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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엠마 (웬디 케셀만 글,바바라 쿠니 그림,강연숙 옮김,느림보 펴냄,2004.2.17./8500원)

할머니는 할머니 그대로 곱습니다. 할아버지는 할아버지 그대로 멋있습니다. 할머니가 대학교수이거나 글을 쓴다고 해서 한결 곱다고 느끼지 않습니다. 할아버지가 자전거를 즐기거나 사진을 찍는다고 해서 더욱 멋있다고 느끼지 않습니다.

한 해 두 해 더 살아가는 동안 내 삶을 내가 어떻게 사랑하며 껴안아야 할는지를 차근차근 깨닫고 배웁니다. 처음부터 모두 깨달을 수 없는 내 삶이며, 한꺼번에 통째로 배울 수 없는 내 나날입니다.

어쩌면 나 스스로 내 삶을 꾸밈없이 받아들이는 가운데 할머니들 삶은 할머니들 삶대로 받아들일 수 있구나 싶습니다. 나 스스로 나라는 사람 삶이 대단하지 않음을 알아채면서 내가 쓰는 글과 내가 찍는 사진을 나부터 스스럼없이 좋아할 수 있을 때에 비로소 할머니들이 저마다 다 달리 꾸리는 삶이 얼마나 고운가를 헤아릴 수 있구나 싶어요.

도시 아파트를 마다 하고 시골집에서 지내며 허리가 구부정한 채 농사일을 잇는 할매와 할배를 떠올립니다. 이분들은 땅을 밟으며 땅을 만지는 일을 합니다. 굳이 이름날 일이 없고, 따로 이름날 일을 살피지 않습니다. 그러나 땅을 밟으며 땅을 만지는 일은 당신 삶을 어여삐 가꾸어 줍니다. 도시에서 텔레비전을 보거나 양로원에 나가 보거나 하는 일은 당신 삶을 어여삐 가꾸어 주지 않습니다.

도시에는 아파트와 골목집이 있습니다. 아파트와 골목집 사이에는 빌라와 다세대주택이 있습니다. 아파트에서 살아가는 할매와 할배는 꽃을 기르거나 키우기 만만하지 않습니다. 아파트가 당신들만 살아가는 터전일 때에는 신나게 꽃을 기르거나 키우겠지요. 아파트가 당신 딸이나 아들 집일 때에는 눈치를 살피거나 보겠지요.

골목집에서 살아가는 할매는, 또 빌라에서 살아가는 할배는, 당신 집이며 골목이며 온통 꽃밭과 텃밭으로 바꾸어 냅니다. 관청 공무원부터 개발업자와 사진작가에다가 당신 딸아들마저 당신들 꽃밭과 텃밭을 어여삐 바라보며 아리땁게 받아들이지 못합니다만, 그러거나 말거나 당신들은 당신들 살림터를 꽃밭터로 일굽니다.

도시에서 골목마실을 하며 사진을 찍을 때마다 늘 고맙다고 느낍니다. 할매와 할배가 골목동네를 말끔하며 정갈한데다가 맑고 밝도록 사랑해 주고 있기에 늘 좋은 사진을 얻어요. 아니, 좋은 사진이라기보다는 할매 웃음과 할배 눈물이 그득 담은 삶자락 사진을 얻어요. 굳이 할매와 할배 얼굴과 손등을 사진으로 담지 않더라도 할매와 할배가 어떻게 지내는가를 꽃그릇 하나와 빨래 한 점에서 읽습니다.

겉그림.
 겉그림.
ⓒ 느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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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족이 찾아오면 할머니는 행복했어요. 푸딩과 초콜릿 크림 파이를 굽고 집안 곳곳에 꽃도 꽂아 놓았지요. 할머니의 가족은 선물을 많이 가져왔지만 오래 머무르지는 않았어요. 할머니는 혼자 지낼 때가 많았지요 … 엠마 할머니의 하나뿐인 친구는 주황색 고양이, 호박씨였어요. 할머니와 호박씨는 밖에 앉아서 함께 햇볕을 쬐었어요. 딱따구리가 나이 든 사과나무를 쪼는 소리도 들었고요 ..  (3, 5쪽)

제 나이 스물여섯에 할매 삶을 오롯이 읽을 수 있었으리라고는 여기지 않습니다. 내 나이 열여섯일 적에 할배 삶을 소롯이 들여다볼 수 있었으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다만, 철이 없던 때에는 철이 없는 대로 바라보고, 철이 좀 들었다 싶은 때에는 철이 좀 들었다 싶은 대로 할매와 할배 삶을 사랑하자고 다짐합니다. 곰곰이 따지면, 내가 할매 삶을 있는 그대로 보면서 아낄 수 있자면 내 삶을 나부터 있는 그대로 보면서 아낄 수 있어야 하거든요.

어제 저녁 무렵, 올해로 여든일곱 해를 살아가는 그림 할머님을 만납니다. 인천 화평동 한켠에 자리한 '평안 수채화의 집'에서 그림을 가르치며 하루하루 지내는 할머님은 어제 하루도 그림그리기를 조용히 즐기면서 마음속으로 꾸준하게 비손을 올렸다고 합니다. 그림을 그릴 수 있어 고맙고, 이 좋은 사람들을 당신과 함께 그림그리기를 나누며 마음을 주고받도록 이끌어 주어 고마우며, 이 고요하고 정갈한 그림그리기에 당신 삶을 바칠 수 있어 고맙다고 비손을 올린다고 합니다.

그림 할머님은 당신 그림을 내다 팔아서 '앞 못 보는' 사람들 살림살이를 살짝 거드는 일을 한결같이 잇습니다. 그림을 가르치며 받는 돈으로 당신 살림살이를 요조모조 꾸립니다. 여든여섯일 때에도 그랬고 여든일곱일 때에도 그러한데, 여든여덟을 맞이하고 여든아홉이나 아흔을 맞이하여도 할머님 그림그리기는 이어지리라 봅니다. 어쩌면, 마지막 숨을 몰아쉬는 날까지 붓 한 자루를 당신 바른손에 살며시 쥐실 테지요.

그림 할머님은 늘 갖가지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또 그림 할머님은 사람들이 들려주는 갖가지 이야기를 가만가만 듣습니다. 당신은 당신대로 살아온 나날을 조곤조곤 들려주고, 당신과 마주한 사람은 저절로 이야기샘이 솟아 내 이야기를 한 올 두 올 풀어냅니다.

.. 엠마 할머니는 소박한 것들을 좋아했어요. 눈이 현관 문턱까지 쌓이는 것을 바라보기 좋아했고요. 앉아서, 고향인 산 너머 작은 마을을 생각하기 좋아했어요. 그런데 할머니가 좋아하는 것들에 대해서 이야기하면, 가족 모두는 웃으면서 이렇게 말했어요. "불쌍한 할머니, 이젠 정말 늙으셨어." ..  (7쪽)

그림 할머님하고 만나서 나눈 이야기를 가만히 떠올리며, 오늘 있던 일을 편지로 적어 충주 산골집에서 아이랑 지내는 집식구한테 띄웁니다. 언제나 세 식구가 함께 움직였는데 어제오늘만큼은 아빠 혼자 서울에 볼일 보러 나오고 인천으로 골목마실 하러 움직입니다. 혼자 움직이니 한결 가뜬하다 할 만하지만, 이래저래 사람 만나고 술 한잔 마신다거나 자전거를 타기에 좋을는지 몰라도, 골목마실을 하며 마주하는 좋은 이웃 좋은 삶을 혼자만 눈과 가슴과 사진으로 담는 일은 적이 아쉽습니다. 한식구라면 좋은 일도 궂은 일도 함께할 노릇이잖아요. 이 얘기 저 얘기 스스럼없이 나누고, 이 놀이 저 놀이 나란히 즐길 노릇이에요.

아이랑 함께 다니면 아이를 보느라 고단하다고들 말합니다. 그래요, 참 고단합니다. 마음을 쓰거나 몸을 쓸 일이 많으니 고단할밖에요. 그러나 아이랑 살아가며 마음과 몸을 쓸 곳이 많으니 마땅히 고단합니다. 고단함을 꺼릴 까닭이 없어요. 그예 받아들이며 즐길 고단함입니다. 마음이든 몸이든 고단할 하루하루인데, 이렇게 고단할 하루하루인 까닭에 하루하루에 뜻이 있습니다. 언제나 다른 새 하루로 찾아오고, 늘 새삼스러운 하루를 즐깁니다.

아빠가 보는 곳을 아이가 보고, 엄마가 보는 자리를 아이가 봅니다. 이 땅 아이들이 씩씩하고 슬기로우며 튼튼한데다가 곱게 자라자면, 아이 아빠와 엄마 된 사람들이 노상 아이랑 함께 복닥이며 모든 일놀이를 나란히 즐겨야지 싶어요. 텔레비전을 보든 밥을 하든 걸레질을 하든 셈틀 앞에 앉든, 어버이 된 이는 '나만 누려야지' 하는 생각이 아니라, '내 살붙이랑 같이 즐겨야지' 하는 마음밭이어야지 싶어요.

모든 삶을 아이하고 나누어야지 싶습니다. 어떤 이야기라도 아이랑 주고받아야지 싶습니다. 사랑을 담고 믿음을 보태야지 싶습니다. 아름답다 일컫는 삶이든 거룩하다 우러르는 삶이든 빛난다 여기는 삶이든, 바로 우리들 하루하루 수수하게 보내는 나날에 좋은 뜻과 고운 값이 있다고 느껴요.

.. 창가에 앉아서 기억나는 대로 고향 마을을 그렸어요. 엠마 할머니는 그림을 다 그리고 나서 벽에 걸려 있던 그림을 내려놓고 자기가 그린 그림을 걸었어요. 그리고 날마다 자기 그림을 바라보며 빙긋이 웃었지요 ..  (13쪽)

그림책 <엠마>를 들여다보면서 이런 느낌 저런 생각이 한결 짙으며 한껏 푸르게 자리잡습니다. 그림책 <엠마>에 나오는 그림 할매 엠마는 그림을 그렸기 때문에 당신 삶을 한껏 빛내며 마무리한다고 느끼지 않습니다. 엠마 할매는 그림 할매 아닌 수수한 할매일 때에도 그지없이 어여뻤어요. 여느 할매인 엠마 할매는 고양이 호박씨하고 오랜 능금나무랑 벗삼으면서 날마다 웃음으로 보냈어요.

다만, 엠마 할머니네 딸아들과 손자들은 이러한 웃음을 읽지 않았습니다. 모두들 너무 바빠요.

참 바쁜 사람들인데요, 무엇 때문에 이리도 바빠야 하나요.

돈을 버느라 바쁜가요. 어른들은 돈을 버느라 바쁘고, 아이들은 학교나 학원을 다니느라 바쁜가요. 그렇다면 궁금해요. 어른들은 왜 돈을 벌어야 하지요. 돈은 얼마나 벌어야 하지요. 번 돈은 어디에서 무엇을 하면서 쓰지요.

아이들은 학교나 학원을 왜 다니지요. 학교나 학원을 다녀서 나중에 무엇을 하고 싶은가요.

내 어머니 삶을 고스란히 바라보면서 받아들일 줄 모른다면, 제아무리 돈을 많이 벌거나 크고 잘빠진 자가용을 몬다 한들 무슨 뜻이 있나 궁금해요. 내 할머니 삶을 꾸밈없이 마주하면서 맞아들일 줄 모른다면, 제아무리 학교 성적이 빼어나 손꼽히는 대학교에 들어가 멋진 학문을 이루었다 한들 무슨 값이 있나 궁금해요.

.. 할머니는 고향인 산 너머 마을을 그리고 또 그리고 자꾸자꾸 그렸어요 ..  (25쪽)

엠마 할매는 그림 할매가 되었기에 아름답지 않습니다. 우리 세 식구가 틈틈이 찾아뵈며 인사드리는 인천 화평동 그림 할매는 여든일곱 나이에까지 붓을 붙잡고 있어서 멋있지 않습니다. 당신들은 그예 어여쁜 할매입니다. 모두모두 매우 고운 사람입니다.

엠마 할매는 고운 할매이기에 당신 고향마을을 떠올리며 자꾸자꾸 그립니다. 그림을 그리지 않던 때에는 당신 살림집을 당신 손으로 예쁘게 꾸몄고, 그림을 그리는 때에는 당신한테 기쁘고 벅찬 지난날을 되새기며 그림 한 점 그립니다. 인천 화평동 그림 할매는 멋진 할매이기에 당신이 사랑하는 꽃을 그리고 또 그리며 자꾸 그립니다. 그토록 살림이 팍팍했어도 스물두 식구를 먹여살린 화평동 그림 할매는 그 작고 가녀린 몸뚱이로 온누리를 다부지게 붙안았습니다.

저는 고작 세 식구 먹여살리는 살림을 꾸립니다. 스물두 식구를 먹여살리던 할머니와 견주면 참 손쉬워 보인다 할 만한 살림일는지 모르지만, 스물두 식구는 스물두 식구이고 세 식구는 세 식구예요. 저한테는 스물두 식구 살림이든 세 식구 살림이든 매한가지랍니다. 한 사람 한 사람이 모두 고마우며 반갑습니다. 저마다 좋으며 즐겁습니다.

그림책 <엠마>를 덮으며 생각합니다. 그림을 그리지 않았어도 어여쁜 할매였기에 그림을 그리면서 한결같이 어여쁜 할매인 엠마와 같은 분들은 우리 둘레 어디에서나 당신 삶을 아리땁게 일구며 살아가신다고.

덧붙이는 글 | - 글쓴이 누리집이 있습니다.
[우리 말과 헌책방 이야기] http://cafe.naver.com/hbooks
[인천 골목길 사진 찍기] http://cafe.naver.com/ingol

- 글쓴이는 다음과 같은 책을 써냈습니다.
<어른이 되고 싶습니다>(양철북,2010)
<골목빛, 골목동네에 피어난 꽃>(호미,2010)
<사진책과 함께 살기>(포토넷,2010)
<생각하는 글쓰기>(호미,2009)
<책 홀림길에서>(텍스트,2009)
<자전거와 함께 살기>(달팽이,2009)
<헌책방에서 보낸 1년>(그물코,2006)
<모든 책은 헌책이다>(그물코,2004)
<우리 말과 헌책방 (1)∼(9)>(그물코,2007∼2010)



엠마

바바라 쿠니 그림, 웬디 케셀만 글, 강연숙 옮김, 느림보(2004)


태그:#그림책, #그림읽기, #책읽기, #삶읽기, #엠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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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말꽃(국어사전)을 새로 쓴다. <말꽃 짓는 책숲 '숲노래'>를 꾸린다. 《쉬운 말이 평화》《책숲마실》《이오덕 마음 읽기》《우리말 동시 사전》《겹말 꾸러미 사전》《마을에서 살려낸 우리말》《시골에서 도서관 하는 즐거움》《비슷한말 꾸러미 사전》《10대와 통하는 새롭게 살려낸 우리말》《숲에서 살려낸 우리말》《읽는 우리말 사전 1, 2, 3》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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