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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성문화원(원장 전용택)에서는 오는 21일부터 지방문화원특성화사업인 '홍성'굿'페스티발' 일환으로 연말까지 임진왜란기 내란을 평정한 청난공신 특별기획사진전을 홍성문화원 2층 전시실에서 연다.

 

'亂中에 亂을 만나다'라는 주제로 열리는 특별기획사진전은 임진왜란 중에 충청도 홍산에서 일어나 홍주(홍성)로 진격하였던 이몽학의 난과 이를 진압한 홍주목사 홍가신을 비롯한 청난공신들에 대한 전시회다.

 

1596년 7월 충청도 홍산의 무량사에서 시작된 이몽학의 난은 규모도 결코 작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의병장 김덕령과 고경명, 곽재우 그리고 서애 유성룡의 연루설까지 제기되는 등 적지 않은 파장을 남겼던 일대 사건이었지만, 그동안 학계나 일반에 크게 알려지지 않았다. 그러나 최근 충청남도역사문화연구원(원장 변평섭)에서 관련 유물들을 모아 기획전을 개최하고, KBS 대전총국과 관련 다큐멘터리를 제작하는 등 이를 알리고 재평가하는 작업들이 이루어졌다.

 

이번 특별기획전은 이몽학의 난의 중심에 있었던 홍주(홍성)에서 잊어진 역사적 사실과 인물을 재조명하는 데 의의가 있다.

 

당초 홍성문화원에서는 청난공신의 주요 유물들도 함께 전시하고자 하였으나, 대부분의 유물들이 문화재로 지정되었거나 충남과 충북, 전북 각지의 종가나 박물관 등에 분산되어 있어 한 자리에 모으기에 어려움이 많아 관련 유물 사진을 충청남도역사문화연구원으로 부터 제공받아 전시하고, KBS대전총국에서 제작한 다큐멘터리를 상영하는 것으로 대신하게 된 것이다.

 

 

이번에 소개되는 주요 사진자료로는 ▲청난공신 1등에 녹훈된 홍가신의 영정 2점과 공신교서, 추증교지(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310호), 분재기, 증시교지(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310호), 제기(祭器) ▲청난공신 2등에 녹훈된 최호의 무과급제교지, 함경도병마절도사에 임명되면서 받은 유서, 충청수사 고신교지, 삼인보검(군산시 향토문화유산 제2호), 노비사패교지 ▲청난공신 2등에 녹훈되었다가 광해군 즉위 후 임해군을 왕으로 추대하였다가 역적으로 몰려 훈적에서 삭제되고 영정 등이 모두 불태워져 유물이 남아 있지 않은 박명현 관련 광해군 일기 ▲청난공신 3등에 녹훈된 신경행의 영정(충청북도유형문화재 제155호)과 보물 제1380호로 지정되어 있는 공신교서ㆍ유서ㆍ시호 서경단자ㆍ증시교지ㆍ시장, 신경행의 시문을 모아 간행한 시문집인 조은선생문집, 신경행을 제향한 군방서원의 각종 현판 ▲청난공신 3등에 녹훈된 임득의 장군의 영정과 추증교지, 문인석 등이 있다.

 

이 가운데 홍가신과 임득의의 영정, 홍가신 공신교서 등은 문화재로 지정되기에 충분한 가치가 있다고 평가되고 있으며, 충청남도역사문화연구원측에서 향후 문화재 지정을 추진하는 등 후속사업을 계획 중이라고 밝혔다.

 

이몽학의 난을 진압한 청난5공신

 

이몽학의 난을 진압한 5명의 공신들에게는 1604년 청난공신(淸難功臣)이라는 공신호가 하사되었다. 이들은 홍주목사 홍가신(洪可臣)을 중심으로 하여 1596년 7월 10일 홍주성을 공격하는 이몽학의 반란군에 맞섰다. 이때 홍주에 사는 무장 임득의(林得義)·박명현(朴名賢)·전병사(前兵使) 신경행(辛景行) 등은 홍주성에 들어가 홍가신을 도왔고, 남포현감 박동선도 변란 소문을 듣고 충청수사 최호(崔湖)와 상의 끝에 군사를 이끌고 원병 합세하였다.

 

홍주성 공격에 실패한 이몽학 무리들은 어둠을 틈타 청양까지 도망을 하였고 김경창(金慶昌), 임억명(林憶明), 태척(太斥) 등 3인이 이몽학의 목을 베어 가지고 와서 항복함으로써 이 반란은 끝이 났다.

 

난이 진압된 후 몇 년 동안, 난을 진압한 공신들에 대한 포상논의가 계속되다가 1604년(선조 37년)에 공이 큰 5명을 청난공신으로 봉하게 되었다. 1등은 홍가신, 2등은 박명현·최호,  3등은 신경행·임득의로 결정되었다.

 

백월산 산신이 된 홍가신

 

홍가신(洪可臣, 1541~1615)의 본관은 남양(南洋)이고, 자는 홍도(興道), 호는 만전당(晩全堂)․간옹(艮翁), 시호는 문장(文狀)이다. 서애 류성룡, 충무공 이순신과 어린 시절을 함께 보냈으며, 이순신과는 사돈이 된다.

 

1571년(선조 4)에 강릉참봉(康凌參奉)으로 출사하여 여러 관직을 거쳐 1594년에 홍주 목사로 부임하였다. 1596년에 일어난 이몽학의 난을 평정한 공으로 1604년 청난공신 1등에 책록되었고, 이어 영원군(寧原君)에 봉해졌다. 저서로 『만전집(晩全集)』과 『만전당만록(晩全堂漫錄)』등이 있고, 아산의 인산서원(仁山書院)과 온양의 정퇴서원(靜退書院)에 배향되었다. 옛 홍주목 진산(鎭山)인 백월산(白月山) 정상에 위치한 청난사에서는 5공신을 제사했던 것으로 보이는데, 후대로 가면서 홍가신 자신이 산신(山神)으로 추앙되어 주민들이 매년 정월에 제사를 받들고 있다.

 

충남 아산시 염치읍 대동리 황골에는 홍가신 종택과 묘소, 사당 등 유적이 남아 있다. 또 홍가신의 추증교지와 시호교지, 부친인 홍온의 추증교지와 어머니, 부인의 증직교지 등 5점은 충청남도문화재자료 제310호로 지정되어 보존되고 있다. 이 외에도 홍가신 청난공신녹권과 홍가신의 신주를 모시던 요여 등이 남아 있다.

 

 

 

 

정유재란의 명장, 최호

 

최호(崔湖, 1536~1597)의 본관은 경주(慶州)이고, 자는 수천(秀天), 시호는 충원(忠元)이다. 1574년(선조 7) 무과에 급제하고, 1576년에는 무과중시에 장원하였다. 이후 여러 관직을 거쳐 1596년에 충청도수군절도사에 임명되었다. 그 해 7월 이몽학이 반란을 일으키자 홍주목사 홍가신과 함께 주장(主將)이 되어 홍산․임천 등지에서 반란군을 소탕하여 공을 세웠다. 이듬해에 정유재란이 일어나자 칠천량해전에서 왜군과 싸우다가 원균(元均)과 함께 전사하였다.

 

1604년 이몽학의 난을 평정한 공으로 청난공신(淸難功臣) 2등에 책록되고, 1615년(광해군 7) 찬집정(撰集廳)의 주청으로 호종원종공신록에도 추록되었다.

 

전라북도 군산시 개정면 발산리에 있는 최호장군 유지(遺址)는 전라북도기념물 제32호로 지정되어 보존되고 있다.

 

 

공신에서 역적으로... 잊혀진 청난공신, 박명현

 

박명현(朴名賢, ?~1608)은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본관은 죽산(竹山)이고, 연성부원군(延城府院君) 원형(元亨)의 후손이다. 무과에 합격하여 무장이 되었으며,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선조를 호종하고 왜적을 물리치는데 공을 세웠다.

 

1596년(선조 29) 이몽학이 충청도 홍산에서 반란을 일으켜 여러 고을을 함락하고 홍성으로 진격하자, 홍주성으로 달려가 목사 홍가신(洪可臣)을 도와 홍주성을 지켰다. 이몽학이 포위망을 뚫고 달아나자 무장 임득의(林得義)와 함께 청양까지 추격하여 반란을 평정하였다. 이듬해 정유재란 때에는 토포사․충청도방어사․전라도병마절도사 등의 요직을 거치면서 호서․호남 일대에서 공을 세웠다.

 

1604년 이몽학의 난을 평정한 공으로 청난공신(淸難功臣) 2등에 책록되고 연창군(延昌君)에 봉하여졌으며, 품계는 가선대부(嘉善大夫)에 이르렀다.

 

그러나 1608년 선조가 죽고 광해군이 즉위하자 무장 고언백(高彦伯) 등과 함께 임해군(臨海君)을 왕으로 추대하였다는 죄목으로 잡혀 문초를 받던 중 사망하였다. 그 해 11월에는 훈적(勳籍)에서도 삭제되고, 회맹록(會盟錄)과 교서축(敎書軸), 공신녹권(功臣錄券) 등도 모두 환수되었으며, 영정(影幀)도 불태워져 현재 남아 있는 유물이 없다.

 

혼탁한 조정을 버리고 은거한 신경행

 

신경행(辛景行, 1547~1623)은 조선중기의 문신으로 본관은 영산(靈山), 자는 백도(伯道), 호는 조은(釣隱)이다. 1573년(선조6) 진사시에 합격하고, 1577년(선조10) 문과에 급제하였다. 1592년에 한산군수가 되었고, 1596년에 충청도순찰사의 종사관이 되었다. 이때 충청도 홍산에서 이몽학의 난이 일어나자 홍주목사 홍가신을 도와 난을 진압하는데 공을 세웠다. 다음해에 군자시정(軍資寺正)이 되었고, 1604년에 청난삼등공신(淸難三等功臣)에 책록되고 영성군(靈城君)에 봉해졌다.

 

1608년(광해군 즉위년) 충청도병마절도사를 지냈으나 광해군의 폭정으로 조정이 혼란해지자 벼슬을 버리고 고향은 청안으로 낙향하였다. 죽은 뒤에 예조판서에 증직되었고, 시호는 '충익(忠翼)'이다. 충북 괴산의 군방서원(群芳書院)에 제향되었다.

 

청난공신교서(淸難功臣敎書)를 비롯하여 유서(諭書), 시호서경(諡號署經), 증시교지(贈諡敎旨) 등 관련유물 8종 9점이 보물 제1380호로 지정되었고, 현재 국립청주박물관에 기탁보관 중이다.

 

호서 무반 명문가 임득의

 

임득의(林得義, 1558~1612)의 본관은 평택(平澤)이고, 자는 자방(子房)으로 부사 임식(林植)의 아들이다.

 

1596년(선조 29) 7월, 이몽학이 반란을 일으키자 박명현·최호·신경행 등과 함께 홍주목사 홍가신을 도와 난을 평정하는 데 공을 세워 1604년 청난공신 3등에 책록되고 평성군(平城君)에 봉해졌다.

 

이후 충청도 수군우후, 경상우도 병마절도사를 역임하였으며, 1647년(인조 25)에는 아들인  임전(林傳)의 공으로 숭정 대부 의정부좌찬성 겸 판의금부사 오위도총부도총관 지훈련원사에 추증되었다.

 

홍성군 서부면 판교리에 영정을 모신 정충사와 묘소가 있으며, 묘소 앞에는 1917년에 김복한(金福漢)이 비문을 찬한 신도비가 세워져 있다. 영정과 문인석, 추증교지 등 관련 유물이 충청남도역사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덧붙이는 글 | 관내 주재기자에게 보도자료로 제공함


태그:#청난공신, #홍성문화원, #홍성내포축제, #홍성군, #충남역사문화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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