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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이름 : 수화로 말해요

- 글ㆍ그림 : 아키야마 나미, 가메이 노부다카

- 옮긴이 : 서혜영

- 펴낸곳 : 삼인 (2009.8.14.)

- 책값 : 11000원

 

 (1) 사랑으로 말해요

 

 북미 대륙에서 조용하게 살아가고 있는 아미쉬 마을 사람들 이야기를 <단순하고 소박한 삶>(리수,2009)이라는 책에서 읽었습니다. 이제까지 우리 나라에 알려진 '아미쉬 이야기'는 조각조각일 뿐, 이처럼 우리 눈썰미로 아미쉬 마을을 어깨동무하면서 풀어낸 이야기책은 없었습니다. 그래도 저는 헌책방마실을 하면서 나라밖에서 나온 몇 가지 '아미쉬 이야기' 책을 찾아 읽을 수 있었습니다. 다만, 이들 두레마을 얼거리와 삶을 책 몇 권을 훑으며 돌아보면서, 좀더 낱낱이 알기가 쉽지 않아 아쉬웠습니다.

 

 이번에 나온 책을 찬찬히 읽으며, 이들 아미쉬 삶은 더없이 '오래된' 틀을 지키고 있으면서 '잘잘못을 함께 껴안고' 있음을 느낍니다. 문명을 거스른다기보다 '제 삶을 고스란히 지킨다'는 생각으로 살아가는 이들 아미쉬 마을에는 예배당이 없고 전기가 없으며 자동차와 텔레비전과 전화와 인터넷과 컴퓨터 모두 없습니다. 성경이나 사제나 전도사 또한 없습니다. 스스로 걷는 길이 옳다고 여겨도 굳이 당신 이웃한테 당신들 믿음을 퍼뜨리려 하지 않습니다. 그러면서 당신들 딸아들이 아미쉬 마을에 남지 않겠다고 하면 스스럼없이 떠나보냅니다. 그저, 다시 받아들이지는 않습니다.

 

 흔히 말하는 탄소발자국으로 치자면, 아미쉬 마을은 놀랄 만큼 푸른빛입니다. 지하자원을 다른 데에서 캐내지 않으며, 지하자원을 얻으려고 전쟁무기를 갖추어 싸우지 않습니다. 자동차를 몰지 않으니 굳이 새로운 물건을 밖에서 사 오지 않습니다. 먹을거리와 입을거리는 모두 손수 마련합니다. 가게에서 사는 옷이란 없고, 집 또한 손수 짓습니다. 기름을 쓰지 않으니 기름값이 치솟든 말든 아랑곳하지 않습니다. 텔레비전을 안 보고 인터넷을 열지 않으니 시시콜콜 자질구레한 세상일에 얽혀들지 않습니다.

 

 이와 같은 삶은 어느 모로 본다면 따분할 수 있습니다. 사람들이 흔히 하는 말에 '산에 가서 혼자 살아라' 하는 그 말대로 살아갑니다. 오늘날 우리 나라 시골에서도 텔레비전과 전기와 자동차 없이 살겠다고 하면 '미친놈'이라 여기거든요. 그러나 안타깝게도 한국땅에서는 '혼자 살 만한 임자 없는 산'이 없고, 섣불리 산에 들어가 홀로 살려고 하면 법을 어긴 사람이 됩니다.

 

 예배당이며 성경이며 사제이며 없는 아미쉬 마을이지만, 집집마다 돌아가며 예배를 본다고 합니다. 집집마다 이웃이 다 함께 모여서 함께 예배를 볼 때에는 '마을에서 함께 보는 성경을 비로소 꺼내어 읽'고는 도로 제자리에 놓으며, 여럿이 모인 자리는 밥을 한 끼니 나누어 먹고 마친다고 합니다. 그렇지만 이렇게 살아가면서도 이들 아미쉬 마을 사람들은 어느 누구보다도 믿음이 깊고 믿음을 잘 지키며 믿음을 잘 나누고 있구나 싶습니다. 이 또한 어느 모로 보면 놀랄 만한데, 다른 모로 보면 놀랄 만하지 않습니다. 성경에 매이지 않고 예배당에 매이지 않으며 사제 말씀에 매이지 않습니다. 예부터 내려온 '올바른 삶'을 붙잡으며 참다운 '하늘나라 삶'을 섬기고 따릅니다. 이리하여 아미쉬 마을 사람들은 자물쇠 없이 살아가고, 도둑이 물건이나 돈을 훔쳐도 신고하거나 앙갚음하지 않으며, 식구들이 몹쓸 사람한테 총에 맞아 죽어도 외려 몹쓸 사람을 용서합니다.

 

 모든 구석에서 믿음직하거나 아름답거나 훌륭하다고만 여길 수 없는 아미쉬 마을이지만, 이들 마을 사람들이 꾸리는 '사랑으로 살고 사랑으로 말하며 사랑으로 손 내미는' 매무새는 더없이 믿음직하거나 아름답거나 훌륭하다고 생각합니다.

 

 옹근 믿음이란 스스로 옹근 삶일 때 비롯하니까요. 가없는 나눔이란 스스로 가없이 나누는 삶일 때 펼쳐지니까요. 열린 사랑이란 스스로 나와 이웃을 고르게 사랑하는 삶일 때 샘솟으니까요.

 

 <단순하고 소박한 삶>이라는 책을 읽으면, 여러모로 훌륭한 아미쉬 마을이지만 가부장제 문화라든지 가정폭력 문제 이야기가 함께 나옵니다. 좋은 모습과 나란히 있는 궂은 모습입니다. 모든 곳에서 빈틈없이 좋지 않고, 어느 구석에서나 얄궂거나 나쁘지 않습니다. 한 사람이기에 좋고 나쁨을 나란히 안고 있겠지요. 그예 우리하고 다른 대목이라면, 우리들은 끝없는 경쟁과 학벌과 계급과 돈과 욕망과 물질문명과 편리주의와 부동산과 개인주의와 따돌림을 그치지 않으며 자질구레한 시시콜콜 이야기에 꽁꽁 옭매여 있습니다. 우리들은 내 밥그릇에서 한 숟가락을 덜어 이웃하고 나누는 삶을 꾸리지 않을 뿐더러, 내 밥그릇을 반으로 나눈다든지 1/3로 나눈다든지 하면서 이웃사랑을 함께하지 않습니다. 정규직과 비정규직, 학벌 있는 사람과 없는 사람, 얼굴과 몸매 가꾸기, 더 크고 빠른 자가용 몰기, 비싸고 높은 집 장만하기에 소용돌이처럼 휘둘리며 대단히 바쁘게 살아갑니다. 숨돌릴 겨를이 없고 이웃을 들여다볼 틈이 없습니다. 아니, 우리 스스로 우리 삶을 돌아보거나 가다듬을 새가 없습니다. 우리한테는 사랑으로 말할 짬이 없습니다. 우리한테는 사랑으로 말을 건넬 생각이 깃들지 않습니다. 우리한테는 사랑으로 어깨동무하겠다는 매무새가 자리잡지 않습니다.

 

 (2) 삶으로 말해요

 

 지난달 저녁나절, 서울에서 하루일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는 전철길에서, 제 옆에 선 할배 둘이 있었습니다. 할배 둘은 큰 몸짓을 하면서 자꾸 제 팔꿈치나 옆구리를 찔렀습니다. 책을 읽으며 성가시고 번거롭기에 뭐 하는 할배들인가 싶어 물끄러미 바라보니, 두 할배는 손말을 나누고 있었습니다. 입으로 하는 말이 아닌 손으로 나누는 말이었습니다. '아, 그렇구나. 이토록 사람 미어터지는 전철에서 손말을 하자면 어쩔 수 없이 내 옆구리를 찌를 수밖에 없겠군.'

 

 지지난달 저녁나절, 이날도 하루일을 고단하게 마치고 인천으로 돌아오는 전철길이었습니다. 젊은 사내 둘이 저를 사이에 두고 마주보면서 큰 몸짓을 하고 있었습니다(사이에 낀 제가 뻘쭘하도록). 저야 책에 눈을 박으니 아무렇지 않기는 했는데, 목아지가 아파 잠깐 목을 쉬려고 고개를 들었을 때, 제 옆에 선 두 사내가 손말을 주고받고 있음을 깨달았습니다. '이런, 이렇구나. 이 젊은이들이 입으로 나누는 속삭임이었다면 나란히 서서 갔을 테지만, 손으로 주고받는 말을 하자니 서로 두 걸음쯤 떨어져서 마주보며 이야기를 할밖에 없었군.'

 

 새로 짓는 지하철역 둘레에 자동계단 놓는 공사를 으레 합니다. 예전 전철역 둘레에 자동계단 놓는 공사를 새로 벌이기도 합니다. 때로는 승강기를 마련합니다. 장애인과 어르신을 생각하는 공사입니다. 그런데, 지하철을 오르내리는 자동계단이나 승강기는 마련하면서 정작 '여느 길가 건널목' 마련은 제대로 안 하기 일쑤입니다. 건널목은 너무 띄엄띄엄 놓기도 하고, 건널목으로 맞은편으로 가자면 빙 돌아야 하도록 마련하기도 합니다. 오로지 자동차가 술술 지나가는 데에만 교통 얼거리를 짜맞추기 때문입니다. 제 고향마을 인천에서는 '지하상가 상권을 지켜 준다'면서, 한길가에 건널목을 마련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자전거를 몰든 무거운 짐을 나르든 낑낑거리며 지하도 계단을 오르내리거나 '무단 횡단'을 해야 합니다. 더욱이 새벽 느즈막하게 지하도 문을 열고 저녁 열한 시 무렵에 지하도 문을 닫으니, 이때에는 '아주 마땅히' 찻길을 아슬아슬하게 가로질러야 합니다.

 

 우리 옆지기는 몸하고 마음에 장애가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옆지기가 앓는 장애는 우리 나라에서는 장애로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이 나라에서 우리 옆지기와 같은 장애를 앓는 이웃이 꽤 많으나, 정부에서는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정부에서 이러한 장애를 받아들여 주기를 바란다기보다, 여느 사람들이 이러한 장애를 앞에 두고 어쩔 줄 몰라 하기에, 무언가 옳고 알맞춤하게 '장애인권 교육'이 이루어져야 하지 않느냐 생각합니다. 우리는 우리가 '비장애인'일 때에 '장애인'을 어떻게 마주하고 어깨동무하면서 함께 살아가는 동무요 이웃이요 한식구로 지내는지를 터무니없을 만큼 모르기 일쑤입니다. 학교에서 장애인권 교육을 하지 않기도 하지만, 집에서 장애인권을 하는 모습은 찾아볼 수 없습니다. 장애인권을 다루는 책이 드문드문 나오기는 하지만, 거의 모두 '딱한 눈길'로 바라보는 책이요, 불쌍하게 여기려는 줄거리인데, 그나마 이런 책조차 잘 안 팔리고 거의 안 나옵니다. 눈물샘 쥐어짜내는 이야기책은 곧잘 대박을 터뜨린다든지, <오체불만족> 같은 책은 아주 드물게 많이 팔리는데, <다르게 보는 아이들>이나 <나는 아들에게서 세상을 배웠다> 같은 이야기책은, 또는 <도토리의 집(사랑의 집)>이나 <머나먼 갑자원> 같은 만화책은 읽히지도 팔리지도 이야기되지도 않기 일쑤입니다.

 

 우리 삶으로 들여다보지 않아서라고 할까요. 우리 삶은 오로지 '비장애인 눈길'에만 맞춰져 있는 탓이라고 할까요. 우리 삶으로는 남보다 더 많이 먹고 더 많이 가지고 더 많이 누리며 더 많이 자랑하다가 더 많이 쏟아내야 한다는 수렁에 빠져 있기 때문이라고 할까요.

 

 우리 스스로 꾸리는 삶이 그리 아름답지 못하니, 내 이웃을 아름다이 바라보며 껴안기 어렵지 않습니까. 우리 스스로 일구는 삶이 그리 훌륭하지 못하니, 내 동무를 훌륭하게 여기며 서로 손 맞잡기 힘들지 않습니까. 우리 스스로 꿈꾸는 삶이 그리 사랑스럽지 못하니, 내 식구를 꾸밈없이 받아들이기 벅차지 않습니까.

 

 우리는 왜 1등을 해야 할까요. 우리는 왜 더 많은 연봉을 받아야 하나요. 우리는 왜 더 낫다는 대학교에 가야 하는가요. 우리는 왜 '내 집(이라기보다 아파트) 마련'을 꼭 해야 하나요.

 

 우리 마을은 나라안팎에서 1등 도시가 되어야 할 까닭이 있습니까. 우리 나라는 세계에서 수출 1위가 되어야 할 까닭이 있습니까. 우리 나라 국민소득이 세계에 첫손으로 꼽혀야 할 까닭이 있습니까. 서울과 부산 잇는 철길이 두 시간 만에 뚫려야 할 까닭이 있습니까. 서울과 부산을, 또 서울과 인천을 잇는 물길을 닦느라 어마어마한 돈을 건설비에 들여야 할 까닭이 있습니다.

 

 국가보안법은 우리 삶터를 얼마나 아늑하게 지켜 주고 있습니까. 한미자유무역협정은 우리 둘레 농사꾼과 가난한 사람들한테 얼마나 도움이 되고 있습니까. 골목동네 재개발과 재건축과 재생사업과 재정비는 골목동네 사람들 삶터를 어떤 눈길로 바라보고 있습니까. 대학교 학문은 우리 터전을 어떻게 가꾸는 데에 눈높이를 맞추고 있습니까. 초중고등학교 교육은 무슨 길을 걷고 있습니까. 딸아들 키우는 우리 어버이는 우리 딸아들한테 무엇을 바라고 있습니까.

 

 우리 삶은 무슨 이야기를 건네고 있을까요. 우리 삶은 어떤 이야기를 보여주고 있을까요. 우리 삶은 어떤 그림을 그리고 있는가요. 우리 삶은 무슨 그림을 어디에서 누구하고 어떻게 그리고 있습니까.

 

 

 (3) <수화로 말해요>라는 책 함께 읽기

 

 이야기책 <수화로 말해요>를 읽습니다. 손말을 쓰면서 살아가는 아가씨와 입말을 하며 손말을 익힌 사내가 가시버시가 되면서 겪고 복닥이고 부대끼고 헤아리고 맞아들인 여러 삶자락을 담은 책입니다. '장애인권'을 말하는 책은 아닙니다. 장애인 아픔을 외치는 책은 아닙니다. 하나도 없는 장애인권 정책을 꾸짖는 책 또한 아닙니다.

 

 <수화로 말해요>는 장애인이든 비장애인이든 똑같은 사람임을 들려주는 책입니다. 장애인이기에 더 사랑스러운 사람이지는 않으나, 장애인인 까닭에 한 번 더 사랑을 받을 만하고 더욱더 사랑스레 어울릴 만큼 아름답다는 이야기를 살며시 일러 주는 책입니다.

 

 이 책을 덮으며 여러모로 생각했습니다. 저한테는 아무 힘이 없으나, 저한테는 꿈이 있기 때문에, 몇 가지 꿈을 꾸었습니다. 이 나라 고등학교 과정에서 '제2외국어'로 '손말(수화)'이 정규과정으로 들어가는 날을 맞이할 수 있기를 꿈꾸었습니다. 이리하여 나중에는 중학교 과정에서 '영어와 같은 자리에서 외국어 한 가지'로 배울 수 있도록 교과목을 마련할 수 있으면 더 좋겠다고 꿈꾸었습니다. 또는, 고등학교 '제2외국어' 과정으로 '손말'이나 '점글' 가운데 하나를 골라서 반드시 배우도록 하는 날이 오기를 꿈꾸었습니다. 그러면서 대학교에서는 이를 더 깊이 헤아리며 '토익 토플 점수'를 반드시 받도록 하는 제도와 마찬가지로, 대학생이라면 누구나 '손말'이나 '점글' 가운데 하나를 통역사처럼 주고받을 만큼 익혀야 졸업장을 줄 수 있는 날이 오기를 꿈꾸었습니다. 그리고, 여느 회사에서 새 일꾼을 뽑을 때에, '손말'이나 '점글' 한 가지를 하는 기본조건을 마련하고, 둘 모두를 할 수 있다면 더 높은 점수를 줄 수 있는 날이 올 수 있기를 꿈꾸었습니다.

 

 홀로 품는 꿈이지만, 이 꿈을 사랑스레 껴안으면서 책을 다시 펼칩니다. 밑줄을 그으며 읽은 대목을 새삼스레 거듭 읽어 내려갑니다.

 

[33, 100쪽] 나는 부엌에서 이런 생각을 한다. 농인의 언어는 수화이므로 시각적으로 확 열려 있는 편이 편리하고 쾌적할 것이다. 만약 농인이 사회의 지배자라면 세상의 건축물 구조는 아마도 지금과 전혀 다를 것이다 … 귀가 들리지 않는 아이가 태어나면 곤란하다는 사람도 제법 있다. 얼굴을 마주보고 이런 말을 하는 사람은 별로 없다. 대부분 제삼자를 내세워 말하게 한다. 그러나 이건 상당히 무례한 태도다. 농인에게 "당신은 태어나지 않는 편이 좋았어요." 하는 거나 같다.

 

[41쪽] "아내는 청각장애인입니다."라는 표현은 거의 사용하지 않는다. 우리 부부의 생활 감각으로는 '청각장애인'이란 말은 서류에서나 사용하는 표현이다. '본적'이라는 말과 마찬가지로 관공서에서 어떤 절차를 밟는 등 정해진 상황에서 쓰는 말이지 평소의 대화에서 사용하는 말이 아니다. 하물며 "아내는 귀가 불편합니다." "귀에 핸디캡을 갖고 있습니다."라니, 그런 말은 한 번도 한 적이 없다. 그렇게 에둘러 하는 애매한 표현은 고양이의 입장에서 보자면 짜증의 원천이다. 게다가 농인의 핸디캡은 귀의 문제가 아니라 수화를 포용하지 못하는 언어 정책에서 생겨나는 정보적인 핸디캡이기 때문에 사실하고도 맞지 않는다 … 일본 과자점의 견본 앞에서 수화로 말장난을 하며 웃는 우리를 가게의 판매원은 어떻게 봤을까. 아마도 뭘 하는 건지 알 수 없었을 것이다. 우리가 설명을 해 줘도, '농'이라는 말을 쓰는 데 익숙하지 않다면, 그리고 실감할 수 없다면 웃을 수 없을 것이다. 번역하기 힘든 웃음이다.

 

[56∼57, 89쪽] 편리한지 어떤지하고는 관계없이 우리는 늘 수화로 말하며 살고 있고, 그것이 창문 너머로는 계속되는 것일 뿐이다. 수화 특유의 대화 예절은 유리창 너머에서도 잘 지켜져야만 하며, 따라서 실은 그러한 장면에서의 적절한 행동 방법을 배우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이런 사정이 드라마에는 그려지지 않는다. 게다가 수화를 공용어로 인정하지 않는 이 나라에서, 보통 때는 농인들이 큰 불편을 감수하도록 해 놓고는, 이런 데에서만 수화를 조금 보여주고 "수화는 편리하다"며 재미있어 하는 것도 농인에게 실례라는 생각이 든다 … 애당초 음성으로 얘기한다는 건 자신의 목소리가 들릴 때 가능한 것이다. 수화통역사에게서 "농인이 구화를 하는 건 사람들에게 한 걸음 다가가는 일"이라는 말을 들었을 때에는 이 나라 통역사의 수준을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61, 86쪽] 한 친구가 "여기서는 집 밖에서 수화를 하면 빤히 쳐다봐." 하고 투덜거린 적이 있다. 실제로 레스토랑에서 보통 때 하듯이 수화로 얘기하며 식사를 하는데 사람들이 우리를 빤히 쳐다봤다. 똑바로 바라보면 금방 눈길을 돌리는 사람이 많다는 걸 학습해 온 내가 '무례하네요. 나는 구경거리가 아니라구요.' 하는 기분을 담아 노려봤는데도, 그들은 눈길을 돌리지 않았다. 우리를 계속 힐끗힐끗 보면서 소곤거리는 데에 그만 할 말을 잃었다. 그게 이곳 사람들이 지닌 의식의 표현일지도 모른다 … 나는 청인인 만큼 주변의 청인들의 몰이해한 발언이 전부 내 귀에 직접 들려온다.

 

[85, 92, 127쪽] "수화는 고유의 문법을 가진 언어예요. 몸짓도 아니고 음성언어를 그대로 옮기는 수단도 아닙니다. 수화를 학습하는 건 일반 어학을 공부하는 것과 똑같이 힘들어요. 수화만을 사용하는 대학이나 학회도 있습니다. 만약 수화가 단순한 몸짓이라면 그런 건 불가능하죠." … 그런대 대학생활을 하다 보니까 100퍼센트 들리지 않는 핸디캡이라는 게 정말로 굉장했다. 특히 영어 수업은 소리를 못 알아들으면 이해할 수 없는 커리큘럼으로 되어 있고, 그런 만큼 압박감도 아주 크다 … 수화통역자를 양성해 필요할 때에 지원하는 대학은 없다. 지금까지 일본의 대학은 수화통역자가 필요한 경우가 생기면 '학생끼리 서로 돕는다', '자원봉사 정신의 소중함'을 운운하며 통역의 책임을 학생들에게 고스란히 넘겨 버렸다.

 

[96∼97쪽] 나는 세상에서 흔히들 말하는 '장애인'이라는 종별에 속하는 사람인가 보다. 그래서 거북이와 결혼을 하려고 했을 때 거북이의 가족이 크게 반대했다. 가장 큰 이유는 결혼 상대인 내가 '장애인이니까'였던 모양이다. 우리는 우리의 결혼을 그렇게 반대하는 부모님의 성을 잇는 것이 싫어졌다 … 또한 여성이기 때문에 차별받는 경우보다 농인이기 때문에 차별당하는 경우가 훨씬 많다고 느끼므로 여권론을 논하기 전에 우선 인간으로서 농인의 존엄을 지키기 위해 싸우는 일이 급하다.

 

[103, 104, 112쪽] 태어난 아이가 청인이라 하더라도 물론 사랑스럽겠지만, 농인 부모에게는 청인인 아이가 태어나면 아이에게 어떻게 수화를 받아들이게 할지가 가장 큰 걱정거리다 … 수화를 공부하는 사람은 여성이 압도적으로 많다 … 어째서인지는 몰라도 남자보다는 여자들이 수화를 익혀 '봉사'한다는 이미지가 강하다 … 농인이 회사에 들어갔다고 치자. 텔레비전 전화가 있다고 다양한 연락 사무를 할 수 있을까? 텔레비전 전화로 거래처에 전화를 걸어도 상대방이 수화를 못하는 사람이라면 대화는 불가능하다.

 

[120, 131쪽] 수화로 얘기한다고는 하지만 농인 입장에서 본다면 나는 이질적인 언어를 사용하는 주류 세계의 한 사람이다. 고양이는 그런 존재와 함께 살기로 선택한 거다. 어떤 의미에서는 훌륭한 사람이다. 칭찬해 주고 싶다 … 그렇게 남의 신경을 거슬리는 말을 하는 사람들은 하나같이 수화를 못하는 사람들이라는 점이 재미있다. 미흡하나마 언어로서 수화를 배우고 수화 통역 업무에 관계하는 사람들은 그런 무책임한 발언을 하지 않는다.

 

[143, 146, 178쪽] 그렇게 수화를 우습게 여기는 세계로 꼭 들어가야만 하는 걸까? 대학이란 세계는 그토록 청인만을 위한 세계란 말인가? … 매일같이 내일은 통역자가 있을까 걱정하면서 힘든 나날을 보냈다. 농인 한 사람이 수강권 보장 문제로 괴로워하다 병들어 죽어도 누구 하나 깊은 관심을 보이지 않는 것이 이 사회의 현실이다 … 대학의 담당 부서 말은 "수화 통역은 비용이 들어서 붙여 줄 수 없다"는 거였다. 영어-일어 통역은 있는데 어째서 수화 통역은 인정을 안 하는가. 일반 공개강좌인데 만약에 농인이 신청을 하면 어떻게 할 건가.

 

 

[156쪽] 연구자들은 참으로 난해한 말을 좋아한다. 좀더 알기 쉬운 말로 쓸 수는 없는 걸까.

 

[248쪽] 아무 지원도 없이 음성으로 하는 대화나 정보 전달을 따라가야 한다는 것은 농인에게 고통일 뿐입니다.

덧붙이는 글 | 글쓴이 인터넷방이 있습니다.

[우리 말과 헌책방 이야기] http://hbooks.cyworld.com
[인천 골목길 사진 찍기] http://cafe.naver.com/ingol


수화로 말해요 - 농인 아내, 청인 남편이 살아가는 이야기

가메이 노부타카.아키야마 나미 지음, 서혜영 옮김, 삼인(2017)


태그:#인문책, #책읽기, #장애인, #수화, #비장애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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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말꽃(국어사전)을 새로 쓴다. <말꽃 짓는 책숲 '숲노래'>를 꾸린다. 《쉬운 말이 평화》《책숲마실》《이오덕 마음 읽기》《우리말 동시 사전》《겹말 꾸러미 사전》《마을에서 살려낸 우리말》《시골에서 도서관 하는 즐거움》《비슷한말 꾸러미 사전》《10대와 통하는 새롭게 살려낸 우리말》《숲에서 살려낸 우리말》《읽는 우리말 사전 1, 2, 3》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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