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 책이름 : 빅토르 하라, 아름다운 삶 끝나지 않은 노래

- 글 : 조안 하라

- 옮긴이 : 차미례

- 펴낸곳 : 삼천리 (2008.9.11.)

- 책값 : 18000원

 

 (1) 내가 발을 딛는 이곳에서

 

 5층짜리 한글회관은 1960년대에 온나라 사람들이 푼푼이 그러모은 돈으로 지은 집입니다. 한글학회는 이 집 5층에 자리를 잡고 있습니다. 1970년대 첫머리에 지은 이 집은 그무렵 얼마나 높은 집이었는지 모르겠으나, 2010년을 앞둔 이즈음, 광화문 새문안길에서 한글회관은 아주 조그마할 뿐 아니라, 이웃 높다란 집에 막히거나 가려 잘 안 보입니다. 그예 파묻혀 있는 집이라 할 텐데, 어쩌면 이런 집은 허물고 높다랗게 다시 지어야 한다는 소리가 나오지 않으랴 싶기도 합니다.

 

 한글회관이 선 옆으로는 새집 하나 올릴 만한 땅이 비어 있습니다. 얼마나 오래 비어 있었는지 모르는데, 빈땅 둘레로 높은 울타리를 쳐 놓아, 안쪽이 어떠한지 알아볼 수 없습니다. 다만, 한글회관 5층 뒷간에서 잠깐 바람을 쐬면서 내려다보면, 빈땅에는 곳곳에 풀이 우거지고 나무가 뻗습니다. 제법 자란 나무가 있으니, 몇 해는 묵어 있는 땅이 아닐까 싶습니다.

 

 문득 빈땅에서 무슨 지저귐소리가 들린다 싶어 가만히 내려다 봅니다. 참새가 떼를 지어 이리저리 노닐고 있습니다. 온통 아스팔트와 대리석과 시멘트로 덮인 광화문인데, 그 광화문 한복판이라 할 만한 자리에 빈땅이 남으면서, 이 빈땅에서 참새 같은 작은 목숨붙이가 숨을 쉬고 있다고 할까요. 이 조그마한 빈땅에서 새로 뿌리 내리고 씨앗 내리며 이룬 수풀이 살짝이나마 맑은 바람을 낸다고 할까요. 어느 나라 대사관 한 곳이 여기에 새집을 짓는다고 하던데, 부디 느즈막하게 미루고 늦추어 한참 나중에 삽질을 하면 얼마나 좋을까(삽질을 아예 안 하면 더 좋고) 하고 꿈을 꿉니다.

 

.. 빅토르는 가정에서 벌어진 이런 폭력 장면을 보면서 평생 지울 수 없는 아버지에 대한 증오심을 가지게 되었다. 아직 조그만 어린애였지만 빅토르는 어머니를 부양하고 돕는 것이 자기 의무라고 느끼기 시작했다. 어머니의 심한 노동, 그 낙천주의, 그리고 온순함이 가족들을 하나로 묶어 주며 빅토르의 표현처럼 "어려운 일들을 견딜 만한 것으로 만들어 주었던" 것이다 … 빅토르는 밤마다 자리에 누운 채, 어머니가 죽도록 일을 한다는 사실 때문에 가슴 아파했다. 그리고 그토록 오래 집을 비우다가 어느 날 갑자기 나타나 짐승같이 구는 아버지를 원망하는 마음으로 속을 태우곤 했다 … (어머니) 아만다는 이제 노래를 부르지 않았다. 시간이 없기도 했지만 아무도 그녀의 노래를 청하는 사람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도시에서는 집집마다 라디오가 있었고, 사람들이 주로 듣는 노래는 볼레로, 맘보, 탱고, 페루 왈츠, 멕시코 코리도 같은 직업 가수들이 부르는 노래들이었다. 아직 미국으로부터 음악적인 침략은 시작되지 않고 있었다 … 직업가수 그룹들은 한두 개의 감상적인 칠레 민요들만을 프로그램 속에 끼워 넣은 채 끊임없이 노래를 되풀이하고 있었다. 그것은 곧 지주들의 눈으로 본 농촌 풍경을 노래한 '관광객용 민요'였다. 푸른 하늘과 충직하고 멋진 목동들, 어여쁜 소녀들, 그리고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나라에서 지내는 태평세월 따위를 노래한 내용이었다 ..  (62, 70∼71, 99쪽)

 

 며칠 앞서, 하루일을 마친 다음 서울시청 앞에 잠깐 가 보았습니다. 마침 '돌아가신 대통령 일기'를 책으로 찍어 나누어 준다고 하기에 설렁설렁 나들이를 해 보았는데, 따로 일기책을 나누어 주는 곳은 찾아내지 못했습니다. 다만, 퍽 많은 사람들이 손전화로든 사진기로든 끊임없이 사진을 찍는 모습을 구경합니다. 꽃을 바치는 줄은 길게 이어지고, '광장을 시민 품으로 돌려 주자'는 설문받기를 하며, 한쪽에는 큼직한 화면을 세워 놓고 옛 대통령을 기리는 이야기를 보여줍니다. 길 건너에서 바라볼 때에는 넓은 찻길을 오가는 자동차 소리에 막혀 이렇게 많은 사람이 이렇게 온갖 모습으로 부대끼고 있으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아주 딴 세상 딴 느낌이었습니다.

 

 서울시청 앞 너른터에서 빠져나와 전경숲을 살짝 지나 전철역으로 들어옵니다. 지옥철에 시달리며 집으로 돌아옵니다. '전철 또한 참으로 딴 세상 딴 느낌이구나' 하고 생각합니다. 아침저녁으로 이렇게 서로서로 악다구니처럼 짓눌리고 낑기는 채 시달리다 보면 사람과 사람으로 서로를 마주하는 매무새를 저절로 잃지 않으랴 싶고, 우리 스스로 우리 사람됨을 잃는 가운데 우리들 넋과 얼은 제자리를 놓치거나 쉽게 놓아 버리지 않으랴 싶습니다.

 

 앞뒤옆으로 찡기는 가운데에도 책을 손에서 놓지 않으려 애쓰지만, 신도림역부터 역곡역을 지나 부천역까지는 책을 펼치기 어렵습니다. 십 분쯤 가쁜 숨을 몰아쉽니다. '나만 힘들겠나. 다들 힘들겠지. 그런데, 다들 무엇을 생각하고 있으려나.'

 

.. 1954년 말쯤 빅토르에게는 새로운 자각이 싹텄다. 어느 날 그는 일자리를 걷어치우고 얼마 안 되는 예금을 찾았다. 곧 합창단에서 사귄 친구들과 함께 칠레 북부 지방으로 민요를 조사하고 채집하기 위해 여행을 떠났다. 그는 어머니 아만다한테서 물려받은 음악적 유산을 재발견하기 시작하고 있었다 … 그는 농사꾼을 우상화하는 일을 그만두고 농민들을 현실 속의 남녀들로 보게 되었다 … 불쌍한 빅토르, 그는 본의 아니게 지배계급의 경직되고 위선적인 도덕성에 깊은 상처를 입히고 말았던 것이다 … 수탈당하는 사람들과 꾸준히 만나고 있었기 때문에, 빅토르는 같은 문제로 무척 근심이 많았고, 그들이 고민하고 있는 문제와 맥이 닿아 있는 노래를 여러 곡 작곡하게 되었다 ..  (79∼80, 92, 168∼169쪽)

 

 지난 8월 23일, 일민미술관에서 사진잔치 하나가 끝났습니다. 6월 19일부터 이어온 사진잔치에 저도 사진 열두 점을 내놓아 함께 걸었습니다. 사진을 처음 걸 때에는 인천에서 사진 여섯 점씩 두 손으로 나누어 들고 낑낑거리며 전철을 옮겨 타며 들고 갔습니다. 틀을 끼운데다가 테두리를 가늘게 해야 해서 뒷판을 두껍게 대다 보니 사진틀 하나만 들어도 무게가 만만하지 않았는데, 여섯 점씩 묶어서 들고 나를 때에는 팔이 빠지는 줄 알았습니다. 이번에 사진잔치가 끝난 뒤, 미술관에서 사진을 찾아가는 연락이 와서 가 보니, 택배나 뭘로 집으로 부쳐 주지 않고 손수 들고 가라고 이야기합니다. 이 녀석들을 또 어떻게 싸서 어찌 들고 가나 걱정을 하는데, 열두 점 가운데 석 점은 미술관에 기증해 달라고 이야기합니다.

 

 이번 사진잔치를 앞두고 저를 생각해 주는 선배 한 사람이, "야, 미술관에서 사진을 팔거나 가지겠다고 하면 그냥 주면 안 돼. 네 마땅한 수고와 대가를 받아야 해." 하고 이야기해 주었습니다. 문득 그 이야기가 떠올라 '미술관에서 사진을 사지 않고 기증을 바란다고요?' 하고 물으려다가 그만둡니다. 열두 점을 도로 들고 돌아가기란 새삼스레 까마득하기 때문입니다. 그나마 석 점을 덜어(?) 주니 내 어깨와 팔뚝이 조금 수월해지지 않을까 생각했습니다.

 

 삼십 분에 걸쳐 끈으로 친친 싸맵니다. 계단을 타고 내려와 광화문네거리 건널목을 건넙니다. 건널목을 건너는데 전화가 와서 사진은 오른손으로 모두어 들고 왼손으로 전화를 받습니다. 곧바로 집으로 들고 가기 무거워, 한글학회 한켠에 세워 두고 조금씩 가져가야겠다고 생각합니다. 땀을 뻘뻘 흘리며 짐을 나르는데, 길을 오가는 사람은 아주 많아도 어느 누구 도와줄 낌새는 없습니다. 아마, 제가 나서서 길 가는 사람을 붙잡고, "저기요, 이것 좀 같이 들어 주시겠어요?" 하고 말을 걸면 도와주었을까요. 한글학회 건물에 닿았을 때에도 건물을 지키는 아저씨는 그저 텔레비전 보는 데에만 바쁘고 손을 거들어 주지 않습니다.

 

 

.. 우리는 아무 거리낌 없이 촌뜨기가 된 기분으로 입을 크게 벌리고 경탄하면서 사방을 구경하기도 하고, 그런 식으로 런던의 명소들을 팔짱을 낀 채 섭렵했다. 칠레사람들이 겪는 빈곤과 고립된 생활에서, 부와 풍요의 절정에 서 있는 발달된 소비 사회의 한가운데로 밀쳐 넣어진 것이 우리에게는 대단한 충격이었다. 우리는 지구 구석구석에서 일어나는 모든 뉴스를 생생하게 보도하는 컬러텔레비전과 상업광고의 일제 사격에 현기증이 났다(칠레에 관한 뉴스만 빠진 것 같았다) … "미국의 손아귀에 쥐어져 있다는 것과 다른 몇 가지 결점을 빼고 본다면, 칠레는 아직 빵은 빵이고 흙은 흙일 수 있는 나라예요. 아직은 진짜 삶, 자연스러운 삶의 나침반을 가지고 자기 자신을 찾거나 다른 사람들을 찾아낼 수 있는 나라입니다. 나는 그들이 우리를 결코 그들 식으로 '문명화'시키지 않기를 희망하고 있습니다. 나는 차라리 지금 그대로의 칠레, 다듬어지지 않고 개방적이고 야성적인 칠레 쪽을 더 좋아합니다 ..  (212, 216쪽)

 

 그제는 집으로 가는 길에 신촌을 살짝 거쳤습니다. 맛이 간 렌즈를 고쳐 달라고 맡길 생각이었습니다. 종로3가로 갈까 하다가, 인천 쪽으로 가는 길목이 한결 나으리라 생각했습니다. 그렇지만, 신촌에 있는 '서비스센터' 문을 들어설 때부터 이곳 일꾼들은 저를 뿔이 나게 했습니다. 예전에도 그랬지만, 저처럼 '후줄근한(?)' 차림으로 다니는 사람은 살짝 얕보는 그런 말씨를 쓰는 일꾼이 아직 버티고 있는데다가(잘 차려입거나 비싸고 큰 장비를 어깨에 걸치고 있거나 양복을 입거나 한 사람한테는 깍듯이 구는), "저희 제품이 아니면 수리를 맡기실 수 없는데요?" 하고 내뱉었기 때문입니다. 한 마디 되쏩니다. "이봐, 고장난 렌즈를 달고 다니는 사진가가 어디 있어? 고장난 녀석은 가방에 넣고 다니지." 되쏘는 말에 아무 대꾸가 없습니다.

 

 서비스센터라는 데를 찾아가면서도 렌즈 때문에 성이 바짝 나 있었습니다. 지난 열 해에 걸쳐 이 회사 장비를 쓰고 있는데, 어김없이 '제품보증기간 1년'이 지나고 얼마 안 있어 사진기며 렌즈며 말썽을 일으켜 왔습니다. 어디가 부러지거나 끊어지거나 하면서 삼만 원에서 오만 원이 들도록 다시 고쳐야 했습니다. 한두 번이었다면 그러려니 하지만, 사진기나 렌즈를 떨어뜨리지 않고 부딪히지 않았음에도 이렇게 말썽이 나면, 정작 제가 사진을 한창 찍고 있을 때 '찍어야 할 모습을 찍지 못하니' 왈칵 짜증이 솟습니다. 사진기 회사에서는 '고장 수리'를 해주며 품값을 받을 생각일 테지만, 곰곰이 따지면 '사진기를 다루는 사람은 돈으로 헤아릴 수 없는 큰 손해를 입었'으니, 사진기 회사가 사진쟁이들한테 피해보상을 해 줄 노릇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사진기 몸통이나 렌즈는 얼마든지 다시 사거나 고칠 수 있지만, '사진쟁이가 바라보는 자리에서 그날 그때 찍어야 할 모습'은 그날 그때를 놓치면 두 번 다시 찾아오지 않을 뿐더러 다시는 되찾을 수 없으니까요.

 

 지난해까지는 제품 수리를 맡길 때 길어도 한 주였습니다. 이번에 맡기니 열흘쯤 걸린다고 이야기합니다. 히유. 한숨이 나옵니다. 그렇다면 저보고는 열흘 가까이 사진을 찍지 말라는 소리가 됩니다. 그나마 다른 렌즈 하나를 부랴부랴 장만해 놓아, 아쉬운 대로 사진찍기를 이을 수는 있지만, 이 또한 제 사진길에서는 가슴시리고 고된 나날이 되고 맙니다.

 

 

 (2) 내가 아이와 함께 사는 이 나라에서

 

 아기가 태어난 뒤로 늘 아기와 옆지기 세 식구가 함께 지내고 있는데, 보름쯤 앞서부터 아기 아빠는 서울로 출퇴근을 해야 하는 몸이 됩니다. 되도록 아기가 잠든 채 조용히 집을 나서려고 하는데, 처음 며칠 아기는 '아빠 아빠' 하면서 저를 찾았다고 합니다. 요즈음은 어떠한지 모르겠습니다. 며칠 지났다고 익숙해져서 안 찾을는지 모르지만, 또 하루하루 커 가면서 혼자서 노는 새로운 재미에 빠져 엄마까지 덜 찾는지 모르지만, 옆지기 혼자서 아이를 보는 일이란 퍽 고단합니다. 어느 누구라도 혼자서 아이 보고 집일 하기란 벅차고 고될밖에 없습니다. 더구나 아기 엄마이든 아기 아빠이든 '무쇠로 만든 사람'이 아닌 터라, 아침에는 어느 만큼 기운을 차린다 해도 저녁이면 파김치가 되기 일쑤입니다.

 

.. 우리는 춤추는 방법만 배운 게 아니라, 인간이 하는 모든 동작을 분석하여 춤과 연결시키는 방법을 배웠다 … 첫 공연을 한 장소는 푸에르토몬트에 있는 어떤 체육관이었다. 그곳은 남극에서 불어오는 찬바람이 깨진 유리창 틈으로 휘파람 소리를 내며 들어오고, 마을 개떼들이 연습장에 드나드는 황량한 장소였다. 그러나 관중들은 다정했으며 열광적이었다. 어떤 종류의 무대 공연도 아주 희귀한 것이었기 때문에, 그 마을 사람들에게 우리 공연은 일대 사건이었다. 그러나 우리가 준비한 철저한 유럽식 레퍼토리는 누가 봐도 이런 환경에서 도무지 어울리지 않았다 … 여전히 우리들한테는 무용가들을 민중한테서 분리시키고 민중 스스로 춤에 참여하기를 꺼리도록 만드는 요소들이 남아 있었다. 그때만 해도 현대무용은 더욱더 추상적인 표현으로 기울고 있었고, 동작을 위한 동작 자체의 연구에만 더 집착하는 경향이 지배하던 때였다 ..  (28, 43, 266쪽)

 

 사람들이 묻든 묻지 않든, 아빠나 엄마는 아이를 키우는 삶이 고단합니다. 그러나 고단하다고만 말하지 않습니다. 고단하면서 즐겁습니다.

 

 생각해 보면, 제가 스스로 좋아서 떠맡는 여러 가지 일거리는 제 살을 갉아먹고 제 목숨을 잡아먹습니다. 동네 도서관을 꾸리든, 혼자서 잡지를 하나 만들든, 책이야기를 쓰고 말 이야기를 쓰든, 골목 사진과 헌책방 사진을 찍든, 품과 땀과 시간과 돈을 바칩니다. 골목마실이나 헌책방마실 한 번 하고 집으로 돌아오면 기운이 쪽 빠집니다. 그렇다고 집에서 드러누워 쉴 수 없습니다. 마실을 다닐 때에도 혼자 다니는 일은 거의 없습니다. 아이를 안거나 걸려 함께 다니고, 집으로 돌아와서도 아이를 씻기고 빨래를 하고 우리 먹을 밥을 차리고 아이를 먹이며, 아이가 누는 똥오줌을 치우고 걸레를 거듭 빱니다. 잠들 녘에는 모기를 잡느라 부산을 떨고, 아이를 새근새근 재우려고 불을 다 끄고 드러눕다 보면, 아이가 잠든 뒤 이것저것 하려고 생각하던 일을 까맣게 잊어버린 채 나란히 잠듭니다. 이러다가 새벽 네다섯 시에 일어나 새 하루를 열 채비를 하며, 다시 전철 타고 서울로 일하러 나가고, 또 같은 하루가 그예 되풀이되고.

 

 저로서는 퍽 여러 해, 여느 제도권 회사에 몸을 안 담고 지낸 나날이 있기는 했습니다만, 오늘날 우리 삶터 거의 모든 사람들은 여느 제도권 회사에 몸을 담고 돈 버는 일을 안 할 수 없도록 짜여 있습니다. 알바이든 정규직이든 비정규직이든 아침 일찍 일어나 제복을 갖춰 입고 대중교통이든 무어에든 시달리며 회사로 나아가, 저녁에 밤일까지 하느냐 마느냐로 갈팡질팡하다가 느즈막하게 다시금 대중교통이든 무어에든 들볶이며 집으로 돌아와 어수선한 집에서 가득 쌓인 살림거리를 돌봅니다. 이러는 쳇바퀴가 고단해 집밥을 해먹기보다 바깥밥 사먹기나 시켜먹기를 하게 되고, 자연스레 바깥일로 돈을 더 버는 데에 힘을 쏟을밖에 없습니다.

 

 이런 쳇바퀴 나날은 어른이 되고 난 뒤에만 겪는 일이 아닙니다. 이 나라 모든 사람들은 유치원에 들거나 초등학교에 들 때부터 쳇바퀴가 됩니다. 유치원이나 초등학교에 들 무렵부터는 어김없이 학원 몇 군데를 돌아다니며, 이렇게 학교와 학원을 돌아다니다 보면, 초등학생임에도 '해 보고 학교 가서 해 보고 집에 오는 삶'이 아닌 '별 보고 학교 가서 별 보고 집에 오는 삶'이 될 수 있습니다.

 

 예닐곱 살부터 정년퇴직을 하는 날까지 거의 예순 해를 이와 같이 살아간다고 할까요. 하늘을 잊고 날씨를 모르며 이웃을 잃고 동네를 알지 못한다고 할까요.

 

 

.. 당시 기독교민주당 운동원들은 포블라시온에 들어와서 '마을 평의회'와 '어머니 센터' 같은 것들을 결성시켰다. 내가 편견에 치우친 시선으로 봐서 그런지는 모르지만, 그 여자들은 예쁜 전등갓이나 장난감 인형 만들기를 배우는 데만 정신이 팔렸던 것 같다 … 빅토르는 그럴 때면 몹시 화를 내거나 친구의 부인들과 다투곤 했다. "자선 따위는 필요없어요! 여러분은 원래부터 사람이 살 만한 곳에 살 권리, 아플 때면 근처에서 쉽게 의사를 부를 권리, 자식들을 제대로 교육시킬 권리를 갖고 있는 겁니다. 그런 것을 넣어 둘 집조차 제대로 없는데, 전등갓 따위가 도대체 왜 필요하단 말이에요?" ..  (172쪽)

 

 돌을 맞이하기 앞서 아이는 아빠가 빨래하는 양을 따라했습니다. 엄마가 몸이 안 좋아 게워내는 양을 따라하며 입에 넣은 먹을거리를 제가 손으로 꺼내기 일쑤였습니다. 엄마가 피리를 불면 옆에서 피리를 따라 붑니다. 아빠가 술을 마시면 제가 술병을 빼앗아 들고 마시는 시늉을 해 보려고 합니다. 돌을 지난 뒤에도 따라하기는 이어집니다. 어설픈 시늉이지만, 기저귀를 저도 개고 싶어 하고, 지가 눈 오줌을 치우는 엄마아빠를 따라 지 스스로 마룻바닥 걸레질을 해 보고 싶어 합니다. 아빠가 일하느라 셈틀 앞에 앉아 자판을 두들길 때에는 저도 자판을 두들겨 보고 싶어 발버둥입니다. 그러나 꼭 한 가지, 엄마아빠가 밥먹는 모습만큼은 따라하지 않습니다.

 

 엄마아빠가 늘 책을 읽고 글을 쓰고 사진을 찍고 그림을 그리고 하니, 아이는 틀림없이 이 모습을 고스란히 지켜보면서 배우거나 따라하리라 봅니다. 엄마아빠가 고단한 일이 쌓여 짜증을 부르거나 거친 말을 하거나 게으름을 부린다면, 이 또한 아이는 물끄러미 바라보면서 배우거나 따라할밖에 없다고 봅니다.

 

 뒷날, 아이가 제도권 학교에 가고 싶어하든 제도권 학교에는 안 가겠다고 하든 마찬가지입니다만, 아이는 학교에 갈 때에는 학교에서 어울리는 동무와 언니오빠와 교사들 매무새를 바라보거나 지켜보면서 제 매무새를 어떻게 다스리면 좋을까를 배우기 마련입니다. 학교에 안 간다면 집이나 동네에서 부대끼는 어른과 또래 동무들 매무새를 살피면서 제 매무새를 추스를 테고요.

 

 학교에 간다고 더 낫다거나 학교에 안 간다고 좀더 좋다고 할 수 없습니다. 어디에서 어떻게 무엇을 하든, 스스로 갈피를 어찌 잡고 줏대를 어찌 세우며 주제를 어찌 마련하느냐에 따라 다르다고 봅니다. 우리 아이이든 다른 집 아이이든, 제도권 학교를 다니면서도 제 마음밭을 알뜰살뜰 일굴 수 있습니다. 제도권 학교가 아닌 집배움을 하면서도 제 마음밭을 조금도 못 일굴 수 있습니다. 마음밭을 알뜰살뜰 일구는 가운데 제 몸과 마음을 꾸밈없이 들여다보며 제 둘레 사람을 있는 그대로 살필 테고, 제가 디딘 터전을 곰곰이 헤아리겠지요. 마음밭을 조금도 못 일군다면 아무리 좋다는 책을 읽혀 지식을 많이 쌓았어도 제 몸과 마음을 느끼지 못하고 제 이웃을 있는 그대로 못 살피며, 제가 디딘 이 나라 삶터를 꿰뚫어보는 눈길 또한 기르지 못하리라 봅니다.

 

 

.. 아옌데 정부는 지나칠 만큼 표현의 자유를 허용했고, 역사에서 유례가 없을 만큼 많은 자유를 보장했다. 우익은 자기들이 탄압 속에 놓여 있으며 칠레의 언론 자유는 위기에 처해 있다고 허위 사실을 주장하며 국제적인 선전활동을 했다. 아옌데 정부는 그것을 막지 못했다 … 사회주의 정부 때문에 일어난 일 가운데 하나가 굶주림이라는 것을 상징하기 위해서 부인네들이 모두 나무숟가락으로 빈 냄비를 드럼 치듯 두들기면서 행진을 벌이는 것이었다. 그 행진은 완벽하게 준비가 잘 되어 있었다. 바리오 알토에서 카드놀음이나 하던 게으른 야회복 차림의 여자들이 드디어 할 일을 발견했던 것이다 … 이들은 자기 집 냉장고 안에 값비싼 식료품을 가득 채워 놓고 살면서 평생 동안 냄비라고는 한 번도 제 손으로 건드려 보지도 않았을 것이다. 아주 잘 차려입고 살이 많이 찐 부인네도 이번에는 자기들의 특권인 안락한 생활을 잃게 될지도 모른다는 현실적인 위험을 깨닫게 된 것 같았다. 그러나 영양실조로 충분히 자라지 못해서 왜소한 자기 자식들을 보거나, 진짜 굶주림이 어떤 것인지를 잘 알고 있는 아낙네들 눈에 그들의 모습은 구역질이 나고 모욕적으로까지 느껴졌다 … 이제 반대 세력들은 민주적인 절차로는 아옌데를 쫓아낼 희망이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  (316, 322∼323, 380쪽)

 

 아이는 공무원이 될 수 있습니다. 월급쟁이 공무원이 될 수 있고, 훌륭한 공무원이 될 수 있습니다. 아이는 농사꾼이 될 수 있습니다. 슬기로운 농사꾼이 될 수 있고, 풀약과 비료를 듬뿍 치는 농사꾼이 될 수 있습니다. 아이는 글쟁이나 사진쟁이가 될 수 있습니다. 돈이 아닌 사람을 보고 이름이 아닌 자연을 보는 글쟁이나 사진쟁이가 될 수 있고, 사람 아닌 돈을 보며 자연 아닌 이름만 보는 글쟁이나 사진쟁이가 될 수 있습니다.

 

 옆지기하고 저는 우리 아이가 무슨 일을 하든 저 스스로 즐겁게 찾기를 바랍니다. 우리 몫은 아이가 튼튼하고 맑은 마음을 착하게 가꾸면서 제 몸마음과 이웃 몸마음을 한결같이 사랑할 수 있도록 손길을 내미는 데에 있다고 느낍니다. 어떠한 정치니 사회니 교육이니 종교니 문화니 예술이니 과학이니를 떠나, 아이가 나중에 대통령이나 시장을 누구를 뽑도록 이끌어야 하느니를 떠나, 우리는 우리 깜냥껏 우리 앞일을 옳고 바르게 내다보는 삶을 붙잡아야 하며, 아이는 아이 깜냥껏 아이 앞일을 환하고 싱그럽게 내다보는 삶을 껴안아야 한다고 느낍니다.

 

 (3) 《끝나지 않은 노래》에서 《빅토르 하라》로

 

 1988년에 《끝나지 않은 노래》라는 책이 나왔습니다. 그 뒤 스무 해가 지난 2008년에 《빅토르 하라, 아름다운 삶 끝나지 않은 노래》가 나옵니다. 조안 하라 님이 쓴 《끝나지 않은 노래》는 제법 입소문을 탔다고는 하나, 새책방에서든 헌책방에서든 애물단지처럼 잘 안 팔리는 책이었습니다. 읽는 사람이 드물었고, 읽고 즐겁게 삭여내는 사람은 훨씬 드물었습니다.

 

.. 그는 내가 마음의 긴장을 늦추고 서서히 녹아서, 과거에 대한 고통스러운 강박관념으로부터 스스로 해방되도록 도와주려고 애썼다 … "내 사랑이여, 너무 두려워 말아요. 우리가 유일하게 두려워해야 할 것은 서로가 깊이 이해할 수 없게 되거나, 서로의 소박한 마음을 발견할 수 없게 되는 것뿐입니다 … 나는 가슴으로 살아가지, 머리로 살아가지 않습니다." ..  (113, 133쪽)

 

 돌이켜보면, 1988년에 처음 나온 《끝나지 않은 노래》는 아주 알맞춤하게 나온 책이었습니다. 1980년대를 국민학생과 중고등학생으로 보낸 저로서는, 1980년대 이때만큼 대중노래와 민중노래가 엄청나게 터져나오며 싱그럽고 아름다운 때는 다시금 없었다고 느끼고 있기 때문입니다. 남자 가수든 여자 가수든, 노래패를 이룬 사람들이든, 발라드든 트로트든 락이든 메탈이든 푸짐하게 넘쳐나던 노래가 아니었느냐 싶습니다. 군부독재 정권이 우리들을 세 가지 에스라는 허울로 쌈싸먹기하려고 노래 문화를 제법 풀어놓았는지 모르지만, 이러하든 저러하든 '제도권 안팎'으로 노래문화와 노래운동은 이때 비로소 봇물이 터지면서 우리 모두를 흐뭇하게 보듬어 주었다고 느낍니다. 그래서, 이러한 노래물결이 치는 가운데 《끝나지 않은 노래》 같은 책은 훨씬 더 잘 읽힐 수 있었고, 이 책에 담긴 목소리와 이야기는 노래판 사람들뿐 아니라 노래를 좋아하는 사람들과 세상을 아름답게 가꾸고픈 사람들한테 남다른 빛줄기로 스며들 수 있지 않았으랴 생각합니다.

 

 그런데 1980년대에는 노래는 노래대로 봇물이 터지고, 책은 또 책대로 봇물이 터졌습니다. 1970년대까지 꽁꽁 틀어막혀 있던 울타리를 어느 만큼 풀어 놓자, 노래뿐 아니라 갖가지 책들이 어마어마하게 쏟아져 나오면서, 《끝나지 않은 노래》 같은 책한테까지 눈길을 뻗치고 손길을 내밀어 마음길로 받아먹는 분은 퍽 드물었습니다.

 

.. 1965년, 칠레 북부 지방의 엘살바도르시에서 광부들과 그 가족들을 학살하는 데 사용된 무기들이 '미국 원조'에 의해 제공되었던 것처럼, 시위 진압을 위해 훈련된 칠레의 특수경찰 부대 '그루포 모빌' 역시 그 장비나 전술을 오로지 미국에 의존하고 있었다. 파나마를 비롯한 라틴아메리카의 여러 지역에 훈련소가 세워졌다. 거기에는 라틴아메리카 군대의 장교나 하사관들, 경찰들이 차출되어 와서 국내의 반란, 혁명, 또는 반체제 분자들을 저지하기 위해 자기네 국민들과 맞서 싸우도록 교육을 받았고, '내부의 적'이라는 개념을 갖도록 세뇌되었다 … 대중매체들은 '미국식 생활방식'을 선전하느라 정신이 없었고, 신문 판매대에는 싸구려 미국 만화들이 판을 쳤다. 라디오에서는 온통 미국 팝송들이 쏟아져 나왔고, 텔레비전에는 미국의 삼류 멜로드라마들이 가득했다. 영화관들까지도 헐리우드의 3류 영화들만 상영하고 있었다. 가장 가난하고 가장 심하게 수탈당하는 사람들일수록 생활에서 라디오가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런 선전에 영향을 많이 받을 수밖에 없다 … 칠레는 아직도 피노체트 집권 시기에 만들어진 헌법에 묶여 있다. 그 헌법에 따르면 상원은 국민에 의해 선출되지 않는 임명직 상원의원들이 차지하고 있고, 그들 중에는 군사쿠테타 당시에 피노체트의 '동지'였던 퇴역 장군들이 포함되어 있다 … 피노체트 정권을 통해서 엄청난 재산을 긁어모은 것은 피노체트의 소수 지지자 그룹뿐이다. 그들은 민주주의 제도의 견제를 전혀 받지 않는 이른바 자유시장 경제 체제를 통해 이익을 거둬들였다 … 증오를 품고 계속 살아간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지만, 아무도 용서를 구하는 사람이 없고 뉘우치는 기미조차 보여주지 않는 마당에 그런 범죄를 용서한다는 것도 불가능한 일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다. 칠레는 아직도 극도로 양분된 나라이다 ..  (224, 226, 481∼482쪽)

 

 2000년대 오늘날은 어떠할까 모르겠습니다. 피노체트를 독재자라고 말할 수 있고, 우리 나라 옛 대통령 가운데 한 사람인 박정희 님이 일으킨 '5ㆍ16'은 달력에서 아예 기념일로조차 들어가지 못하고 있는 2000년대 오늘날 우리 삶터는 《빅토르 하라, 아름다운 삶 끝나지 않은 노래》를 얼마나 읽어낼 수 있을까 모르겠습니다. 박정희를 독재자라고 버젓이 외칠 수 있고, 꽤 많은 '박정희 지지자'들조차 "그래, 당신들 말마따나 박정희는 독재자였다. 그렇지만 우리가 먹고살게 이러쿵저러쿵" 하고 말할 만큼, 우리 말길은 아주 조금 트였습니다. 이러한 우리 2000년대 오늘날은 《빅토르 하라, 아름다운 삶 끝나지 않은 노래》를 읽을 만한 터전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이러한 2000년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은 먹고살기 바쁜 짬을 내고, 돈벌기 고단한 하루하루를 덜어내며 만팔천 원짜리 두툼한 인문책 하나를 가슴에 꼭 부둥켜안으면서 눈물콧물 질질 짤 마음밭이 마련되어 있을까요?

 

 

.. "힘들여서 개인의 영광을 쫓거나 순진하고 순수한 사람들한테서 이익을 얻는 가수들은, 노래란 자갈돌을 씻어내리는 물과 같으며 우리들을 깨끗하게 해 주는 바람과 같으며 우리를 하나로 만들어 주는 불과 같은 존재라는 것을 결코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그리고 그 노래가 우리 안에 살아 있을 때 우리가 더 나은 사람들로 변화되리라는 것도 모를 것이다." ..  (397쪽)

 

 511쪽짜리 《빅토르 하라, 아름다운 삶 끝나지 않은 노래》는 지난날과 견주면 꽤 많은 매체에서 소개글을 써 주고, 칭찬을 해 주었습니다. 책이 새로 나온 지 어느덧 한 해가 다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 책은 아직 1쇄가 다 팔리지 않았습니다. 2009년이 가기 앞서 2쇄를 찍을 수 있을는지 없을는지 아리송합니다. 《빅토르 하라, 아름다운 삶 끝나지 않은 노래》 1쇄에는 오탈자가 꽤 많아, 이 잘잘못을 하나하나 바로잡아 주어야 합니다. 저는 이 책을 읽는 동안 삼백 군데가 넘는 곳을 짚어냈는데, 더 많이 짚어낸 분이 있다고 합니다.

 

 다만, 이런저런 오탈자가 꽤 많기는 해도(좀 지나치게 많습니다), 빅토르 하라와 조안 하라 두 가시버시가 독재정권 칠레를 민주정권 칠레로 뜯어고치는 길에 어떻게 힘을 모두고 애썼는가 하는 줄거리를 톺아보는 데에는 걸림돌이 되지 않습니다. 하루빨리 1쇄가 다 팔리고 2쇄를 찍는 기쁨을 맛보며 이런저런 자질구레한 말마디를 바로잡을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덧붙이는 글 | 글쓴이 인터넷방이 있습니다.

[우리 말과 헌책방 이야기] http://hbooks.cyworld.com
[인천 골목길 사진 찍기] http://cafe.naver.com/ingol


빅토르 하라 - 아름다운 삶, 끝나지 않은 노래

조안 하라 지음, 차미례 옮김, 삼천리(2008)

이 책의 다른 기사

노래여, 무기여!

태그:#빅토르 하라, #책읽기, #칠레, #노래운동, #인문책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우리말꽃(국어사전)을 새로 쓴다. <말꽃 짓는 책숲 '숲노래'>를 꾸린다. 《쉬운 말이 평화》《책숲마실》《이오덕 마음 읽기》《우리말 동시 사전》《겹말 꾸러미 사전》《마을에서 살려낸 우리말》《시골에서 도서관 하는 즐거움》《비슷한말 꾸러미 사전》《10대와 통하는 새롭게 살려낸 우리말》《숲에서 살려낸 우리말》《읽는 우리말 사전 1, 2, 3》을 썼다.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