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깊은 가을의 하늘 아래 직장생활 5년차 기로에 서다

가을하늘의 청량함이 싱그러움을 뿜어내고 있었다. 백지장에서 직장생활 5년차를 시작하기 딱 좋은 날이라 여겨졌는데. 몇 달 동안 벼르던 산행의 날이다. 이직이냐 묻지마 퇴직이냐. 산에 오르면 결론이 나겠지. 내심 은근슬쩍 산의 태도로 갈아탈 요행수를 기대했다. 그래, 면벽보다는 108배참선이 낫겠다 싶어 고행길을 선택했다.

그렇다면 어떤 산을? 어느 코스로 등반할 것인가 하는 문제가 남아 있었다. 고민하던 찰나, "오예. 왕건이다." 고맙게도 읽던 책에 해답이 보였다.

우연히 발견한 한비야식 북한산 등반 코스

한비야 저, 그건사랑이었네에서 찾은 북한산 등산로
▲ 우연히 발견한 등산로 추천글! 아싸! 가오리! 한비야 저, 그건사랑이었네에서 찾은 북한산 등산로
ⓒ 허연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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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비야가 지은 <그건 사랑이었네>에서 북한산 등반로 추천코스를 우연히 발견한 것이다. 올타쿠나! 이것이구나! 그런데 순간 스치는 두 번째 생각. 조금만 야근한 다음날 낮 12시 전에 깨지도 못하는 저질체력인 내가 구호단체 팀장인 한비야씨를 따라할 수 있을까. 힘들면 중간에 내려오자는 심산으로 두 번째 고민도 가볍게 털어버렸다. 자, 이제 산행이다.

시작은 좌충우돌, 묻고 또 물어 형제산매표소에 우여곡절 끝에 도착

서울 평창동에는 예능교회가 3곳이 있다. 포털사이트 지도서비스를 검색하면서 한비야씨가 야속해지기 시작했다. 그러나 가르쳐 준 사람도 예능교회가 3곳이나 있을지 아셨겠소. 완벽한 등반코스를 알려주셨는데 고마워하지 못할 망정, 원망으로 야속해 하다니 도움받는 사람의 태도가 아닌지라 꾹 참고 차근히 입장로를 찾아보기 시작했다.

출발은 경복궁역에서 3번 출구로 나와 1711 버스를 탔다. 출발 시각은 오전 10시 50분. 약 15분쯤 달렸을까, 한국일보사 앞에서 내렸다. 길 건너 맞은편에 GS칼텍스 주유소와 으리한 3층 건물의 갈비집 사이로 이정표가 보인다. 예능교회다. 찾았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한비야씨가 알려줬던 그 예능교회는 아니었다. 3곳의 예능교회 중 하나인 것이다. 형제봉매표소로 갈 길을 묻는 입 동냥, 택시까지 잡아타고 버스 한 정거장을 더 지나서야 또 다른 주유소 옆길로 예능교회 이정표가 보인다. 스위스 레스토랑을 오른쪽에 끼고 오르막을 올라, 길가 부동산 집에서 형제봉매표소 가는 길이라는 확인사살이 끝난 후에 가벼운 발걸음이 허락되었다. 아, 이제 찾았구나!

형제봉매표소에자리잡은 마지막화장실. 사뭇 비장하다.
▲ 마지막화장실 형제봉매표소에자리잡은 마지막화장실. 사뭇 비장하다.
ⓒ 허연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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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위스레스토랑, 강남동태찜을 오른 쪽에 두고 오르막을 올라 갈림길에서 선지수도원 방향으로 우회전해 올라가면 형제봉매표소에 5분 안팎으로 도착할 수 있다. 1711을 이용하려는 산악인들은 한국일보사 다음 정거장인 벽산평창힐스아파트에서 내리면 될 듯하다. 북악터널을 지나지 않아 스위스레스토랑을 찾을 수 있다. 매표소 입구에서 마지막 화장실을 이용해야 한다. 형제봉까지 올라가는 데 화장실은 정말 없었다.)

참고로 매표소에서 돈을 받지 않는다. 매표소란 이름 때문에 필자도 헷갈렸었다.

형제봉 등반으로 숨이 찰 정도로 쫓아오는 산세 절경에 중독되다

여기에서는 선지수도원 방향으로 우회전
▲ 갈림길 여기에서는 선지수도원 방향으로 우회전
ⓒ 허연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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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산은 꽤나 잘 만들어진 등산로라 산악인들 사이에서도 칭찬이 자자하다. 게다가 한비야씨가 추천한 형제봉으로 시작하는 코스는 능선을 따라 움직이기 때문에 아름다운 풍경이 숨찰 듯이 등정 내내 쫓아온다. 형제봉을 오르는 코스는 생각보다 난코스이다. 다리를 심하게 찢어서 바위를 타야 한다. 평탄한 청계산 정도로 생각했으면 마음가짐을 조금 더 하시기 바란다. 콤파스 길이가 짧은 나로썬(*산길에서 만난 아주머니들이 웃으시며 다리 길이를 콤파스로 비유하신 건 지금 생각해도 재미있다) 형제봉 등반은 다소 무서웠지만, 오르고 난 후 산이 허락한 절경에 묘하게 중독된 듯하다.

한비야씨가 추천해준 형제봉/일선사 입구/대성문/대남문/암문/비봉/향로봉/불광사 입구(5~6시간 코스)는 초행자에게는 무리가 있어 보인다. 대성문 입구 쪽에서 절경을 병풍삼아 김밥 도시락을 먹으며 쉬던 시간이 오후 1시, 한시간여 휴식을 취하고 2시쯤 하산을 시작해 국민대 쪽으로 산을 다 내려오니 2시 40분이다. 내려오는 시간은 훨씬 짧다.

버티려고 버텨지는 것이 아니라 하다 보니 버텨지더라

여기에서 선지수도원 방향으로 우회전
▲ 갈림길 여기에서 선지수도원 방향으로 우회전
ⓒ 허연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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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는 통통하고 귀여운 캐릭터와는 싱크로율이 매우 높다.
▲ 귀여운불상과조우도하고.. 필자는 통통하고 귀여운 캐릭터와는 싱크로율이 매우 높다.
ⓒ 허연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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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을 정복하거나 도전하고자 하는 마음이 컸다면 그 부담감에 중간중간 깊은 절벽과 벼랑들에 더 호되게 두려워했을 것이다. 짧은 등반길에 무슨 철학이 이리도 깊었는가 싶었겠지만, 산은 그냥 산대로 있었고 나는 산에 몸을 맡긴 채 겸손하게, 겸허하게 산이 보여주는 절경에 감사하며 올랐던 것이 내가 할 수 있는 그리고 산에게 배울 수 있는 실천하는 철학이었다. 사회생활도 직장생활도 이 같은 것 아닐까. 작고 큰 고비 하나하나 민감하게 반응하기 보다는 흘러가는 데로 내 몸과 마음을 다해 업무에 집중하다 보면 어느 샌가 멋진 절경도 허락되고 쉼도 주어지는 것이 아닐까.

버틴다고 버텨지는 것이 아니라 하다보면 버텨지는 것일 터. 어떤 선택을 하게 되든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지금의 일들을 성심껏 해내고 중간중간 힘들면 어깨에 맨 짐들을 내려놓고 김밥도시락을 먹고 또 올라가면 될 것을 무엇을 그리 아둥바둥 내려놓지 못 하고 있을까. 이번 등반이 불광사까지는 어려우면 다음에 체력을 더 보강해 올라가면 되는 것처럼 인생이라는 긴 여정에서 지금 내가 이직/퇴직을 고민하는 것은 그리 큰 문제가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마지막으로, 징징거리며 입으로 산행했던 나를 앞에서 뒤에서 끌어주며 행복한 시간을 함께 해준 사람에게 감사드린다. 사랑하는 사람과 산이 있어서 풍요로운 하루였다. 오는 주말에는 아침에 조금 더 일찍 서둘러 대성문 너머로도 가보겠다고 다짐해 본다.



태그:#북한산, #형제봉, #한비야, #가을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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