된 것이 아니기 때문에 구체적인 내용들을 밝힐 수는 없지만, 이전의 군 당국에서 발표한 내용과는 다른 것들을 우리는 발표할 수 있다. 아무리 보안사를 비롯한 당시의 권력기관들이 자료를 내놓지 않는다 해도, 아무리 그들이 위원회에 불려와 거짓진술로 일관한다 해도 우리는 상당히 많은 증거와 관련 진술들을 확보했다.

이제는 직접 피해를 입은 당사자들이 입을 열 때다. 거짓진술로 역사를 왜곡하고 있는 사람들과 아직도 자신들의 잘못을 깨닫지 못하는 이들, 우리는 그래서 피해자들의 진솔한 얘기를 모아내려 한다.

오는 17일부터 22일까지 강제징집·녹화사업 피해자들은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에 와서 당시의 겪었던 상황들을 진솔하게 털어놓자. 고통을 당한 사람은 고통 당한 대로, 조금 덜 당한 사람들은 그런 대로, 어렴풋한 기억을 되살려 군사정권의 비열한 억압의 실체를 증언하자.

동생을 잃은 한 형(김두황의 형 김두원)의 애절한 호소를 가슴으로 받아 안자.

우리는 크게 울어야 합니다
강제징집자-녹화사업 피해자 집단간담회에 보내는 호소문

▲ 녹화사업 피해자 김두황
ⓒ유가협
80년대 많은 젊은이들이 군사독재정권과 맞서 싸웠고 그들로부터 탄압을 받았다. 그 과정에서 일부는 죽고 일부는 살아 남았다. 살아남은 자는 더욱 슬프다. 투쟁을 약하게 해서 죽음을 모면했는가? 아니다. 의문사는 본인 스스로의 선택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군사독재정권에 의해서 강제된 것이다. 죽은 자나 살아남은 자 모두 선택권은 없었다.

죽은 자에게는 사람들이 빚을 졌다고 생각하고 예우를 해준다. 살아남은 자에게는 슬픔만 있는가? 아니다! 살아남은 자는 더욱 큰 고통을 받고 있다고 생각한다. 죽은 자는 군사독재정권에 생명을 빼앗겼지만, 살아남은 자는 생명보다 더 소중한 인간의 존엄을 빼앗겼다. 그러면서도 미안해하며 살아가고 있다. 살아남은 것이 자신의 죄 인양......

이제 우리는 크게 울어야 합니다. 그때 우리에게 울지도 못하게 했던 그들이 우리에게 저질렀던 그 모든 죄상을 낱낱이 이야기하며 울어야 합니다. 가슴이 메어지고 눈물이 펑펑 나오게 엉엉 울어야 합니다. 인간으로서는 차마 할 수 없는 그 많은 짓들을 누구를 위하여 무슨 이유로 우리에게 저질렀는지 물으며 처절하게 울어야 합니다.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는 관계기관의 비협조로 사건의 상세한 실상에 접근하기 어려운 상태에서 강제징집자 및 녹화사업 피해자들을 통하여 산 자와 죽은 자를 함께 조명하고자 합니다. 죽은 자와 산 자가 함께 어떻게 고통을 받았으며, 저들이 어떻게 역사에 죄를 저질렀는지 밝혀 내고자 합니다. 산 자는 죄송하다고 이야기하기보다는 어떻게 함께 고통을 받았는지 떳떳하게 이야기해야 합니다. 그리고 살아남은 자의 슬픔에서 벗어나 군사독재정권의 잔혹함을 드러내는 고발자의 역할을 해야 합니다. 그럼으로써 죽은 자보다 오히려 산 자가 더 큰 희생자일 수 있음을 보여야 합니다.

위원회가 추구하는 진상규명은 어떻게 죽었는가 하는 사인 규명은 아닙니다. 80년대를 아파하고 변화시키고자 했던 젊은이들 중에 일부인 녹화사업 희생자를 통해서 80년대를 아름답게 살고자 했던 젊은이들이 어떻게 민주화를 이루어 갔었으며 군사독재정권에 의해서 어떻게 산화하거나 또는 좌절되어 갔는가, 80년대를 산 자와 죽은 자가 어떻게 함께 했는가를 밝혀 내고 역사를 바로잡는 일 입니다.

녹화사업 희생자의 형으로서 가장 가슴 아픈 것은 동생에 대해서 아는 것이 없다는 것이다. 말리기만 하였지 무엇을 하고 다니는지 알려 고는 하지 않았습니다. 나는 모릅니다. 모르는 것이 진정 한 입니다. 동생이 죽은 것도 원통하지만 동생이 어떻게 살다가 갔는지 모르는 것이 더욱 원통합니다. 이러한 원통함 때문에 가끔 가슴이 뻐근하게 아팠었습니다. 문득 문득 동생이 생각날 때마다 눈물도 많이 흘렸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가슴도 별로 아프지 않습니다. 동생에 대한 생각을 해도 눈물이 나오지는 않습니다. 대신 밝혀 내야지 하고 어금니를 꽉 깨뭅니다.

이 녀석아, 이 불쌍한 녀석아! 무엇을 하다가 죽임을 당했니? / 김두원(김두황의 형)

덧붙이는 글 | 박래군(대통령소속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 조사3과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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