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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이름 : 국가는 폭력이다

- 글 : 레프 톨스토이

- 옮긴이 : 조윤정

- 펴낸곳 : 달팽이 (2008.7.25.)

- 책값 : 12000원

 

(1) 머리 아프도록 읽는 책 하나

 

이제는 사라진 잡지 가운데 <샘이 깊은 물>이 있습니다. 이 잡지를 이끌어 나간 '설호정'이라는 분은 1992년부터 1995년 사이에 <이 인물의 대답>이라는 꼭지를 꾸렸고, 이 꼭지에서 설호정 편집장은 당신이 만나본 사람이 쥐구멍이라도 찾고 싶을 만한 구석을 꼬치꼬치 파고들면서 깊이있는 이야기를 이끌어 냈습니다. 설호정 편집장한테 꼬치꼬치 대꾸를 해야 하는 사람으로서는 힘겹고 고단하고 짜증스러울 수 있을는지 모르나, '설호정이라는 사람까지도 뭔가 속시원히 풀리지 않는 대목이 보이고 느껴지기 때문에 환히 밝혀질 때까지 파고들어 캐낸다'는 흐름이었습니다.

 

1992년 9월치 <샘이 깊은 물>에서는 <이 인물의 대답> 꼭지에서 <녹색평론>을 펴내는 김종철 교수와 만나보는 자리를 마련합니다. 이 자리에서 김종철 교수는 설호정 편집장이 꼬치꼬치 묻는 말에 벌컥 성을 내며 소리를 높였다고 하는데, 그래도 설호정 편집장은 아무렇지도 않게 더 가시돋힌 말을 묻고, 이런 이야기들이 오가면서, 잡지 <샘이 깊은 물>을 읽는 사람들로서는 '1992년에 막 새로 나온 환경잡지 <녹색평론>은 뭐를 하려는 책인가?' 하는 궁금함을 많이 풀 수 있습니다.

 

물음을 받는 분으로서는 괴롭겠지만, 곰곰이 생각해 보면 이런 괴로운 물음을 받아야 서로서로 발돋움합니다. 우리 스스로 못 느끼는 내 모자람과 어리숙함을 느낄 수 있습니다. 우리 스스로 슬그머니 넘어갔거나 대충 흘려보낸 어설픔과 어리석음을 깨달을 수 있어요.

 

이를테면, 김종철 교수가 너무 뜬구름잡듯 '철학적·추상적 이론'만 늘어놓고 있다 보니 설호정 편집장은 "사실 무슨 이념을 펼치는 데는 정권을 장악하는 게 최선 아닙니까?" 하고 한 마디를 쏘아붙입니다. 그러며 "지구의 광범위한 지역에서는 계속해서 미국 식의 소비 문화가 지속될 터인데 개인 몇 만 명이 책을 통해서건 명상이나 직관을 통해서건 각성한다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요? 무력하기 짝이 없는 일 아닙니까?" 하고 덧붙입니다.

 

이때 김종철 교수는 성남을 참지 못하고, "그거는 그야말로 산업화된 사회에서 세뇌된 논리입니다. 저는 종교적인 배경이 없는 사람이지만 예컨대 예수라는 존재가 하나 있었기 때문에 인류가 얼마나 변했습니까?" 하고 대꾸하는데, 설호정 편집장은 거침없이 "장기적으로는 그런 소수가 인류를 의미있는 방향으로 몰아갈 수는 있기도 하겠지만, 이런 식의 개발 일변도로는 세계는 백 년 앞도 내다볼 수 없다는 것 아닙니까?" 하고 따지고, 다시금 "모든 사람이 부처 될 만한 싹수를 가졌다고 해서 부처가 된다는 법도 없고, 또 되더라도 아주 장구한 세월이 필요할 것 같고, 그때가 되기 전에 세상은 이미 든 망조 때문에 망해 버릴 것 같다는 말입니다." 하고 못을 박습니다.

 

이에 김종철 교수는 "그건 오만한 얘기예요. 우리가 당장 부처입니다. 또 지금 지구가 망하느냐, 안 망하느냐, 망할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우리가 할 일을 안 한다든지 그건 불필요한 얘기라고 생각해요……." 하고 말을 잇지만 그리 가슴에 와닿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이런 이야기들, 김종철 교수가 하는 이야기는, 일찌감치 설호정 편집장이 몸을 담았던 '전두환이 없앤 잡지'인 <뿌리 깊은 나무>에서 해 왔던 일인 한편, 지금 편집장으로 몸담은 <샘이 깊은 물>에서도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설호정 편집장은 당신이 몸소 겪어 왔을 뿐 아니라 헤쳐나가고 있는 일을, '설호정 당신 눈과 머리'가 아닌 '환경잡지라는 빛깔있는 목소리로 한길을 걸어가려는 다른 사람 눈과 머리'가 무엇인가를 듣고 싶어 이렇게 물었지만, 김종철 교수는 이때까지 제대로 당신 생각을 펼치지 못했습니다.

 

.. 오늘날 정부와 지배 계급은 정의 아니면 권리 비슷한 것에조차 기초해 있지 않고, 오로지 발달된 과학의 도움으로 정교하게 고안된 조직에 의존하고 있다 ..  (21쪽)

 

설호정 "개인 몇 만 명이 책이나 명상을 통해 각성한다는 게 무슨 의미가 있나요"

김종철 "예수라는 존재가 하나 있어서 인류가 얼마나 변했습니까?"

 

올해는 2009년입니다. 1992년부터 열일곱 해가 흘렀습니다. 2009년 오늘날 <녹색평론>은 '대구 변두리'를 떠나 '서울 한복판'으로 일터를 옮겼습니다. 어느덧 열일곱 해가 지난 이야기인데, 열일곱 해 사이, 서울 한복판에서 환경잡지를 펴내는 <녹색평론> 김종철 교수 생각과 삶은 어떻게 거듭났을까 궁금합니다. 오늘에 와서 지난날 물음에 대꾸를 해야 한다면 어떤 말씀을 펼치실까 궁금합니다.

 

설호정 편집장은 "저와 같은 패배주의자들한테 들려주실 수 있는 얘기이기는 하겠습니다. 그러나 제 개인으로 말하자면 이 책을 탐독하기 시작한 뒤로 구체적으로 훨씬 더 패배주의자가 된 것은 사실입니다. 속되게 말해 고민만 늘었다는 말이지요." 하고 말합니다. 김종철 교수는 "자꾸 사람을 고민하게 만들었다는 건 제가 상당히 성공하고 있다는 얘기 같은데요?" 하고 묻습니다. 설호정 편집장은 "그런데 이런 책이 진실로 성공하려면 저 같은 사람이 실천에까지 이르도록 해야 하는 것 아닙니까? 책에 제시되는 문제들을 끊어버릴 힘이 제겐 없습니다." 하고 한 마디 받아칩니다.

 

두 어른이 주고받는 이야기를 아주 멀찌감치 떨어진 자리에서, 더구나 열일곱 해 만에 다시 읽는 저는 피식 웃습니다. 쓴웃음이 저절로 새어나옵니다. 그러면서 제 옷깃을 여미게 됩니다. 제가 읊는 말마디가 나 스스로 내 삶을 고쳐 나가는 말마디인가를 돌아보게 되며, 내 말마디를 듣는 이웃이 당신 스스로 당신 삶을 고쳐 나가는 말마디로 받아들일까를 돌아보도록 하기 때문입니다.

 

.. 노동자에게 땅이 없고 게다가 자신과 가족을 부양할 양식을 땅에서 얻을 수 있는 인간 본연의 권리조차 없다면, 그것은 그가 그런 상황을 바랐기 때문이 아니라 어떤 특정한 사람들(지주들)이 노동 계급한테서 땅과 그 권리를 박탈했기 때문이다. 이 비정상적인 사물의 질서는 군대에 의해 지탱된다 … 모든 정부와 통치 계급은 기존의 제도를 유지하기 위해 군대를 필요로 한다. 이런 제도는 결코 사람들의 요구에 의해 마련된 게 아니며, 국민의 이익을 침해하며 오로지 정부와 통치 계급에게 봉사한다 …

 

군비와 전쟁을 위해 사람들에게서 징수한 세금은 군대가 보호한다고 하는 노동 생산물의 대부분을 앗아간다. 또 전 남성 인구가 평소 하던 일을 더 이상 할 수 없게 되면서, 노동의 가능성 자체가 상실된다. 언제라도 발발할 수 있는 전쟁의 위험 때문에 사회적 삶의 개선은 헛되고 무익한 것이 되고 만다 … 정부는 외국의 침략을 막기 위해 군대가 필요하다고 주장하지만, 이것은 사실이 아니다. 군대는 주로 국내에서 억압적 통치를 하기 위해 필요하고, 군대에 들어간 모든 사람은 국민에 대한 정부의 폭력에 동참하는 자가 된다 … 병역 의무를 져야 하는 사람들이라면 누구나 국가의 의미에 대해 성찰해 보아야 한다 ..  (35∼40, 44쪽)

 

설호정 "<녹색평론>의 이념을 삶에서 얼마나 실천하세요"

김종철 "대부분 못하죠. <녹색평론>은 제 자신에게 하는 말"

 

퍽 긴 꼭지로 마련한 <이 인물의 대답>이 막바지에 이를 때, 설호정 편집장은 가장 날카롭게 파고드는 말 한 마디를 묻습니다. "<녹색평론>의 이념을 선생님은 삶에서 어느 정도 실천하세요?" "대부분 못하죠. 그러니까 <녹색평론>은 제 자신에게 하는 말이기도 합니다." "어느 정도 실천하시는지." "가급적이면 외식 안 하려고 하고." "보신주의라고 하는 거 아니에요?" "보신주의 나쁠 거 없어요. 나한테 좋은 게 지구한테도 좋은 거예요. 또 고기 안 먹고. 제 생활은 간단하게 단순하게 살고. 여행을 잘 안 하고. 거의 안 합니다. 도시를 벗어나지 않고. 집하고 여기하고 학교하고밖에 왔다갔다 안 하고. 또 식구한테 빨래 자주 하지 말라는 얘기를 합니다. 그리고 빨래 해결해야 되는 과제가 아파트로부터 나와야 하는 일입니다." "선생님 가족들이 공감하세요?" "내년이면 애들이 다 우리를 벗어납니다. 대학을 가니까." "서울로 간단 말이죠?"

 

김종철 교수는 2009년에는 '아파트를 벗어나셨'는지, 그리고 당신 잡지에 실은 이야기 가운데 '거의 하나도 실천을 못했다는 대목 가운데 어느 대목을 실천하고 있으'신지 궁금해집니다. 그러나, 이런 대목을 궁금해 하기보다는, 어딘가 뒤끝이 많이 남는다는 느낌을 지우지 못합니다. 왜 스스로 못하는 일을 '마치 스스로 하고 있는 듯 느껴지도록' 글을 쓰고 생각을 하고 책을 내고 해야 할는지요. 왜 우리 스스로 즐겨하고 좋아하는 일이 아닌, 머리로만 굴리는 일을 해야 할는지요.

 

저는 아파트가 싫고 텔레비전이 싫어 부모님 집을 박차고 나왔습니다. 부모님께서 저한테 당신 아파트(이제는 전원주택이 되었습니다)를 물려주실는지 안 물려주실는지 모를 노릇이지만, 저로서는 부모 재산을 물려받을 마음이 없습니다. 옆지기 또한 내가 내 부모한테, 또 옆지기는 옆지기 부모한테 재산을 물려받을 까닭이 없다고 말합니다. 우리는 '책이 제대로 못 읽히는 나라에서 책을 제대로 느끼도록 돕는 일을 하는 도서관 운동'을 하기 때문에 일부러 인천에 남아 있지만(인천이 우리 나라에서 책을 가장 안 읽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아파트 아닌 골목동네에서 살아간다 할지라도 자연이 아닌 기계와 시멘트와 석유로 온통 가득한 터전에서는 우리 스스로 숨이 막힙니다. 이리하여 텔레비전은 마땅한 노릇이고, 세탁기나 냉장고나 이런저런 가전제품을 처음부터 들여놓지 않았습니다. 우리 몸에 알맞게 씻고 빨래를 합니다. 굳이 맛난 바깥밥을 찾아 먹으러 돌아다니지 않으나, 밖에서 밥을 먹어야 할 때에는 옳고 바르게 애쓰는 집을 찾아서 즐겁게 먹습니다.

 

환경운동이란, '환경운동'이라는 이름이 붙기 앞서에도 언제나 있어 왔던 일이니까요. 지식 있는 분들이 환경운동을 외치고 환경모임을 열고 환경책을 펴내기 앞서 우리 어머니와 아버지와 할머니와 할아버지는 자연 삶터와 사람 삶터를 고루 사랑하는 매무새를 고이 지켜 오셨으니까요.

 

.. 왜 이런 죄수 같은 일을 하냐고 내가 묻자 그들은 "그럼 뭘 한단 말입니까?"라고 되물었다. "하지만 왜 36시간을 쉴 새 없이 일하는 겁니까? 작업을 교대제로 할 수는 없나요?" "우리는 시키는 대로 하는 것뿐이에요." "그래요. 하지만 왜 그저 시키는 대로 하냐 이겁니다." "먹고 살아야 하기 때문이죠. 보나 마나 '싫으면 그만둬.'라고 할 거라구요. 작업에 한 시간이라도 늦으면 당신에게 허가증을 집어던지며 나가라고 하죠. 당장 일할 수 있는 사람이 10명은 된다구요." … 노예 주인은 말할 것도 없고 마차 주인조차도 자기 말에게 그런 일을 시키지는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말은 비싸기 때문이다. 힘든 일을 시켜 값비싼 동물의 생명을 단축하는 것은 비경제적인 일이리라 …

 

실상 우리들, 즉 부자들, 자유주의자들, 인도주의자들, 사람의 고통뿐만 아니라 동물의 고통에도 매우 민감한 사람들은 그런 노동으로 덕을 보고 있으며, 게다가 더욱더 부자가 되고 싶어 한다. 즉 그런 노동으로 더 큰 덕을 보고 싶어 하는 것이다. 그러고도 우리는 완전히 평온한 마음으로 지내고 있지 않은가 … 우리 주위에서 천천히 그리고 대개 고통스럽게 죽어가고 있는 수백만 명의 노동자들에 관한 한, 그들의 노동 생산물로 우리가 편의와 쾌락을 얻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두 눈을 굳게 감고 있다 ..  (105, 108, 111∼112쪽)

 

옆지기는 저와 혼인하기 앞서 <녹색평론>을 정기구독하고 있었으나 지난해에 끊었습니다. 저는 고등학생 때부터(1992년) 책방에 서서 <녹색평론>을 읽었지만, '쉽게 누구나 하고 있는 일을 어렵고 딱딱하고 긴 글로 적는 일'은 그리 안 달갑다고 느꼈습니다.

 

참다운 "푸른 이야기"라 한다면, 지식 있는 사람만 새겨읽을 수 있는 글이 아니라, 지식 없는 누구나 기꺼이 읽을 수 있는 글이어야 한다고 느끼기 때문입니다. 아름다운 "푸른 이야기"라 한다면, 나부터 오늘까지 꾸준히 이어온 내 삶을 글로 담아낼 노릇이요, 아직까지 못하던 일이라면 오늘부터 신나게 펼쳐 나가려 하는 몸짓을 실어낼 노릇이라고 느끼기 때문입니다.

 

노동운동이든 정치운동이든 사회운동이든, 입으로 할 수 있는 운동이란 없습니다. 몸으로 하는 운동입니다. 남녀평등을 이루려는 운동이든 장애인 권리를 지키려는 운동이든, 입이 아닌 몸으로 하는 운동입니다. 환경운동은 더더욱 밑바탕이 되면서 커다란 운동인데, 환경운동이라 할 때에는 다른 어느 운동보다도 나 스스로 내 삶이 되어 가면서 말하는 운동이어야 하고, 나부터 먼저 즐겁게 한몸으로 받아들인 이야기를 내 이웃과 식구와 동무한테 스스럼없이 말하고 함께하도록 어깨동무하거나 손을 맞잡는 운동이어야 한다고 느낍니다.

 

.. 정부는 사람들을 어린아이의 의식 수준에서 붙잡아 두기 위해 노력했다. 칭얼대는 아이에게는 돌봐 줄 어머니가 있어야 한다는 식이었다 … 당신들은 국민을 보호한다는 명목으로 세금을 거두어 우리를 파탄에 몰아넣는다. 세금으로 함대를 유지하고 무장을 강화하고 전략적 철도를 건설하지만, 그것은 당신들의 야망과 허영을 충족시키기 위해 필요한 것일 뿐이다 … 토지 재산을 보호하고, 그 결과로 지가가 상승하는 일이 없었다면, 사람들은 좁은 공간 안에 와글와글 모여 사는 일이 없었을 것이다. 아직 세계에 넘쳐나는 자유로운 땅으로 퍼져 나갔을 것이다 … 싸움에서 유리한 자는 땅을 일구며 사는 사람들이 아니라, 언제나 정부의 폭력에 참여한 사람이 된다 ..  (157, 159쪽)

 

책을 읽는 손이 무겁습니다. 그러나 책을 손에서 놓을 수 없습니다. 책을 읽는 가슴이 어둡습니다. 그렇지만 책을 눈에서 뗄 수 없습니다. 책을 읽는 머리가 지끈거립니다. 그러하나 책을 내 삶에서 떨굴 수 없습니다. 안타깝고 아쉬운 대목이 많이 보이지만 <녹색평론>을 내치지 못하는 한편, <뿌리 깊은 나무>와 마찬가지로 이 땅에서 조용히 사라져 버린 잡지 <샘이 깊은 물>을 헌책방마실을 하면서 하나하나 찾아내어 차곡차곡 갖추어 놓고 틈틈이 다시 꺼내어 읽으며 내 오늘날을 돌아봅니다.

 

 

(2) 몸이 아프도록 돌보는 목숨 하나

 

옆지기는 엊그제부터 아기 '오줌 가리기'를 시키려고 애씁니다. 열 달을 넘어간 아기가 이제부터 차근차근 오줌 누기를 가릴 수 있도록 가르쳐야 한다고 이야기합니다. 그러나 아기는 아직 변기에 앉아 쉬를 할 마음이 없어 보입니다. 이웃 분들 말씀으로는 '바지를 벗기고 있으면' 얼마쯤 방바닥 닦느라 애먹겠지만 이내 쉬를 가릴 수 있다고 합니다. 우리 아기도 그와 같은 길을 걸어가 준다면, 아기 기저귀 빨래에서 한 시름을 놓으리라 생각합니다.

 

그렇지만 아기 기저귀에서 한 시름 놓인다고 할지라도, 이제부터는 다른 빨래가 새 시름으로 다가오리라 느낍니다. 아기 옷가지가 부피가 커질 테며 신발도 있을 테니까요.

 

.. 애국심을 조장하는 일은 해서는 안 되는 일이다 … 참되고 올바른 애국심이 무엇인지 우리는 아직까지 들은 바가 없다 … 애국심은 자기 국민만을 사랑하는 감정이며, 자기 마음의 평정, 재산을 희생하고, 심지어 목숨까지 바치며 적들의 침략과 학살로부터 자기 국민을 보호한다는 신조이다. 애국심은 모든 국가의 국민들이 자기들의 이익을 위해 다른 나라의 국민들을 침략하고 학살하는 것을 당연한 일로 생각하던 당시의 개념이다 … 애국심과 그 결과(전쟁)는 신문사에 엄청난 수입을 안겨다 주고, 다른 많은 업계도 이로부터 이득을 챙긴다. 작가나 교사, 교수 등 직업이 안전한 사람일수록 더욱 열정적으로 애국심을 찬양한다. 왕과 황제는 더 큰 명성을 얻을수록 애국심에 더 깊이 빠져든다. 지배 계층은 군대, 돈, 학교, 교회, 언론을 손안에 쥐고 있다. 그들은 학교 역사 수업에서 그들 민족이 최상의 민족이며 언제나 옳다고 가르치면서 아이들에게 애국심을 이식한다 ..  (51, 57, 59쪽)

 

아기 먹일 죽을 날마다 새로 끓이고, 아빠 엄마 먹을 밥 또한 날마다 새로 끓입니다. 빨래하는 데에도 한짐이요, 밥하는 데에도 한짐입니다. 그렇다고 아기가 밥을 낼름낼름 받아먹어 주느냐?

 

저로서는 제 어릴 적을 떠올리지 못하지만, 저 또한 우리 아기처럼 우리 어머니를 고달프게 했을지 어떠했을지 궁금합니다. 보나 마나 제가 아기였을 때에도 어머니를 몹시 고달프게 하지 않았으랴 싶습니다. 이웃집에서는 '뭘 그리 힘들게 아이를 키우느냐'고 하지만, 우리 어버이나 이웃 어르신이나 아이를 낳아 키울 때 어려움과 고단함 없던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리고, 이렇게 아이 키우는 고단함이 있으니 아이 키우는 보람이 있지 않느냐 싶어요.

 

.. 공장 일꾼, 나아가 일반적인 도시 노동자들이 감수하는 비참한 환경은 오랜 노동 시간과 적은 보수가 아니라, 자연과 접촉하는 정상적인 환경을 빼앗기고, 자유를 빼앗기고, 다른 사람의 지시에 따라 강제적이고 단조로운 작업을 할 수밖에 없는 상황을 말한다 … 세상의 모든 현자와 시인들은 인간 행복의 이상을 언제나 농촌 생활의 조건 안에서 찾고 있다. 또 생활 습관이 왜곡되지 않은 노동자들의 경우, 무엇보다 농업 노동을 선호하고 있으며, 공장 일이 언제나 유해하고 단조로운 반면 농업은 건강하고 다양성을 제공하는 일이다. 농업은 자유롭고 농민들은 자기 마음대로 일하거나 쉴 수 있는 반면, 공장 일은 공장이 노동자들의 소유라고 하더라도 언제나 기계 작동에 따라 일할 수밖에 없다. 게다가 공장 일은 부차적인 반면, 농사일은 일차적이다. 농업이 없으면, 공장은 존재할 수 없다 ..  (119, 122쪽)

 

아침마다 똥을 누는 아기를 씻기고, 틈틈이 아기를 안고 바깥마실을 다니며 바람을 쐴 때면 팔이며 허리며 등짝이며 쑤시고 저립니다. 아직 걸음마를 떼지 못하니까요, 그래도, 아기를 안고 골목마실을 하다 보면, 우리처럼 아기를 안고 있는 동네이웃을 곧잘 만납니다. 서로 모르는 사이이지만, 마음으로는 '저쪽 집에서도 우리와 똑같거나 비슷하겠지' 하는 생각이 됩니다. 마음으로 '힘들겠지만 힘내셔요' 하는 인사를 보냅니다.

 

아기 아빠는 바깥일 때문에 가끔 아기 엄마랑 아기만 집에 두고 서울마실을 하는데, 이렇게 홀가분한 몸이 되면 '이렇게 돌아다니는 일은 얼마나 신나고 즐거운가?' 하고 새삼 느낍니다. 몸이 아파 오래도록 몸져눕던 사람이 비로소 자리를 훌훌 털고 일어나 햇볕을 쬐고 바람을 마시며 숲길을 걸을 때 짜릿함과 아름다움을 느끼듯, 아기한테서 잠깐 풀려난(?) 때에 이토록 신나고 즐거운 바깥마실이 다 있었다고 느끼면서, 집에 홀로 남아 아기랑 씨름하는 옆지기한테 미안해집니다. 그러다가 '나 혼자만 이렇게 신나게 다녀서는 안 되겠다'고 느끼고, 다음부터는 나 혼자 볼일을 보지 말고 온 식구가 다 함께 움직이자고 마음먹습니다. 칠월까지 대안학교 아이들하고 자전거 정비를 가르치고 배우는 자리는 어쩔 수 없지만, 다른 때에는 늘 함께하자고 다짐합니다.

 

.. 사치품은 내버려야 한다. 폭력과 자본, 발명이 불필요한 물품의 생산에 치우쳐 있는 한 아무것도 이룰 수 없다 … 필수품의 경우 누구도 일정 정도 이상은 사용하지 못한다. 하지만 사치품의 경우는 한도 끝도 없다. 수천 톤의 금으로 집을 장식할 수 있으며, 수백만 에이커의 땅을 공원으로 조성할 수도 있다 ..  (185, 196쪽)

 

이렁저렁 따지면, 혼자 살 때에 얼마나 크고 너르게 홀가분함을 누리는지 모르는 노릇입니다. 혼자 밥하고 빨래하고 살림 꾸리는 일이란, 얼마나 넉넉히 시간을 쓰며 내 삶을 가꾸는 셈인지 모릅니다. 혼인을 하면 저마다 제 시간을 빼앗긴다지만, 아이를 낳아 키울 때를 생각하면 우스울 뿐입니다.

 

이러한 이음고리를 일찌감치 깨달았기 때문에, 적잖은 예술가와 글쟁이들은 '혼인 않고 아이 안 낳고' 사는지 모르겠다고 느낍니다. 힘들고 고되니까, 힘듦과 고됨에 당신들 예술과 슬기를 빼앗기고 싶지 않아, 홀로 조용히 당신들 삶을 즐기는구나 싶습니다.

 

그래, 참 바보스러운 사람들이 아이 낳고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제 삶이든, 제 시간이든, 제 겨를이든 하나도 없으니까요. 제 삶이며 시간이며 품이며 땀이며 온통 아이한테 쏟아붓고 바쳐야 하니까요. 제 살을 깎아 주고 발라 주고 모조리 내놓아 주어야 하니까요.

 

.. 폭력을 없애기 위해서는 어느 누구도 어떤 구실에서든, 심지어 가장 흔한 처벌의 구실에서도 폭력을 행사해서는 안 된다 … 과거의 혁명에 참여했던 사람들은 주로 육체노동에서 벗어나 있는 고급 직종 종사자와 이들이 이끄는 도시 노동자들이었다. 반면, 다가오는 혁명의 참여자들은 주로 농촌의 대중들이 될 것이다 … 오늘날 사람들은 별개의 자유, 즉 언론의 자유, 출판의 자유, 양심의 자유, 집회의 자유, 이런저런 형태의 선거의 자유, 결사의 자유, 노동의 자유, 그리고 다른 여러 가지 자유에 관해 말한다. 이것은 사람들이(지금의 러시아 혁명가들처럼) 자유에 관해 매우 잘못된 생각을 하고 있거나, 아니면 자유가 무엇인지 모르고 있다는 것을 분명하게 보여주고 있다. 모두가 납득할 수 있는 그런 단순한 자유는 어떤 사람에게 그의 바람과 이익을 무시하고 어떤 행동을 하도록 요구하는 권력이 존재하지 않는 상황을 말한다 ..  (234, 257, 270쪽)

 

아이와 함께 살면서 집살림이 버겁다고 느끼지만, 버거운 만큼 새로운 길을 엿봅니다. 아이가 없었다면 한결 단출하고 홀가분하게 살림을 꾸렸을 텐데, 이렇게 살림을 꾸렸다면 우리 두 사람이 미처 깨닫지 못하거나 느끼지 못하며 지나칠 숱한 일을 알게 되고 보게 되고 헤아리게 됩니다. 아이 키우는 고단함만큼 둘레사람들 고단함을 새삼스레 돌아보고, 우리가 미처 모를 또다른 숱한 고단함은 무엇일까를 살피게 됩니다.

 

아이를 돌보면서 책 펼칠 겨를이 몹시 줄어든 만큼 아무 책이나 허투루 읽으며 나한테 애틋한 말미를 함부로 버리지 않도록 하는 가운데, 글 한 줄을 쓰면서도 더 마음을 쏟도록 해 줍니다. 동무나 이웃이 저를 볼 때면 "얼굴에 살이 쏙 빠졌네요." 하고 말을 거는데, 이런 말을 들을 때면 "아이 키우는 사람은 다 그렇잖아요. 그래도, 힘드니까 그만큼 보람이 있어요." 하는 말이 절로 튀어나옵니다.

 

 

(3) 톨스토이 님이 남긴 <국가는 폭력이다>

 

사람들한테 '문호(文豪)' 아닌 '대문호' 소리를 듣는 톨스토이 님 이름을 모르는 분은 얼마 없으리라 봅니다. 톨스토이 님 작품을 찬찬히 읽어 보지는 못했어도 이분 이름은 익히 알 테며, 러시아 사람들 여느 이야기를 그러모아 엮은 옛이야기 또한 온누리 사람들한테 두루 퍼져 있습니다. 이를테면, <한 사람한테는 땅이 얼마나 있어야 하느냐> 같은 작품은 무척 짧은 글이요 쉬운 글이면서도 어린이부터 어른 모두한테까지 '내 삶에서 내가 깊이 돌아보고 사랑할 대목이 어디에 있는지'를 느끼게 합니다. 우리 나라에는 1930년대부터 우리 말로 옮겨지며 읽힌 이야기인데, 설익은 가르침이나 어설픈 밀어붙이기가 아닌 따뜻한 사랑과 튼튼한 믿음으로 우리 스스로 우리 삶을 아름다이 가꿀 길을 보여줍니다.

 

.. 사람들은 다시 이렇게 말한다. "하지만 정부가 없다면, 사람들은 서로에게 폭력과 살인을 일삼을 것이다." 왜 그렇단 말인가? 폭력의 결과로 생겨난 조직이, 폭력을 행사하기 위해 세대를 넘어 이어져 온 조직이, 이제는 아무 필요도 없어진 그런 조직이 사라진다고 해서 왜 사람들이 서로에게 폭력을 행하고 서로를 죽인단 말인가? ..  (75쪽)

 

톨스토이 님 산문모음 <국가는 폭력이다>를 읽습니다. 산문모음 <국가는 폭력이다>는 무척 억세고 굳은 목소리로 오로지 한 가지 말마디를 외칩니다. "한 나라는 그 나라에서 살아가는 모든 사람한테 주먹다짐만 하고 있다."고. "사람들한테는 정부가 아닌 자치만 있어야 하며, 모든 전쟁은 정부가 일으킬 뿐 아니라, 전쟁을 일으키려고 사람들을 억누르고 있다."고. "정부는 애국심이라는 이름으로 사람들한테 나라 지키기에 몸바치도록 이끌려 하지만, 정부가 말하는 애국심이란 다름아닌 권력자 밥그릇 지키기요, 권력자 밥그릇을 크게 키우려고 우리 뼈와 살을 온통 발라 주는 일에 지나지 않는다."고.

 

그러니까, <국가는 폭력이다>는 "나라와 정부는 있어야 한다. 그리고 지켜야 한다."는 말마디가 얼마나 그릇되고 잘못되고 엉터리인가를 낱낱이 밝히는 책입니다.

 

<국가는 폭력이다>를 읽는 동안 조지 오웰 님 산문모음 <파리와 런던의 밑바닥 생활>이 떠올랐습니다. 조지 오웰 님 스스로 파리와 런던 밑바닥에서 가난뱅이나 떨꺼둥이로 지내면서 '프랑스와 영국이 나라 안팎으로 내세우는 거짓된 이름과 껍데기'가 무엇인지를 밝힌 책으로, 톨스토이 님과 조지 오웰 님이 살았던 곳이 다르고, 느낀 바는 다르지만, 두 사람이 만나는 자리는 같습니다. 우리는 우리 삶을 우리 손으로 가꾸는 길에서 자꾸자꾸 멀어지고 있으며, 우리 손으로 가시울타리를 쳐 놓고 이 안에 우리 스스로 갇혀 있다고.

 

.. 우리 시대에 모든 사람들이 인류를 변화시킬 생각을 하고 있지만, 정작 아무도 자기 자신을 변화시킬 생각은 하지 않고 있다 … 참여는 희생을 요구한다. 사람들이 진정으로 자신의 지위뿐만 아니라 형제ㆍ동포들의 지위를 향상시키기를 원한다면, 익숙해 있는 삶의 방식을 바꾸고 그동안 누리고 있던 유리한 지위를 포기하려는 마음가짐을 가져야 할 뿐 아니라 격심한 투쟁에 대비해야 한다 … 사람들이 이웃에게 도움을 주기 위해 취해야 할 행동은 새로운 형태의 체제를 건설하는 것이 아니라, 우선 자기 자신과 타인의 품성을 바꾸고 개선하는 것이 되어야 할 것이다 ..  (88, 174, 220쪽)

 

그러면, 이 나라는 이 정부는 왜 폭력덩어리가 되었을까요. 우리들은 왜 나라와 정부가 폭력덩어리가 되도록 손을 놓고 있을까요. 아니, 우리들은 나라와 정부가 폭력덩어리가 되도록 이끄는 한편 떡고물을 얻어먹고 있지는 않는가요. 얄딱구리한 나라얼개를 뜯어고치는 데에 마음쏟기보다는, 고시에 붙어 죽는 날까지 쇠밥그릇 떵떵거리면서 살아가기만을 바라지는 않는가요.

 

스스로 아름답게 꾸릴 내 삶을 찾지 않는 가운데, 스스로 바보가 되어도 좋으니 돈만 있으면 그만인 내 삶이 되도록 굴러떨어지고 있지 않습니까. 스스로 사랑과 믿음이 가득한 훌륭하고 멋진 사람이 되도록 힘쓰지 않는 가운데, 이웃이고 동무이고 식구이고 밟고 타올라가며 내 밥그릇 두둑히 챙기면 좋다고 여기는 삶이 되도록 망가지고 있지 않습니까.

 

.. 사람들을 돕는 방법은 한 가지밖에 없다. 스스로 좋은 삶을 사는 것이다 … 다른 모든 수단은 환상이다 ..  (223쪽)

 

스스로 아름답게 살아가는 사람만이 아름다이 말을 하고, 아름다이 일을 합니다. 스스로 아름답지 않게 살아가는 사람들은 겉보기로는 예쁘장한 말을 할는지 몰라도 속알맹이까지 예쁘지 않을 뿐더러, 겉보기로만 훌륭해 보이는 일을 할 뿐, 조금도 안 훌륭한 일을 합니다. 내가 나를 돕지 않고서는 내가 발디딘 이 나라를 도울 수 없습니다. 내가 나를 사랑하지 않고서는 내가 몸담은 이 마을을 사랑할 수 없습니다. 내가 나를 살찌우지 않고서는 내 이웃과 동무와 식구가 오순도순 살가운 보금자리를 이룰 수 없습니다. 나부터 '폭력덩어리'이기 때문에, 나와 같은 숱한 폭력덩어리가 하나둘 뭉치면서 '나라와 정부라고 하는 어마어마한 폭력덩어리'가 망나니처럼 나대고 짓찧고 까불며 법석을 떱니다.

덧붙이는 글 | 글쓴이 인터넷방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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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는 폭력이다 - 평화와 비폭력에 관한 성찰

레프 니콜라예비치 톨스토이 지음, 조윤정 옮김, 달팽이(2008)


태그:#책읽기, #인문책, #톨스토이, #폭력, #국가폭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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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말꽃(국어사전)을 새로 쓴다. <말꽃 짓는 책숲 '숲노래'>를 꾸린다. 《쉬운 말이 평화》《책숲마실》《이오덕 마음 읽기》《우리말 동시 사전》《겹말 꾸러미 사전》《마을에서 살려낸 우리말》《시골에서 도서관 하는 즐거움》《비슷한말 꾸러미 사전》《10대와 통하는 새롭게 살려낸 우리말》《숲에서 살려낸 우리말》《읽는 우리말 사전 1, 2, 3》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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