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복싱은 최근 부활이란 표현을 쓰는 것조차 어색할 만큼 어두운 터널에서 빠져 나오지 못하고 있다. 선수안전관리 부재로 인한 최요삼 사망, WBC 회장 참관경기에서의 가짜 선수 출전 파문, KBC내부비리 고발, 유명우 사무총장 해임파문 등으로 인한 내분으로 자멸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어 이미 사망선고가 내려진 상태라는 목소리도 들렸다.
 
하지만 이런 와중에서 희망의 불씨가 되어준 승전보가 계속 전해지고 있다. 작년 9월 홍수환에 이어 35년만의 남아프리카공화국 원정경기를 통해 IBO 세계챔피언이 된 김지훈이 해외원정경기에서만 4연승을 달리고 있기 때문이다.
 
김지훈에 이어 손창현, 이재성 등 한국 유망주의 해외진출을 통해 한국복싱 부활의 돌파구를 마련하고자 미국에서 한국복서들의 해외진출을 진두지휘하고 있는 매치메이커 이현석과 한국복싱의 장래를 이야기 해보았다.
 
1969년 서울에서 태어난 그는 경북대를 졸업하고 미국 뉴욕 시립 퀸즈대학 미술 대학원을 졸업후 미국에 정착했으며 현재는 필라델피아에 살고 있다. 2004년 펀치라인을 복간할 때 미국 통신원으로 글을 썼던 인연으로 미국 및 한국 복싱 관계자 들과 친분을 쌓게 되었다가, 2005년 김정범 선수의 미국 원정경기를 주선했고, 이듬해인 2006년부터는 WBO, IBF등 세계기구들의 총회에 참석하면서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했다.
 
이 무렵 현역 세계챔피언이던 지인진의 K1 진출을 보고 큰 충격을 받아, 한국 복싱의 서글프고도 심각한 현실을 비로소 인식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래서, 착수한 것이 한국 유망주의 미국 무대 진출이었다.
 
 선수발굴,경기주선,훈련,통역은 물론 시합장에서도 바쁜 이현석(가운데)

선수발굴,경기주선,훈련,통역은 물론 시합장에서도 바쁜 이현석(가운데) ⓒ 이현석





 
김지훈의 발굴은 김형열 관장의 열정에 탄복해서 이루어진 일

 
"2006년 한국에서 서너 명의 유망주를 찾던 중 김지훈은 단지 그 중 하나였을 뿐입니다. 게다가 김지훈은 전적도 그저 그랬고 그 이후에도 임흥식에게 졌고 일본 가서도 졌기 때문에 완전히 잊고 있었습니다. WBO 아시아 퍼시픽 회장 리온 파논시요에게 플라이급 타이틀전에 출전할 선수를 구해달라는 부탁을 받고 정진기 선수를 추천하고자, 매니저인 김형열 관장님과 통화를 하게 되었죠.

 
그런데 김관장이 '정진기 시합은 다른 시합이 예정되어 있어서 그 시합 출전은 어려운 상황이고, 대신 분신처럼 아끼며 키워온 선수가 있다 꼭 좀 도와달라' 고 미국 시합을 부탁 하더군요. 그 후 김지훈과 정재광의 시합 영상을 보내왔고 이 시합을 보고 난 후 김지훈은 미국무대에서 통할 것 같은, 즉 팬들이 좋아할듯한 느낌이 왔습니다.

 
그래서 저와 가장 가깝게 지내던 배너 프로모션의 아트 펠룰로 프로모터를 찾아가 부탁을 했고 무려 6개월 동안이나 배너측과 씨름을 하고서야 계약을 성사시켰습니다. 김지훈 말고도 몇 선수가 더 있었는데 한국측에선 무리한 요구를 했고 결국 김지훈만이 유일하게 사인을 했습니다."
 
원정경기 승리는 해외동포들에게 평생의 추억

 
"라스베이거스에서 WBO 세계 챔피언 결정전에서 패했던 코바 고골라지의 재기전 상대로 미국진출 첫 시합에 나선 김지훈은 예상을 깨고 1회 KO로 승리를 거둠으로서 한국 복서로는 라스베이거스에서 첫 승을 거두는 쾌거를 이뤘습니다. 김지훈이 전혀 알려지지 않은 선수고 전적도 그저 그렇다 보니 고골라지가 깔보고 인파이팅을 시도하다 찰라의 레프트 카운터에 걸려 나가 떨어진 시합이었습니다. 그 시합으로 미국 복싱팬들에게 김지훈이 알려지기 시작 했습니다.

 
2009년 9월12일에는 남아공 요하네스버그에서 졸라니 마랄리를 상대로 9회 KO승으로 IBO 수퍼 페더급 타이틀을 획득 했었습니다. 항상 슬로우 스타터이지만 이 시합때는 유독 심해 5회까지 큰 펀치도 많이 맞고 고전하다가 6회부터 몸이 풀려 9회 역전 KO승을 거뒀습니다.

 
경기후 들린 얘기로는 맞으면서도 계속된 전진 압박에 질린 마랄리가 8회가 끝나고 경기를 포기하려고 했는데 트레이너의 설득으로 9회를 맞이 했다고 합니다. 멀리서 오셔서 태극기를 흔들며 응원해 주시던 남아공 한인들이 정말 고마웠습니다. 홍수환씨 경기 때 원양어선 선원들이 배에 꽂혀있던 태극기를 빼가지고 와서 응원을 했고, 끝나고 같이 애국가를 부르면서 울었다던 그 모습이 이랬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해외원정 경기마다 태극기를 들고 링에 오르는 이현석(오른쪽)

해외원정 경기마다 태극기를 들고 링에 오르는 이현석(오른쪽) ⓒ 이현석




고국을 떠나 살고 있는 저는 김지훈이 승리할 때마다 조국이 있다는 사실에 너무 행복해 지고 감사하게 됩니다. 시합 때마다 태극기를 들고 나가는 것도 그 이유입니다. 지난번 남아공 시합 때는 시합전 국민의례를 하는데 애국가를 듣는 순간 눈물이 나오려 했습니다. 외국에 오래 나가 살아본 사람이라면 제말이 이해가 갈 겁니다. 생애에 있어 외국인들 앞에서 애국가가 연주되며 태극기에 경례를 할 수 있는 기회가 몇번이나 되겠습니까? 그리고 늘 이겨준 지훈이가 너무 자랑스럽고 고맙기만 합니다."
 
- 김지훈이 승승장구하는 동안 국내 복싱 흥행은 가짜복서 파문, KBC 회장고발소송 등으로 인해 더더욱 침체일로를 걷고 있어서 해외진출에 대한 관심이 큽니다. 한국 선수들의 해외진출을 위한 요건은 어떤 것이라고 봅니까?
"사실 한국복싱이 수십 명의 세계 챔피언을 배출해냈지만 본고장인 미국 무대에서는 대부분 졌습니다. 승률은 5%도 안됩니다. 하지만, 기자님이 어떻게 생각할지는 모르겠지만 제가 본 관점으로는 한국에 아직 미국 무대에서 통할 유망주가 많이 있습니다. 한국 복싱이 세계적으로 뒤떨어져서 그간 미국 원정시합에서 대부분 지고 돌아갔던 게 아닙니다.

 
언어소통 등의 문제로 인해, 그리고 언어문제가 해결되더라도 복싱 비즈니스를 모르는 사람들의 통역으로 인해 시합할 분위기를 못 만들고 시합을 했기 때문입니다. 복싱 흥행이 최고였던 때도 못 이겼는데 한국랭킹도 못 채울 정도의 저변이 무너진 지금은 4연승을 하고 있지 않습니까? 김지훈을 통해서 그걸 증명했다고 생각 합니다.

 
스피드가 돋보여 배너 프로모션과 계약시킨 손창현 선수도 미국에서 잘해 낼 거라 믿습니다. 김지훈과 비슷한 시기에 미국에 진출했던 이재성은 5번 경기 중에 단 한번도 자기 체급이 아닌 1,2체급 위의 선수와 싸운 탓에 결과가 좋지 않았으나, 앞으로는 제가 관리하면서 제대로 된 시합을 만들 예정이니 기대해 주시기 바랍니다. 이미 라스베이거스, 메디슨 스퀘어가든, 아틀랜틱시티 등 빅 무대에서 다섯 번이나 경기를 경험이 있기 좋은 결과 있을 것이라 믿습니다."

 2008년 뉴욕 메디슨스퀘어 가든에서 태극기를 달고 싸우던 이재성

2008년 뉴욕 메디슨스퀘어 가든에서 태극기를 달고 싸우던 이재성 ⓒ 이재성





 
- 한국 복싱은 공격적이라 재미는 있지만 기본기가 약해서 승률이 낮다
"한국 복싱은 투지가 좋고 공격적이라 보는 재미가 있습니다. 그러나 발을 너무 안 쓰는 단점이 있고 현대 복싱의 조류로 볼 때 복싱의 가장 기본인 공격적인 잽과 레프트 훅을 제대로 치는 선수가 없습니다. 월드 클래스로 올라선 김지훈 역시 잽이 엉성합니다. 제가 보기엔 그것 때문에 많이 맞는 복싱을 합니다. 이재성이 미국 데뷔전에서 진 것도 잽이 없어서 였으며 김정범이 아투로 모루아에게 진 것도 같은 이유입니다. 이 부분만큼은 지도자들이 좀 더 연구하며 선수들을 지도해야 합니다. 세계적인 추세를 역행해서는 미래가 없습니다."
 
IBF 타이틀 매치를 잡았으나 WBA, WBC하고만 시합을 한다며 포기하더라

 
"한국복싱이 다시 흥행하고 슈퍼스타를 배출하려면 30년 전 사고방식에 갇혀있는 프로모터들의 사고가 바뀌어야 합니다. 얼마 전 화끈한 공격력으로 인상적인 시합을 했던 한국챔피언 K선수에게 어렵게 IBF 타이틀 시합을 잡아 제시한 적이 있습니다. 매니저에게 국제전화를 했더니 '우린 오직 WBA, WBC만 한다. IBF 같은 기구들 시합을 하면 권투가 죽는다'고 하더군요. 전 세계적으로 웃음거리가 될 말입니다. 지금 IBF나 WBO의 위상이 어느정도인지 아십니까? 본고장 에선 이미 WBA, WBC를 눌렀습니다.

 
그러면 IFBA같은 여자 복싱은 뭡니까? 여자 복싱이 정말 인기입니까? 쉽게 스폰서를 마련하기 위한 명분으로 여자 세계 타이틀전을 하면서 남자는 마이너 기구 세계타이틀전이라 안 된다고 하면 안되죠. 권투협회는 자신들의 임무를 잘하고 있다고 생각할지 모르나 지금 인터넷을 보면 팬들의 불만이 극에 달했습니다.

 
차근차근 숨겨진 많은 유망주들을 발견해 한 명이라도 더 좋은 무대에 올리도록 힘쓰겠습니다. 그게 매치메이커의 역할이죠. 그런 활동이 쌓이다 보면 언젠가는 프로모터로서 정상에 서는 날도, 한국 복싱이 세계 무대에 꽃을 피우는 날도 올 거라 믿습니다. 한국 복싱의 수준이 세계에 내놓으면 어느 정도인지 김지훈이 보여주고 있고 이재성, 손창현이 앞으로 보여 줄 것입니다. 한국 복싱에 희망의 불씨와 소금이 되도록 노력하겠습니다."
 
한국복싱의 심각한 위기상황은 세계챔피언이 있고 없고의 문제나 관중이 없어서의 문제가 아니라, 선수가 없다는 것이다. 권투협회 내분으로 신인왕전이 올해도 열리기 힘든 상황이니 선수층은 더더욱 얇아지는 상황이다.
 
게다가 신인왕 결승전에 오른들 상금은 40만원이고, 서너번 예선전은 고작 20만원인데 그마저도 선수 몫은 11만원뿐이라니 교통비, 숙식비를 감안하면 자기 돈이 더 들어가는 셈이다. 한국 챔피언 타이틀전도 마찬가지다. 한국 챔피언 획득 시에는 100만원 중 57만원을 받는다. 일년에 시합이 두 번 있으면 다행이니, 연봉으로 치자면 200만원 되는 것이다.
 
이런 상황이므로 해외 진출이야말로 한국 복서들에게는 새로운 돌파구가 아닐 수 없다. 본고장에서 경험도 쌓고 비행기표를 제외하고도 몇 백 만원을 벌 수 있는 기회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최근 세계 최고의 선수로 등극한 매니 파퀴아오가 아시아 출신이라 아시안 복서의 본고장 진출의 여건은 과거 그 어느 때보다도 좋다.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실력이 뒷받침되어야만 가능한 일이다. 김지훈에 이어 한국챔피언 출신의 손창현, 이재성의 미국 경기를 주선하는 등 고군분투하는 이현석의 바람처럼 한국 복싱이 새로운 활로를 개척하길 바란다.

이현석 김지훈 이재성 손창현 한국복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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