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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남아도는 시간에

 

 과천에 볼일이 있어서 나왔는데, 네 시 약속이었으나 시간을 잘못 알고 두 시가 안 되어 닿습니다. 오늘 따라 일찌감치 길을 나섰기에 시간이 세 시간 가까이 남아돌게 됩니다. 이를 어쩌나 생각하다가, 그러면 과천에서 가까운 헌책방에라도 가서 책을 보다가 가자고 생각합니다. 자전거를 몰아 과천을 벗어나고 남태령을 넘어 사당역을 거쳐 남현동 안쪽 골목으로 들어갑니다. 달력 같은 데에 시간을 잘 적어 놓았다면 몸이 이렇게 고단할 일을 불러오지 않았으련만, 이래저래 마음만 바쁘게 돌아치듯 살고 있다 보니까, 몸은 더욱 고달픕니다.

 

 그래도 봄볕을 느끼며 자전거를 몰 수 있습니다. 모처럼 즐거이 자전거 나들이까지 하게 됩니다. 더욱이 뜻하지 않게 시간이 남아 헌책방 나들이도 할 수 있으니, 시간을 잘못 안 일은 오히려 즐거움이 아닐까 싶기도 합니다.

 

 

 피식피식 웃으며 훅훅 숨을 몰아쉬고, 조금 헐떡댄 끝에 헌책방 앞에 닿습니다. 요사이 서울 나들이를 얼마 못하다 보니 남현동 헌책방 〈책창고〉도 아주 오랜만에 찾아왔습니다. 얼마만인가 손가락으로 달수를 꼽아 보는데 잘 떠오르지 않습니다. 그동안 나를 기다리던 책들은 얼마나 지루해 했을까 싶고, 지루함을 견디다 못해 다른 책손 품에 안겼겠구나 싶습니다. 그러나 뭐, 책이란 돌고 돌기 나름이니 내 품에 안기다가도 다른 이 품에 안기고, 다른 이 품에 안기다가도 내 품에 안기곤 합니다. 오늘 하루 뜻이 맞고 눈이 맞으면 제 손을 거쳐 가방에 고이 담기고, 오늘 하루 뜻이 맞지 않고 눈도 안 맞으면 제 손으로 와닿지 않습니다.

 

 아무튼, 두 시간이면 넉넉할 수 있으나 빠뜻할 수도 있으니 바지런히 둘러보자고 생각합니다.

 

 

 (2) 즐겁게 배우는 작은 책

 

 헌책방 〈책창고〉 아저씨한테 꾸벅 인사를 합니다. "아, 오랜만이요!" 하면서 오른손을 내미는 아저씨한테 "네, 뭐가 그리 바쁘다고 오랜만입니다." 하면서 오른손을 맞잡습니다. "뭐 좋은 일이 많아서 그리 바쁘셨나?" "좋은 일은 없는데 늘 바쁘게 사네요."

 

 도란도란 인사와 안부를 주고받은 다음 슬그머니 골마루 안쪽으로 한 발 두 발 옮깁니다. 오늘은 안쪽 깊숙한 데에 있는 손바닥책 칸을 먼저 둘러봅니다. 《가톨릭 문우협회 엮음-존재 둘레의 사색》(성바오로출판사,1974)이라는 작은 책이 보입니다. 이 책에는 나라안에 이름난 글쟁이들이 '하느님 사랑'을 더 널리 나누고자 쓴 짤막한 글이 모였습니다. 한 분 한 분 이름을 살피며 읽어 보는데 영 지루하고 졸음이 쏟아집니다. 하느님 사랑이든 부처님 사랑이든, 입으로 욀 사랑이 아닌 몸으로 부대낄 사랑이 아니라면 듣기 힘듭니다. 그러다가 눈이 살짝 뜨여지는 글을 하나 만납니다.

 

.. 내 눈이 두 개밖에 없고, 따라서 보는 시야도 좁으니 그런 점을 전제로 하는 말이지만, 사실은 세속사회보다 못한 보수를 주는 곳이 거의 다라는 것이다. 그리고 한다는 말이, "여긴 교회기관이요, 하느님께 희생하는 셈치고 달게 받으시오." 만일 불평이라도 한다면 "그럼 그만두면 되지 않소" 하는 경우도 없는 게 아니다. 그리하여 유능한 일군은 교회에서 떠난다 … 나는 사실 억울한 저임금을 감수하면서 일하는 독실한 많은 교유를 알고 있다. 하지만 내가 믿기엔 세상에서 살림에 충분한 임금을 받았다고 해서 하늘나라에서 하느님께서 주실 상을 덜 주실까? 우리가 믿는 하느님은 그런 인색한 하느님이 아니시다. 희생을 가장한 저임금, 그것은 정녕 하느님의 저주거리라고 나는 확신한다. 이 말은 그대로 가톨릭 신자인 기업가에게도 해당되는 말이다. 주일날 열심히 교회에 나가고 몇 푼 안 되는 헌금이나 했다고 가톨릭 신자인가! 적어도 크든 작든 가톨릭 기업가는 노사문제에 있어서, 역대 교황 성하가 무엇을 역설하고 계신지 알고 실천해야 한다 … 우연히 런던 대학생을 만나 맥주를 나누며 이야길 했는데 "종교가 뭐냐"고 물었더니 '가톨릭'이라고 대답한다. 그래서 교회엘 나가느냐고 물었더니 "안 나간다"고 대답한다. "왜 안 나가느냐?"고 물었더니, "교회에 나가면 그럴듯한 말은 한다. 그러나 말만 하지 실천은 하지 않는다. 그런 교횔 뭣하러 나가느냐"고 오히려 내게 반문한다. 이태리에서 공산당원들을 만나 이야길 했는데 그들은 이구동성으로 말한다. "교회는 우리 가난한 사람을 돌보아 주지 않는다. 그러나 공산당은 우리 편을 들어준다. 그런데 그들도 나도 다 가톨릭 신자다"라고 말한다 … 교회는 정의와 사랑의 모임이다. 말로만 정의 사랑을 외치는 것이 아니라, 누구보다 앞서 정의와 사랑을 실천해야 한다. 입으로만 하늘나라가 땅에 이루어지기를 기도할 것이 아니라, 이 세상이 하늘나라가 되도록 기도를 실천해야 하겠다 ..  (74∼76쪽/김창수)

 

 서른 해가 넘은 글임을 헤아리면서 오늘날은 얼마나 나아졌을까 곱씹어 봅니다. 글쎄, 나아진 구석이 있을까요. 나아진 구석이 있기는 있을까요. 이때와 오늘을 견주면 국민소득이니 경제성장이니 어마어마하게 높아졌는데, 우리들 생각과 살림과 매무새는 어느 만큼 올바른 길을 걷고 있을는지요.

 

 아무래도 고개를 절레절레 젓게 됩니다. 앞으로라도 나아질 수 있을까 생각해 보지만, 앞으로라고 달라질 듯하지 않습니다. 천주교이든 개신교이든 하느님이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를 곰곰이 되새기는 분이 얼마나 많으랴 싶고, 불교이든 원불교이든 부처님이 어떤 이야기를 하는가를 찬찬히 되살피는 분이 얼마나 많으랴 싶습니다.

 

 

 《G.V.플레하노프/민해철 옮김-맑스주의의 근본 문제》(거름,1987)라는 작은 책을 하나 집어든 다음, 《미나미 히로시/남근우 옮김-일본인의 심리》(소화,2000)라는 작은 책도 집어듭니다. 그리고 《쟝 오브리 외 여덟 삶/이강렴 옮김-음악과 문학》(국민음악연구회,1961)이라는 작은 책도 집어듭니다. 헌책방에서 작은 책이라 하여 더 값싸지는 않지만, 두툼한 책과 견주어 조금 눅기는 눅습니다. 똑같은 알맹이를 담았어도 작은 책은 적은 돈으로 좋은 생각을 얻거나 배울 수 있는 고마운 스승이 됩니다. 《음악과 문학》을 먼저 펼쳐 봅니다.

 

.. 들라크로아에게는, 음악은 이유를 모르는, 혹은 거의 관계없는 오락이나 쾌락은 아니다. 음악은 정말 그 자신이 발표하려고 애썼던 미의 표현, 그에게는 가장 친애하는 표현의 하나였다. 이어서, 이 미의 정복을 위해 정력을 소비하고 애정 그것까지도 희생하였던 것이다. 그것에는 어떠한 격려도 필요없었다. 그런데, 들라크로아는 그가 기대했던 가장 미묘한 또 가장 희유한 격려의 하나를 쇼팡이란 인물에게서 뜻하지 않게 얻었다 … 쇼팡과 만났을 때 들라크로아를 매혹시킨 것을 찾아내기는 쉬운 일이다. 그것은 그 전아한 태도, 그 정서와 사고의 탁발과 신중함, 그 수수한 외관과 부드러운 사고의 그늘에 꺼지는 불과 같은 영혼이다. 아이나 어른이나 모두가 사회 개혁과 정치적 유토피아에 고민하고, 죠르쥬 상드가 앙팡탕의 종문 외의 설법에 열중한다는 환경에서, 결국 달자를 영감이라 오해하며, 흥분을 정서로 오인한 이 예술의 세계에 있어서, 쇼팡으로서는 그 결의에 진지 또 신중한 예술애에 확실한, 하층계급의 사람처럼 당파를 갖지 않는 사람에게 만난 것을 그저 즐거워할 뿐이었다 ..  (92∼94쪽)

 

 쉰 해 가까이 지난 책이라 맞춤법은 오늘날과 많이 다릅니다만, 못 읽을 구석은 없습니다. 이런 책은 오히려 헌책이 아니고서는 맛볼 수 없는 남다른 즐거움이 담겨 있습니다. 어찌 되었든 이런 책이 다시 나오는 일이 드물고, 다시 나와도 널리 알려지며 읽히는 일이 드물곤 합니다. 헌책방에 나도는 숫자도 얼마 되지 않아 이런 책을 만나는 일은 큰 행운인 한편 고마움이라 할 수 있는데, 가만가만 읽으면서 '옛날과 오늘과 앞날을 잇는 생각줄기'를 만나기도 하다가는 '옛날에서 그치고 오늘로는 이어지지 못하는 생각줄기'를 만나기도 합니다. 두 가지를 고루 느끼면서, '오늘을 살아가는 내가 다스릴 생각줄기'를 돌아보고, '옛날부터 이어서 오늘에 와닿은 생각줄기가 앞날로 이어가자면' 어떻게 다스려야 하는가를 가눕니다.

 

 《음악과 문학》은 베를레느, 스탕달, 발자크, 들라크로아, 스트린드베리, 도이취낭만파 작가, 니이체, 데카르트, 타고르, 나폴레옹, 이렇게 열 갈래 사람이 '노래를 어떤 삶으로 맞아들였는가'를 다룹니다. 이 사람 저 사람 이야기를 곰곰이 읽다 보니, 문득문득, 지난날에는 노래 아닌 다른 예술이나 문화를 맛볼 자리가 없었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오늘날에는 노래도 있고 다른 예술과 문화도 많습니다. 나라안 문화와 예술뿐 아니라 나라밖 문화와 예술을 아주 손쉽게 만날 수 있고, 몸소 비행기나 배를 타고 나가서 맛볼 수 있습니다.

 

 사진기가 있어 언제 어디서나 '내 마음에 드는 모습'을 담기도 합니다. 그러나 오늘날 문학이나 문화나 그림이나 예술이나 공연이나 사진에서는 차츰차츰 '참됨'을 찾아보기 어렵다고 느낍니다. 참다움을 잃어 간다고 느낍니다. 왜일까, 왜 그럴까 헤아리는데, 아무래도 '너무 손쉽게 담을' 수 있기 때문이 아닌가 싶고, '너무 손쉽게 즐길' 수 있기 때문이 아니랴 싶습니다.

 

 책 하나만 해도 그렇습니다. 이제는 집구석 아닌 방구석에 틀어박혀서 셈틀만 또닥거려도 집으로 책이 날아옵니다. 거의 하루 만에. 예전처럼 책 하나 사려고 하루 온통 바치며 다리 아프도록 돌아다니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인천에서 서울로, 인천에서 부산으로, 인천에서 제주로, 인천에서 대전으로, 인천에서 진주로 '책 하나 산답'시고 나들이를 다니는 사람은 거의 자취를 감추었습니다. 그러면서 이야기를 하지요. "인터넷으로 사면 손쉬운데 왜 시간 버리고 고생을 사서 하슈?" 하고. 그런데 참말로 인터넷으로 구경해서 사들이는 책은 '시간을 아끼고 고생을 더는' 일이 될까요?

 

 《레스터 브라운/권태완,김용한 옮김-하나뿐인 선택》(탐구당,1979)이라는 손바닥책을 만납니다. 앗, 이 책이 이렇게 진작 나왔던가? 조그마한 책 앞에서 몸이 얼어붙습니다.

 

 그러고 보면 레이첼 카슨 님이 쓴 《침묵의 봄》도 진작에 탐구당 손바닥책으로 나온 적이 있습니다(1976년에). 이 책도 헌책방을 다니다가 뜻밖에 만나면서, 책방에서 온몸이 얼어붙은 채 한동안 꼼짝을 못한 적이 있습니다. 세상을 앞서간 책들이 세상을 너무 앞서갔다고 해야 할는지, 아니 우리들이 우리 세상을 읽을 줄 모르고 앞을 내다볼 줄 모른다고 해야 할는지.

 

 안타깝다면, 1976년에 이만한 책을 알아보고 기꺼이 펴낸 출판사는 있었으나, 이만한 책을 제대로 알아보고 읽어내어 곰삭인 사람은 너무 적었습니다. 그 뒤로 두어 번 다른 출판사에서 새로 나왔을 때에도 제대로 읽히지 못했는데, 이제서야 다시 나온 판이 그럭저럭 읽히고 있습니다. 《하나뿐인 선택》을 쓴 레스터 브라운 님 책 또한 그렇습니다. 이분이 쓰고 엮은 책은 요즈음 나라안에 꽤 많이 옮겨졌는데(이를테면 《지구환경보고서》 같은), 예전이나 오늘날이나 거의 안 읽힌다고 해도 틀리지 않습니다. 환경운동연합 회원이나 녹색연합 회원이 십만을 훌쩍 넘어가는 숫자임에도. 이 나라에서 내로라하는 지식인 숫자가 꽤 많음에도.

 

 

 (3) 바보 같은 책, 바보 같은 사람

 

 《하나뿐인 선택》을 살살 어루만지면서 셈대에 옮겨다 놓습니다. 다시 책시렁으로 돌아와 《송건호 외-바보와 등신》(태창문화사,1979)이라는 책을 들여다봅니다. 성내운, 송건호, 안병욱, 김동길, 홍사중, 남정현, 한승헌, 김용구, 김중배, 신상웅, 김주영, 송영, 양성우, 이렇게 열세 사람한테 '바보와 등신'이라는 글감을 주어서 제법 두툼한 글을 받아서 엮은 수필책입니다. 글쓴이 대표는 '송건호' 님 이름이지만, 책에 실린 첫 글은 '성내운' 님이 씁니다. 성내운 님은 글 첫머리에, 출판사에서 부탁한 글을 쓰며 10만 원을 받게 되었다는 이야기를 밝히는데, 이무렵 성내운 님은 민주민족운동으로 대학교 강단에서 쫓겨난 몸이었습니다. 당신은 아주 고맙게 이 돈을 받았다면서, "자그만치 10만 원이 넘는 것이다. 나보다 먼저 국비생으로 독방에 처박혀(국가보안법에 걸려 감옥에 사상범으로 갇힌) 아직껏 못 나오고 있는 벗들에게 영치금의 상한선대로 송금한대도 열 분이오, 그 절반씩이라면 스무 분에게 송금할 수 있는 엄청나게 귀한 돈인 것이다. 지금 나는 그 돈을 벌려고 펜을 들었다. 내 마음이 좀 괴롭기로 대수랴. 지금 나에게는 그보다 귀한 것이 없는데. 먹고 자고야 혈육들에 얹혀서 그럭저럭 하고 있지만, 나의 벌이는 단돈 몇 만 원이, 아니 아주 없는 것이다.(17쪽)" 하고 적습니다. 벌써 스무 해 지난 옛이야기요, 성내운이라는 이름 석 자는 사람들한테 잊혀 가는데, 제 마음속에 성내운이라는 이름 석 자는 잊혀지지 않고 있기에 코끝이 찡합니다.

 

 성내운 님은 '나야말로 바보요 등신이라'면서, 당신이 주례를 서던 이야기를 줄줄 풀어 놓습니다. 당신은 바보요 등신이라 멋진 주례사를 펼치지는 못하고, 그무렵 '민주민족 시인'들 시를 주례사로 읊곤 했다고 하는데,

 

.. 한 번은 노교수들이 모인 자리에 끼이게 되었는데, 결혼 주례가 화제이었다. 나는 귀를 곤두세웠다. 그런데 모 유명인사는 사례의 많고 적음으로 골라서 주례를 서 준다 하지 않는가. 듣기에도 민망해서 나는 그 자리를 슬그머니 떠났다. 그럴 수야 없거니 곧이듣지 않았지만, 나는 내가 받은 사례들이 생각났다. 한결같이 술 한 병 아니면 와이셔츠이거나 넥타이어었다. 그러고 보면 저들이 유명인사가 아닌 나를 주례로 택한 이유 중의 하나는 많은 사례를 할 처지가 아니어서였던가. 그 후로 나는 가난 티가 나는 약혼자들의 주례는 도리어 성큼 서 주게 된 것이다 ..  (21쪽)

 

 하는 대목을 읽으며 다시금 코끝이 찡합니다. 참 바보 같은 사람이었네요. 더없이 등신 같은 사람이었군요. 가뜩이나 주례 사례를 거의 안 받는다고 할 당신인데, 이렇게까지 글로 적어 놓으면 앞으로도 주례 사례란 거의 못 받지 않았겠습니까. 그러나 주례를 돈 받으려고 서지 않고, 두 사람이 앞으로 나아갈 길에서 살며시 길을 거드는 손 하나로 생각하는 당신이니, 이와 같은 바보스러운 마음으로 바보스러운 글을 썼구나 싶어 고개를 숙이게 됩니다.

 

 《E.보에시/박설호 옮김-노예 근성에 대하여》(무림사,1980)라는 작은 책을 집어듭니다. 까만 빛으로 꾸며진 겉그림에 노란 빛으로 새겨진 책이름이 도드라져 보입니다. 그나저나 '노예 근성'이라니. 책이름이 만만하지 않다고 느끼면서 펼쳐 봅니다.

 

.. 그러나 분명히 말해서, 결코 자비롭다고 단언할 수 없는 한 군주에게 복종하는 것은 끔찍한 불행이다. 왜냐하면 그가 마음만 내키면 언제든지 간악하게 되는 것이 또한 그의 권력과 결착되어 있기 때문이다 ..  (9쪽)

 

 글쓴이는 군주제를 말하지만, 이 낱말을 '대통령제'로 바꾸어 생각하면 어떠할까 싶습니다. 어찌 되었건 뽑아 놓으면 그예 다섯 해 동안 한 대통령을 모셔야 하는 우리들인데, 우리 삶과 삶터는 어떠할까 싶습니다.

 

.. 그러나 독재자가 어떻게 모든 곳에서 민중을 착취하고 그들의 자유를 약탈하는가를 본다면 우리는 자신의 눈을 믿을 수 있지 않겠는가? … 폭군에 의해 스스로 학대받는 자는 바로 민중이라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한다 … 민중은 스스로 노예가 되며, 자신의 목을 자르는 사람과 같다. 그들은 자유나 노예의 선택권을 가지고 있지만, 자유를 포기하고 압제에 굴복하여 노예 처지에 찬성한다. 정말 그들은 노예가 되려고 급히 달려간다 … 그러나 사람들은 자유를 '열망'하기만 하였으며 단순히 그러한 의지로 만족할 뿐이었다. 실제로 사람들은 마땅히 자유를 쟁취해야 할 텐데, 그렇지 못하였다. 왜냐하면 이 땅의 민중들이 자유가 없다는 단 하나의 사실만이라도 알아야 했는데 그렇지 못하였다. 이것은 자유에 대한 열망과 의지를 우연히 얻으려고만 하기 때문이 아닐까? 만약 자유의 행복감이란 엄청난 피를 흘려야 쟁취할 수 있는 것이라면, 자유에의 열망조차 지니고 있지 않은 어떤 나라의 경우, 그 나라 사람들은 자유에의 행복감을 얻으려는 노력을 포기하고 말 게 아닌가? 자유란 말하자면 이런 게 아닐까? 그것을 상실할 경우 명예를 중시하는 어떤 사람도 생명을 오래 연장하려 하지는 않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유를 위하여 목숨마저 바칠 가치가 있는 것으로 여기지 않는 게 아닐까? ..  (18∼20쪽)

 

 어디서 자주 듣던 말, 아니 어느 누구나 흔히 하는 말이라고 느낍니다. 그러나 어느 누구도 흔히 말하면서도 몸으로는 옮기지 못하는 말이라고 느낍니다. 자유와 평화와 민주를 억누르는 독재와 총칼과 돈다발이 있을 때, 우리는 어느 쪽으로 가든가요. 우리는 자유와 독재 사이에서, 아니 자유와 돈다발 사이에서 어느 길로 걸어왔든가요. '경제'라는 허울을 걸친 독재에 매인 채 우리 스스로 우리 삶을 옥죄고 우리 이웃들 삶마저 옭죄어 버리고 있지는 않은가요.

 

 《천주교사회문제연구소-분단시대의 성찬과 평화》(일과놀이,1990)라는 얇은 책을 집습니다. 오늘은 어쩐지 얇거나 작은 책에만 눈길이 팍팍 꽂힙니다.

 

.. 우선 여러분들이 하루 매일 세 끼 식사를 하고 계시고(요즘 유행병처럼 아침굶기가 많이 유행하고 있지만), 그래도 많은 사람들이 하루 세 끼로 밥을 먹습니다. 그러나 특히 밥을 먹으면서 농민들의 삶이 어떤가, 또 농민들이 어떤 문제점을 안고 있는가에 대해서 깊게 생각할 겨를이 없을 줄 압니다 ..  (장경암/13쪽)

 

 1990년을 넘어 2000년, 그리고 2010년, 또 앞으로 2020년까지도 우리 나라는 '분단'인 나라, '남북이 갈라진' 나라로 있지 않으랴 싶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1990년뿐 아니라 2010년과 2020년에도 "분단시대의 성찬과 평화"를 나누어야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남북이 갈라져 있음에도 남북이 갈라진 줄 느끼지 않는다면, 남북이 갈라지면서 배속을 채우는 사람들이 많음을 깨닫지 않는다면, 우리 앞날이 어찌 되겠습니까. 우리 앞날까지 아니라 우리 오늘날이 어찌 될까요. 날마다 밥을 먹으면서도 이 밥이 어디에서 어떻게 여기까지 왔는가를 돌아보지 못하면 어찌 될까요. 자가용을 몰면서 이 자가용 하나가 우리 둘레에 어떻게 영향을 끼치는가를 살피지 못하면 어찌 될까요.

 

.. 우리 나라 학부모들의 70%가 노동자입니다. 그들의 자녀에게 노동자 멸시 교육, 노동 천시 교육을 실시하고 현실에 눈이 멀게 교육을 한다면 어떻게 자녀들이 노동자 부모를 존경할 수 있겠습니까? ..  (한민호/25쪽)

 

 일하는 보람은 틀림없이 있습니다. 그러나 일하는 보람은 일벌레가 되는 보람이 아닙니다. 땀이 선사하는 보람입니다. 땀에 배인 보람입니다. 즐거운 땀이어야 하고, 우리한테 넉넉히 대가로 돌아오는 땀이어야 합니다.

 

 아무래도 우리는 우리 스스로한테나 우리 아이들한테나 사람다이 살아갈 길을 가르치는 학교로 가꾸지 못하는데, 남북이 갈라지건 골골샅샅 떨꺼둥이가 외로워하건, 푸대접과 따돌림이 판을 치건, 잘못되고 뒤틀린 말과 글이 판치면서 영어 미친바람만 거세게 불건, 아랑곳하지 못하는 몸이 되겠구나 싶습니다.

 

 

 (4) 어쩐지 새책으로 사기 힘들던 책

 

 《샤를리 보와쟝/전채린 옮김-기계들의 밤》(형성사,1981)을 만납니다. 오, 드디어 만나는군. 언젠가는 만날 줄 알았지. 아무렴, 다리품을 팔고 또 팔아 못 만날 책이 어디 있으랴고.

 

.. "초과근무가 없다니, 우린 이제 어떻게 되지?" "투쟁해야지!" "뭘하란 말이니? 동맹파업? 더 많은 돈을 잃어버리려고?" "도대체 우린 어떻게 될까?"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다. 규칙적인 생활이 깨져 버렸고, 공장에서의 일상적인 세계가 무너져 내린 것이다. 따르릉, 감독이 직공 두 명에게 이동대들을 페인트칠하라고 시켰다. 전에는 없던 작업이 휴업에 빠져 있다는 고통을 배가시켜 주었다. "이 정도로 운영이 안 된단 말인가? …… 이러다가 공장문이나 닫는 말이면?" 내가 약간 정치적인 책동을 했다. "이건 다 감언이설일 뿐이야. 지난 9월에만 해도 저들은 사업의 확장을 이야기했었어. 공장위원회의 지난번 소식에도 공장 건물 하나를 추가로 더 건축할 것까지 얘기하고 있었어. 이건 단지 초과근무수당을 절약하려는 수작일 뿐이야!" 우리는 몇 분 더 이런저런 토론을 벌였지만 뭐니뭐니해도 …… 작업을 해야 했다. 기계들이 돌아가고 있으니 실을 집어넣어 줘야 했다. 모랭이 내 옆에서 일을 하고 있었다. "봤어? 기계 두 개를 정지시켰어 …… 일이 줄어들 거야." 해고당할까 겁을 먹은 그 녀석은 내게 대답할 시간도 주지 않고 여느 때보다 더 열심히 일을 계속했다. "무엇보다도 잘못 보이지 말 것." 역설적인 생각이 떠올라, 난 웃음이 저절로 나왔다. "파업하지 말자. 초과근무를 잃으니까"라고 전에는 말했었지만, 이제는 "파업하지 말자. 이젠 초과근무가 없으니까"로 변했다 ..  (94∼95쪽)

 

 누구한텐가 쥐어졌기에, 누군가 주머니를 털어 장만해 주었기에, 이 책 하나는 사라지지 않고 남아서 헌책방 책꽂이에 꽂혔다가 제 손으로까지 옮아옵니다. 반가운 책을 가슴에 안고 기쁨에 겨워 책등을 토닥토닥 어루만지고 쓰다듬습니다. 나한테까지 와 주어 고맙구나. 반갑구나. 기쁘구나.

 

 《김정환-페레스트로이카와 약한 고리 (1)》(민맥,1990)를 골라서 머리털 쥐어뜯으며 읽으려 하지만, 영 어려운 말만 가득하여 끝내 덮어 버리고 맙니다. 누가 읽으라고 쓴 책이었을까 생각해 봅니다. 저 같은 사람 읽으라고 쓴 책은 아니겠다고 생각합니다. 대학교에서 학생운동을 하거나 나라안에서 교수나 지식인으로 일하는 사람들 읽으라고 쓴 책이 아니랴 싶습니다. 저는 저한테 걸맞는 책, 《기계들의 밤》을 파고들어야겠습니다.

 

 신나게 책을 구경하다가 시계를 들여다보니 돌아갈 때가 거의 다 되었습니다. 이제 책 구경은 그만하자고 생각하며 셈대로 갑니다. 책값을 셈하는 동안 한 번 더 둘러보는데 《김병익-글 뒤에 숨은 글》(문학동네,2004)이라는 책이 보입니다. 새로 나왔을 때 몇 번 들춰보기는 했으나 다시 꽂아 놓았던 일이 떠오릅니다. 그래도 다시 한 번 들춰볼까? 헌책 값이면 반값이니 고맙게 장만해서 읽을까?

 

 때때로 '어쩐지 새책으로 사기에는 어렵다고 느끼는' 책을 헌책방에서 고맙게 만나 장만하곤 합니다. 이런 책은 나중에 '잘 샀다'고 하는 느낌보다는 '괜히 샀다'는 느낌을 짙게 받습니다. 제 마음을 뭉클하게 움직이면서 너른 가르침을 베풀어 주는 책은, 새책으로 사건 헌책으로 사건 조금도 망설여지지 않거든요. 단돈 이천 원에 사든 이삼만 원을 치르고 사든, 그 책에 담긴 글 한 줄만으로도 '이 책을 산 기쁨이 있다'고 느낍니다. 책을 샀으니까, 더욱이 좋은 책을 샀으니까.

 

 그나저나 오늘 고맙게 눅은 값으로 장만하는 《글 뒤에 숨은 글》은 어찌 되려나요. 잘 샀다고 느끼는 책이 될는지, 괜히 샀다고 느끼는 책이 될는지.

 

 이래저래 망설이다가 《글 뒤에 숨은 글》까지 올려놓고 책값을 셈합니다. 헌책방 〈책창고〉 아저씨는 책값을 부르면서, "가끔은 이렇게 큰 선물 해 주는 것도 좋아." 하고 한 말씀.

 

 그래, '큰 선물'로 생각하자. 이 책들을 집에서 좀더 찬찬히 다시 읽을 때에 아쉬움이나 안타까움이나 모자람이 느껴진다면, 그런 아쉬움이나 안타까움이나 모자람이 내 삶에는 깃들지 않도록 거울로 삼으면 될 노릇 아니겠는가. 이 책들을 거듭 읽으면서 반가움과 기쁨과 새로움을 느낀다면, 이런 반가움과 기쁨과 새로움을 달게 받아먹으면서 내 삶을 한껏 싱그럽게 가꾸어 나갈 노릇 아니겠는가.

 

 책으로 즐겁게 배우는 하루입니다. 책을 다루는 헌책방 일꾼한테 말 한 마디로 고맙게 배우는 하루입니다. 부리나케 전철역으로 달려갑니다. 책방에서 좀더 머뭇거리느라 그만 네 시를 넘겨 볼일 볼 곳에 닿습니다.

덧붙이는 글 | - 서울 남현동 〈책창고〉 / 02) 582-16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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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그:#헌책방, #책창고, #책읽기, #책방마실,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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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말꽃(국어사전)을 새로 쓴다. <말꽃 짓는 책숲 '숲노래'>를 꾸린다. 《쉬운 말이 평화》《책숲마실》《이오덕 마음 읽기》《우리말 동시 사전》《겹말 꾸러미 사전》《마을에서 살려낸 우리말》《시골에서 도서관 하는 즐거움》《비슷한말 꾸러미 사전》《10대와 통하는 새롭게 살려낸 우리말》《숲에서 살려낸 우리말》《읽는 우리말 사전 1, 2, 3》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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