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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을 다녀온 후, 1년 만에 여행 이야기를 정리했습니다. 모두 5회에 걸쳐 기사를 올릴 예정입니다. 부족하지만, 소중히 정리해 올립니다. 앞으로 올릴 여행기의 목차와 아내와 함께 다녔던 곳은 기사 아래에 있습니다. - 기자 주

낮은 산인데도 정상에 오르니 들판이 한눈에 들어오지 않을 만큼 펼쳐졌다.
▲ 전남 영암. 낮은 산인데도 정상에 오르니 들판이 한눈에 들어오지 않을 만큼 펼쳐졌다.
ⓒ 이시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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섬과 노을

첫사랑이라도 시작했다면 누구나 기를 쓰고 일출이나 일몰 장면을 보기 위해 동해든 서해든 달려간다. 이제 막 사랑을 시작한 연인과 늦은 시간까지 술에 취해 있다 밤기차를 타고 동해로 달려간 추억을 지닌 사람도 있을 것이다. 지갑이 두둑하다면 총알택시를 타는 무모한 짓도 감행한다. 마치 함께 일출(몰) 장면을 봐야 연인으로 인정받는 면허를 발급 받을 수 있는 것처럼 말이다.

그렇다고 딱히 대단한 장면이 눈앞에 펼쳐지는 것도 아니다. 애국가 나오는 텔레비전 화면과 다를 게 없다. 그럼에도 사랑하는 이가 손잡을 수 있는 거리에 있다면 그 정도의 낭만을 즐기는 건 자유이거나 특권이다. 실은 나도 마찬가지였다. 답사를 갔던 경주. 숙취가 찌꺼기처럼 남아 몸은 힘들었어도 수작을 걸고 싶은 여자 후배가 일출을 보고 싶다기에 기를 쓰고 따라갔던 기억이 있다. 수작의 결과는 별 볼일 없었지만.

게으른 우리 부부는 여행을 하면서 일출보다는 일몰을 더 많이 봤다. 그 가운데서도 우이도에서 본 일몰이 가장 아름다웠다. 우이도를 가기 위해서는 목포에서 배를 타야 한다. 배는 하루에 두 번 떠나 우이도까지는 4시간이나 걸린다. 섬은 작다. 작은 섬이니 사는 주민도 많지 않다. 집이 많지 않아도 민박이 여럿 있어 머물기에 좋은 곳이었다.

낮은 구릉 주위에 마을이 있다. 담장은 어른 가슴께를 넘지 않고, 아무에게나 꼬리를 흔드는 지조 없는 갈색 강아지가 골목을 뛰어다닌다. 민박집 주인은 낚싯대 하나 메고 멀리서 온 여행자를 위해 물고기를 잡아오는 곳. 여든을 넘긴 교회 전도사는 뭍에 나가서 걸치고 온 술 몇 잔을 이기지 못해 교회 마이크로 알 수 없는 노래를 흥얼거리는 곳. 거기가 우이도다.

마을에서 조금 걸으면 작은 해수욕장이 나온다. 해가 질 때쯤 이곳에 서 있으면 누구라도 지금껏 보지 못한 아름다운 노을을 볼 수가 있다. 그 노을이 얼마나 아름다운지를 말하기에 나의 문장력은 턱없이 부족하다. 기대도 하지 않던 노을을 보는 순간, 우리는 오랫동안 말을 하지 못했다.

아내는 노을을 보며 무슨 생각을 했을까. 소리 없는 노을은 서두르지 않고 천천히 아내를 위로해 주었다. 노을을 보던 아내의 뒤에서 나 또한 위로를 받았다. 찔끔 눈물을 흘렸을까. 그러다 어두운 해변을 이리저리 뛰기도 하고, 산책도 했다. 많은 말을 나누진 않았다. 단지 맨발로 고운 모래를 함께 밟고, 조용한 파도에 발도 담그고 한참을 그러다 숙소로 올라왔다. 늦게 먹은 저녁이 그날따라 유난히 맛났다. 산 너머에서 뜬 달이 우리에게 지친 마음을 내려놓고 편히 쉬라 말해주었다.

우이도에서 본 노을. 잠시 말이 필요 없던 노을.
▲ 전남 우이도 해변. 우이도에서 본 노을. 잠시 말이 필요 없던 노을.
ⓒ 이시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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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소하지만, 매우 중요한 우리 여행의 노하우

여행을 하면서 몇 가지 평범한 노하우를 얻었다. 그 노하우란 행복한 여행을 위해서는 매우 중요한 지식이었다.

여행자에게 신발과 가방이 가장 중요한 물건이라는 사실은 누구나 다 안다. 여행 전 나는 배낭 하나를 구입했다. 신발은 평소 신고 다니던 운동화면 충분할 것 같았다. 아내는 트레킹화 한 켤레를 구입했다. 가방과 신발 모두 빠듯한 살림에 적지 않은 값으로 구입했지만, 여행을 시작하자마자 잘한 결정이었다고 깨달았다. 아내에게도 배낭 하나를 사라고 권했지만, 필요 없다고 고집을 부렸다. 아내의 고집은 여행을 시작하고 하루 만에 탈이 났다.

늦여름 여행이라 겨울보다는 옷가지가 적었음에도 오랜 여행이라 이것저것 넣다보니 가방 무게가 꽤 나갔다. 한두 시간 정도는 견뎠지만 이내 어깨가 아프고, 금세 힘들어 했다. 결국 여행 첫날 필요 없는 물건을 골라 부모님 댁으로 보냈다. 여행이란 필요한 '모든' 물건을 지니고 다니는 게 아니라 하나라도 빼고 가볍게 다녀야 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러고도 가방 무게를 견디지 못해 결국 광주로 들어가 새로 배낭을 구입했다. 덕분에 여행 내내 편하게 다닐 수 있었다.

가을로 접어드는 9월과 10월에도 모기는 극성이다. 모기뿐만 아니라 이름 모를 벌레들이 우리를 공격했다. 주된 공격 대상은 나였다. 팔과 다리에 벌레들이 다녀간 흔적이 마치 여행의 훈장처럼 고스란히 남았다. 발에 생긴 물집은 약과였다. 벌레가 지나간 자리는 여지없이 간지럽고 피가 나 여간 신경이 쓰이는 게 아니었다. 해서 우리는 모기향과 벌레물린 곳에 바르는 약과 스프레이를 항상 지니고 다녔다. 길을 걷다 쉬기 위해 그늘을 찾아 들어가면 스프레이를 뿌리고 약을 바르기 일쑤였다.

더위에 땀이 비오듯 쏟아져도 긴팔 옷을 입고 선크림을 바르는 것도 기본이다. 그러지 않았다면 경미한 화상이라도 입었을 것이다. 초가을 햇살은 생각보다 강했다. 여행 내내 선크림을 바르라는 아내와 그게 귀찮은 나는 거의 매일 아침 작은 실랑이를 벌였다. 솔직히 끈적거리는 선크림을 바르는 일은 내게 귀찮은 일이었다. '얼굴 좀 타면 어때? 난 괜찮다니까!'라고 말하며 도망가지만 이내 붙잡혀서 허연 선크림을 얼굴과 목, 팔에 발라야 했다.

여행을 떠날 때 작은 밀폐 용기도 하나 챙겼다. 식당에 들어가 식사를 해결할 때 남은 밑반찬을 챙겨 나왔다. 이를 본 식당 아줌마는 새로 꺼내온 반찬을 챙겨주곤 했다. 김치라도 챙기면 숙소에서 컵라면 한 그릇을 먹을 때 훌륭한 반찬이 된다. 남도의 김치 맛은 전국구다. 여행 전에 미리 지자체 홈페이지에 신청을 해 우편으로 지도를 받았다. 미처 챙기지 못한 지도는 기차역, 터미널 등지에서 쉽게 구할 수 있었다. 지도에는 여행을 하기 위한 각종 정보가 고맙게도 잘 정리되어 있다.

평소에는 사소해 보여도 여행을 한다면 모두가 절대적으로 필요한 물건들이다. 모기향과 가루비누, 빨랫줄과 발에 익은 운동화, 여행이 끝날 때쯤에는 낡아버린 지도 한 장 등. 나는 아직도 모기향내를 맡으면 그때의 여행이 생각난다. 책장에 가지런히 꽂아둔 지도 한 장이 떨어져 발 끝에 툭 걸리는 날에도 그때의 여행이 생각난다. 낡은 지도는 내게 다시 길을 떠나라 재촉하는 듯하다.

우리를 두 달 동안 살게 해준 생필품들.
▲ 여행 짐. 우리를 두 달 동안 살게 해준 생필품들.
ⓒ 이시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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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축한 마음이 햇빛에 마르던 날

여행을 하면서 가장 힘들었던 건 빨래였다. 며칠 동안의 여행이라면 빨래를 가방에 넣고 다니면 그만이다. 하지만 여행이 일주일 이상 된다면 그게 불가능하다. 배낭이 무겁지 않게 기본적인 옷과 속옷, 양말 등을 챙겼으니 3∼4일에 한 번은 빨래를 해야 했다. 빨래비누를 갖고 다니는 게 번거로워 여행을 떠나기 전에 집에서 가루로 된 빨래 세제를 한 봉지 챙겨왔다. 빨랫줄로 쓸 비닐끈도 충분히 챙겼다.

그러고 숙소에 들어가서는 화장실에서 대충 빨래를 했다. 이때쯤이면 몸이 피곤하니 손으로 박박 문질러서 옷을 빠는 것도 힘들었다. 해서 세면대나 세숫대야에 세제를 물에 풀어넣고 옷을 대충 손으로 문지르거나 발로 밟아 빨래를 한다. 물기를 꽉 쫘서 방안에 끈을 매고 빨래를 널면 끝이다.

빨래는 햇빛 좋은 날, 마당에서 말려야 제맛이다.
▲ 여행 중 빨래하던 날. 빨래는 햇빛 좋은 날, 마당에서 말려야 제맛이다.
ⓒ 이시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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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이 힘들긴 했지만 여행 중에 했던 빨래는 행복한 일이었다. 살고 있는 집이 해가 잘 들지 않는 아파트 2층이니 '쨍'한 햇볕에 빨래를 말리는 일은 거의 불가능하다. 빨래란 모름지기 마당이나 옥상에서 햇빛 좋은 날 바짝바짝 말려야 제맛인데, 우리 집에서는 이 행복감을 느낄 수가 없었다.

하지만 여행 중에는 이런 행복감을 실컷 누릴 수 있었다. 날씨도 좋고, 널찍한 마당이라도 있는 숙소에 들어가면 나는 우선 빨래를 했다. 입고 있던 속옷부터 양말과 수건 등을 나만의 노하우로 깨끗하게 빨았다. 그리고 있는 힘껏 물기를 짜고 툭툭 털어 빨랫줄에 널었다. 이렇게 널어놓은 빨래를 보면 괜히 마음이 뿌듯했다. 뭔가 제자리를 찾은 느낌이었다.

따뜻한 햇볕과 시원한 바람에 빨래가 마르고 있다. 빨래처럼 내 마음도 뽀송뽀송하게 마르고 있다. 뚝뚝 떨어지는 물방울은 나 대신 흘리는 눈물 같았다. 축축해진 눈물과 눅눅한 마음도 함께 마르는 것 같아 줄에 매달린 빨래를 보고 있으면 기분도 좋아졌다. 마당에서 빨래를 하고 있을 때면 아내는 늘 내 뒤에 앉아 나를 보고 있었다.

빨래가 마른다. 우리 마음도 마른다.
▲ 빨래 마르는 풍경. 빨래가 마른다. 우리 마음도 마른다.
ⓒ 이시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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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곳에서의 시간, 오늘이 며칠이지?

될 수 있는 대로 오랜 시간 여행을 하자는 정도의 결심만 했지 딱히 정한 원칙 같은 건 없었다. 힘들면 쉬고, 피곤하면 늦잠을 자고, 너무 좋다 싶으면 이틀이나 그 이상 머물자는 정도만을 아내와 말했을 뿐이다. 그렇게 보낸 시간이었다. 그리고 흐르는 시간을 굳이 확인하지 않았다.

여행을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는 오늘이 무슨 요일인지, 또는 며칠인지 확인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오히려 깜박 잊으면 괜히 불안해했다. 월요일엔 뭘 하고, 또 주말엔 뭘 해야 하는지 일상의 자리에서는 매우 중요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여행에서는 이런 불안이 의미가 없었다. 눈을 뜨면 그게 우리의 아침이고, 배가 고프면 그 시간이 우리의 끼니때였다.

평일과 주말의 경계가 모호하고, 중요하지도 않았다. 해가 뜨면 길을 걷거나 버스를 탔고, 해가 질 때쯤이면 그날의 숙소를 잡았다. 시간이 흐르고 있다는 사실은 조금 시원해진 바람과 조금 짧아진 낮과 조금 길어진 밤으로 알 수 있었다. 여행지에 사람이 조금 많아졌다 싶으면 주말인 줄로 알았고 출근하는 이들이 있는 것으로 보아 평일인 것 같았다. 여행을 떠날 때만 해도 초록이었던 들판이 노란색으로 변하는 걸 보고는 여름이란 계절은 저만큼 물러나고 가을이 요만큼 내 앞에 와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반바지를 긴 바지로 갈아입어야 하고, 아침이면 썰렁해진 방에서 일어날 때 계절이 흐르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순천 낙안읍성 앞에서 송광사 가는 버스를 기다리고 있었다. 함께 버스를 기다리던 할머니께 여쭈었다.

"할머니, 송광사까지는 버스로 몇 분이나 걸리죠?"
"글씨……. 빨리 가는 놈 타믄 빨리 가는 것이고, 늦게 가는 놈 타면 늦게 가는 것이제!"
"……."

할머니의 현답에 나는 말 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시간은 할머니에게 그런 것이었다. 빠르고 느린 건 할머니에게 중요하지 않았다. 시간은 최소한 낙안읍성 할머니를 구속하지 못했다. 할머니는 최소한 시간에서 해방되어 있었다.

여행이 계속되면서 흐르는 시간에 거짓말처럼 둔감해지고 있었다. 나와 아내 모두 이런 느낌에 놀라워했다. 잠이 들기 전에는 항상 알람시계를 확인해야 하고, 비슷한 시간에 일어나 일을 나갔다. 금요일쯤엔 의레 친구들과 약속을 잡아 마치 분을 풀 듯 술을 마셨고, 주말엔 청소와 밀린 빨래, 또는 재활용 쓰레기를 내다버려야 다음 한 주가 찜찜하지 않았다.

일상이라는 게 우리의 존재에 의해서가 아니라 시계와 요일과 달력이 정해준 대로 흘러가는 것 같았다. 어떤 발버둥을 쳐도 시간은 우리를 위해 흐르지 않았다. 여행이 마지막으로 흐를 때쯤에는 '오늘이 며칠이지?'라는 질문에 금세 답을 할 수 없는 경우가 많았다. 그때 느낄 수 있었다. 여행을 떠나고 나서야 비로소 우리는 시간에서 잠시나마 해방될 수 있었다는 사실을 말이다.

비오던 날.
▲ 보길도에서. 비오던 날.
ⓒ 이시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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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부부의 여행 안내서
■ 목차

― 1. 여행이 시작되기 전
"우리 잠시 어디로든 떠나자. 한 달이나, 두 달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건 무모함, 또는 용기
여행도 일상이 될 수 있을까

― 2. 단지 44일 동안①
'카메라를 왼쪽으로 멜까? 오른쪽으로 멜까?'
길, 구불구불한 이 땅의 길
걸으며 느낀 행복

― 3. 단지 44일 동안②
길에서 사람을 만났네
여행을 해도 부부는 싸운다
여행도 스트레스가 될 수 있다니!

― 4. 단지 44일 동안③
섬과 노을
사소하지만, 매우 중요한 우리 여행의 노하우
축축한 마음이 햇빛에 마르던 날
그곳에서의 시간, 오늘이 며칠이지?

― 5. 여행 후
여행의 끝에서
여행의 후유증

■ 참고<지난 여행 일정>

* 1차(9. 1.∼9. 28.)
서울→장성(9. 1.∼2.) → 광주(9. 2.∼3.)→영광(9. 3.∼4.)→백수해안도로(9. 4.∼5.)→백바위해수욕장(9. 5.∼6.)→나주(9. 6.∼7.)→목포(9. 7.∼8.)→우이도((9. 8.∼10.)→목포(9. 10.∼12.)→영암(9. 12.∼14.)→해남(9. 14.∼15.)→완도(9. 15.∼16.)→강진·화순(9. 16.∼17.)→순천(9. 17.∼19.)→고흥 거금도(9. 19.∼20.)→고흥 녹동(9. 20.∼21.)→청산도(9. 21.∼24.)→보길도(9. 24.∼28.)→완도→목포→서울(9. 28.)

* 2차(10. 5.∼10. 20.)
서울→부산(10. 5.∼10.)→통영(10. 10.∼12.)→전주(10. 12.∼13.)→군산(10. 13이∼16.)→고창(10. 16.∼17일.)→부안(10. 17.∼18일.)→전주(10. 18.∼20.)→서울(10. 20.)

덧붙이는 글 | 이기사는 저의 블로그(http://blog.naver.com/timerain95)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태그:#부부여행, #전남, #걷기여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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