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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버드 스퀘어에서의 황홀

몇 년 전, 보스턴의 하버드 야드Harvard Yard(유독 하버드대학만이 캠퍼스가 아니라 야드로 불린다)를 방문했습니다. 와이드너 도서관The Harry Elkins Widener Memorial Library를 방문해서 이 야드 안에 90개 이상의 부속도서관에 장서가 약 1350만 권에 달하고, 연간 도서 구입비가 275억 원이라는 하버드 측의 설명을 듣고 교문을 나왔습니다. 와이드너 도서관은 방대한 하버드 도서관 시스템의 중심에 해당합니다. 이 도서관만 해도 50마일에 달하는 서가에 320만권의 장서를 보유하고 있답니다.

와이드너 도서관The Harry Elkins Widener Memorial Library
 와이드너 도서관The Harry Elkins Widener Memorial Library
ⓒ 이안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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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하버드 야드를 나서고도 그 교문 앞, 하버드 스퀘어Harvard Squire를 배회하는 것을 멈출 수가 없었습니다. 거리에 어둠이 내리고서야 그곳을 떠날 수 있었습니다. 몇 개의 고풍스러운 서점 때문이었습니다.

1882년부터 영업을 했다는 하버드의 공식 서점, The Harvard COOP, 1932년에 개점한 Harvard Book Store 등 대형 서점이 여전히 자리를 지키고 있었습니다. 120년의 연륜을 가진 서점 품안에 있는 것 자체가 저를 황홀하게 했습니다. 서가마다 의자를 비치하고 전망 좋은 창가에 안락의자와 함께 책상을 두어 신간을 마치 개가식 도서관에서의 독서 마냥 편안한 마음으로 읽을 수 있도록 한 서점의 배려가 그 긴 세월만큼이나 아름다웠습니다.

The Harvard COOP 서점
 The Harvard COOP 서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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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Harvard COOP 서점의 내부 풍경
 The Harvard COOP 서점의 내부 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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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시티에서 하버드스퀘어의 황홀과 재회하다

열화당 신관의 파사드는 현란한 건축의 양태가 줄지어선 북시티의 다른 건물들에 비하면 차라리 소박했습니다. 뽐내지 않은 건물 안에 이렇게 멋진 책의 숲이 펼쳐져 있을 거란 생각은 하지 못했습니다. 유리문 안으로 얼핏 내부를 보았을 때 공간 가운데의 책상만이 보였습니다. 사무공간으로 알고 돌아서는 발걸음을 잡아준 것은 문을 열고 나온 젊은 청년이었습니다.

"열려 있습니다. 들어오셔도 됩니다."

내부에 들어가고서야 돌아서는 제발걸음을 잡아준 그 청년이 한 없이 고마웠습니다. 그가 아니었다면 전, 이런 가슴 뛰는 흥분을 경험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도서관Library+책방Bookshop’이 있는 열화당의 신사옥
▲ 열화당의 '도서관Library+책방Bookshop’이 있는 열화당의 신사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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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으로 한 발을 들여놓자 하버드대학 앞의 그 서점들이 제일 먼저 생각났습니다. 2층 높이의 벽면을 빼곡히 채우고 있는 책의 풍경은 차라리 장엄했습니다. 키 높은 책장을 가득 채운 책들은 내딛는 발걸음을 잡았습니다. 제 목에서는 그 흥분된 마음을 감추지 못하고 '꼴깍' 마른 침 넘기는 소리를 냈습니다.

열화당의 ‘도서관Library+책방Bookshop’ 새책공간
 열화당의 ‘도서관Library+책방Bookshop’ 새책공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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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화당의 ‘도서관Library+책방Bookshop’ 새책공간
 열화당의 ‘도서관Library+책방Bookshop’ 새책공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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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책공간을 지나면 옛책공간이 이어집니다. 그 공간에는 고서가 빼곡하게 정리되어 있고 유리진열장 속에는 희귀본 책들이 전시되어 있습니다.

열화당의 ‘도서관Library+책방Bookshop’ 옛책공간
 열화당의 ‘도서관Library+책방Bookshop’ 옛책공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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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층으로 오르면 블랙디스크로 재생하는 음악을 들을 수 있는 '음악공간'이 있습니다. 위층의 빈 벽과 아래층의 책상 위에는 작품이 전시되어 있습니다. '승지원 그림전'이었습니다. 예술가의 길을 가기로 '갓' 결심한, 그러나 그리는 것을 '오랫동안' 즐겨온, 상상력 풍부한 고등학교 3학년 학생의 전시였습니다. '地文Landscript'이라는 책을 열화당에서 막 출판한 건축가 승효상 선생님의 딸이라고 했습니다.

열화당의 ‘도서관Library+책방Bookshop’ 음악공간
 열화당의 ‘도서관Library+책방Bookshop’ 음악공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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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화당의 ‘도서관Library+책방Bookshop’ 새책공간에 전시된 승지원양의 그림들
 열화당의 ‘도서관Library+책방Bookshop’ 새책공간에 전시된 승지원양의 그림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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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밀한 곳에 위치한 다실은 안내받지 않고는 찾을 수 없습니다. 필시 강릉의 선교장 활래정活來亭에서 이름을 가져왔을 이 좁은 공간은 노출콘크리트의 모던한 건물 속에서 그윽하고 여유롭습니다. 활래정에서는 마치 연꽃으로 세속 잡사의 어지러운 기운이 씻긴 바람이 드나드는 선교장의 연못 정자에 앉은 듯 고요합니다. 입구의 활래정 현판이며 천장과 맞닿은 벽에 걸린 편액扁額들은 모두 이 공간의 크기에 맞추어 크기를 줄인 선교장의 레플리카replica들입니다.

열화당의 ‘도서관Library+책방Bookshop’ 에 위치한 숨어있는 다실,

활래정
 열화당의 ‘도서관Library+책방Bookshop’ 에 위치한 숨어있는 다실, 활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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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층에서 조각보의 방식으로 조화를 지어낸 단아한 삼베작품으로 살짝 가리어진 벽감壁龕 안을 들여다 보았습니다. 그곳에는 할머니와 할아버지의 작은 흑백사진 액자들이 나란히 놓였습니다. 쪽을 찐 머리를 가다듬는 흰머리의 할머니사진에 시선이 멈추었습니다.

열화당의 ‘도서관Library+책방Bookshop’ 의 새책공간에 위치한 벽감의 내부에 진열된 흑백 사진들
 열화당의 ‘도서관Library+책방Bookshop’ 의 새책공간에 위치한 벽감의 내부에 진열된 흑백 사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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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머니의 5mm 디테일

3년 전입니다. 일본의 조각가인 미츠아키 타나베 선생님이 모티프원에 오셨을 때입니다. 식물감각의 마숙현 선생님과 더불어 이기웅 사장님을 찾아뵈었습니다. 구관의 4층, 이 사장님의 방에서였습니다. 키친에서 손수 차를 끓여 내오셨습니다. 창문 너머 멀리 한강하류가 보였습니다. 그 하류의 하늘을 기러기가 날고 있었습니다.

열화당에서의 타나베선생님
 열화당에서의 타나베선생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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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공간이 참 적막합니다. 이렇듯 손수 차를 내려드시고, 홀로 이 공간에 계시면 적적하지 않으세요?"

서쪽으로 나는 기러기를 보면서 무심코 던진 저의 질문이었습니다.

"이제 홀로 가는 긴 여행을 준비해야지요. 이렇게 홀로 되는 연습을 하고 있습니다."

이 사장님은 어느 누구도 동반할 수 없는 피안으로의 여행을 말씀하셨습니다. 신관 3,4층에 들인 이곳 살림집으로 가족들이 이사 오기 훨씬 전의 일입니다.

열화당의 사옥 구관 4층에서 손수 차를 준비하시는 이기웅 사장님
 열화당의 사옥 구관 4층에서 손수 차를 준비하시는 이기웅 사장님
ⓒ 이안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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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나베 선생님을 비롯해 우리 일행은 이 사장님의 안내로 서점과 전시장 등 열화당의 사옥을 살피고 아시아출판문화정보센터로 장소를 옮겨 북시티의 탄생에 관한 얘기를 들었습니다.

북시티 내의 이탈리안 레스토랑 '다이닝 노을'에서 식사를 하면서도 많은 얘기를 했습니다.

"이 사장님께서 나고 자라신 강릉 열화당이 있는 선교장은 잘 관리되고 있지요?"

저는 얘기의 막간을 이을 요령으로 인사치레의 물음을 물었습니다.

"무슨 체험교육장 같은 곳으로 활용되고 있는데 반듯하지가 못해요."

저의 기대와는 전혀 다른 답변이었습니다.

"성에 차지 않는다는 말씀이군요?"

"집안에 제사가 많습니다. 어릴 적 제사를 모시는 날에는 며느리들이 모두 모여 정성껏 제상을 차렸습니다. 준비가 끝나면 할머니가 오십니다. 우리 눈에는 완벽하게 놓였다고 여긴 그 차림의 제기들을 할머니는 일일이 5mm쯤 돌려놓거나 1-2cm쯤 옮겨놓곤 했지요. 할머니 눈에는 그 1-2cm의 차이가 턱없이 커보였던 것입니다. 엉망입니다."

이 사장님은 할머니의 눈으로 지금의 선교장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5mm 혹은 1-2cm의 디테일이 성에 차지 않은 것이지요.

저는 이 사장님께서 말씀하시는 '할머니의 5mm 디테일'에 충분히 공감이 갔습니다. '거충거충'이 만연한 이 시대에 격조와 품격을 만들어내는 것은 바로 젊은 며느리들은 도저히 읽어낼 수 없는 그 할머니의 디테일이기 때문입니다.

아시아출판문화정보센터내의  이탈리안 레스토랑 '다이닝 노을'
 아시아출판문화정보센터내의 이탈리안 레스토랑 '다이닝 노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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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나절, 황홀한 책의 숲을 거닐다

지금의 북시티를 입안하고 구체적 실현을 견인해 오신, 출판도시문화재단 이사장이기도 하신 이기웅 사장님은 단순히 책을 기획하고 편집하는 책의 탄생지로서의 북시티를 넘어 '도서관으로서의 도시'를 꿈꾸고 계신 듯합니다. 이제 하드웨어의 구축이 끝나가는 출판도시에 어떤 콘텐츠로 풍요로울 수 있을지가 가장 큰 고민이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이 공간을 통해 그 전형을 제시하고픈 듯싶습니다. 이 사장님은 이 '도서관+책방'의 공간에 대해 이렇게 적었습니다.

"책이 놓이는 공간으로 작게는 사적인 성격의 개인 서재에서부터, 공공에게 개방된 도서관이나, 상품으로서 책을 판매하는 책방 등이 있다. 우리가 만들고자 한 공간은 이러한 여러 가지 성격이 하나로 통합된, 새로운 개념의 실험적 공간이었다. 다시 말해, 마흔 해 가까이 모아온 나의 소장본과 열화당 편집부 장서 중에서 선별된 책들을 정리, 분류하여, 그것을 열화당 직원들은 물론 출판도시 입주자들에게, 더 넓게는 이곳을 찾는 방문객들이 도서관처럼 열람할 수 있게 하며, 갖고 싶은 책이 있을 경우 구매할 수도 있는 책방의 기능을 겸비한다. 따라서 이 공간은 나의 공부방이자 편집부의 자료실이자 출판도시 편집자들의 도서관이자 모든 이들의 책방인 것이다."

열화당의 ‘도서관Library+책방Bookshop’ 의 셀프서비스 북카페
 열화당의 ‘도서관Library+책방Bookshop’ 의 셀프서비스 북카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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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이 만들어내는 정취에 반해 떨어지지 않는 발길을 겨우 돌려야 했던 하버드대학교 앞 서점의 경우처럼 열화당 신관 1,2층의, 가칭  '도서관Library+책방Bookshop'은 우연한 발길의 저를 이렇게 매혹시켰습니다. 그곳은 어느 누구에게나 열린 공간이기를 바라는 이기웅 사장님의 의도와는 달리 저 혼자만을 위해 아무에게도 소문내고 싶지 않은, '할머니의 5mm 디테일'로 가득한 책의 지혜와 품격이 가득한 고혹蠱惑한 공간이었습니다.

이기웅사장님께서 수집한 '소년'
 이기웅사장님께서 수집한 '소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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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모티프원의 블로그 www.travelog.co.kr과 홈페이지 www.motif1.co.kr에도 함께 포스팅됩니다.



태그:#북시티, #열화당, #이기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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