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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산>에서 정조가 되는 세손 이산(이서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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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산의 등극이 초읽기에 들어갔다. 영조가 양위의 뜻을 밝혔고, 세손파와 반대파 간에 치열한 물밑 작전이 개시되었다. 영조는 '설날' 이후엔 사망할 것으로 보이고, 이산도 '대통령 취임일'에 즈음해서 등극할 것으로 보인다. 그 때까지 세손에게 남은 것은, 반대파의 공격을 누르면서 국왕직 인수를 준비하는 것뿐이다. 이것은 드라마 <이산>의 내용이다.

실제 역사에서는 영조가 대리청정을 선포한 이후 세손파와 반대파 간에 치열한 공방전이 전개되었다. 세손이 대리청정을 개시한 시점은 서기 1776년 1월 30일이고, 영조가 사망한 시점은 같은 해 4월 22일이다. 이 82일 동안 이산은 반대파의 공격을 누르면서 국왕직 인수를 추진했다. 요즘 말로 하면, 82일간의 '대통령직' 인수에 대처한 것이다. 

이 82일 동안의 정치적 공방전에 관한 이야기는 차후로 미루고, 여기서는 그 기간 동안에 정조가 어떤 자세로 국왕직 인수에 대처했는지 하는 점만 살펴보기로 한다. 국왕직 인수에 대한 세손 이산의 자세.

왜 그것을 살펴보아야 할까? 여기엔 중요한 이유가 있다. 그것은 이산이 얼마나 진지한 자세로 왕자(王者) 훈련을 해왔는지를 보여주는 바로미터가 되기 때문이다.

대통령직 인수기간 82일, 이산은 무엇을 했나

열렬히 고대하던 그 무언가가 갑작스레 이루어지려는 순간, 그 앞에서 인간의 자세는 크게 두 가지로 갈린다. 한 가지는 매우 진중한 태도, 또 한 가지는 매우 경망스러운 태도.

고대하던 그 무언가를 위해 평소부터 열심히 준비해온 사람은 희망의 성취 앞에서 진중함을 유지할 수 있다. 마지막 순간까지 자신이 어떻게 처신해야 하는지를 잘 알기 때문이다.

그러나 고대하던 그 무언가를 그냥 고대만 했을 뿐 평소에 별다른 준비를 하지 않은 사람은 갑작스러운 희망의 성취 앞에서 그저 흥분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그런 사람은 대개 경망스러운 태도를 보이는 법이다. 스스로 어찌해야 할 바를 잘 모르기 때문에 주변 사람들까지 덩달아 혼란스럽게 만드는 것이다.

이산에게도 국왕 등극은 '고대하던 그 무언가'였다. 왕의 손자로서, 왕세자의 아들로서 태어난 그는 세상에 나온 그 순간부터 왕자(王者)의 자리를 향해 달려온 사람이었다. 아버지의 죽음으로 하마터면 좌초될 뻔도 했지만, 그는 그런 파고를 헤치고 국왕 등극 직전까지 달려온 사람이었다.

국왕 등극을 눈앞에 둔 상황. 만약 그가 평소에 준비를 게을리했다면, 그는 분명히 몹시 흥분하여 경망스러운 태도를 보였을 것이다. 반면 그가 평소부터 충실히 준비했다면, 그런 상황에서도 침착성을 잃지 않고 진중함을 보였을 것이다.

영조 앞에서 고개 숙인 이산. ‘대통령직’ 인수에 대처하는 그의 자세를 엿볼 수 있다.
 영조 앞에서 고개 숙인 이산. ‘대통령직’ 인수에 대처하는 그의 자세를 엿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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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82일간의 국왕직 인수기간 동안에 세손 이산은 어떤 자세를 보였을까? 그는 곧 다가올 자신의 시대 앞에서 두렵고 떨리는 마음을 품고 있었을까? 아니면, 세상 사람들을 놀라게 만들고 그들이 자신의 통치에 대해 기대감을 품도록 하기 위해 그저 '쇼킹한 정책'이나 궁리하고 있었을까?

서당에서는 청나라 말로만 수업을 시키도록 하겠다고 선포하여 백성들을 '쇼킹'하게 만들지는 않았을까? 양반·귀족들만 들어갈 수 있는 학당을 따로 만들려 하지는 않았을까? 왜인이나 청나라 사람에게도 판서·참판 직을 맡긴다고 하여 세상을 어리둥절하게 하지는 않았을까? 황해·평안·함경도를 예조(외교부서)에 편입시키겠다는 황당한 정부개편을 꿈꾸지는 않았을까? 혹시라도 사도세자를 사면하겠다는 청천벽력 같은 선포를 하지는 않았을까?

물론 조만간 새로운 왕이 될 사람으로서 새로운 정책을 예고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그 경우에도 인간에 대한 사랑과 예의를 잃지는 말아야 한다. 토지개혁 같은 것을 선포한다면 모를까, 그런 것도 아니면서 그저 세상을 깜짝 놀라게 하는 데에만 주안점을 둔다면 그런 사람에게서 어찌 믿음직한 군왕의 모습을 그릴 수 있을까?

서당에서는 청나라 말로 수업, 양반 들어가는 학당 개설?

만약 세손 이산이 그렇게 행동했다면, 우리는 정조 이산을 재평가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정조 이산이 정말로 그렇게 시시한 인물이었다면, 우리는 정조를 그냥 '이산 씨'라고 불러도 될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정조를 '이산 씨'라고 부를 만한 빌미를 쉽게 찾지 못할 것이다. 왜냐하면, 그 82일 동안 정조는 매우 진중한 자세로 국왕직 인수에 대처했기 때문이다. 그에게서는 흥분이라든가 경망이라든가 하는 태도를 조금도 찾아볼 수 없었다. <정조실록> ‘정조대왕 행장’이 그 82일간의 상황을 생생하게 증언하고 있다.

'정조대왕 행장'에서는 "(그 기간에 세손이) 포고한 명령들이 모두 다 하늘의 법칙에 맞아 모든 사람들이 다 호응하고 그대로 순종"할 정도였다고 한다. 자신의 직무집행이 법도에 어긋나지 않음을 잘 알면서도, 세손 이산은 국왕 영조에게 일일이 보고하고 사전 동의를 얻었다고 한다.

그는 '곧 전임자가 될 사람' 앞에서 교만하지 않고 최대한의 예의를 다했다. 그것은 전임자에 대한 예의라기보다는 인간에 대한 예의였다. 정조는 인간에 대한 예의를 지킬 줄 아는 사람이었다. 

그는 국왕 앞에서만 겸손한 인물이 아니었다. 국왕직 인수기간 동안에 세손은 아랫사람들에게도 한층 더 겸손하게 대했다. 그는 동궁 소속 관원들에게 "내가 사안을 처결할 때마다 너희들의 의견을 말해달라"면서 "나의 부족함을 채워달라"는 부탁을 덧붙였다.

양위문제를 놓고 대책회의 중인 동궁 사람들. 오늘날로 치면, ‘국왕직 인수위원회’라 할 수 있는 모임이다. <이산> 제39회(28일 방영) 예고편에서.
 양위문제를 놓고 대책회의 중인 동궁 사람들. 오늘날로 치면, ‘국왕직 인수위원회’라 할 수 있는 모임이다. <이산> 제39회(28일 방영) 예고편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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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수기간 동안의 세손은 위와 같이 인간에 대한 예의만 지킨 게 아니었다. 그는 국왕직 인수에 수반된 제도개혁에서도 분명한 원칙을 선보였다. 그의 정책은 세상을 황당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세상을 공감하게 만드는 것이었다.

먼저, 그는 동궁 소관인 명례궁(덕수궁의 옛 이름)을 탁지(호조의 별칭) 소속으로 이관했다. 명례궁 소유 토지를 경작하는 농민들이 명례궁 소속 관리들로 인해 피해를 입지 않도록 탁지가 그곳을 관할하도록 한 것이다. 조정이 동궁전을 견제함으로써 백성들이 보호를 받을 수 있도록 하기 위하여 왕실 소관이던 명례궁을 조정 소관으로 넘겨준 것이다.

또한 그는 환관 등의 비리를 조정에 고발할 수 있도록 하는 조치를 취했다. 이들로 인해 궁궐의 권위가 떨어지고 백성들이 피해를 입는 일을 막기 위함이었다.

위의 사례들은, 국왕직 인수기간 동안에 세손이 염려한 바가 백성의 안위와 조정의 기강 확립이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는 통치를 위한 기본 작업에 충실했던 것이다.

인간에 대한 예의, 그리고 분명한 제도개혁

그런데 이 기간에 그럴싸한 건의 하나가 세손에게 들어왔다. 모든 과거시험에 면접을 필수화하자는 것이었다. 그 제안의 구체적 사유는 확인하지 못했지만, 이에 대한 세손의 대답으로 미루어보아 아마도 "면접시험 없이 필기시험만으로는 선비를 제대로 평가할 수 없다"는 것이 그 건의의 사유였던 것으로 짐작된다.

이에 대해 세손은 "선비에게는 예(禮)와 성(誠)으로써 대우해야 한다"면서 "사람을 처음부터 의심해서는 안 된다"며 그 제안을 물리쳤다. 문장으로 선비를 평가하자는 것이었다. 능력을 시험하기 위해 선비에게 이것저것 질문하는 것은 선비에 대한 예우가 아니라는 것이 그의 신조였던 것으로 짐작된다.

그러면서 세손은 다음과 같은 말을 덧붙였다. <정조실록>의 기록이다.

"예로부터 임금들이 잘 다스리는 방법을 찾기 위해 너무 서두르는 경우가 많았다. 나는 대리청정 이후로 한두 가지 폐단을 바로잡으려 하고 있지만, 이 역시 너무 빠른 게 아닐까 염려된다."

우리가 개혁군주로 존경하는 정조도 이와 같이 개혁 앞에서는 한없이 진중한 자세를 보였다. 그는 조금도 서둘지 않았다. 82일의 기간 동안 그는 "빨리!빨리!"를 외치지 않았다. 단순히 기존의 것을 바꾸기 위한 개혁이 아니라 인간을 위한 개혁을 꿈꾸었기에 그는 그 개혁 앞에서 한없이 진지해지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국왕직 인수기간 동안에 세손이 얼마나 신중했는가는 아버지 사도세자에 대한 그의 태도에서도 잘 드러난다. 28일 방영된 <이산> 제39회에서는 국왕 등극을 눈앞에 둔 세손이 아버지의 복수를 추진하는 장면이 나온다.

물론 실제의 이산이 그런 생각을 품었을 수는 있다. 하지만, 실제의 이산은 절대로 그런 속내를 밖으로 드러내지 않았다. <이산> 제39회 방영분은 실제 역사를 보여주는 것이라기보다는 이산의 마음 속 의지를 보여주는 것이라고 해석하는 편이 나을 것이다.

"아버지는 죄인"이라고 말한 정조의 속내는

<이산>에서 누명을 쓰고 억울하게 죽은 사도세자.
 <이산>에서 누명을 쓰고 억울하게 죽은 사도세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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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왕직 인수가 한창 진행되던 음력 2월(양력으로는 3·4월)이었다. 수은묘(사도세자를 기리는 사당)를 참배하고 돌아온 세손이 영조 앞에 나아가 사도세자 문제를 거론했다.

"왜 내 아버지를 저리 만들었습니까"라고 말했을까? 아니다. 세손은 다음과 같이 말을 시작한다.

"신은 임오년에 전하께서 내리신 처분을 사시(四時)처럼 믿고 금석(金石) 같이 지킬 것입니다. 못된 무리들이 그것을 뒤집고자 한다면, 그런 자들은 종묘사직에 대한 죄인이 될 뿐만 아니라 만고의 죄인이 될 것입니다."

아버지에 대한 할아버지의 처분을 존중한다는 것이었다. 아버지는 여전히 죄인이므로, 아버지를 죄인 아니라고 하는 자는 만고의 죄인이 될 것이라는 말이었다. 

물론 그게 이산의 본심은 아니었다. "그래도 그렇지, 아무리 보위가 탐나도 어찌 아들로서 그런 말을 할 수 있느냐"라며 분개하는 사람들이 있을지 모른다. 하지만, 그 바로 다음에 세손이 한 말을 계속 들어보면, 그가 왜 서두에서 사도세자의 죄를 인정했는지 짐작할 수 있게 된다. 

"아버지를 죄인 아니라고 하는 자들은 만고의 죄인이 될 것입니다"라고 말한 뒤에 이산의 입에서 튀어나온 한 마디는 "다만!"이었다. 진짜로 하고 싶은 말은 따로 있었던 것이다.

그럼, 이산이 하고 싶었던 말은 무엇이었을까? 그것은 다름 아니라 <승정원 일기>에 남아 있는 사도세자 관련 기록을 세초(洗草)해 달라는 것이었다. 자식으로서 슬픔이 너무 복받쳐 <승정원일기>의 그 세세한 내용들을 차마 눈 뜨고 볼 수 없으니, 아버지에 관한 일부 사료의 초고를 없애달라는 것이었다. 없애고자 하는 사료를 물로 씻어서 글자를 지운 뒤에 그 종이를 재활용했기 때문에, 그런 작업을 세초라고 불렀다. 영조는 손자의 부탁을 들어주기로 했다.

위와 같이 세손이 영조 앞에서 "아버지는 분명히 죄인"이라고 인정한 진짜 속내는 아버지에게 불리한 기록을 없애기 위함이었다. 아버지의 복권을 꿈꾸는 한편, 할아버지를 노하게 할 만한 발언을 삼가고 있었던 것이다. 이산의 이중적인 태도에서 약간의 무서움을 느낄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우리는 그 같은 태도에서 목표를 향한 그의 차분한 접근법을 엿볼 수 있을 것이다.

정조의 개혁에는 "빨리빨리"가 없었다

이산은 아무 준비도 안 된 상태에서 경망하게 행동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런 진중함이 없었다면 그 숱한 난관을 뚫고 등극하지도 못했을 것이고, 수구보수들의 틈바구니 속에서 개혁 드라이브를 펼치지도 못했을 것이다.

이상이 국왕직 인수에 대처하는 세손 이산의 자세를 보여주는 역사적 사실들이다. 여기서 알 수 있는 바와 같이, 이산은 절대로 경망하게 행동하지 않았다. 그는 항상 진중하게 행동했다.

그는 말도 안 되는 정책들을 내놓아 세상을 황당하게 한 게 아니라, 오로지 백성과 조정의 앞날에 '꼭 필요한 정책들'만 내놓았다. 곧 전임자가 될 영조에게 극진한 예의를 다했고, 아랫사람들에게도 거만하게 굴지 않았다.

이처럼 몸가짐이 바른 인물이었기에, 그가 추진한 개혁 역시 두고두고 후세의 칭송을 받을 수 있는 것이다. 아무리 능력이 출중했다 해도 인간에 대한 사랑도 없었고 진중함이나 겸손함도 없었다면, 오늘날의 우리는 절대로 정조 이산을 존경하지 않았을 것이다. '대통령직' 인수에 대처하는 그의 자세는 정조 임금에 대한 우리의 존경심을 한층 더 자극하고 있다.

<이산>
 <이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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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그:#이산, #정조, #영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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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mjongsung.com.일제청산연구소 연구위원,제15회 임종국상.유튜브 시사와역사 채널.저서:대논쟁 한국사,반일종족주의 무엇이 문제인가,조선상고사,나는 세종이다,역사추리 조선사,당쟁의 한국사,왜 미국은 북한을 이기지못하나,발해고(4권본),패권쟁탈의 한국사,한국 중국 일본 그들의 교과서가 가르치지 않는 역사,조선노비들,왕의여자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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