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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민족의 자유와 정의와 인간존엄성에 대한 소망을 안고서 불의한 군사독재자의 무서운 총칼에 맞서 맨손으로 싸우다 쓰러진 한 많은 광주의 영령이여!

오늘 여기 먼 이국땅에서도 당신들의 죽엄을 추모하는 우리 겨레가 당신들의 거룩한 죽음이 있은 지 3주년이 되는 이날을 그대로 넘길 수가 없어 여기 모였습니다. 또한 당신들의 죽음은 민주주의를 사랑하는 모든 인간의 양심의 아픔이라고 생각하는 많은 미국의 벗들이 이 모임에 협력하거나 참석했습니다. 그러나 이 많은 분들 가운데서 나는 특별한 감회와 슬픔과 분노를 가지고 이 자리에 섰읍니다.

나는 광주의거가 일어나기 바로 하루 전인 5월 17일 밤에 체포되어 중앙정보부 지하실에서 7월 15일까지 악몽같은 60일을 보냈습니다. 그런데 나는 광주사태에 관해 까막득히 모르고 있다가 7월 10일 보안사령부의 고위간부가 찾아와서 넣어준 신문을 보고야 비로서 알았던 것입니다. 신문에 보도된 군사정부의 발표를 보니 5월 18일 아침 나의 체포의 보도를 들은 광주시민이 계엄령 해제, 김대중 석방 등을 외치면서 데모하다가 180여명이 사망했다는 것이었읍니다.

나는 이 보도를 보고 희생자는 훨씬 더 많을 것을 짐작했지만 그러나 그것만으로도 광주시민이 열흘 동안이라는 기나긴 동안 얼마나 영웅적으로 싸웠는가 하는 것을 능히 판단할 수가 있었읍니다. 이 신문을 본 나는 충격을 받은 나머지 의식을 잃다싶이해서 의사의 긴급치료를 받고야 겨우 회복되었던 것입니다.

나는 이 신문을 본 후에야 비로서 그동안 조사관들이 내가 평생듣지도 보지도 못한 정동년이란 학생에게 내집 안방에서 500만원의 돈을 주고 광주에서 투쟁을 하라고 지시했다는 자백을 받기 위해서 정동년 기타 관계자들의 자술서를 같다보이고 내옷을 벗기고 고문을 하겠다고 위협을 하며 잠을 안재우고 괴롭히든 이유를 알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들은 당초 나를 내란죄로 몰면서 반드시 사형에 처하려고 갖은 조작을 다 꾸몄읍니다. 그러면서 일방 나를 찾아온 보안사 간부는 자기네와 타협할것을 요청하며 타협하면 살고 거부하면 반드시 죽는다는 것을 의심하지 말라고 강조했던 것입니다. 솔직히 고백해서 그때 나는 너무 지쳤고 죽엄이 두렵기도 하여 그들에게 협력할 수는 없지만 인권이나 민주운동으로부터 영원히 손뗀다는 조건으로 협력을 해볼까하는 유혹도 받았었습니다.

그러나 신문을 토해 광주의거를 알게 된 나는 천번 죽는 한이 있어도 나를 똑바로 쳐다보고 있는 당신들의 영혼을 배반할 수 없다고 생각하여 세 차례에 걸쳐 찾아오는 보안사 간부에게 타협할 것을 거절했으며 육군교도소로 이감된 후에도 계속된 타협요청을 '나는 광주시민과 같이 민주재단에 목숨을 바치겠다'는 말로 일축했던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당신들은 살아서도 나를 위해 싸워주었을 뿐 아니라 죽은 후에도 내가 소신을 일관하도록 붙잡아 주었던 것입니다.

광주의거는 권력에 미친 한줌도 못되는 소수의 군인들이 민주주의를 열망하는 시민을 가장 잔인한 방법으로 학살한 주권자에 대한 반역행위인 것입니다. 광주의거는 국민의 사랑과 신뢰를 받던 국군이 비록 일부이기는 하지만 한국군인은 국민에게 총을 쏘지 않는다는 전통을 깨고 시민들을 살해함으로서 국군에 대한 국민적 신뢰와 사랑을 송두리째 흔들은 사건이었읍니다.

광주사태는 제한된 지역에서만 행해진 고립된 투쟁은 압도적인 무력 앞에 결코 성공할 수 없다는 뼈저린 교훈을 우리에게 가리켜 주었읍니다. 광주의거는 한국군의 작전지휘권을 가지고 있는 미군사령관의 무책임한 행동이 가져온 재난이 어떠한 것이며 이로 인하여 한국국민의 미국에 대한 태도에 결정적 변화를 가져오게 한 사건이었던 것입니다.

이와같이 하여 광주의거는 여러분의 거룩한 희생에도 불구하고 참담한 실패로 끝나고 말었읍니다. 그러나 광주의거는 그러한 표면적인 성패가지고는 판단할 수 없는 커다란 의미와 교훈을 우리에게 준 사건이며 이는 날이 갈수록 더욱 절실해지고 있는 사건입니다.

첫째 : 광주의거는 자유와 정의와 인간의 존엄성을 열망하는 우리국민의 민주의지는 어떠한 폭력앞에서도 꺽이지 않으며 독재자의 가슴을 서늘하게할 무서운 저력을 발휘하고야 만다는 것을 국내외에 과시한 사건이었읍니다.

둘째 : 광주의거는 장구한 이 나라의 역사를 통해서 우리 민중이 보여준 저항의 전통을 이어받은 사건으로서 집권자의 억압과 착취에 항쟁한 만적의 난, 홍경래의 난, 진주민란, 동학혁명, 3·1 독립운동, 4·19 혁명, 부마 사태 등 일련의 투쟁맥락과도 합치한 사건입니다. 그리고 동학혁명, 3·1 운동, 4·19 등에 나타난 민중, 민족, 민주의 3대 정신을 집중적으로 나타낸 사건이었읍니다.

셋째 : 광주의거는 대한민국 건국이래 독재자들의 폭악앞에 짓밟히고 또 짓밟혀도 마치 잡초와 같이 되살아나고 다시 일어나는 이나라의 민중이 있는 한 일시적인 비관적 상황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머지 않아서 전국민의 소망인 민주회복과 조국통일의 대로를 나아가고야 말것이라는 가능성을 증거했던 사건입니다.

넷째 : 광주의거는 그 진상이 차츰 알려짐에 따라 광주의 한은 전한국민은 물론 세계의 모든 양심있는 인사들의 공통의 한으로 승화되었으며 그러한 우리들의 한이 오늘 이 자리를 만들게 한 것입니다. 우리 국민은 한의 국민입니다.

오늘 우리의 한은 38년 동안 계속된 조국분단의 한, 건국 이래 거듭된 독재 정치의 한, 1961년 계속된 군인정치의 한, 경제건설이 소수에게 집중된 빈부 양극화의 한, 그리고 언론, 국회, 사법부 등 민권의 보루가 무력해가고 타락돼 가는것을 보는 한 등입니다. 광주의거는 이러한 우리의 한을 풀고자 일어섰던 것이며 그 한을 안은 채 좌절된 또 하나의 한의 사건입니다.

그럼으로 광주의 한은 민주회복을 통해서 이러한 우리의 길고긴 한이 풀릴때만 해결되는 것입니다. 한은 민중의 좌절된 소망입니다. 한은 민중이 좌절된 소망을 안고 그 성취를 바라는 민중의 기다리는 마음입니다. 한은 민중이 기다림 속에서도 쉬지 않고 그 성취를 위해 조용히 전진하는 민중의 몸부림입니다. 그러므로 한풀이는 그 소망을 성취하므로서만 이루어지고 복수를 통해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춘향이의 한은 이도령과의 재결합을 통해서 풀렸고 변사또에 대한 보복을 생각하지 않읍니다. 흥부의 한은 부자가 되므로서 풀렸으므로 악한 형 놀부에 대한 보복은 고려하지 않읍니다. 용궁에 끌려갔던 토끼의 한은 살아 돌아옴으로서 풀렸으므로 자기를 속인 자라를 보복하려하지 않읍니다.

광주의 한도 광주 영령 여러분의 소원이었던 민주회복과 그를 바탕으로 한 통일에의 전진으로만 근본적인 한풀이가 가능한 것이라고 믿읍니다. 군사쿠데타를 저지른 자들이 여러분에게 가한 만행에 대한 여러분과 우리의 슬픔과 분노와 통탄을 어찌 말로 다하겠으며 철저한 보복을 가하고 싶은 충동을 어찌 금할 수가 있겠읍니까. 나는 비록 목숨은 살았지만 나자신 격은 치욕과 고통과 분노를 생각할 때 참기 어려운 격정을 느낄 때가 한두번이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의 진정한 한풀이는 눈에는 눈, 이에는 이의 복수에 있지 않고 한을 맺히게 한 좌절된 소망의 성취에 있으므로 우리는 내일의 국민적 화해와 생산적 전진을 위해서 만일 과오를 범한자들이 뉘우치고 여러분의 한풀이에 동참한다며 우리는 어떠한 정치보복도 엄중히 삼가해야 할것입니다. 이러한 광주영령 여러분의 한풀이를 위해서 우리는 전두환 정권에 요구합니다.

첫째, 전두환 정권은 광주사태의 전모와 실상을 밝히고 죽은 광주영령과 국민앞에 사과해야 한다. 둘째, 전두환 정권은 광주시민의 의거를 폭동과 내란으로 몰았던 거짓을 취소하고 이로 인해서 처벌된 인사들과 광주 시민의 명예를 회복해야 한다. 셋째, 전두환 정권은 광주시민과 온 국민의 열망인 민주회복을 위해서 성의를 다해야 하며 그러기 위하여 우선 언론자유의 회복, 정치범의 석방과 복권, 정치활동 금지자의 해제, 그리고 노동조합과 농민운동 및 학원활동의 자유보장 등을 단행하여 사태의 진정한 해결의 실마리와 국민화해의 길을 열어야 한다.

다음에 우리는 미국 정부에 요구합니다. 미국은 광주사태에서 군사력남용을 막지 못한 책임을 통감하고 다음과 같은 조치를 취해야 한다.

첫째, 안보라는 구실아래 독재정권의 지지를 계속하므로서 한국민의 민주회복노력을 방해할뿐 아니라 결과적으로 국민의 사기저하속에 안보 그 자체마저 위태롭게 하는 그릇된 대한정책을 즉시 전환시켜야 한다. 둘째, 미국은 군인이 국방에는 충실치 않고 군대를 동원하여 정치에 개입하는 행동에 대해서 책임을 지고 이를 저지해야 한다. 셋째, 미국은 그 건국정신에 따라 한국에서의 다수국민의 의사를 존중하는데 충실해야 한다. 넷째, 미국정부와 미국보도기관은 폴랜드나 공산권에서의 인권투쟁에만 대대적인 관심을 보이고 한국내에서 매일같이 일어나는 학생, 노동자, 농민, 지식인, 그리고 종교인들의 인권과 민주주의에 대한 투쟁을 등한시하는 불공정한 태도를 시정해야 한다. 이러한 태도의 변경만이 한, 미 양국국민간의 진정한 화해와 협력의 길이며 한국에서 제 2의 월남화의 운명을 막는 길이다.

세 번째로 우리중 많은 사람이 범해온 행동하지 않는 양심 즉 방관의 죄에 대해서 당신들 광주의 영령앞에서 반성하고 새로운 결의를 다짐하고 싶습니다. 2차대전 당시의 히틀러 치하의 불란서에서 어떤 레지스탕스가 다른 혐의자와 같이 사형장으로 끌려가고 있었읍니다. 그때 끌려간 혐의자중 한사람이 소리내어 울면서 ‘나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는데 왜 죽이느냐’고 불평을 했읍니다.

그때 그 레지스탕스는 우는 사람을 돌아보고 '당신이 아무것도 안했기 때문에 우리가 지금 죽게 되는 것이다. 만일 모든 불란서국민이 빠짐없이 저항에 참가하고 당신과 같은 방관자 노릇을 하지않았던들 히틀러가 어찌 전 불란서 국민을 죽일 수 있으며 억압정치에 성공할 수 있겠는가'고 했다는 것입니다.

이 말은 바로 오늘의 우리 국민에게 적중한 말이며 재미교포인 우리들에게도 큰 교훈을 주는 말입니다. 우리는 비록 고국으로부터 떨어져 있지만 아니 어떤 의미에서는 떨어져 있기 때문에 아무런 제약없이 더 효과적으로 우리 국민과 광주영령의 맺고 맺힌 한을 푸는 민주회복 운동에 참가할 수 있읍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첫째, 우리는 미국시민 또는 거주자로서 미국의 정치와 여론이 한국에서의 바른 정책으로 전환하도록 노력해야 할 것이며 둘째, 한국정부의 독재정치의 종식을 촉구하는 투쟁을 성의있고 끈질지게 전개해야 할 것이며 셋째, 국내 민주세력에 대해서 물심양면의 지원을 아끼지 않고 동참하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이상 지적한 바와 같이 전두환 정권의 회개와 새출발, 미국의 바른 대한정책으로의 태도전환, 재미교포의 행동하는 양심으로서의 참여활동은 우리가 한국에서의 오늘의 국민간의 대립과 경색된 위기를 풀어나가는 유일한 길이며 위대한 여러분 광주의 영령들을 위로하고 그 죽음을 값있게 되살리는 길입니다. 우리는 이 이상 국민내부에서 불행한 투쟁이나 유혈이 없기를 진심으로 바라며 그러기 위해서는 정부나 국민이나 미국당국자 모두가 광주 의거의 진정한 의미를 되새기고 바르게 체득하는 데서만 그 길을 찾을 수 있다고 믿습니다.

우리는 확신합니다. 광주의거의 위대한 투쟁과 희생에 힘입어 우리는 80년대에 반드시 민주회복에 성공할 것입니다. 우리 국민의 뜻은 그만큼 더욱 굳어졌고 역량은 그 만큼 강해졌으며 지혜는 그만큼 성숙해 졌습니다. 이승만씨도 박정희씨도 독재적 영구집권에 실패했습니다. 어찌 전두환 정권만이 예외일 수 있겠습니까.

존경하고 사모하는 광주의 영령이시여! 여러분은 죽어도 죽지 않았습니다. 사육신과 의병과 동학혁명군와 3·1운동의 순국자와 4·19 민주영령의 넋이 우리속에 영원히 살고 있듯이 여러분도 우리 마음속에 깊이 깊이 자리잡고 살아있습니다. 우리는 여러분의 뜻을 받들어 국민의 인권과 정의실현의 길이며 통일에의 기본이 되는 대한민국의 민주회복을 성취하는데 모든 것을 받혀 헌신할 것입니다. 그리하여 여러분은 이 나라의 민주주의의 수호신이 될 것이며 광주시는 우리민족과 세계민주 인사가 경모하는 자유의 성도가 될 날이 반드시 올 것입니다.

거룩한 영혼들이여! 6천만 국민의 존경과 사랑속에 고히 잠드십시요. 하느님 사랑이 여러분에게 천국에서의 평화와 영광의 생활을 주실 것을 굳게 믿습니다.

1983. 5. 22
김대중

덧붙이는 글 | 1983년 김대중의 광주 추도사 전문을 그대로 옮긴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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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학 박사이며 연세대학교 김대중도서관에서 사료연구 업무를 담당하고 있습니다. 김대중에 대한 재평가를 목적으로 한 김대중연구서인 '성공한 대통령 김대중과 현대사'(시대의창, 2021)를 썼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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