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대우(46)씨는 작년 12월부터 올해 6월까지 세 차례 해외를 다녀왔다. 방문국은 모두 프랑스. 짧게는 보름, 길게는 한 달 이상 머물렀다. 팔자 좋은 해외 여행? 말도 마라. 언어도, 풍경도 낯선 이국 거리에서 한뎃잠을 자며 지냈다.

그런 그의 모습은 프랑스 5대 일간지 가운데 하나인 <리베라시옹>에 소개됐다. 지난 6월 리베라시옹은 "한국의 화난 노동자들이 파리에서 대화를 요구한다"는 제목의 기사를 실었다.

기사에서 지칭된 '한국의 화난 노동자들'은 충남 천안시 입장면에 소재한 발레오공조코리아의 노동자들. 한때 산업 역군으로 칭송받았던 이들은 수십 일째 프랑스 발레오 본사 앞에서 해외원정투쟁을 전개하고 있었다.

"먼 나라까지 가서 농성할 일이 벌어질 것이라고 상상이나 했겠습니까? 오죽 했으면 갔겠습니까? 전 사원을 모조리 해고하고 흑자 공장을 일방적으로 청산하고도 노동자들 대화 요구에 꿈쩍도 않으니, 본사로 쫓아가 투쟁해야죠. 와 보니 이곳에서도 발레오 자본은 악덕 기업으로 이미 유명하네요."

2009년 잔인한 늦가을

큰사진보기
▲  발레오공조코리아지회 조합원들의 거리행진 모습.
ⓒ 윤평호	관련사진보기

작년 늦가을을 떠 올리면 박한주(34)씨는 요즘도 부아가 치밀어 오른다.

실업계 고등학교에 다니던 박씨는 3학년 첫 실습을 당시 대한공조(현 발레오공조코리아)로 나왔다. 실습이 인연되어 고등학교 졸업과 함께 95년 3월 대한공조에 입사했다. 대한공조는 1987년 일본 젝셀사와 한국 주주가 각각 50%씩 지분으로 설립한 자동차 에어컨용 컴프레서 생산 업체. 2003년 프랑스 자본인 발레오가 지분을 모두 인수했다. 2005년 10월 회사 이름도 발레오공조코리아로 바뀌었다.

2009년 10월 회사는 1, 2차 희망퇴직 실시로 관리직 전원을 포함해 사원 80여 명을 정리해고했다. 회사의 칼 끝은 여기서 멈추지 않았다. 10월 26일 일방적으로 공장 폐쇄와 청산을 발표했다. 희망퇴직에 응하지 않은 근로자 100여 명 전원에게 나흘 뒤 퀵 서비스로 해고 사실을 통보했다.

15년 동안 일해온 공장에서 영문도 모른 채 해고된 박한주씨. 다른 이들도 마찬가지였다. 전국금속노동조합 충남지부 소속 발레오공조코리아지회(지회장 이택호)는 조합원들을 규합해 곧장 공장 정상화 투쟁에 돌입했다. 회사측의 기기 반출을 막기 위해 공장에서 순번을 정해 철야농성을 시작했다.

박씨도 대열에 동참했다. 분노를 삭이며 공장을 지키고 있을 무렵, 뜻하지 않은 비보가 전해졌다. 암 투병 중인 아버지의 작고. 노동자들과 그 가족들 생계를 헌신짝처럼 내동댕이친 '먹튀' 자본의 횡포에, 아버지 죽음까지 겹쳐져 한주씨는 어느 해보다도 잔인한 계절을 보냈다. 그리고 그 잔인함은 오늘도 진행형이다.

'먹튀' 자본 고발하러 각지로

큰사진보기
▲  발레오공조코리아지회 해외원정투쟁단의 일본 활동 모습.
ⓒ 윤평호	관련사진보기

프랑스에 본사를 둔 발레오 자본이 발레오공조코리아 근로자 전원을 해고하고 공장 청산을 단행한 것은 작년 10월 말. 다국적 자본의 횡포에 맞서 노동자들이 위장 폐업 철회와 공장 정상화 투쟁에 나선 지도 어느새 1년여가 되어 간다.

지난 한해동안 발레오공조코리아 노동자들은 줄기차게 싸웠다. 천안은 물론 경주와 대구 등 발레오 자본 사업장이 산재한 전국 각지로 떠나 며칠씩 현지에서 시위와 집회를 했다. 프랑스 대사관, 국회, 발레오 한국지사가 있는 서울 63빌딩, 충남도청, 천안시청, 천안노동부 등에서도 시위를 이어갔다. 발레오 본사가 있는 프랑스를 비롯해 일본의 발레오 동북아 본사까지, 그동안 해외원정투쟁단만 다섯 번을 꾸렸다.

지난 6월에는 뙤약볕 아래 경남 창원의 발레오 국내 투자기업에서 출발, 63빌딩까지 14박15일간 전국 1400리 길을 걸으며 '먹튀' 자본 횡포를 고발했다. 봄부터 매주 수요일 저녁 천안역 동부광장에서 발레오충남대책위와 함께 촛불집회도 개최한다.

노동자들의 공장 정상화와 대화 요구에 회사측은 회유와 탄압으로 답했다. 특별위로금 3000만 원 지급으로 모든 사태를 종결짓자고 제안하는가 하면 지난 8월 주말 새벽에 용역경비 1백여 명을 투입해 공장 안에 기거하던 조합원들을 밖으로 끌어내며 충돌 사태까지 빚었다.

조합원 정명선(43)씨는 용역경비들한테 폭행을 당해 오른손 손가락이 복합골절됐다. 20여년동안 공장에서 일하며 한번도 다친 적 없었던 그는 가족들이 걱정할까봐 한동안 집에 갈 때마다 깁스를 풀어 놓고 갔다. 정씨의 손가락은 아직도 회복되지 않았다.

포기할 수 없는 공장 정상화 염원

큰사진보기
▲  발레오공조코리아지회 조합원들이 '위장폐업.청산 철회, 공장 정상화'를 외치고 있다.
ⓒ 윤평호	관련사진보기

1년 전 발레오공조코리아지회가 공장 정상화 투쟁을 시작할 무렵 조합원은 97명. 현재는 79명이다. 공장에서 한솥밥을 먹던 18명 동료가 한해동안 투쟁 현장을 등졌다. 경제적인 이유 탓. 가족들에게까지 전가되는 생계난을 견디다 못해 몇몇 동료들은 회사측이 내놓은 특별위로금 수령에 동의하고 투쟁 대열에서 사라졌다.

남은 이들은 떠난 동료들을 원망하지 않는다. 떠난 조합원들과 가끔 전화 통화를 한다는 박한주씨는 "어쩔 수 없이 떠난 동료들에게 해줄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어 오히려 미안한 심정"이라고 말했다.

공장 정상화 투쟁이 1년 넘게 지속되며 조합원들 건강에도 빨간불이 켜지고 있다.

해외 원정투쟁에 세 차례나 동반했던 이대우씨. 지난달 프랑스로 떠난 5차 해외 원정 투쟁단에는 빠졌다. 건강상 이유 때문이었다. 회사측이 공장에 단행한 단전·단수로 불편한 잠자리, 불규칙한 식사, 그리고 오랜 스트레스로 안면근육수축증이 발병했다. 의사는 스트레스 조절이 가장 좋은 치료법이라 권고하지만 '먹튀' 자본과 질긴 싸움에 스트레스가 없을 수 있을까.

다른 조합원 처지도 비슷하다. 단국대천안병원 산업의학과 노상철 교수는 지난 2월 발레오공조코리아지회를 찾아 노동자들 건강 상태를 확인했다. 노 교수는 공장이 정상적으로 가동될 때와 지금 건강상태를 비교할 때 상당히 우려스럽다며 특히 일부 조합원은 위험한 상태라고 경고했다. 이택호(40) 지회장도 그새 몸무게가 7~8㎏ 빠졌다.

녹록치 않은 여건에서도 한해 동안 공장정상화 투쟁을 지속할 수 있는 원동력은 무엇일까? 이택호 지회장은 두 가지를 언급했다.

"발레오 자본이 왜, 공장 청산을 결정하고 전원 해고를 했는지, 아직도 뚜렷한 이유가 밝혀져 있지 않습니다. 발레오공조코리아는 2008년 한해만 순이익 28억 원을 기록한 우량 공장이었습니다. 단물만 빼먹고 철수하는 먹튀 자본 행태를 근절하기 위해서라도 이 싸움을 포기할 수 없습니다. 1년 이상 장기화될 것이라고 생각 못 했지만 힘든 시간을 견디고 지지해준 조합원 가족과 지역단체, 다른 노동자들 도움 때문이라도 반드시 공장 정상화를 실현할 겁니다."

발레오공조 투쟁 1년, 노동계 총력투쟁 선언 천안~서울 도보행진, 투기자본 폐해 고발 외신기자 기자회견

큰사진보기 ▲  발레오자본 규탄 기자회견 모습. ⓒ 윤평호 관련사진보기 발레오공조코리아지회(지회장 이택호)의 공장 정상화 투쟁 1주년 시점을 맞아 노동계가 다시 한번 힘을 집결한다. 발레오공조코리아지회는 오는 25일부터 27일까지 천안을 출발해 서울 주한 프랑스 대사관까지 도보 행진한다. 프랑스 대사관 1㎞ 전 구간부터는 위장 폐업 철회와 공장 정상화 요구를 담아 삼보 일배를 실시한다. 삼보 일배 뒤 프랑스 대사관 앞에서는 금속노조 주최로 기자회견이 열린다. 기자회견 뒤 프랑스 대사관에 항의서한도 전달한다. 26일 오전 서울 프레스센터에서는 먹튀 자본 횡포에 고통받는 다른 지역 사업장 노조들과 공동으로 투기자본 대응 기자회견을 갖는다. 같은 날 오후 충남도청에서도 발레오충남대책위가 기자회견을 개최해 발레오 사태 해결에 지역사회 관심을 촉구한다. 27일 저녁 공장에서는 '1주년 투쟁 결의 문화제'가 열린다. 이 자리에서는 위장 폐업 철회와 공장 정상화, 먹튀 자본 횡포 근절 대책 수립 등을 염원하는 각계 1천인 선언이 발표된다.