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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년에는 이상기온이란 말이 많습니다. 이것은 인간이 약해진 증거입니다. 정말 지혜는 자연과 대결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받아들이면서 배우는데 있습니다. 옛사람은 바깥보다 안을 더 찾았습니다. 폭풍이 일면 그것을 보고 내 속의 폭풍을 가라앉히는 정신의 힘을 길렀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자연을 정복하고 부려먹고 캐먹다 못해 바닥이 거의 나게 됐으니 인간은 어디로 가려는 것입니까? (중략) 자연에 조금 이상이 있으면 거기 대해서는 투덜대는 사람들이 역사가 정상적인 길을 달리지 못하고 이상적으로 비뚤비뚤하는 데 대해서는 왜 한마디 의분의 탄식도 없을까요?" -함석헌의 '의분'중에서

<만화 함석헌> 3권 '바보새의 노래' 겉그림
 <만화 함석헌> 3권 '바보새의 노래' 겉그림
ⓒ 한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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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화 함석헌 1~3권>(한길사 펴냄)은 함석헌(1901~1989) 선생의 일대기를 그린 청소년 만화다. 책의 머리말에서 청소년기에 인상 깊게 읽었던 '의분'이란 글을 만났다. 

책을 좋아하는지라 그동안 참 많은 글들을 만났음에도 오래전에 읽었던 이 글이 잊히지 않는 이유는, 세상을 향해 새로운 눈을 뜨던 청소년기에 선생의 글들로 사춘기의 쓸데없는 삐딱함과 반항을 어느 정도 가라앉혔기 때문이다. '세상을 어떻게 사는 것이 마땅한가. 인간적으로 산다는 것은 어떤 것인가'를 생각하게 한 것도 선생의 글들이었다.

비폭력 저항, 평화주의, 실천하는 지식인, 참 종교인, 씨알과 민중, <씨알의 소리>과 <사상계>, 오산학교와 유영모, 장준하와 김용준, 생각하는 백성이라야 산다,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함석헌이란 이름과 함께 떠오르는 것들이다. 이런 말들과 함께 너무나 유명한 함석헌 선생에 대한 기본적인 설명은 더 이상 필요치 않으리라.

<만화 함석헌 1~3권>은 선생이 <사상계>에 5·16 군사쿠데타를 비판하는 글을 쓰는 것으로부터 시작된다.

그리하여 1권(죽을 때까지 이 걸음으로)과 2권(겨울이 만일 온다면)에서는 용천에서 태어난 선생이 소년기에 러·일 전쟁을 간접적으로 겪는다거나 평양고등보통학교 3학년 때 3.1운동을 맞아 독립선언서를 평양에 배포한 사건으로 학업을 중단한 것, 오산학교 및 유영모와의 인연, 도쿄 사범대학 유학 후 돌아와 오산학교에서 강의, 계우회 사건으로 투옥, <성서조선>으로 인한 필화 등 선생의 일생을 순서적으로 들려준다.

제3권 '바보새의 노래'에는 월남(1947년)과 한국동란으로 인한 부산 피난생활, YMCA에서의 강의와 유신정권의 독재에 맞서는 것, YMCA 위장결혼사건과 87년 민주화 항쟁 가담, 선생의 죽음까지를 담았다.

선생이 장준하의 부탁으로 1961년 7월에 <사상계>에 발표한〈5·16을 어떻게 볼까>는 5·16군사쿠데타에 대한 한국에서의 첫 비판이었다. 선생은 이 글로 필화를 입는다.

선생은 이전에도 필화를 입었다. 1940년에 평양교회 송산리 농사학원장을 지내다 계우회 사건으로 투옥된다. 이후 고향인 용천으로 돌아가 종교와 계몽운동을 하던 중 <성서조선>필화사건으로 서대문형무소에서 미결수로 복역한다. 이승만 정권에 항거, <생각하는 백성이라야 산다>(1958년)라는 글로 인한 필화사건은 자유당 시절의 대표적 필화사건이다.

이후 <사상계>는 정부의 심한 감시 속에서 뜻있는 몇몇 사람의 헌신과 열정으로 간신히 이어가다가 급기야는 폐간의 위기에까지 이른다. 책에는 우리의 민주화가 태동되던 무렵, 국민들의 답답한 가슴을 속 시원히 대변해 준 <사상계> 폐간을 둘러싼 비화가 자세하게 그려진다.

선생은 5·16군사쿠데타 이후 한일회담에 반대하는 등 사회운동에 참여한다. 선생은 또한 1970년에 월간지 <씨알의 소리>를 창간, 폐간(1980년) 될 때까지 10여 년간 발행인·편집인·주간으로 있으면서 민중계몽을 위한 수많은 글들을 발표, 글들로 민중계몽에 앞선다.

저자는 역사의 고비마다 단식과 투옥을 반복해 온 선생의 고단한 역정과 사상, 선생이 <사상계>나 <씨알의 소리>에 발표한 글과 강연 내용 등을 함축하여 들려준다. 때문에 <만화 함석헌>을 읽다보면 선생의 사상과 삶을 고스란히 접한다는 감동까지 인다.

함석헌 선생님은 여태까지의 역사기술방식이었던 왕조와 지배층 중심의 사관을 민중 중심의 역사관으로 바꾸어 놓았습니다. 선생님은 민중을 '씨알'로 갈아입혀 동서양의 종교와 철학의 알짬을 웅축시켰습니다. 우리 속에 원래 들어 있는 씨알을 일깨워 주었습니다. 그 씨알을 기르고 꽃피워 열매를 얻는 것은 우리 각자의 몫입니다. -김영호 추천사 중에서(함석헌 기념사업회 부설 함석헌 씨알 연구원 원장)

<만화 함석헌 1권 2권> 겉그림
 <만화 함석헌 1권 2권> 겉그림
ⓒ 남기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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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아가 한사람의 일생이 아닌 20세기 한국의 민족사와 민중사를 고스란히 만나는 성취감도 맛볼 수 있다. 1901년에 태어나 일제강점기에 성장한 선생이 살았던 시대는 우리나라 근대 격동기에 해당하는데 저자는 선생이 살았던 시대적 배경과 선생과 관계되는 사건 등을 별도 페이지에 설명함으로써 독자들의 역사 이해를 돕기 때문이다.

시대정신을 이끌었던 선생 주변에는 수많은 지식인들이 있었다. 저자는 선생이 영향을 받았거나 뜻을 함께 했던 유영모, 장준하, 김용준 등 근대 우리 역사 인물들을 쪽지 형태로 본문에 설명한다. 때문에 수많은 사건과 수많은 사람들이 등장하지만 혼란스럽지 않게 만화를 통해 선생의 삶과 사상은 물론 우리 근대 역사를 일목요연하게 정리해 볼 수도 있다.

청소년기 이후 더 이상 함석헌에 관한 책을 읽지  못했다. 하지만 언젠가는 반드시 사춘기 때 인상 깊게 읽었던 책들과 함께 다시 읽어보리라 늘 마음에 두던 터였다. 이런 와중에 읽게 된 <만화 함석헌>은 또 다른 감동이다. 청소년기에 삶의 연륜이 부족해 더러는 이해하기 힘든 선생의 삶과 사상을 좀 더 깊게 들여다 볼 수 있었기 때문이다.

"아! 세상에 이런 글이 다 있구나. 막혔던 가슴을 뻥 뚫어주고, 앞으로 세상을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에 대한 방향을 알려주는 글에 감동했습니다. 나는 함석헌 선생님의 글이 나온 책이라면 모두 사서 읽어보게 되었습니다. 이미 폐간된 <사상계>에 선생님의 글이 많이 실려 있다는 것을 듣고는 보수동 헌책방 골목을 스시로 드나들던 그때가 지금도 생각납니다.

이 만화는 함석헌 선생님이 살아오신 삶의 궤적을 따라간 것이지만, 선생님의 깊은 사상과 철학, 나라를 사랑하는 마음, 사람을 바라보는 따스한 시선을 전하기에는 너무나도 부족합니다. 다만 만화를 읽은 젊은 세대에게 함석헌 선생님의 글을 읽는 계기를 만들어 줄 수 있다면 만족합니다. 내가 함석헌 선생님의 글을 읽으면서 느꼈던 감동, 기쁨을 이 만화를 읽는 독자들도 느낄 수 있다면 더 바랄 것이 없습니다."-저자의 말 중에서

저자는 선생의 글들을 찾아 탐독하는 것으로 그치지 않고 입영 직전 선생을 직접 만나 삶의 방향을 얻는다. 나아가 선생의 타계 20주년을 앞두고 이 책을 몇 년간 작업 하는 중 '함석헌 씨알사상연구원'에 참석하여 공부를 한다거나 평전들을 열독하고 주변 사람들을 만나 이야기를 들어보는 등의 오랜 노력 끝에 <만화 함석헌>이 세상에 낸다.

함석헌 선생이 쓴 글이나 선생에 관한 글은 수십 권에 이른다고 한다. 너무 방대한 양이라 엄두가 나지 않는다는 사람들까지 있을 정도다. 그런 사람들에게 이 책은 나름 위안이 될 법하다. 청소년기에 함석헌 선생의 글에 깊은 감동을 받았으며 삶의 지표로 삼은 저자가 이처럼 수년간 노력을 한 결과물이기 때문이다.

중학생부터 읽을 수 있는 만화지만 역사 만화라 그리 가볍지 않다. 만화 형식을 빌었지만 책 전반에 선생의 사상을 함축하다보니 선생이 발표한 글로 줄거리를 이끌어 나가고 있기 때문에 감동 깊은 자서전 한권을 읽는 느낌이다. 때문에 어른들에게도 꼭 권하고 싶다.

선생의 별명은 '바보새'다. '앨버트로스' '아호도리(바보새)'라고도 불리는 이 새는 힘찬 날개짓 때문에 태평양의 제왕으로 불리나, 고기를 잡을 줄 몰라 갈매기가 먹다 흘린 먹이를 얻어먹고 산단다. 선생은 말년에 '뜻은 푸른 하늘에 가 있지만 밥벌이를 할 줄 몰라 평생 친구들의 호의로 살아온' 자신을 이 새에 비유한다. 때문에 붙은 별명이다.

청소년기 내 아이들은 아직 함석헌을 모른다. 교과서 속 역사인물과 TV에서 자주 만날 수 있는 사람들을 더 많이 알고 있는 우리 아이들에게, '바보새 함석헌'은 어떻게 읽혀질까. 물질과 출세, 경쟁 등이 시대정신이 되어버린 오늘을 사는 우리 아이들이 함석헌을 제대로 만나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인간적으로 산다는 것은 어떤 것인지를 알았으면 좋겠다.

올해는 함석헌 선생 타계 20주년이 되는 해이다. 선생의 삶과 글, 사상에는 언제나 민중이 있었다. 오늘의 우리는 선생이 역사와 삶의 시작이자 끝이요, 중심으로 여긴 그 민중일 수 있는가. 함석헌 선생의 삶과 글들은 지난해와 올해, 민주주의를 잃어버린 우리들의 휑한 가슴을 어루만져 주리라.

덧붙이는 글 | <만화 함석헌 1권~3권>(남기보 지음/한길사/2009.5/각권 값 1만원)



만화 함석헌 세트 - 전3권

남기보 글.그림, 한길사(2009)


태그:#함석헌, #씨알의 소리, #사상계, #장준하, #민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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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제게 닿아있는 '끈' 덕분에 건강하고 행복할 수 있었습니다. '책동네' 기사를 주로 쓰고 있습니다. 여러 분야의 책을 읽지만, '동·식물 및 자연, 역사' 관련 책들은 특히 더 좋아합니다. 책과 함께 할 수 있는 오늘, 행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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