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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에 들어서서 그의 얼굴을 보는 순간, 페리 앤더슨이 에드워드 톰슨을 묘사한 구절이 떠올랐다. 젊은 시절부터 톰슨이 실제보다 나이가 들어보였다는 것을 회상하면서 앤더슨은 그의 얼굴을 거친 비탈과 계곡에 비유했다. 물론 내 앞에 있는 사람은 톰슨보다는 굴곡이 덜했다. 하지만 오랜 삶의 흔적이 스며들어 있는 것은 분명했다.

내가 만난 사람은 한국 진보 운동의 살아 있는 역사이자, 최고의 목소리라 할 수 있는 백기완 선생이었다. 아니 정확하게 말하면 나는 금민 후보, 선대위원장인 김세균 서울대 교수 등이 백기완 선생을 만나러 간 자리에 사진을 찍기 위해 동행했다. 그리고 이번이 두 번째 만남이었다. 며칠 전 금민 후보 선거 사무소 개소식에 백기완 선생이 오셨을 때도 사진을 찍었다. 하지만 파인더를 통해 그를 바라본 것을 실무적인 일이었다고 치부하면 호흡을 느끼면서 만난 것은 처음이다.

16일, 금민 후보와 함께 대학로 통일문제연구소를 방문해 만난 백기완 선생
▲ 백기완 선생 16일, 금민 후보와 함께 대학로 통일문제연구소를 방문해 만난 백기완 선생
ⓒ 윤호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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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기완 선생은 우리 일행에게 개소식에 왔던 일이 당신으로서는 특별한 일이라 했다. 정당 행사에 처음으로 참석했다는 것이다. 이번 선거에서 금민 후보를 지지한다는 것을 에둘러 말하는 것 같았다. 그러면서 은평을 선거에 나선 이재오의 옛날 모습 이야기나 장상에 대한 평가를 비속한 언어로 쏟아냈다. 말씀을 걸게 하시지만 언제나 시대의 핵심만을 집어내는 듯했다. 금민 후보가 진보를 대표해서 이번 선거에서 꼭 승리해야 하는 이유를 말하는 것 같았다.

하지만 내 귀에 더 들어온 것은 그 이후에 선생이 어떤 때는 차분하게, 어떤 때는 격한 어조로 내뱉은 인생 이야기였다. 선생은 자신의 덧이름[별명]이 울보이자 쌍도끼라고 했다. 울보는 내가 개소식 때 찍은 당신의 모습이 꼭 우는 것 같다며 꺼낸 이야기였다. 이때 울보는 가슴의 인간을 말하는 것이다. 이른바 사회과학적 인식 이전의, 사회과학적 인식 이후의 행동의 동기 말이다. 바로 옆에서 굶주리고 있는 사람이 배불리 먹는 것, 아파하는 사람이 낫는 것이 그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이야기이다. 물론 흔히 들을 수 있는 이야기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진보 운동가들이 지니고 있는 지적 함정을 삶의 경험에서 지적하는 그의 말은 작은 방의 공기를 팽팽하게 만들었다.

이런 의미의 울보이기 때문에 쌍도끼라는 덧이름이 어색하지 않게 들렸다. 두 개의 도끼는 말과 주먹이다. 때론 말의 폭풍으로, 때론 주먹의 번개로 부당한 것을 서슴없이 공격하는 것이 그가 지닌 인생의 무기였다. 이것이 거친 뒷골목에서 시작해서 한국 현대사의 골짜기를 지나 민중의 대통령 후보, 진보 운동의 어른으로 이어지는 그의 삶을 꾸려온 힘이었을 것이다.

백기완 선생
▲ 백기완 선생 백기완 선생
ⓒ 윤호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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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이런 인생 이야기를 꺼낸 이유가 있었다. 그것은 진짜 진보를 만들라는 당부였다. 그는 무심한 듯 내뱉었지만, 현실을 꿰뚫고 있었다. 진보 운동의 단결이 중요하지만, 민주노동당, 진보신당, 사회당 등이 기능적으로 결합해서는 아무 일도 되지 않는다고 거듭 강조했다. 백기완 선생이 말한 진짜 진보는 내 식대로 말하자면, 두 가지를 갖추어야 한다. 하나는 현실을 정확하게 보고, 대중적으로 말할 수 있는 능력이다. 다른 하나는 민중에 대한 사랑, 동지에 대한 사랑, 다시 말해 풍부한 감수성이다. 백기완 선생이 특히 강조한 것은 후자였다. 이 대목에서 그는 자기와 오랜 시간 함께 했던 사람, 지금은 어느 고궁에서 야간 경비 일을 하는 친구 이야기를 했다. "배운 건 없지만, 그 사람이 진짜 사회주의자야." 아마 그 사람도 삶의 감성이 넘치는 사람이었나 보다.

이런 그의 이야기는 끊어질 듯하면서도 이어지고 있었다. 김세균 교수가 끼어들지 않았으면 우리는 아마 장맛비가 세차게 퍼붓는 오후 내내 그의 인생 여행을 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분초가 아까운 선거 운동이 아니었다면 시간이 잠시 멈추는 것도 나쁘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자리를 뜰 수밖에 없었다.

왼쪽부터 안효상 공동선대본부장, 방현수 수행팀장, 김세균 공동선대위원장, 백기완 통일문제연구소장, 전원배 공동선대본부장, 금민 은평을 국회의원 후보.
▲ 백기완 선생과 금민 선본의 기념촬영 왼쪽부터 안효상 공동선대본부장, 방현수 수행팀장, 김세균 공동선대위원장, 백기완 통일문제연구소장, 전원배 공동선대본부장, 금민 은평을 국회의원 후보.
ⓒ 윤호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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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에 백기완 선생이 낸 자서전에 추천사를 쓴 김세균 교수는 그의 삶을 '서사시'라고 했다. 그 책에 담긴 절망과 좌절과 패배의 기억들, 바로 그를 살게 한 그 기억들은 분명 한 편의 서사시이리라.

그런데 서사시는 무릇 비극으로 끝나는 법. 우리의 금민 후보는 그 비극의 끝을 새로운 진보의 첫 걸음으로 만들 수 있을까? 빗줄기가 잠시 멈춘 틈에 이런 질문이 내 입가를 맴돌았다.


태그:#금민, #백기완, #은평을, #진보대연합, #김세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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