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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연재 기사 <시 더듬더듬 읽기> 이야기

내가 살아가는 이 시대는 지식 과잉의 시대다. 사방 천지에 볼거리와 읽을거리가 넘쳐난다. 그 때문에 사람들의 정신은 늘 소화불량과 피곤함에 쩔어 있다. 머릿속은 쓰잘데기 없이 복잡하다. 잡초처럼 자욱하게 우거진 활자의 숲에서 미아가 된 자아를 발견하는 건 결코 드문 일이 아니다.

아침에 눈만 뜨면 인터넷으로 들어간다. 내 눈은 습관처럼 글이라는 음식을 탐하지만, 내 뇌는 자주 영양실조를 하소연한다. 읽는다는 행위는 과연 무엇을 뜻하는 행위일까?  어쩌면 무언가를 읽는다는 건 자신의 내부에 돌을 던져 적막을 깨트리는 행위인지도 모른다. 처음엔 아주 조그맣던 동심원이 점점 커져 나중에는 마음이 크게 출렁인다. '아무것도 읽고 싶지 않다'라는 생각이 일어 읽을거리를 멀리하는 때가 있다. 그럴 땐 내 마음이 제가 가진 적막을 깨트리고 싶지 않다는 뜻이다.

아마도 지식에 대한 염증 때문이었을 것이다. 서른 살 이후, 난 오랫동안 책을 읽지 않았다. 그러나 몇 년 전 어느 날 우연히 인터넷을 시작하면서 사정은 크게 달라졌다. 글 읽기를 넘어서 글쓰기라는 영역에까지 발을 들여놓게 된 것이다. 그것은 아무리 좋게 봐주려 해도 주제넘은 일이었다.

사춘기 시절 이래, 유난히 시(詩)를 좋아했던 나. 기왕에 글을 쓰려면 시를 쓰고 싶었다. 그러나 시가 어디 원한다고 해서 아무나 쓸 수 있는 물건인가. 그렇다면 내가 차선책으로 꿈꿀 수 있는 것은 시 같은 아름다운 산문을 쓰는 것이었다. 그것이 내가 <오마이뉴스>에 시 감상 기사인 <시 더듬더듬 읽기>를 쓰기 시작한 이유다.

은근슬쩍 겁이 났다. 시에 대한 올바른 이해를 담보할 수 없는 내 얕은 지식이 시의 맛을 상하지 않게 적절하게 풀어낼 수 있을까. 그런데 일찍이 사망선고를 받았다는 시에 대한 이야기를 어느 누가 읽어주기나 할까. "시가 죽었다"라는 건 시를 읽는 독자가 죽었다는 것이 전제돼야 하는 것이다.

혹 내 무식이 저지를지도 모를 오류에 대한 방패막이가 필요했다. 내가 부제에 '더듬더듬 읽기'라는 말을 슬쩍 집어넣은 건 그 때문이었다. 더듬더듬 읽다 보면 실수할 수도 있지 않는가 말이다. 그렇게 시작된 내 시 감상 기사가 어느덧 90회를 넘었다. 그러나 지금도 기사를 올리고 나면 '혹시 내가 시를 잘못 읽었으면 어쩌나?" 오류의 가능성에 항상 가슴 졸이곤 한다.

시의 임자인 시인들과의 '만남' 아닌 '맛남'

그런 소심한 내가 가끔 글쓰기에 탄력을 받는 경우도 있다. 독자로부터 심심찮게 날아오는 쪽지나 메일이 당도하는 경우이다. 시의 임자인 시인으로부터 직접 연락이 오는 경우도 있다. 작년 이맘때쯤엔 김수영문학상 등을 여러 상을 받은 바 있는 이정록 시인으로부터 연락이 오기도 했다. "술 한 잔 합시다"라는 참새 혀만큼이나 짧은 글과 자신의 전화번호 뿐인 아주 짧은 쪽지였지만 난 그것만으로도 그의 의사를 충분히 접수했다.

암, 모름지기 시인이라면 그렇게 간단 명료해야지. 이정록 시인과 통화를 시도했다. <붉은 풍금새에게는 건반이 없다>라는 기사 이래 그의 시에 대한 감상을 두어 편 썼던 게 고마웠던 모양이다. "오시거든 천안역에서 전화하세요"라는 말로 통화를 끝냈지만 난 여태 천안에 가지 않았다.

시집 <봄, 벼락치다> 속지에 쓴 시인의 사인.
 시집 <봄, 벼락치다> 속지에 쓴 시인의 사인.
ⓒ 안병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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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다음으로 쪽지를 보낸 시의 임자는 홍해리 시인이다. 자신의 '모깃불을 피우며'라는 시에 대한 감상을 적은 <한 여름밤에 피우던 쑥 모깃불 향내가 그립다>라는 기사를 읽은 시인께서 쪽지를 보내온 것이다. "주소를 알려주면 시집을 보내주겠노라"라는 말씀이었다.

보내온 시집 날개에 실린 시인의 사진을 보니, 아주 멋쟁이시다. 우리 나이로 올해 예순일곱이신 이 연부력강한 시인께선 <봄, 벼락치다>(우리글)와 <푸른 느낌표!>라는 두 권의 시집을 보내주셨다. 거기서 그친 게 아니라, 자신이 동인으로 있는 월간 <우리시>를 달마다 보내주시고 있다.

며칠 전에는 뜬금없이 <글 잘 읽었습니다. 고맙습니다.>라는 제목의 쪽지가 왔다. 발신자를 보니, 김영남이다. 김영남이 누굴까? 나는 또 어느 독자가 보낸 쪽지이거니 했다. 그러나 그 쪽지는 김영남 시인이 보낸 것이었다.  2006년 현대시작품상을 수상하기도 한 김영남 시인은 세계를 바라보는 낙관적인 시선과 시의 도처에 번뜩이는 기지가 돋보이는 시를 쓰는 분이다.

안병기 선생님, 안녕하세요. 
시집 <푸른 밤의 여로> 속지에 쓴 시인의 사인.
 시집 <푸른 밤의 여로> 속지에 쓴 시인의 사인.
ⓒ 안병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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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시 쓰는 김영남입니다.

선생님의 글, 그리고 제 시 감상 글 잘 읽었습니다. 읽다보니 정서가 저와 똑같다는 걸 느꼈습니다. 혹여 고향이 저와 같은 남도 지역이 아니신지요?

하여 본격적으로 고향 풍물, 풍경을 소재로 한 최근 시집을 보내드리려고 합니다. 주소를 알려주시면 고맙겠습니다. 서신이 오가고 언젠가 소줏잔 기울일 기회가 오길 기대해봅니다.

그럼 이만 줄입니다. 제 메일 주소는 ○○입니다 

그런데 가만있자, 내가 김영남 시인의 시에 대한 감상을 언제 썼더라. 시 '초가집이 보인다'에 대한 느낌을 적은 <휘파람으로 달빛을 불러들이던 집의 기억>은 작년 10월에 썼던 기사다.

그런데 어떻게 해서 이제야 기사를 읽은 것일까. 메일로 주소를 보냈더니 즉시 시집 <푸른 밤의 여로>(문학과지성사)를 부쳐왔다. 내가 이미 시집을 갖고 있건 아니건 간에 시인의 사인이 든 시집을 받는 건 기쁘고 영광스러운 일이다.   

요즘엔 저작권 문제가 여간 까탈스러운 게 아니다. 사진 같은 경우엔 반드시 작가의 허락을 얻어야만 실을 수 있는 게 현실이다. 그러나 여전히 이 저작권에서 예외인 존재들이 있다. 국악인들과 시인들이 바로 그런 분들이다. 대중가요 가수들과는 달리 국악인들의 경우엔 자신의 저작권을 행사하긴커녕 자신의 노래를 들어주는 것만도 고마워해야 하는 게 현실이다.

시를 읽어내는 내 자세가 좀 더 투철하기를

시인들의 처지 역시 이와 크게 다르지 않다. 독자가 자신의 시를 읽어주는 것만으로도 그저 황공무지한 것이다. 저작권 문제를 염두에 두고 생각하면 시인들이 내게 고마워서 시집을 보내야 하는 게 아니라 도리어 시인의 허락 없이 시를 사용한 내가 고마워 해야 할 처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류의 메일을 받을 때면 왠지 모르게 미안한 느낌이 든다. 그럴 때마다 앞으로는 '시 감상을 작성하는 일에 더욱더 신경을 써야겠다'라고 홀로 다짐하곤 한다. 젊어서 내가 알던 어느 시인 한 분은 '만나다'라는 말을 '맛난다'라고 쓰기를 고집하곤 했다. 주제 넘은 시 감상을 통해 우리 시단의 중진들과 '만난다'는 건 확실히 '맛나는' 일이다.

사람들은 툭하면 얘기하곤 한다. "요즘 시가 너무 어렵다"라고. 산문의 압축이랄 수 있는 시가 어려운 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시에는 산문이 갖지 못한 매력이 있다. 한 사람의 정신을 축약한 엑기스이니 짧은 시간에 삶에 대한 깨침 혹은 깨우침을 얻을 수 있는 셈이다. 새벽에 일어나면 습관처럼 시집을 뒤적이곤 한다. 내 정신의 공복을 채워줄 몇 줄의 시구를 찾아 헤매는 것이다. 감상을 쓰고 싶은 시를 발견했을 적엔 가벼운 흥분을 느끼기까지 한다.

삶은 언제나 시어미의 눈초리처럼 지엄하다. 삶의 내용을 담아내는 시도 지엄한 진리를 단고있다. 그런 시를 읽어내는 내 감상도 갈수록 투철했으면 좋겠다.


태그:#이정록 , #홍해리 , #김영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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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 곳을 지향하는 눈(眼)과 한사코 사물을 분석하려는 머리, 나는 이 2개의 바퀴를 타고 60년 넘게 세상을 여행하고 있다. 나는 실용주의자들을 미워하지만 그렇게 되고 싶은 게 내 미래의 꿈이기도 하다. 부패 직전의 모순덩어리 존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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