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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이름 : 숨어 있는 예수

- 글 : 크리스토프 프리드리히 블룸하르트

- 옮긴이 : 원충연

- 펴낸곳 : 달팽이 (2008.8.5.)

- 책값 : 8500원

 

 (1) 우리가 읽을 책이라면

 

 저한테 "어떤 책을 즐겨 읽으셔요?" 하고 묻는 분들한테 언제나 "읽어서 좋고, 받아들여 살 만한 책을 즐겨 읽습니다" 하고 대꾸합니다. 문학이냐 비소설이냐 인문학이냐 자연과학이냐 종교냐 예술이냐 하는 갈래는 아무런 뜻이 없습니다. 만화책이나 사진책이나 그림책을 더 좋아할 수 있고, 글만 가득한 책을 더 즐길 수 있습니다. 그 책이 제 마음을 톡톡 건드릴 수 있다면 모두 반갑습니다. 다만, 건드리다가 그치면 서운합니다. 책이 더 아름답지 못해서 서운하다기보다, 이 책을 쓴 사람 마음밭이 너무 얕아서 서운합니다. 글쓴이가 좀더 깊고 너르게 뻗어나가지 못했다고 느끼니 불쌍한 마음이 들어 서운합니다. 얕은 책을 애써 펴낸 책마을 일꾼 땀방울이 서운합니다. 더 가다듬지 못해서 안타까운 한편, 더 갈고닦으며 글쓴이를 일으켜세우지 못해서 슬픕니다.

 

 이리하여, 저는 따로 갈래를 나누지 않고 책을 장만하여 읽습니다. 종교책을 읽는다 할 때에도, 개신교와 천주교와 천도교와 불교와 이슬람교 책을 굳이 가르지 않습니다. 어떠한 종교를 이야기한다 할지라도, 저 스스로 참다운 길을 느끼도록 해 주는 책이라면 기꺼이 집어듭니다. 어떠한 종교를 다룬달지라도, 스스로 우상을 모시지 않는 이야기로 펼쳐진다면 고마이 받아듭니다. 어떠한 종교 테두리에서 흘러가는 이야기라 할지라도, 자기들 종교 테두리 사람한테만 달고 맛난 마음밥을 선사할 그릇이 아닌 책일 때에 비로소 사들게 됩니다.

 

.. 모든 사람들로부터 자유로워지게. 자유로우면서도 하나님이 자네에게 보내는 사람들과는 일치를 이루게. 사람들이 자네에 대해 무슨 생각을 할지 걱정할 필요는 없어, 그리스도의 말씀이 세상에서 이뤄지게 될걸세 … 선교사는 종교 논쟁을 할 필요가 없어. 예수의 이름으로 살면서 사람들에게 생명을 전해 주면 그만이야 … 성령은 파당을 만들지 않고 세상 안에서, 세상을 위해 일을 한다네 … 이런 입장 때문에 아마 자네는 윗사람과 갈등을 겪게 될지도 모르겠어. 하지만 하나님이 내려 살펴 줄 거야. 무슨 일이 생기든지 기다려야 하네 … 섬기는 법을 가르치는 그리스도의 성령은 군림을 허용하지 않네. 사람들은 생명을 주는 섬김이 아니라 힘에 의지해서 살고 싶어하는데, 그것은 세상에 죽음만을 가져다준다네 … 크게 소리칠 필요 없이 그냥 있는 그대로 얘기하면 돼 … 말의 하나님이 아니라 행동의 하나님이라는 걸 알게 될 거네 ..  (23∼24, 28, 33, 38쪽)

 

 두 번째 물음은 으래 "한 달에 몇 권쯤 읽으셔요?"나 "한 해에 몇 권쯤 읽으셔요?"입니다. 어떤 책을 즐겁게 읽느냐는 물음 못지않게 부질없는 물음이 아닌가 싶습니다. 어떤 작가 책을 좋아하느냐는 물음과 마찬가지로 쓸데없는 물음이라고 느낍니다.

 

 제가 어느 일터에 몸담고 있다고 치면, 달삯으로 얼마를 받느냐 묻는 소리인데, 제가 달삯을 200만 원 받으면 그럭저럭이고, 210만 원 받으면 뛰어나고 220만 원 받으면 훌륭하겠습니까. 달삯 1000만 원은 되어야 뭔가 있어 보이고 달삯 900만 원은 좀 모자라고, 달삯 1100만 원은 아주 뛰어나 보이겠습니까.

 

 어쩌면, 아이들한테 "너 몇 살이니?" 하고 묻는 철없는 어른들 물음하고 똑같지 않느냐 싶습니다. 아이는 그저 그 아이인 대로 반갑고 귀엽고 좋을 뿐입니다. 그 아이가 네 살이든 여덟 살이든 그리 마음쓸 일이 아닙니다. 아홉 살인데 키가 몹시 크다든지 열세 살인데 키가 참 작다든지 하는 일 또한 마음쓸 대목이 아닙니다. 열다섯에 부쩍 클 수 있고, 아홉 살 키가 스무 살까지 갈 수 있으니까요. 무엇보다도, 겉으로 드러나는 매무새가 아닌 속으로 살찌우는 매무새를 들여다볼 줄 아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속차림을 살피고 속차림을 북돋우며 속차림을 아낄 줄 아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아무튼, 어제도 이 물음을 받고 시익 웃으면서 "한 달에 300권쯤?" 하고 대꾸했습니다. 예전처럼 책방 나들이를 자주 못하고 살기에(예전에는 날마다 두어 곳씩 다녔으나 이제는 한 주에 두어 번 겨우 다니니까요), 예전만큼 책을 장만하여 읽지는 못하지만, 책방 나들이에서 더듬는 책과 꼼꼼히 되짚는 책과, 거듭거듭 곱씹는 책을 헤아리면 이만한 숫자로 이야기를 해 주어야겠다는 생각이 퍼뜩 들었습니다. 많다면 많은 숫자일 테지만, 적다면 적은 숫자이고, 넘치면 넘치는 숫자일 테지만 모자라면 모자라는 숫자입니다. 한 달에 삼백 권 읽는 사람과 서른 권 읽는 사람과 세 권 읽는 사람과 세 쪽 넘기는 사람하고는 그리 다를 바가 있지 않습니다. 그저 제 삶이 이러할 뿐입니다.

 

.. 일하는 계급, 가난한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의 나라가 약속이 되어 있네. 하늘의 이름으로 그 사람들 사이에 있는 것만으로도 아버지의 이름은 의미가 있어질 거야 … 하나님의 아들 예수가 세상 위가 아니라 눈에 띄지 않는 세상 속에서 살아 있다는 사실이 희망이지 않나? 죽음을 이긴 하나님은 사람들을 불러모으고 싶어하고 있어. 그러니 특정 종교를 위한 선전에는 관심이 없지. 자네는 모든 사람을 위해, 그들이 누구인지 상관하지 않고 모두에게 비추는 복음을 당당하게 대표해야 하네. 예수는 낮은 사람들로부터, 낮은 사람들을 위해 왔다는 것을 절대 잊지 말게나 … 자네는 사람들 사이에 서 있어야 해. 그래서 나중에는 후원자들 없이도 지낼 수 있어야 하고, 정부 관리들이나 성공한 사업가들한테 칭송을 받기보다는 낮은 사람으로 머물러 있게나 ..  (25, 47∼48, 56쪽)

 

 이틀이나 사흘에 한 번씩 보리술을 사러 찾아가는 구멍가게가 있습니다. 이곳을 지키는 할매는 늘 성경을 펼쳐 놓고 있습니다. 돋보기를 쓰고 찬찬히 읽어내려 가십니다. 성경 통째로 읽기를 퍽 많이 하셔서 당신 다니는 교회에서 표창장을 받으셨다고 하고, 무거운 성경을 받쳐 놓고 읽는 틀을 선물로 받았다고 합니다. 저는 이 할매 삶이 어떠한가를 잘 알지 못합니다. 어떤 마음가짐과 말씨로 사람들과 마주하는지 깊이 알지 못합니다. 다만, 틈틈이 스쳐 지나가는 만남과 할매가 동네에서 이웃한테 보여주는 만남과 때때로 당신 아이들(막내가 저보다 일곱 살쯤 위이더군요) 살아가는 이야기를 털어놓는 말씀으로 돌아보건대, 할매 마음자리 깊이는 할매가 다니는 ㅊ교회 목사님하고 대면 웅숭깊구나 싶어 고개를 숙이게 됩니다.

 

 그러고 보면, '어슐러 르 귄'이라는 분이 쓴 《어스시의 마법사》에 나오는 아렌과 게드와 같은 셈이구나 싶습니다. 아렌은 아주 젊은 제자요 게드는 나이 많이 든 훌륭한 임금 같은 스승입니다. 아렌은 게드를 모시면서 머나먼 여행길에 오르는데, 이 여행길은 아렌이 게드한테서 배우는 여행길이라 볼 수 있지만, 곰곰이 들여다보면 외려 게드가 아렌한테서 배우는 여행길이라 볼 수 있습니다. 할매가 다니는 ㅊ교회뿐 아니라 수많은 교회들에서는 목사님이 신도한테 가르침을 베푼다기보다, 신도들이 목사님한테 가르침을 베풀면서 더 깊고 너르게 예수님 사랑과 마음과 뜻을 받아들이고 깨닫도록 하지 않느냐 싶습니다. 삶에서 우러나오는 너비와 깊이를 '징검다리'에 선 이들한테 넉넉히 나누어 주면서, 징검다리에 선 이들이 다른 나그네를 만날 때마다 기꺼이 당신 자리를 내어주면서 즐겁고 걱정없이 냇물을 건너도록 도와주는 셈이 아니냐 싶습니다.

 

 어버이는 딸아들이 튼튼하게 자라도록 피와 살을 내어주고, 교회 신도는 교회 목사가 훌륭한 징검다리가 되도록 믿음과 돈과 품과 땀을 내어주는구나 싶습니다. 어머니 자연이 뭇사람과 뭇목숨한테 제 땅과 바람과 물과 햇볕을 베풀면서 오순도순 살라고 하듯, 구멍가게 할매는 당신 식구뿐 아니라 동네 이웃과 교회 목사님한테도 모두를 바치면서 '당신이라는 자리가 보이지 않게' 하는구나 싶습니다.

 

.. 우리가 만약 증오에 맞서 화를 내지 않는다면 악은 선으로 인도될 거야 … 지금까지 종교 지도자들은 자신들의 지식과 영혼만 돌봐 왔기 때문에 결국 사람들의 물질적 삶을 어두운 좌절과 죄에 내주고 말았네 … 영적인 틀은 세워져야 하지만, 그것은 반드시 사람들의 자연의 삶에서 나와야 해 … 나는 중국사람들이 교회나 교리의 길이 아니라, 자유로운 하나님의 길로 인도되어지길 기도하네 … 사실, 사람들을 기독교 교회들의 늪에서 건져내는 일은 죄와 불신앙의 야만에서 사람들을 건져내는 것보다 훨씬 더 어려워 … 모든 곳에서 기독교의 겉치레가 완전히 없어져야 하네. 실제의 삶에서 실패한 종교는 어떤 모습을 하든 간에 사람들의 진정한 삶을 빼앗아 버리기 때문이야 … 자네도 권력과 영향력을 찾는 사람들한테서 자유로워질 수 있도록 오직 단단한 바위 위에 짓게 ..  (35, 50∼51, 54, 57쪽)

 

 구멍가게 할매를 보면서, 또 저잣거리에서 좌판을 펼쳐놓고 성경을 숱하게 읽어내는 할배와 할매를 보면서, 이분들이 다른 책들을 함께 읽으면 더 좋을 텐데 하고도 생각합니다. 한편으로는, 이분들한테는 오로지 이 거룩한 책 하나로도 넉넉하겠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면서, 이분들한테는 거룩하다는 책조차 없어도 즐거웁겠다고 생각합니다. 책을 읽기 앞서 삶이 튼튼하고, 거룩한 책을 펼치기 앞서 당신 몸과 마음이 거룩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면서도 삶과 마음이 흐트러지지 않도록 오직 한 가지 책을 붙안으면서 당신 몸이며 마음이 슬지 않게끔 가다듬는 셈이라고도 느낍니다.

 

 톨스토이 님 말이 아니어도, 우리한테 얼마나 많은 땅이 있어야 하며, 얼마나 커다란 돈이 있어야 하며, 얼마나 높은 이름이 있어야 하며, 얼마나 센 힘이 있어야 하며, 얼마나 많은 책이 있어야 하며, 얼마나 넓은 집이 있어야 합니까. 우리한테 넉넉한 삶자리란 무엇이겠습니까. 우리가 받아안으면서 스스럼없이 나눌 품이란 무엇이겠습니까. 우리가 바라볼 곳은 어디이겠습니까. 우리가 읽는 책에서 무엇을 얻어듣겠습니까.

 

 

 (2) 우리가 살 집이라면

 

 교회에 빠짐없이 나갈 뿐더러, 틈틈이 제법 큰돈을 내놓기도 하는 아주머님이 저보고 "교회 나가야지" 하는 말씀을 스무 해 가까이 하셨습니다. 예전에 이태쯤 교회에 나간 적이 있으나 대입시험을 앞두고 더 나가지 못하게 되었고, 그 뒤로는 삶에 치이기도 했으며 책으로 받아먹는 말씀이 고마워 굳이 예배당에 나가야만 믿음이 아님을 깨달았습니다. 이즈음까지도 아주머님은 "교회 나가야지" 하고 말씀합니다. 그러나 저는 천주교회에서 세례와 견진을 받았다는 이야기를 따로 꺼내지 않습니다. 세례와 견진을 받았대도 바지런히 다니는 사람이 못 되기도 하고, 저 스스로 천주교회 길을 따른다고는 느끼지 않기 때문입니다. "가까운 교회를 나가" 보라고 하시지만, 아주머님이 다니는 교회는 당신 집에서 가까운 교회가 아닙니다. 우리 나라에는 교회가 아주 많이 있는데, 교회 다니는 분들을 보면 집이나 일터에서 가까운 교회에 나가지는 않아 보입니다. 모두들 참으로 먼 데까지 나들이를 다닙니다. 거의 모두 자가용을 끌면서 멀리멀리 교회를 찾아갑니다. 그런데 동네마다 새 교회는 끝없이 우뚝우뚝 섭니다. 새 교회마다 때 되면 절집 크기 불리는 공사를 끊임없이 되풀이하곤 합니다.

 

.. 고통당하는 사람들을 진심으로 구하려는 사람들은 언제나 권력에 목 졸리게 되어 있어 … 우리의 삶은 우리가 작아지고, 예수가 커지는 것을 분명히 보여줘야만 하네 … 낡은 세계를 빠져나와 새로운 세계로 들어가는 게 우리의 목표인 것은 분명하네 … 다른 사람들의 문화와 관습을 존중하지 않는 기독교 사람들의 오만함을 경계하게. 그런 기독교 사람들은 유교 사람들에게 절을 해야 돼. 왜냐하면 그들은 존경을 진정한 예배의 시작이라고 봤거든. 우리 모두는 이런 존경하는 마음을 적들을 포함해 모두에게 가져야 해 ..  (52, 60, 73, 94쪽)

 

 천주교회가 참으로 괜찮다고 느끼는 대목 하나는, 절집에 매이지 않는 믿음에 있습니다. 천주교회는 제 삶터에서 가까운 곳으로 옮겨가도록 되어 있습니다. 멀리멀리 '아는 얼굴 있는' 곳으로 다니지 않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아는 얼굴 있는 데로 나간다고 하여 탈이 되지 않습니다. 그저, 미사를 함께 받는 일이란 어디에서나 할 수 있음을 보여줄 뿐입니다.

 

 개신교회에서 안타깝다고 느끼는 대목 하나는, 자꾸자꾸 큰집을 지어서 더 멀리에서도 자가용 끌고 찾아오도록 하는 데에 있습니다. 왜 우리는 우리 조그마한 살림집에서 비손을 올릴 수 없을까요. 왜 우리는 으리으리한 절집에서만 비손을 올려야 하는 듯 여기고, 이런 흐름을 부추길까요. 절집을 크게 다시 짓는 데에 바치는 돈(헌금)이 아니라, 바로 내 팍팍한 삶을 일으키는 데에 바치는 돈이 되는 한편, 내 식구들과 동무들과 이웃들 팍팍한 삶을 돌보는 데에 바치는 돈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내 살림이 팍팍함에서 겨우 벗어났다 하면, 아니 내 살림이 팍팍함에서 벗어나지 않았다 하여도 다른 식구와 동무와 이웃한테 나눌 수 있습니다. 다른 식구와 동무와 이웃도 마찬가지 삶을 꾸리니까요. 서로서로 돈이 넘쳐나서 도와주는 삶이 아니라, 모자라는 가운데 도와주는 삶이거든요.

 

 우리가 따르거나 받들거나 모시거나 세워야 하는 절집이라면, 비바람을 막을 만한 집 하나면 넉넉하기도 하지만, 비바람을 막지 못하는 한데라 해도 넉넉합니다. 말씀과 넋은 절집으로 찾아오지는 않기 때문입니다. 말씀과 넋은 지붕을 가려 가면서 찾아오지는 않기 때문입니다. 타워팰리스에만 찾아오거나 더샵에만 찾아오는 말씀과 넋이 아닙니다. 판자집 철거마을에도 찾아오고 서울역 떨꺼둥이한테도 찾아오는 말씀과 넋입니다. 우리가 지어야 할 집이라면, '나라가 만드는 가난' 때문에 고달픈 사람들이 쉴 만한 자그마한 방 한 칸이 차근차근 마련된 집이어야 한다고 느낍니다. 개신교회에서 수없이 절집을 지으려 한다면, 이 절집에 예배를 올릴 때에는 '거룩한 집'이 되고, 예배를 마친 여느 때에는 '가난한 집'이 되어 집없이 헤매는 사람이 깃들 보금자리가 되어야 한다고 느낍니다. 이런 보금자리로 가꿀 수 있을 때라야 비로소 개신교회 새 절집을 지을 구실이 생기고, 이런 구실을 지키지 못한다면 이곳은 절집이 아니라 부자집일 뿐이라고 느낍니다.

 

.. 기독교가 적을 사랑하는 힘이 부족하기 때문에 지금 도리어 심판을 받고 있네 … 사업가들, 선교사들, 군인들마다 모두 하나님의 손이 아닌 자신들의 주머니 속에 사람들을 틀어넣으려고만 해 … 어느 누구도 우리가 만든 형식에 따라서 기독교인이 될 필요는 없어. 하나님이 우리의 뜻이 아니라 그의 뜻에 따라 세례를 줄 수 있도록 허용하길. 그래서 사람들이 진짜 자유를 찾고 해방이 될 수 있게 되기를 … 세례를 줄 사람을 고르지 말고 모든 사람들을 신뢰하게 … 자네는 세례를 받고 싶어하는 사람들뿐만이 아니라 다른 모든 사람들까지 생각을 해야 하네. 불행하게도 오늘날의 선교사들은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대신, 지역 교회 조직들을 세우는 어리석은 일에만 몰두하고 있어. 그건 당연히 사람에게는 영광이 되겠지만 하나님에게는 모욕이 될 뿐이야 … 예수를 따르려는 기독교 사람들은 사람들을 섬겨야지, 지배해서는 안 되네 ..  (66∼69, 90쪽)

 

 그렇지만, 절집이 부자집이 되어 가는 흐름을 우리 형편에서는 무어라 따질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절집만 부자집이 되지 않으니까요. 우리네 살림집도 부자집이 되어 버리고 있으니까요. 나라살림이 힘들다는 소리는 그치지 않으나, 서울시청 으리으리 다시 짓는 모습을 보고, 숱한 관공서가 번쩍번쩍 새로 올리는 모습을 보면 혀를 내두르게 됩니다. 서울 강아랫마을에 있는 어느어느 우체국 건물은 서울 중앙우체국 건물보다 훨씬 크고 우람하고 빛이 납니다. 돈이 넘쳐나는 동에서 짓는 동사무소와 돈이 쌓이는 구에서 짓는 구청 건물은 어마어마하기까지 합니다. 공무원도 사람이라 공무원이 느긋하게 일할 자리를 마련해 주면, 그만큼 '봉사'를 잘할 수 있다고 여길 테지요. 그런데, 공무원이 일하도록 세금을 내는 우리들이 살아가는 집은 모두 헐리거나 쫓겨나야 한다면, 가난한 사람이 겨우 얻어서 들어갈 만한 작은 골목집은 모두 헐리며 몇 억도 아닌 십 몇 억이 넘는 아파트로만 새로 짓는 재건축과 재개발만 판을 치도록 하는 행정을 짜는 공무원들이 나라 안에 득시글거리게 된다면, 이런 부자집들이 우리 삶을 얼마나 북돋우게 될는지요. 참말 북돋운다고 할 만한지요.

 

 사람 사는 집이 살림집이 아니라 부자집이 되는 가운데, 관공서 행정기관 건물도 부자집이 되고, 개신교회 절집도 부자집이 되어 갑니다. 믿음을 얄딱구리하게 비틀면서 절집에 돈이 넘치거나 쌓이는 우리네 흐름이 아니라, 우리 스스로 우리 보금자리를 보금자리 아닌 부자집으로 깎아내리거나 비틀고 있기에, 바로 우리 나라가 깎아내려지거나 비틀리고 맙니다.

 

 공무원이 누구이겠습니까. 목사님이 누구이겠습니까. 신도가 누구이겠습니까. 바로 우리들입니다. 우리 식구이고 동무이고 이웃입니다. 우리 스스로 그처럼 살아가고 있는 판인데, 누가 순복음교회에 돌을 던질 수 있습니까. 우리 스스로 부자집에 자가용 몇 대씩 굴리며 떵떵거리고 있는 주제에, 어느 누가 순복음교회를 손가락질할 수 있습니까. 순복음교회뿐 아니라, 수많은 부자 교회는 다름아닌 우리 모습이요 우리 넋이요 우리 말씀입니다.

 

.. 기독교의 역사 전체는 종교적 예식에 의존하는 것이 얼마나 잘못된 길로 가는 것인지 보여준다네 … 우리는 신학이나 교회를 대표해서는 안 되네. 우리는 그저 사람들이 진리의 성령 가까이 갈 수 있게 돕기만 하면 돼 … 사람들이 교회 문으로 걸어 들어가지 않고도 하나님에게 갈 수 있다는 것을 왜 상상조차 할 수 없을까? … 혹시 우리는 이교도처럼, 죽고 난 다음의 행복을 찾고 있는 건 아닌가? 이 땅을 버리고, 우리 자신과 이웃들을 버리고 있는 건 아닌가? … 모든 종교적인 도발은 피하는 게 좋아. 그리스도가 조용하게 일하고, 위로하고, 그리고 사람들이 자네가 시도하는 일 속에서 다른 곳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정신을 분명하게 느끼게 되길 바라네 … 기억하게, 그들이 '기독교 사람들'이 될 필요는 없어. 그런 이름은 전혀 신경을 쓰지 말게. 누구든지 하나님의 뜻대로 살려는 사람은 그 실마리를 유교에서 찾든 교부에서 찾든 아무 상관없이 모두 하늘나라의 자녀가 되기 때문이야 ..  (70, 76, 77, 79, 99쪽)

 

 대학교 졸업장을 따지는 우리가 순복음교회를 만듭니다. 아이들한테 똑같은 학교옷을 맞추게 하고 똑같은 머리길이로 맞추게 하며 똑같은 연속극과 연예인 놀음놀이에 온마음을 빼앗기게 하는 우리들 스스로 순복음교회를 만듭니다. 더 높은 연봉을 받는 펜데 굴리는 큰회사 사무직 일자리를 바라는 우리들이 순복음교회를 만듭니다. 쇠밥그릇 공무원시험에 붙어 걱정없이 연금 받고 놀고먹겠다는 우리들이 순복음교회를 만듭니다. 얼굴과 몸매를 따지는 우리들이, 돈벌이밖에 생각하지 않는 우리들이, 옷차림과 유행에 얽매이는 우리들이, 갖은 전자제품과 자동차를 버리지 못하는 우리들이, 사장님입네 교수님입네 기자님입네 선생님입네 사모님입네 하는 거짓 이름값에서 스스로 벗어나지 않는 우리들이 순복음교회를 만듭니다.

 

 아니, '순복음교회'라는 이름으로 보여지게 되는 거짓 믿음을 만들고, 잘못된 믿음을 세우며, 뒤틀린 믿음을 섬깁니다.

 

 (3) 개신교회에 '칼'이 아닌 '사랑'을 드는 《숨어 있는 예수》

 

 이야기책 《숨어 있는 예수》를 쓴 '크리스토프 프리드리히 블룸하르트'라는 사람은 1842년에 태어나 1919년에 죽었습니다. 이 책은 꽤나 오래 묵어 있던 글모음입니다. 성경만큼 오래 묵은 글모음은 아니나, 성경에 담긴 말씀과 넋을 고이 새기면서 살아오던 한 사람이 자기와 같이 믿음길을 걷는 젊은이한테 들려주고픈 이야기를 담은 조그마한 책입니다.

 

 얼핏설핏 이 작은 책을 읽는다면, '우리 사회 뒤틀린 개신교단에 칼을 들어 썩은 자리를 도려내는' 이야기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라도 읽어 줄 수 있다면, 이 책은 어느 만큼 값을 하지 않으랴 싶습니다. 그렇지만, 《숨어 있는 예수》는 칼을 드는 책이 아닙니다. 사랑을 드는 책입니다. 왼뺨을 내주고 오른뺨도 내주는 예수처럼, 한손에 사랑을 들고 다른 한손에도 사랑을 드는 책입니다.

 

.. 모든 종류의 사람들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고 있네. 그들은 기독교 사람들에게 다가가고 있는 게 아니라, 그리스도에게 다가가고 있는 거야 … 기독교 교회들은 영적인 세계와 사랑을 짓는 대신 다른 사람들의 풍습을 반대하는 일에만 힘을 쓰고 있어 … 지금 자네는 교회가 아니라 복음을 전하고 있는 거야. 그러니 지금은 무엇을 하는가는 별로 중요하지 않아 … 자네가 할 일은 종교적 방법으로 사람들에게 영향을 주려는 것이 아니라, 자네의 벗들이 자신을 극복하는 법을 배워서 문제를 이겨내고 좋은 열매를 맺도록 하는 것이야. 예수는 생명, 하나님의 진정한 생명을 주고 싶어해. 종교적 느낌과 의견은 중요하지가 않네. 세상은 생명 있는 사람이 필요하지 경건한 척하는 위선자가 필요하지는 않아 … 서로 존중하는 신앙이 평화를 가져다주게 될 걸세 ..  (100, 112, 116, 127, 128쪽)

 

 이 세상을 살리는 길은 가르침에 있지 않음을 보여줍니다. 우리 세상을 북돋우는 길은 봉사에 있지 않음을 들려줍니다. 우리 세상을 일구는 길은 선교에 있지 않음을 깨우쳐 줍니다. 오로지 사랑 하나에 있음을 이야기합니다. 무엇보다, 나 스스로를 있는 그대로 바라보면서 나 스스로를 사랑하는 길부터 믿음길이 열림을 이야기합니다. 나 스스로 어떠한 사람인 줄 느껴야 내 삶을 사랑할 길을 찾고, 내 삶을 사랑할 길을 찾으며 내 삶을 고쳐 나가야, 비로소 내 삶이 새로워지면서 나와 얽히거나 나를 둘러싼 사람들한테 즐거움과 보람과 좋음을 함께할 수 있음을 이야기합니다.

 

 종교를 나누는 일이란 '내가 먼저 믿고 보니 참 좋아서 너한테도 믿게 하려는 일'이 아니라고 느낍니다. 내가 이렇게 믿으며 내 삶을 이처럼 고칠 수 있었음을 털어놓는 일이며, 내 삶을 고치는 길에 접어들었기에 더 나은 삶으로 고쳐 보고자 내 이웃과 동무한테도 마음문을 여는 일이라고 느낍니다. 우리가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가를 함께 돌아보고 함께 나아지자고 손을 맞잡거나 어깨동무를 하는 일이라고 느낍니다.

 

.. 사람들과 따뜻한 관계를 다져나가되 그들의 신뢰를 얻기 전까지는 절대 설교를 하지 말게 … 설교가 아니라 삶이 사람들에게 빛을 비춰야 하니까 말이야 … 자네가 다르게 살지 않고 사람들을 그들의 높이에서 만나지 않는다면 하나님을 이해할 사람들은 아무도 없게 될 거네 … 사람들과 함께 어깨를 걸고 서게 … 사람들은 목사나 선교사에게 의존하지 않고도 언제나 새로운 생각과 행동에 이를 수 있네 … 신학에 의존한 추상적인 믿음은 무기력해. 우리 스스로 하나님의 사랑과 진리의 실제적인 표현이 되어야 하네 … 오늘날 중국의 선교사들은 학생들을 지도하는 교수처럼 행동하는 끔찍한 실수를 저지르고 있어. 동시에 교회와 기독교 사회는 모든 것을 '성공'이라는 기준에 의해 판단하는 기업가처럼 행동하고 있지 … 스스로 기독교인이라고 부르는 사람들은 자기 교인들만 존중하려고 들어. 다른 사람들을 자신의 친구로 받아들이기 전에 자기와 똑같이 만들려고 하고 있으니 .. (111∼114, 118, 121쪽)

 

 이리하여 블룸하르트 님은, 중국으로 선교사 일을 하러 간 젊은이한테 틈틈이 편지를 남겼습니다. 당신이 살아온 길을 더듬고 당신이 겪은 삶을 돌이키면서, 당신이 젊은이한테 줄 수 있는 가장 좋은 선물을 남겨야겠다고 생각했는데, 이 편지들을 찬찬히 얻어읽는 동안 젊은이가 블룸하르트 님한테 말씀과 넋을 받는다기보다 블룸하르트 님이 젊은이한테 말씀과 넋을 받아들이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젊은 선교사가 중국에 들어가 갖은 애를 쓰기에 비로소 블룸하르트 님 당신 마음에 뭉클하고 움직이는 무엇인가가 생겨났구나 싶습니다. 이 움직이는 무엇인가는 블룸하르트 당신이 빚어낸 말씀이나 넋이 아닌, 젊은 선교사와 늙은 블룸하르트 둘이 마음과 마음이 만나면서 하늘나라 아닌 땅나라에서 둘을 지켜보던 말씀과 넋이 살며시 배어들어가 이 책 하나 꾸려지게 되었구나 싶습니다.

 

.. 기뻐하고, 걱정하지 않으며, 늘 한결같은 젊은이가 되게 … 자네가 목사나 선교사의 자리에서 조금씩 물러나는 것은 바람직한 일이네. 그런 자리는 사람에게서 온 거지 하나님에게서 온 게 아니거든. 자리의 이름으로 무슨 일을 하는 것은 예수의 이름으로 하는 것과 절대 똑같아질 수가 없어. 그러니 변절의 누룩을 경계하게. 중국사람들과 늘 같은 높이에서 머물러야 해. 사람들의 마음을 바꾸는 것은 자네가 신경 쓸 일이 아니야 ..  (118, 128쪽)

 

 한결같은 젊은이가 되기를 바라는 블룸하르트 님 말은, 곧바로 블룸하르트 당신이 한결같은 사람으로 살고 싶다는 말이 됩니다. 이리하여 블룸하르트 님은 당신이 높은 이름값을 당신 뜻하고 달리 얻게 되었을 때 스스럼없이 내놓으면서 조용히 물러났고, 사람한테서 온 이름이나 자리가 아닌 하늘에서 온 이름이나 자리를 찾으러, 아니 하늘에서는 이름도 자리도 오지 않음을 느끼면서 몇 마디 글로 당신 삶자락을 남겨 놓았다고 느낍니다. 마지막 눈을 감는 날까지 "변절의 누룩"이 생기지 않도록, 자기가 발디딘 이 지구에서 모든 사람들과 "늘 같은 높이"에서 머물려고, 그리고 사람 아닌 뭇목숨하고도 "늘 같은 높이"에서 얼싸안도록 마음을 다스리고 몸을 맞추었다고 느낍니다.

 

 이렇게 되면서, 《숨어 있는 예수》는 기나긴 세월에 걸쳐 우리들한테 고마운 마음밥이 되어 준다고 봅니다. 앞으로도 이 작은 책은 저와 옆지기와 아이한테, 더불어 제 둘레 사람들과 다른 식구와 동무한테도 마음밥이 되어 주겠구나 싶습니다. 날마다 먹는 사랑 깃든 마음밥으로, 언제나 즐기는 믿음 넉넉한 마음밥으로.

덧붙이는 글 | 글쓴이 인터넷방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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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어있는 예수 - 예수는 낮은 자리에서 세상을 비출 것이다

크리스토프 프리드리히 블룸하르트 지음, 원충연 옮김, 달팽이(2008)


태그:#인문책, #기독교, #블룸하르트, #예수, #책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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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말꽃(국어사전)을 새로 쓴다. <말꽃 짓는 책숲 '숲노래'>를 꾸린다. 《쉬운 말이 평화》《책숲마실》《이오덕 마음 읽기》《우리말 동시 사전》《겹말 꾸러미 사전》《마을에서 살려낸 우리말》《시골에서 도서관 하는 즐거움》《비슷한말 꾸러미 사전》《10대와 통하는 새롭게 살려낸 우리말》《숲에서 살려낸 우리말》《읽는 우리말 사전 1, 2, 3》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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