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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만화 <최강입시전설 꼴찌 동경대 가다!>가 한국에서 드라마화된다는 소식을 들었을때, 한바탕 논쟁이 일어날 것이란 예감을 했다. 변호사 사쿠라기가 다 쓰러져 가는 고등학교의 변호사로 재단을 정리하러 왔다가 오히려 입시명문고로 발돋움 시키기 위해 2명의 학생을 뽑아 1년도 채 못되는 기간 안에 동경대에 진학 시키려 한다는 '파격'을 담은 만화였기 때문이다. 한국과 일본의 입시지옥 현상은 동일한 구석이 있으니 논쟁은 필연이다.

아니나 다를까, 예상대로 '입시지옥을 조장하는 저질 드라마'라는 평이 식자들에게서 오가고 있다. 원작을 지켜본 독자로서, 드라마를 지켜보고 있는 시청자로서 전혀 공감할 수 없는 평들이다. 드라마는 결말을 지켜봐야겠지만, 적어도 원작을 봤다면 그런 평을 쉽게 할 수는 없다. 그리고 드라마 자체에도 '공부를 왜 해야 하는지에 대해' 알려주고 있기 때문이다.

변호사 사쿠라기는 겉으로 보면 그저 아이들을 입시지옥에 편승시켜 동경대에 보낼 궁리만 하는 것으로만 보인다. 하지만 흐름은 다소 다르다. 중요한 것은 세상으로부터의 소외와 그에 따른 반항심으로만 가득차 냉소적이었던 아이들에게 '목표'를 불어넣으며 목표를 향한 길을 걸어가는 방법을 가르친다는 것이다.

감수성 예민한 10대들의 상처를 공부라는 길을 통해 긍정적으로 극복하게끔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제목과는 달리 동경대에 진학하지 않는 학생도 있다. 동경대보다 더 큰 것, 그리고 동경대보다 자신에게 더 맞는 것을 찾기 위해 다시 길을 떠나는 학생으로 그려진다. 사쿠라기가 지정해 준 동경대라는 목표, 얼떨결에 따라가다가 스스로에 대해 고민하면서 진정한 스스로의 가치를 만들어가는 것이다.

<공부의 신>의 한 장면
 <공부의 신>의 한 장면
ⓒ KB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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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타이타닉> 속 3등석, 가난하지만 행복한 세상?

영화 <타이타닉>에서 실소를 머금은 장면이 있었다. 가난한 남성 화가와 귀족 여성이 '타이타닉호'에서 만나 사랑에 빠져 서로의 살아온 환경인 1등석과 3등석을 오가는 장면이다.
1등석은 귀족의 허세와 위선이 가득찬 숨막힌 공간, 귀족 여성은 가난한 남성 화가가 살아온 3등석의 떠들썩한 파티에서 신나게 논다. 그렇다고 3등석이 '가난하지만 행복한 세상'이기만 할까? 아니다. 배가 침몰할 때, 여성과 어린이를 먼저 구명보트에 태운다는 대원칙은 성립됐지만, 어디까지나 1등석의 여성과 어린이가 먼저였다.

100여 년 전 세상의 일이기만 할까? 마찬가지로 아니다. 모두가 평등한 민주사회라지만 권력과 재력에 따라 엄연히 신분 차이가 있다. 그래서 중요한 장면이었다. 배가 잘못된 길로 가지 않도록, 설령 배가 잘못돼 여성과 어린이가 먼저 구출돼야 하는 순간이 오더라도 등석 구분에 차이 없이 합리적으로 구출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3등석의 서민들이 1등석으로 더 많이 진출해 보다 무시할 수 없는 목소리를 낼 수 있어야 한다.

입시지옥을 비난하는 목소리는 늘상 이어져 왔다. 하지만 3등석에서 1등석을 비난한다고 바뀔까? 세상은 현실이다. 현실은 힘이 존재한다. 힘은 1등석에 있다. 1등석은 3등석에서의 비난을 무시하면 그만이다. 힘이 없기 때문이다.

<타이타닉>이 침몰할 때, 여성과 어린이부터 탈출시킨다는 대원칙은 있었다. 하지만 엄연히 1등석의 여성과 어린이 먼저 구출시키는 것이 침몰하는 배의 현실이었다. 우리의 현실은 어떨까?
 <타이타닉>이 침몰할 때, 여성과 어린이부터 탈출시킨다는 대원칙은 있었다. 하지만 엄연히 1등석의 여성과 어린이 먼저 구출시키는 것이 침몰하는 배의 현실이었다. 우리의 현실은 어떨까?
ⓒ 20세기 폭스 코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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힘을 가진 공간을 그들이 독점할 수 없게끔 하는 것이 중요하다. 입시지옥을 비난하기만 한다고 입시지옥이 해결되나? 아니다. '반란'은 끊임없이 이어져야 한다. 누구말마따나 "공부해서 서울대 가는 것이 제일 쉬웠다"는 개개인의 차이를 무시한 무식하고도 심각한 과장은 곤란하지만, 적어도 '반란'은 일어나야 하는 것이다.

입으로 비난하는거야 쉽다. 하지만 입으로는 문제를 해결할 수는 없다.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선 문제를 향해 덤벼들어야 한다. 두들겨패듯 덤벼들어도 좋고, 놀이하듯 덤벼들어도 좋다. 중요한 것은 덤벼든다는 것 그 자체다.

이것이 일본의 사쿠라기와 한국의 강석호가 말하려던 것일 듯하다. 입시지옥이라고 비난하기만 해서야 과연 해결이 될까? 권력의 잘못을 고치기 위해선 권력을 향해 덤벼들어야 한다. 그래야만이 권력으로부터 속지 않는다. 정치에 무관심한 유권자들이 많을수록 정치인들이 신나는 이유와 똑같다.

"주입식 교육이야말로 진정한 교육"이라던 수학교사의 숨겨진 과거

천하대 특별반 수학교사는 "주입식 교육이야말로 진정한 교육"이라고 강변한다. 고리타분한 옛날방식의 교육관을 그대로 갖고 있는 교사다. 원작만화와 헤어스타일까지 똑같이 그려졌다. 아니나 다를까, 달동네 공부방에서 어린아이들에게 구구단을 가르치면서도 호통과 회초리를 동원한다. 구세대 교사의 전형이다.

그런데 중요한 것이 있다. 그가 '달동네 공부방'에서 아이들을 가르치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가 어떤 철학을 갖고 있는지를 알 수 있는 상황이다. <공부의 신> 속 그의 과거 회상 장면에서도 중요한 것이 있다.

비행 청소년을 강하게 호통치며 공부시켜 그를 '각성'시키면서 그가 결국 의대에 진학할 수 있게끔 도와준다. 훗날 의사가 된 그는 수술에 성공해 환자 가족에게 인사를 받으며 뭉클한 감동에 젖는다. 하던대로 힘 없는 아이들을 두들겨패고 '삥'이나 뜯던 그 나날들을 이어갔다면 그 보람과 기쁨을 느낄 수 있었을까?

<공부의 신>이 원작의 숨은 진의를 이어갈 것 같다는 예감을 한 장면이기도 했다. 변호사 사쿠라기가 시도하던 것과 똑같다. 다시 한번 얘기한다. 동경대, 혹은 천하대 그 자체가 목표가 아니다. 미래를 위해서, 그리고 잘못된 현실을 고치기 위해서 처절하게 노력해본 적이 있느냐는 질문을 건네는 것이다.

물론, "주입식 교육이야말로 진정한 교육"이라는 표현은 절반만 맞다. 주입은 교육의 기본인 것은 명백하다. 하지만 한국이나 일본식 교육에서 부재한 것은 주입 그 자체만 있다는 것, 주입과 응용이 조화해야만이 훌륭한 교육이다. 교육방식에 대해서야 차이가 있을 수 있을 것이다.

수학교사의 '달동네 공부방'을 통해 느낄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 학비가 비싸기 때문에 무조건 대학을 포기해야만 하는 것일까? 아니다. '입시지옥'이 말 그대로 '지옥'이 된 이유는, 학부모 대다수의 '입시지옥'에 대한 어긋난 오해 때문이다. 대학을 가는 것 그 자체가 목적이 됐다. 그러다 보니, 아이들에게 이유 모를 공부를 강요한다. 입시지옥이 지옥이 된 근본적인 이유일 것이다. 공부를 왜 해야 하는지, 참을성 있게 깨닫도록 도와주는 학부모가 과연 몇이나 될지가 의문이다.

뿐만 아니라, '대학을 가는 것 그 자체'가 부작용인 이유는 고급교육을 통한 사회적 기여를 가르칠 생각을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하얀 거탑>의 장준혁이라는 캐릭터는 이 부작용의 적격이다. 외과 정교수가 되려는 야심은 있다. 하지만 외과 정교수로서 어떻게 환자들에게 도움을 줘야 하는지는 고려 밖이다. 대학을 가서 뭘 어떻게 해야 하는지 가르치는 사람이 아무도 없는 것이다.

이런 각각의 요건을 무시하고 그저 드라마만 비난하면 다일까?

누구도 전문계 교육을 이야기하지 않는다

몇 년 전, '모 공고 사태' 당시에 나는 엄청난 비난 세례에 노출됐다. 아파트단지가 세워져 초등학교가 만들어져야 하는데, 모 공고의 부지가 초등학교 건설부지로 선정돼 공고가 이전해야 했던 상황이었다.

대다수의 여론과 달리 나는 아파트 주민들의 목소리에 비중을 뒀다. 땅값과 집값에 연연하는 주민들의 앞잡이로 보일 것이란 예상을 충분히 하면서 뒀던 승부수였다. 왜 그랬을까? 과연 나도 아이들을 공고생이라고 무시했던 것일까? 그랬을 수도 있다. 하지만 내가 근본적으로 주목했던 것은 공고가 사람들에게 심어주는 부정적인 인상이었다.

정말 논의가 이루어지려면 근본적으로 이 부분에 대해 논쟁했어야 했다. 전문계고가 왜 부정적인 대상으로 전락했던 것일까? 입시지옥을 비난하는 이들도 누구도 이 부분을 이야기하지 않는다.

그러니 입시지옥 비난은 절반에 그치고 만다. 아무리 명문대학을 진학하는 것이 가장 빠르게 세상을 향해 나아가는 길이며 힘을 기르는 수단임은 분명하지만, 누구나 그럴 수 없다는 것도 명백한 사실이다. 모 교육평론가는 이 부분을 거론하며 "<공부의 신>이 사람들에게 잘못된 환상을 심어준다"고 비난하지만, 그것도 비난을 위한 비난에 머무르는 이유가 된다.

중요한 것은 한국 사회는 대학 진학 외에는 10대 후반의 청소년들이 세상에 나아가 꿈을 키울 수 있는 수단 자체가 없다는 것이다. 전문계고는 공부 외에 다른 세상을 꿈꾸는 청소년들에게 훌륭한 대안이 돼야 한다.

하지만 세상 인심도, 소위 말하는 전문가라는 사람들도 그들에 대해서는 고민의 비율이 부족하다. 그리고 여기에는 조선시대의 잘못된 유산 '사농공상'의 폐해가 여전히, 하지만 더욱 강하게 작용하고 있다는 잘못된 관습도 영향을 준다.

말뿐인 비난만 하기엔 교육과 진로의 문제는 너무나도 중요한 것이다. 입시지옥 비난론이 힘을 얻지 못하는 이유다. 입시지옥과 값비싼 대학 등록금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오히려 전문계고가 힘을 얻도록 다양한 정책과 길을 만들어야 한다. 하지만 세상의 눈은 그저 '입시' 그 뿐이다. 현실이 그렇게 작용하니 현실에 뛰어들어 현실을 뜯어고치는 방법이 남는다. <꼴찌 동경대 가다>의 사쿠라기와 <공부의 신> 강석호가 웅변하는 것은 바로 그 이야기다.

KBS 드라마이기에 드러나는 작은 흠

진보 성향의 논객들과 교육전문가들을 불편하게 했던 것은 아마도, <공부의 신>에서 무능력한 선생들의 대명사로 나오는 병문고의 교사들이 마치 '전교조'처럼 묘사됐던 부분일 듯하다. 그와 더불어 "교육도 서비스"라고 외치는 강석호에게서 이명박 대통령을 느꼈을 것이란 점도 추가해야 할 것이다.

이것은 흠이다. 전교조를 향한 왜곡된 공격을 그대로 반영했다. KBS이기에 드러나는 흠일 것이다. 하지만 전교조를 향한 공격은 예상외로 학부모들에게 설득력을 제공한다. 국제중과 특목고로 보내기 위해 위장전입도 마다하지 않는 학부모들이라 왜곡된 공격을 그대로 받아들여서일 가능성이 크다. 하지만 거기에 안주해서야 언제든 강석호에게 공략당하는 것이 전교조의 엄연한 현실이라는 이야기도 빼놓을 수는 없을 듯하다.

병문고 교사들은 마치 보수언론이 규정해 비난하는 전교조의 이미지로 그려진다. 이것은 KBS이기에 그려지는 것일듯하다.
 병문고 교사들은 마치 보수언론이 규정해 비난하는 전교조의 이미지로 그려진다. 이것은 KBS이기에 그려지는 것일듯하다.
ⓒ KB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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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다가, 입시지옥 비난론을 제기하는 이들 상당수 혹은 진보 성향의 논객들 중 이름난 사람들은 태반이 명문대 출신들 아닌가? 그들조차도 주요 명문대 학벌의 중요한 구성원이라는 사실, 그리고 세상은 현실적으로 그들의 학벌도 눈여겨본다는 사실을 어떻게 바라봐야 할까? 명문대를 향해 꾸는 꿈 자체, 그리고 그 꿈을 꾸며 달려가는 것 자체가 나쁜 것일까?

<공부의 신>에 공감하는 개인적인 이유들

사실대로 고백하자면, 나 역시 새로운 진로를 탐색중이라는 것이다. 내 스스로에게 자부하는 것이 있었다면, 실력과 노력을 기울여 블로그 활동을 함으로써 분에 넘치는 주목도 받아봤고 그 덕분에 취업도 성공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보이지 않는 벽도 있다. 대학을 나오지 않았기에 나의 20대는 늘 불안한 롤러코스터였다. 그러다 보니 분의 넘치는 주목은 오히려 내 스스로에게 경계할 지점을 만들어줬다.

뿐만 아니라, 인터넷은 과연 평등한 공간일까? 아니다. 똑같은 이야기를, 똑같이 치밀하게 전개하고 성실하게 글을 썼더라도 '명함'과 '학벌' 가진 사람들의 글이 우선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것을 깨닫는 순간, 나는 당장의 블로그 활동에 연연할 필요가 없었다. 그래서 새로운 목표를 정해 기나긴 길을 걷기로 결심했다. 어쩌면 뒤늦은 나이일 수도 있지만 언제든 새로 시작할 수 있는 나이라고 생각한다. 이것이야말로 내가 지난 3년간 블로그 활동을 하면서 얻게 된 가장 큰 깨달음이자 소득이었다.

학창시절의 나는 공부해야 할 이유를 알려고 하지도 않았고, 그저 이것저것 궁금한 것만 많아서는 하고 싶은 공부만 했다. 그러다 보니, 독서량은 많아 글을 쓰는데에는 지장이 없었지만 늘 한계를 느껴왔으며 그 대가를 치러야 할 때도 많았다.

현실이 그렇다면 현실을 뜯어고칠 힘을 가져야 한다. 그래서 나 역시도 기나긴 길을 가기로 결심한 것이다. 일과 공부를 병행해야 하는만큼 쉽지 않은 일이지만, 이 역시 나만 걷는 길은 아닐 것이다. 그래서 기꺼이 그 길을 걷기로 했다.

중요한 것은 '과정'과 '그 이후'일 것이다. 세상을 향해 나아가기 위해 얼마나 노력했는지, 그리고 목표를 이뤘을 때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다. 그래서 <공부의 신> 속에서 환자 가족에게 감사인사를 받고 뭉클해하던 의사와 <하얀 거탑>의 장준혁이 동시에 오버랩됐는지도 모르겠다.

한국 사회와 한국 교육, 교육을 왜 받았는지와 교육을 받아 사회의 주류로 거듭났기에 실천해야만 하는 의무를 대다수의 주류들이 지키지 않기 때문에 생기는 문제다. 그것을 고치기 위해서는? 공부가 됐든 뭐가 됐든, 목표를 향해 끊임없이 노력을 기울인다는 것, 그것이 우리가 진짜로 받아들여야 하는 숙제다.

그런 의미에서 <공부의 신> 속 황백현 역시 강석호처럼 변호사가 돼 그처럼 쓰러져 가는 학교에서 '천하대 특별반 시즌2'를 만들어 또다른 자신의 사례를 만들려 한다는 식의 결말은 어떨까 하는 상상도 한다.

부디, 만화독자와 TV 시청자를 조강지처를 버리고 바람피우는 역할을 맡은 남자배우를 캐릭터와 동일시해 돌팔매질을 했던 1970년대 시절 사람들로 오해하지 말아야 한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다음 View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태그:#공부의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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