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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일(한국시간)오후 남아공 포트 엘리자베스 만델라 베이 스타디움에서 열린 2010 남아공월드컵 B조 대한민국과 그리스의 경기에서 박지성이 후반 추가골을 성공하며 기뻐하고 있다.
 12일(한국시간)오후 남아공 포트 엘리자베스 만델라 베이 스타디움에서 열린 2010 남아공월드컵 B조 대한민국과 그리스의 경기에서 박지성이 후반 추가골을 성공하며 기뻐하고 있다.
ⓒ 뉴시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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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딸은 태어난지 23개월 됐다. 다음 달이면 두 돌이다. 대외적 닉네임은 '이쁜이', 그리고 주로 타인들이 딸에 대해서 언급하는 문장들은 "너무 귀엽다", "딸 키울 맛 나겠다" 등이다.

하지만 내부적으로는 '무법자', '폭군', '독재자', '네로 황제' 등으로 불린다. 엄마, 아빠가 실제로 가장 많이 내뱉는 문장은 "우이씨~ 이걸 그냥~"이다.

얼핏 보면 "아이가 무슨 잘못이냐"고 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놀고 먹고 자고 심술 부리고 깽판 치고 협박하고 노려보고 분명 욕이라고 단정지을 만한 '우주 언어'를 내뱉는 것을 볼 때, 그리고 이 모든 것이 일관성 있게 반복되는 것을 볼 때 하나의 '주체'로서 아주 능동적으로 활동하고 있는 아주 영리한 생명체임이 분명하다. 

최근에는 '자기가 하고 싶은 것'을 어떻게든 쟁취하겠다는 신념과 투지가 하늘을 찌른다. 전략도 다양하며, 상황에 따라 전술은 변화무쌍하다.

주전략은 '무조건 울기'이지만 상황에 따라 물건 집어던지기, (물건이든, 사람이든) 물어뜯기, 자기 머리를 바닥에 박는 자해, 목과 다리에 힘을 주고 요가하기(완전 부러질 듯한 자세가 나옴), 화장실이나 현관 같은 더러운 곳에 드러눕기, 의자에 억지로 올라서서 봉봉 타기, 그리고 아주 가끔 '불쌍한 눈빛으로 한없이 매달려 있기' 등의 부가작전을 능수능란하게 구사한다.

새삼 이런 아기와 대부분의 시간을 함께 해야 하는 아내가 대단해 보이고 이땅의 엄마들이 존경스럽다. 모 CF 광고처럼 "네가 했던 일을 기억한다면 미안해서라도 엄마에게 그러지 못할 거야"라는 말이 정답이다. "우리 아기가 자는 모습이 너무 이뻐요"라는 말이  괜히 나온 게 아니다.

한국 대 그리스전... 딸이 뽀로로를 보겠단다

월드컵 시즌이다. 축구의 장점은 '누구나 캐스터'가 될 수 있다는 거다. 예를 들어, 야구는 투수가 긴장된 상황에서 '삼진'을 잡아내거나, 혹은 타자가 '역전타' 정도를 때려 주어야지 흥분할 상황이 된다. 야구 시합이 평균 3시간 정도라면 30분 내외가 이러한 초절정 흥분 상태가 된다.

그 외에는 다들 '감독자'의 입장에서 다들 '해설자'로 느긋하게 상황을 분석하는 특징이 있다. "지금 슬라이더를 던지면 좋을 거야~", "지금 기습 번트 어때?", "양준혁이 지금 나올 타이밍인데~"라는 식이다. 아주 구체적이고 전문적인 '노가리'를 깐다는 거다.

하지만 축구는 철저히 '캐스터'로서의 역할이 관람객에게 부과된다. 전문적인 '해설'이 중요하지 않다는 거다. 그냥 소리만 질러도 한없이 동화될 수 있다. 요령도 간단하다. "슛 해야지~ 슛 하라니까~ 슛 왜 안하노!"를 오천 번. "패스해라~ 패스하라고! 젠장할, 패스를 그렇게 하면 어떡하노!"를 삼천 번, 그리고 "아이 씨X, 이 개발, 우라질~"이라는 한탄 이백 번 정도만 조합되면 90분은 금방 흘러간다.

축구가 스트레스도 풀고 세대간 화합도 이끌고 가정의 화합도 도모한다는 것은 지어낸 이야기가 아니다. 그만큼 '함께' 흥분하고 '함께' 토론하고 '함께' 기뻐하고 슬퍼할 가능성이 무엇보다 높은 스포츠가 바로 축구다. 야구처럼 '복잡한 스포츠'는 이런 카타르시스를 분출시키는 지점이 너무 다양하지만 축구는 아주 심플하다. 그래서 전 세계적 운동이 되는 듯하다.

어쨌든, 축구를 이렇게 보아야 제 맛인데... 23개월 내 딸, 갑자기 '뽀로로'를 틀어달란다. 그것도 한국과 그리스의 운명의 1차전. 그것도 양팀 선수들이 입장해서 국가 연주가 시작될 때 리모콘을 잡고 "뽀~"를 외친다.

평소에는 딸아이가 "뽀로로"를 세 번 외치기 전에 해당 채널을 찾는 시늉이라도 해야 한다. 그 이상 넘어가면 '소프라노 성악가'가 '난동'을 부린다고 생각하면 된다. "꺅~"으로 시작해서 "꺅~"으로 끝나는 '생떼'. 당해 보지 않으면 이것이 얼마나 무섭고 동네 창피인 줄 모른다.

그런데 엄마, 아빠가 간이 부었는지 이번에는 개갰다. 월드컵이 사람을 용감하게 하더라. 물론 아주 무모한 용기였다. 한 다섯 번을 그냥 침묵했는데... 결국은 아주 난리가 났다.

들고 있는 리모콘으로 하나밖에 없는 15만 원짜리 15인치 TV의 브라운관을 사정없이 내리친다. 교도소 집단 난동 같은 데서 볼 수 있는 장면이다. 아니면 전경들이 방패로 땅을 치면서 위압을 주는 모습? 그래 또 우리가 졌다. 그렇게 '뽀로로'를 보고 있는데 동네가 시끄러워진다. 아, 한 골 넣은 것 같다. 

박지성이 골을 넣었지만... 입 틀어막은 우리 부부

캡틴 박지성이 골을 넣은들 나랑 무슨 상관이냐 말이다. 잠 자는 나를 건드리지 마라! 나에게 오직 '뽀로로'뿐.
 캡틴 박지성이 골을 넣은들 나랑 무슨 상관이냐 말이다. 잠 자는 나를 건드리지 마라! 나에게 오직 '뽀로로'뿐.
ⓒ 오찬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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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시간 정도가 지나니 딸아이도 '뽀로로'가 지겨운 듯한 표정이다. 당연하지, 지금까지 수천번은 더 봤는데. 혼자 책장에 가서 논다. 이미 축구는 후반전이 시작된 상태. 이제 준비해놓은 '치맥(치킨과 맥주)'을 즐기면서 축구시합에 몰입해 보자!

그 순간, 딸이 그냥 TV 앞에 와서 엎어진다. 그리고 1분도 안 되어서 주무신다. 그러면 부모가 해야 될 일이 있다. 여기 잠을 자는 아기에게 모든 상황을 맞추는 것이다. 천사를 극진히 모셔야 된다. 깨면 천사가 아니니까.

이 상황을 깰 어떤 변수도 허용되어서는 안 된다. 일단 '소등' 및 '모든 음소거'다. 그리고 일상적 대화는 '낮은 목소리'로 한다. 물론 이는 '아기'를 위한 것이 아니라 단연코 '부모'를 위한 거다. 갑자기 침실로 이동시켜서도 안 된다. 최소한 1시간은 내버려 둬야지 '골아 떨어진' 상태가 된다. 그 전의 터치는 '자폭' 행위다. 녀석의 누운 곳이 곧 그날의 '주의장소'가 된다.

그 순간 박지성이 골을 넣었다. 하지만 기뻐하지 못했다. 고함 지르지 못했다. 16강보다 더 중요한 것은 이 녀석을 깨우지 않는 거다. 그렇게 볼륨  '제로', 캐스터 역할 '제로'의 상태에서 축구를 본다. 아무 느낌이 없다. 무엇보다 입에서 '거친 말'들이 나올 수 있는 일상의 몇 안 되는 기회를 놓쳐 버리니 재미가 없다. 흥분을 하지 않으니 맥주와 치킨은 너무나 어색하다.

이게 아빠의 삶인가 보다. 나중에 복수하고 말 테다.

ps) <신생아 아빠의 눈치껏 올림픽 시청하기>를 링크겁니다. 그때는 공 하나하나마다 '물을 들이켜서' 삼키지 않은 상태에서 보았습니다. 물이 입에 있으면 '괴성'을 못 지르니까요. 2008년 여름, 참 많은 물을 마셨답니다. 하지만 축구는 야구와 다르네요. 어떻게 해야 하나요?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개인블로그(http://blog.daum.net/och7896)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태그:#육아, #월드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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