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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지난 5월 29일, 노무현 전 대통령 국민장 영결식 후 노제가 거행된 서울광장에서 간신히 몸을 빼어 지하철을 타기 위해 지하도로 내려왔을 때였다. 쓰레기통과 쓰레기통 주변에 한 장짜리 노란 종이 인쇄물이 많이 버려진 것을 볼 수 있었다.

'전국언론노동조합'에서 만든 인쇄물이었다. 한 면에는 노짱의 얼굴 그림과 '편히 쉬십시오'라는 글귀가 새겨졌고, 다른 한 면에는 '조중동은 사죄하라'는 말이 검은 고딕체 활자로 크게 새겨진 인쇄물이었다.

수십 장은 될 듯한 그 인쇄물들을 보는 순간 가슴이 아팠다. 아깝다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제법 두꺼운 종이를 사용한 그 인쇄물들이 그냥 한번 사람들의 손에 들려졌다가 미련 없이 버려졌으리라는 생각에 가슴 쨍한 슬픔 같은 것을 머금어야 했다.

공주 나들이 내 승합차에 노란종이 인쇄물을 부착한 이틀 후인 5월 31일 공주 처가엘 갔다. 그 후로 오늘까지 내 승합차로 먼길 나들이를 많이 했다.
▲ 공주 나들이 내 승합차에 노란종이 인쇄물을 부착한 이틀 후인 5월 31일 공주 처가엘 갔다. 그 후로 오늘까지 내 승합차로 먼길 나들이를 많이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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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한 불안감과 두려움도 있었다. 이것을 조중동 기자들이 본다면? 조중동에게는 능히 호재(好材)가 되리라는 생각이었다. 이 쓰레기통과 주변 풍경을 카메라에 담아 '쓰레기천국' '낭비천국' 어쩌고 한 제목을 큼지막하게 달아서 신문에 낸다면? 조중동에 중독된 독자들은 또 한번 혀를 차며 탄식하고, 더러는 즐거워하기도 하겠지.

이걸 손에 들었던 사람들이 쉽게 버리지 말고, 모두들 집에 가지고 가서 보관을 하면 얼마나 좋을까. 그런 생각을 하며 쓰레기통 주변에 버려진 인쇄물들을 여러 장 주워 모았다. 그리고 그것을 가지고 집에 왔다. 그 인쇄물들 외에 내 손에는 노란 풍선도 하나 들려 있었고, 접혀진 노란 종이모자도 들려져 있었다. 물론 머리에는 또 하나의 노란 종이모자가 씌워져 있었고….

집에 온 나는 노란 풍선은 거실 피아노 위에 올려놓고, 노란 종이모자들은 책장 안에 잘 보관해 놓았다. 그리고 전국언론노동조합 인쇄물들도 평생 동안 사용할 생각으로 책장 안에 보관하면서 한 장은 내 승합차의 뒷문 유리에 부착해 놓았다. 내 차 뒤에서 누구나 쉽게 '조중동은 사죄하라'는 글자들을 볼 수 있게 붙인 것이었다. 투명 테이프와 가위가 필요한 이 작업에 아들 녀석이 손을 보태 주었다.      

나는 내 승합차 뒷문 유리에 '조중동은 사죄하라'라는 노란색 종이 인쇄물을 붙이면서, 평생 동안 차에서 떼지 않을 결심을 했다. 현재 10년을 넘기고 있는 프레지오 승합차를 내년쯤에는 다른 차로 바꿀 생각인데(10년 동안 정들었던 프레지오 승합차에 벌써부터 미안한 마음이 들지만), 그때도 새 차에 인쇄물을 부착할 생각이었다. 평생 동안 내 차에 그 인쇄물을 붙이고 살기 위해 그것을 여러 장 준비해놓은 것이었다.

우리 집 거실의 노란 풍선 5월 29일 노짱 영결식 날 서울광장에서 가져온 노란 풍선은 우리 집 거실 피아노 위에 모셔졌다. 50여 일이 지나는 동안 시나브로 공기가 빠져서 크기가 줄어들었다. 콩알만하게 될 때까지 자리를 지킬 것이다.
▲ 우리 집 거실의 노란 풍선 5월 29일 노짱 영결식 날 서울광장에서 가져온 노란 풍선은 우리 집 거실 피아노 위에 모셔졌다. 50여 일이 지나는 동안 시나브로 공기가 빠져서 크기가 줄어들었다. 콩알만하게 될 때까지 자리를 지킬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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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전국언론노동조합'에서 만든 그 인쇄물이, 다시 말해 '조중동은 사죄하라'는 그 말이 노짱의 죽음과만 연관되는 것은 결코 아니라고 생각했다. 물론 노짱을 죽음으로 내몬 깡패 집단과 같은 조중동 수구 족벌언론들의 언론 폭력은 명약관화하게 드러났다. 노짱의 비극적인 죽음에서 조중동의 야비한 죄과는 씻어질 수 없는 일이 되었다. 하지만 '조중동은 사죄하라'는 그 말을 노짱의 죽음과 연관되는 것으로만 국한시킬 수는 없다.

수구 족벌언론 조중동의 폐해는 이루 다 말할 수 없다. 그들의 사악함과 야비함은 우리 국민에게 참으로 큰 해악을 끼쳤고, 오늘도 우리 사회에 음울한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다. 그것은 쉽게 해소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들은 결코 자신들의 음습한 기득권, 제왕적인 언론 권력을 쉽게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 사죄라니! 언감생심 꿈도 못 꿀 일이다.

그래서 계속 싸워야 한다. 당장 이기고 지는 싸움이 아니다. 이기고 지는 것은 중요하지 않다. 싸운다는 자세 자체가 중요하다. 그것은 평생을 걸고 나아가야 할 싸움이기도 하다. 하루아침에 끝나는 것이 아니므로, 평생을 두고 싸워야 할 것이므로, 내가 죽은 후에도 그 싸움은 이어져야 할 것이므로, 그것에 대한 상징적 표현으로 나는 '조중동은 사죄하라'는 인쇄물을 평생 동안 내 차에 붙이고 살 결심이었던 것이다.            

<2>

나는 청년 시절이던 저 1980년대 초부터 조선일보의 실체를 알았다. 광주에서 일어난 엄청난 비극의 내용을 처음에는 풍문으로만 듣다가 천주교 안의 유통 경로를 통해 비교적 소상히 알게 되었다. 그때 광주시민들을 '폭도'로 매도한 조선일보의 기사를 보면서 치를 떨어야 했다.

당시에는 '조중동'이라는 지칭 명사가 없었지만, 조중동 중에서도 조선일보가 단연 앞장을 서는 것을 확연히 느낄 수 있었다. 또 당시에는 신문이 살아남기 위해서 어쩔 수 없이 신군부 세력에 부화뇌동하는 면이 없지 않을 거라는 생각도 했다. 무지막지한 신군부의 총칼 앞에서 살아남으려면 무슨 짓은 못하랴 생각했고, 비굴한 아부와 국민을 철저히 속이는 짓에 일말의 연민 같은 것을 느끼기도 했다.  

그러나 거대한 군사 권력 앞에 굴종하고 아부하던 형태에서 벗어나더니, 조선일보는 스스로 거대 권력이 되어갔다. 수구 족벌언론의 위상을 견고하게 쌓아갔고 마침내 사주(社主) 방일영은 '밤의 대통령'이라는 칭호를 얻게 되었다.

2001년 '국민의 정부' 시절 시민들에 의해 언론개혁운동이 일어날 때, 수구 족벌언론들은 결속하는 모습을 보이기 시작했고, 이때부터 '조중동'이라는 이름이 회자되기 시작했다.

노짱 영결식 날 5월 29일 오전 경복궁에서 노짱 영결식이 거행되는 동안 아들 녀석과 함께 동아일보사 앞에 앉아 있었다. 동아일보 사옥 앞에서 건너편 조선일보 사옥 벽에 걸린 멀티비전을 통해 영결식을 보는 건 괴로운 일이기도 했다.
▲ 노짱 영결식 날 5월 29일 오전 경복궁에서 노짱 영결식이 거행되는 동안 아들 녀석과 함께 동아일보사 앞에 앉아 있었다. 동아일보 사옥 앞에서 건너편 조선일보 사옥 벽에 걸린 멀티비전을 통해 영결식을 보는 건 괴로운 일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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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2001년 여름 20여 년 동안 구독해오던 동아일보를 끊었다. 동아일보는 내 모지(母紙)이기도 하다. 1982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중편 부문으로 작가 호칭을 얻게 되었으니, 동아일보와의 인연은 각별하다. 하지만 나는 조선일보를 따라가는 동아일보의 행태에 실망과 분노를 하지 않을 수 없었다. 1975년의 이른바 '동아일보 광고탄압' 때 독자들의 '격려광고' 대열에 동참했던 일들을 회억하면서 정말 눈물을 머금고 동아일보 구독을 끊지 않을 수 없었다.

나는 1990년대 중반 충남 서산에서 '갯마을'이라는 지역잡지와 '새너울'이라는 지역신문 창간에 관여하고, 편집주간과 논설주간을 맡아 일하면서 조선일보와의 싸움을 시작했다. '안티조선' 운동과 언론개혁운동이 일어나기 훨씬 전부터 한국의 변방 동네인 서산에서 조선일보를 비판하는 일을 한 것이었다.

물론 지방 소도시 지역매체들의 작은 지면을 가지고 거대 언론 조선일보와 싸운다는 것은 다윗과 골리앗의 싸움도 못되는 짓이었다. 계란으로 바위를 치는 격이었고, 새발의 피일 뿐이었다. 하지만 나는 열심히 조선일보의 그릇된 논조들을 비판했다.

처음에는 조선일보의 '양비론'을 주로 공격했다. 조선일보도 처음에는 양비론적 자세를 많이 견지했다. 하지만 점점 거대 언론권력이 되어가면서 조선일보는 양비론적 자세도 벗어 던지고, 반대쪽에 대한 노골적인 적대감과 공격성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이빨을 드러내고 마구 물어뜯는 야수의 모습 그것이었다.

나는 2001년 '안티조선' 운동에 참여하면서, 그리고 그 해의 언론개혁운동에 동참하면서, 이미 거대 권력이 되어 있는 수구 족벌언론들과의 싸움은 단기간에 끝날 수 없는 것임을 감지했다. 비록 다윗과 골리앗의 싸움일망정, 지속적으로 죽는 날까지 싸워야 할 일임을 자각했다. 물론 여기에는 나 자신과의 싸움도 수반되는 것이었다.

추모객들과 함께 어울리는 노짱 49재가 거행되던 10일 오전 봉하마을 마을회관 앞마당에 마련한 무대에서 추모문화제가 진행되는 동안 노짱도 밝은 모습으로 추모객들과 자리를 함께 했다. 그는 앞으로도 늘 그렇게 함께 할 것이다.
▲ 추모객들과 함께 어울리는 노짱 49재가 거행되던 10일 오전 봉하마을 마을회관 앞마당에 마련한 무대에서 추모문화제가 진행되는 동안 노짱도 밝은 모습으로 추모객들과 자리를 함께 했다. 그는 앞으로도 늘 그렇게 함께 할 것이다.
ⓒ 지요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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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년 언론개혁운동을 계기로 조중동은 결속했고, 조중동이라는 이름 아래 더욱 큰 권력의 성채가 되었다. 그들에게는 언론의 기본 명제인 정론이라는 것은 안중에도 없었다. 오로지 기득권을 지키는 일에서는 물불을 가리지 않는 '사악함'이 최대 무기였다.

무릇 '정론'이라는 것은 바탕이 건전해야 가능한 법이다. 진실을 사랑하고 정의를 추구하려는 의지가 있어야 한다. 의로움이 바탕을 이루어야 거기에서 정론이 나올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세상에는 거짓 정론이 판을 친다. 사악함에서 나오는 궤변이 정론으로 포장되어 지면을 장식한다. 그리고 많은 독자들이 그 궤변과 거짓 정론에 중독된 채로, 자신이 중독된 사실조차 인식하지 못하는 가운데 살아간다.

<3>

내가 노무현 전 대통령 서거 영결식 날 서울광장 지하도에서 입수한 '조중동은 사죄하라'는 전국언론노동조합의 인쇄물을 내 승합차 뒷문 유리에 부착한 것은, 1980년대 초 청년 시절에 실체를 알아버린 조선일보에 대한 반감, 그리고 1990년대 중반부터 시작한 수구 족벌언론들과의 싸움을 다시 한번 확인하고 표현하는 일이었다. 평생 동안 싸울 것을 다짐하는 것이기도 했다.                            
  
나는 내 승합차 뒷문 유리에 그 인쇄물을 부착한 5월 29일부터 오늘까지 차를 가지고 참으로 많이 움직였다. 공주 처가에도 가고, 서울과 홍성 등 먼 곳 나들이도 여러 번 했다. 그때마다 수십만 장이 만들어졌을 그 인쇄물을 부착하고 있는 차량을 하나도 발견하지 못하는 데서 아쉬움과 외로움도 느껴야 했다.

섭섭함과 외로움 속에서도 나는 꿋꿋하게 평생 동안 변함 없이 그 인쇄물을 내 차에 붙이고 다닐 생각이었다. 그 부착물이 훼손되거나 차를 바꾸게 되면 다시 붙일 수 있는 여벌도 충분히 확보해 놓았으니 걱정할 게 없는 일이었다.

김정란 교수와 함께 2001년 나로 하여금 '안티조선' 운동에 동참케 한 김정란 시인(상지대 교수)도 오랜만에 만날 수 있었다. 문우이자 동지로 같은 '눈물'을 공유하는 사람과 오랜만에 만나는 것은 정말 반가운 일이다.
▲ 김정란 교수와 함께 2001년 나로 하여금 '안티조선' 운동에 동참케 한 김정란 시인(상지대 교수)도 오랜만에 만날 수 있었다. 문우이자 동지로 같은 '눈물'을 공유하는 사람과 오랜만에 만나는 것은 정말 반가운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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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뜻밖에도 어머니로부터 제동이 걸렸다. 폐와 갑상선에 문제가 생겨 서울성모병원에 열흘 가까이 입원도 하셨다가 집에 와서 계속 다량의 약을 드시며 투병하시는 어머니는 신경이 예민해지셨다. 전에는 내 강력한 '동지'이셨다. 오체투지 순례기도 참여도, 용산미사 참례도 말리지 않고, 내 건강 걱정을 하면서도 허락을 하시곤 했다.

그러시던 어머니가 몸이 아프시게 된 이후로는 태도가 달라지셨다. 내 차에 붙어 있는 것을 제발 떼라고 성화를 하셨다. TV 뉴스를 열중해서 보시는 어머니는 전에는 보지 못했던 풍경들, 이상한 시국 관련 보도들을 접하시면서 불안해하시는 것이 분명했다. 아들과 교육공무원인 며느리가 어떻게 잘못될 수도 있다고 생각하시는 것 같았다.

나는 어머니의 성화가 시국과 관련하는 불안과 걱정으로부터 오는 것임을 감지하자 참으로 난감한 마음이었다. 어머니를 설득하는 일을 포기했다. 병환 중이신 노친네와 계속 싸울 수는 없는 일이었다.

우리는 오늘 민주주의가 후퇴하고 있다는 말들을 많이 듣는다. 민주주의 퇴보와 역주행 현상의 세목들을 예시하는 일들은 어렵지 않다. 요즘 무시로 그것의 실체를 피부로 느끼고 접하며 살고 있다. 생각하면 참으로 어처구니없고 곤혹스러운 일이다.

그런데 나는 어머니의 불안과 걱정을 접하면서, 민주주의 퇴보 현상의 세목들을 예시하는 일은 참으로 무의미함을 절감했다. 어머니의 그 불안과 걱정은 지난 십 수년간 어머니에게서 없던 일이었다. 십 수년의 세월을 건너뛰어 다시금 노인네에게서 재발한 현상이었다.

아, 민주주의 퇴보란 바로 이런 것이구나! 시국과 관련하는 이상한 보도들 때문에 노인네의 신경이 예민해져서 노인네가 필요 이상으로 불안해하고 걱정하시는 것, 이것이야말로 민주주의 퇴보의 명확한 실체로구나!

그것을 절감한 순간 나는 어머니와 타협할 필요를 느꼈다. 병환을 겪으시는 노인네와 정말 계속 싸울 수도, 설득을 시도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나는 어머니께 타협안을 제시했다.

평생 동안 내 차에 붙이고 살 마음이었지만 노짱 49재 때까지만  인쇄물을 붙이고 있다가 떼겠다고 노모와 타협하고 약속한 날 지레 아쉬워지는 마음에 아파트 주차장에서 사진을 찍었다.
▲ 평생 동안 내 차에 붙이고 살 마음이었지만 노짱 49재 때까지만 인쇄물을 붙이고 있다가 떼겠다고 노모와 타협하고 약속한 날 지레 아쉬워지는 마음에 아파트 주차장에서 사진을 찍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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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 그럼 이렇게 하기로 해요. 노무현 대통령의 49재 때까지만 그걸 차에다 붙일게요. 노 대통령의 49재가 지나면 그것을 뗄 테니까요, 그때까지만 참아 주세요. 오늘 당장 떼라고 하지 마시고, 어머니도 좀 양보를 해주세요."
"그려? 노 대통령 49재가 원젠디?"                   
"한 보름 남았어요."
"그려, 그럼. 노 대통령 49재가 지나면 그걸 뗀다구 헌 말, 꼭 지켜야 혀?"
"예, 꼭 지킬게요. 약속할 게요."
"그려. 내가 얼마를 더 살더라도, 좀 맘 편케 살다가 죽으야니께."

어머니의 그 말을 듣는 순간 나는 입술을 깨물며 울음을 참아야 했다. 노친의 길지 않을 여생도 슬펐고, 노인네의 이상한 불안과 걱정 때문에 내 차에서 '조중동은 사죄하라'는 부착물을 떼기로 약속까지 한 사실도 슬퍼져서 입술을 아프게 깨물지 않을 수 없었다.

노짱의 49재를 지내고 봉하마을에서 돌아온 11일과 12일 나는 내 차에서 그 부착물을 떼지 못했다. 너무도 아쉽게 느껴지기 때문이었다. 어제(12일) 주일 아침에 어머니를 모시고 성당에 가고 올 때 별 말씀이 없으셔서 그냥 계속 붙이고 살까하는 생각이 들었으나 그건 도리가 아닐 것 같았다.

오늘 아침에 아내를 학교에 출근시켜 주면서 아내의 생각을 물었더니 이런 대답이 나왔다.

"어머니와 약속한 일이니 일단 약속을 지키세요. 어머니가 아직 말씀을 안 하셔도 속으로 섭섭해하실지 모르니까요."        

나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고, 아내를 출근시켜 주고 돌아온 즉시 내 승합차 뒷문 유리창에서 그 부착물을 떼였다. 하지만 그것을 버리지는 않았다. 유리에서 떨어진 투명 테이프를 잘 오므려 붙인 다음 내 책장 속에 잘 보관해 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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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남 태안 출생. 1982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중편「추상의 늪」이, <소설문학>지 신인상에 단편 「정려문」이 당선되어 문단에 나옴. 지금까지 120여 편의 중.단편소설을 발표했고, 주요 작품집으로 장편 『신화 잠들다』,『인간의 늪』,『회색정글』, 『검은 미로의 하얀 날개』(전3권), 『죄와 사랑』, 『향수』가 있고, 2012년 목적시집 『불씨』를 펴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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