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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84학번이다. 80년대에 대학을 다닌 이른바 386세대라고 할 수 있다. 얼마 전 오랜 만에 대학 시절의 같은 과 동기들이 한 자리에 모일 일이 생겼다. 같은 과 친구 중 한 명이 뒤늦게 결혼하는 자리였다.

나이 40을 앞두고 결혼한다는 연락을 받다보니 친구들 사이에서는 “재혼이냐?”는 우스개 질문도 나왔지만. 그 친구는 단지 한 동안 우리들의 상상을 초월하는 ‘엉뚱한 일’에 전념하느라 결혼할 타이밍을 놓쳐버렸을 뿐이다.

나는 이 자리에 디지털카메라를 가지고 갔다. 오랜 만에 만난 친구들을 카메라에 담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친구들은 대학 다니던 시절 사진 찍기를 유난히 싫어했던 내가 디지털카메라를 들고 왔으니 신기한 모양이었다.

▲ 85년 엠티에서 찍은 사진. 오른쪽 끝에서 뒷모습만 보이는 사람이 기자다.
ⓒ 김학규
“야, 너 사진 찍기 그렇게 싫어하더니 뭔 일로 카메라를 다 가지고 왔어?”

당시 나는 ‘앞으로 학생운동을 열심히 하게 되면 언제 경찰의 수배를 받을지 알 수 없는데 사진을 함부로 찍어 쉽게 잡힐 수 있는 증거물을 제공해서는 안 된다’는 일념으로 사진 찍기를 거부했다.

하필 학과가 ‘국사학과’인 탓에 고적답사도 자주 가게 되고 자연히 사진 찍을 기회가 많았음에도 이를 일관되게 거부했으니 친구들의 기억 속에 강하게 남아 있을 수밖에 없었던 모양이었다.

오랜 만에 수소문해서 모였다고는 믿어지지 않는 꽤 많은 20명 정도의 친구들이 모인 자리에서는 자연히 80년대 함께 대학 다니던 시절을 회고하는 대화가 주종을 이루었다.

물론 개중에는 전공을 살려서 대학원에 진학한 후 지금은 대학교수를 하고 있는 경우도 있지만, 386세대가 대개 그렇듯이 우리 역시 대학시절 ‘역사의 부름’에 부응하느라 전공인 한국사는 게을리 한 경우가 대부분인 친구들이다.

나 역시 “역사는 붓으로 쓰는 게 아니고, 온 몸으로 쓰는 것”이라는 멋있는 말에 현혹(?)되어 학생운동을 시작으로, 청년운동, 노동운동, 시민운동을 두루 섭렵하느라 ‘역사의식’은 있을지언정 역사적 사실에 대한 구체적인 지식과 연구는 턱없이 부족할 수밖에 없다.

이런 친구들이 한 자리에 모였으니 나오는 이야기가 참 재미있다.
한 친구가 이야기한다.

“요즘 왜 그리도 사극을 많이 하냐? 마누라하고 자식들이 자꾸 물어보는데 참으로 환장한다!”

모두가 공감할 수밖에 없는 이야기이다 보니 동의의 뜻으로 웃음이 터져 나온다.

그런데 곧바로 이어진 다른 한 친구의 대답이 더 가관이다.

“고대나 조선시대 역사극이 나오면 ‘나 현대사 전공했어!’라고 대답하고, 김두한 이야기 같은 거 나오면 ‘나 조선시대 전공이야!’라고 말하면 돼!”

순간 모든 것을 잊게 하는 한바탕 웃음이 장내를 진동한다. 참으로 훌륭한(?) 대비책을 제시했던 것이다.

▲ 결혼식 피로연장에서 만나 호탕하게 웃는 친구들의 모습.
ⓒ 김학규
어느새 이야기는 최근 각자의 근황에 대한 주제로 옮아가고 있었다.

학교를 졸업하고 각자의 분야에 정착한 과정, 새로운 변화에 적응하면서 전직한 이야기, 대학시절 꿈꾸던 그 이상을 현실화시키기 위해 여전히 운동 일선에서 뛰어다니는 이야기, 자라나는 미래세대에 희망을 걸고 교사의 길을 걷고 있는 이야기를 비롯해서 서로에 대한 이야기는 시간 가는 줄 모르고 계속되었다.

▲ 오랜 만에 친구들과 편안한 마음으로 사진을 찍었다. 왼쪽 끝이 기자다.
ⓒ 김학규
80년대 그 암울했던 시절, 전두환 군사독재정권이 판치던 시절 언제 잡혀갈지 모르는 상황에서 긴장된 모습으로 학생운동에 참여하던 모습, 사진조차 함부로 찍지 않으려고 어쩔 수 없이 사진을 찍게 될 경우 뒤돌아서 찍기조차 했던 그 엄숙한 시절에 살던 우리는, 이제는 밝은 모습으로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면서 우리 사회의 중추가 될 40대를 희망차게 맞이하기 위한 새로운 도약을 준비하고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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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작역사문화연구소에서 서울의 지역사를 연구하면서 동작구 지역운동에 참여하고 있으며, (사)인권도시연구소 이사장과 (사)민주열사박종철기념사업회 이사를 맡고 있습니다. 저서로는 <동작구 근현대 역사산책>(2022) <현충원 역사산책>(2022), <낭만과 전설의 동작구>(2015) 등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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